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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 22장 47~5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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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 224753)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마지막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이적은 대개 오랫동안 병중에 있던 사람을 고쳐주시거나 귀신들린 사람을 깨끗케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이적은 베드로의 폭력으