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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욥의 인내를 배우라(야고보서 5:7-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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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인내를 배우라(야고보서 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德目)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행하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행함의 덕목을 말씀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를 길이 참으라"-7절로 11절에 걸쳐 야고보는 '인내'라고 하는 행함의 덕목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실제는 '인내'로 귀결됩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이요, 그 믿음이 열매로 나타날 때에는 처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인내'입니다. 즉 믿음의 실천 덕목 제 1호가 인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는 정도의 인내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참을성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인내가 따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봉사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는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스스로의 인격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봉사는 돈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함에도 지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어떤 경우에도 밑천을 필요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만큼 인내에 관한 한 '못했다'라고 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든가, 마음은 있으나 아는 것도 없고 돈도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봉사를 못한다는 식으로는 변명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참는 것에 대해서는 가령 '돈 없어서 못참았다'라는 따위로 변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참지 못했다는 말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내'가 믿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덕목 가운데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렇듯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기다림'이란 단어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기초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십시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음이 좋아서 유무상통(有無相通)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했던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주님이 곧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곧 오심을 믿음으로 저들은 더는 물질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더는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이 썩어질 육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순교할 수 있었고, 아낌없이 봉사와 희생을 할 수 있었고, 마음껏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구체적인 뿌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마음의 기다림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인내' '참으라'는 뜻을 지닌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의미는 같지만 표현은 '길이 참으라' '오래 참음' '인내' 등으로 약간씩 다릅니다. 헬라어로 쓰인 원문에는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7절에 두 번, 8절과 10절에 각각 한 번씩 나타나는 '마크로두미아''쉬퍼모네'가 그것입니다. '쉬퍼모네'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인내'라고 하는 말로 11절과 12절에 한 번씩 나옵니다. '마크로두미아'라고 하는 말은 인간관계에서의 인내를 뜻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잘 참아주는 것, 즉 인간관계중의 인내를 가리킬 때에는 '마크로두미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쉬퍼모네'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가난하다든지 병에 걸렸다던가 춥다든지 덥다든지 하는 것을 참을 때에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인격에 대한 인내와 비인격적 상황에 대한 인내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성경에서 전혀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는 '마크로두미아''쉬퍼모네'가 다 나오는데 전자가 네 번, 후자가 두 번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히 이 '마크로두미아'라고 하는 말은 고대의 헬라에서는 별로 쓰임이 없고, 오히려 근래에 와서 나타나 기독교적 전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성경에만 주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로 '기독교적인 인내다'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견고한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견고한 마음가짐'-----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변덕을 부리고 못된 짓을 해도 내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상대방이 사랑을 하든 미워하든 내가 주는 사랑만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봉사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봉사를 하다보면 지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사불성이 됩니다. 죽자고 봉사를 해봐야 소망도 소용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봉사하는 마음이 식고 맙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 한 분이 신학교를 졸업할 때에 '하나님, 제가 졸업한 뒤에는 가장 어려운 곳,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곳에 가서 일평생 일하게 해주십시오. 오라는 곳이 있으면 그대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그를 오라고 한 곳은 정신박약아수용소였습니다. 저능아들만 모여 있는 고아원에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찬송을 부르니 압니까, 성경을 가르치니 알아듣습니까? 아무리 봉사를 해봐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삼 년 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 일을 보더니 그도 한 3년 지나니까 안되겠던지 다시금 저능아들을 돌보는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졸업할 때에 하나님께 서원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고 은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큰 죄나 짓고 도망해 나와 있는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상대의 보답이 이건 업건, 성과가 있건 없건, 나는 섬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섬기려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안내입니다. 추울 때에 안춥다 하고 견디는 것도 인내이지만 그것은 쉬퍼모네에 속하는 것으로, 그리 값진 것은 아닙니다. 인격을 상대로 하는 안내, 결코 변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 마음가짐, 이것을 인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참아주십니다. 죄인들이 아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보시면서도 잘 참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 참아야 합니다. 가끔 저를 찾아와서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아이들이 어떻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참아보았느냐고 물어보면 대개들 육 개월 정도 참아보았다고 합니다.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제게 와서 토로한 이야기 중에 생각할수록 우스운 것이 있습니다. ", 저희집 애가 제 아비를 닮아서 벌써부터 여자 밝힘증이 있어요. 방랑기도 있고요"라고 걱정을 하고 수선을 떱니다.

그애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국민학교 삼학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는 집 나간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십삼 년 동안이나 참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어거스틴은 성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몇 달이나 참아보고 참았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몇 가지나 참아보고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낙심했느니 실망했느니 합니까? 도대체 무슨 실망이 그다지도 쉽사리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을 향해서 인격을 향해서 오래오래 참는 것, 내 사랑에게 내가 주는 마음이 조금도 변함없는 것이 인내입니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os)'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인내일 것이다'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인내의 특징을 성경에 나타난대로 살피면 재미있는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좀 못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약간 아리송한 데가 있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생전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난을 하는 사람도 조금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바울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도권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중에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라고 못을 박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의 증거로 꼽는 첫째가 '모든 참음'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하겠습니다.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긴 것 같습니까? 저는 간단히 생각합니다. 목소리 큰 쪽이 진 것입니다. 참지 못한 쪽이 진 것이요, 인내한 쪽이 이긴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 안하고 참은 것이 이긴 것이요, 웃음까지 머금었다면 더욱 이긴 것입니다. 마음에 조금도 섭섭함이 없었다면 완전히 이긴 것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에 조금도 금이 가지 않은 사람, 상대가 내 따귀를 때린다 해도 그 상대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이긴 사람입니다.

큰 사람 작은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참은 자가 큰 사람이요, 못참은 자가 작은 사람입니다. 어린아이가 잘못한다고 해서 그때마다 어머니가 때릴 것입니까, 잔소리를 할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쟁을 치르느라 중동에서는 지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꽤 오래전, 푸에블로호 사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미국 군함 푸에블로 호가 동해에 떠다녔는데 이것을 북한이 납치해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미항공모함이 원산만으로 집결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강화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필경 전쟁이 터지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렇다할 해결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미국측에서 멋진 소리를 한마디 남겼습니다. "강한 자가 참는다." 푸에블로 호라는 함정 하나 때문에 원산을 폭격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약한 자가 불장난을 하지만, 큰 사람은 그런 장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도끼 가진 사람과 바늘 가진 사람이 싸우면 바늘 가진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바늘 든 사람에게 도끼를 휘두를 수가 있겠습니까? 강한 자가 참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사도다. 그것은 내가 참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래 참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인내'에 대한 말씀은 성경의 많은 곳에 나타납니다. 디도서 22절은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라 말씀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22절은 성령의 아홉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의 열매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인내에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적 인내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인내하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참으면 되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본문은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8)"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9)"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내의 한계가 바로 주님의 재림에 있다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주님께서 신원(伸寃)해주실 때까지 참을 것이요, 이것이 시한이라고 말씀함입니다. 모든 것을 재림에 걸고, 그것에 근거해서 참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갖출 인내의 본질입니다. 종말론적 인내는 '주님의 재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나를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상황이 이렇게 되건 저렇게 변하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까지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오니 참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므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모든 인내의 근거를 주님의 재림에 둘 것입니다.

둘째, 소망적 인내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고역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도 있듯이 잘 참은 뒤에 좋은 일이 생기면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참고 참는데 마지막에 망하고 만다면 참을 수가 없지요. 그것은 소망 없는 인내로 절망입니다. 기다림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의 대상은 주님입니다. 본문에서는 비유를 들어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농부는 추수할 가을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참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허무한 인내가 아니요 막연한 인내가 아닙니다.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는 것, 이 기다림에는 구체성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고 수고해나가면 가을에 가서는 거두어드립니다. 말씀인즉 추수하는 그날을 바라보며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인내하라고 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반드시 보상해주시고 흡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날 그때를 기다립니다. 이렇듯 소망적 인내란 약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으로 승리하는 인내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9)"-서로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원망하면 인내가 소용없다고 말씀함입니다. 그리고,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은 곧 사랑으로 승리하는 '인내' 그것인 것입니다. 가끔 제게 와서 "이 사람한테 10년이나 참았어요." 그런데 더는 못 참고 터지고 말았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담을 청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10년 동안이나 참았다고 하는 그 말까지 하지 말아야 참는 것이 됩니다. 지금 와서 10년 동안 참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두고보자 하고 벼른 것이지 참은 것이 아닙니다. 벼르면 버틴 것을 어찌 인내라 할 것입니까? 10년이든 100년이든 그 시간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인내 속에 이미 소화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원망이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코 원망이 없어야 하고, 절망이 없어야 하고, 비난이 없어야 합니다. 내 고통과 어려움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서 비난과 원망과 불평이나 하고 있다면 그 순간에는 이미 믿음이, 인격이, 인내가, 사랑이, 다 사라지고 만 것이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외경(外經)에서도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아니 준 것만 못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니 봉사니 하지만 때로 보면 안 해야 될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서로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인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9)"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본심이 어디 있는지, 그 깊은 뜻이 어디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고 계시니 믿음으로 잘 참고 사랑으로 승리할 때에만 진정한 인내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넷째, 모본(模本)이 있는 인내입니다. 무릇 인내에는 본이 있는 법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10)." 나보다 더 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나의 어려움은 좀 작게 느껴져서 쉽게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하면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불행합니까? 얼마나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나서 여러분에게 요한복음 91절의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의 삶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사람이 인내의 모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성경을 가리켜 'inspired casebook-영감된 사례(事例)의 전서(典書)'라고 묘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숱한 사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예수님만큼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고난을 당한들 욥이 당한 고난만 못합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본이 있습니다. 인내의 본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훌륭한 인내의 승리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느라면 우리의 고통은 어느 사이에 눈녹듯 스러져버리게 됩니다. 여러분가운데 고난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욥기를 읽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욥기를 몇십 번이고 읽어나가느라면 '나는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인내의 모본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참아나가는 것이다 하는 인내의 길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의 결과도 보여줍니다. 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겪지 않아도 성경에 있는 모본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의 지혜를 배우고, 인내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속에도 세 가지의 본이 나타납니다. 첫째, 선지자들로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을 삼으라(10)." 선지자들의 인내는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들이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감정대로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과 그 사명을 위해서 숱한 고난을 참고 참았습니다. 순교자적인 인내입니다. 이로써 본을 삼으라고 말씀함입니다.

둘째, 욥으로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욥의 인내를 들었고(11)"-욥이 얼마나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참았는가를 배우라 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모든 고난을 이깁니다. 그 누구를 원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길을 아시고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참아 견딥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세째, 농부로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7)"-농부는 늦은 비와 이른 바를 기다리면서 가을을 위해 일을 합니다. 이들의 수고하면서 참음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농부는 가만히 앉아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건 안오건 일을 합니다. 비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리면서 일을 합니다.

또한, 본문은 인내의 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1)." 인내의 복이 무엇입니까? 인내 자체가 자신에게 승리감을 안겨준다고 심리학에서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참지 못하고 보면 꼭 후회가 됩니다. 그러나 참고 나면 '잘 참았다'라는 기쁨이 생깁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자기자신을 스스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못 참고 그만 버럭 뒤집어놓으면 '또 실수했구나, 이렇게 형편없구나' 하고 내 인격을 스스로 심판하게 됩니다. 인내는 자신으로부터 성원을 받을 수도 있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이겨냈다는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인내가 주는 중요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를 해 나가다보면 자기 인격에 대해 자신이 생기고, 스스로 자기를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인격 자체가 격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내하게 되면 이웃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내하는 편이 이기는 것입니다. 인내함으로 믿음과 복이 생기게 됩니다.

인내는 약속을 내것으로 받는 큰 그릇이 되게 합니다. 잘 참아가느라면 분명히 끝에 가서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인내는 약속과 성취사이의 시차를 메꾸는 길이 됩니다. 약속은 멀리 있고 현실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내의 능력이 있으면 인내하면서 약속을 향해가기 때문에 잘 극복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또한 인내는 주님께서 주시는 결말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복을 배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 참는 자에게 필경 큰복을 주십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내의 결과는 아름다움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미라나타"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말입니다. 미국에 척 스미스(Chuck Smith) 목사가 시무하는 갈보리 교회(Calvaly Chapel)가 있습니다. 그 간판 밑에 '마라나타 커뮤니티(Maranatha Community)'라고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격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인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르 F.H라고 하는 분은 늘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사무실의 책상에도 "어쩌면 오늘 주님께서 오실는지 모릅니다"라고 써붙여놓았습니다. 서재에는 "깨어 기도하라"라고 서 붙여놓았습니다. 그는 늘 이 푯말을 쳐다보면서 생활했습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4:13)"-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끝까지 선교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인내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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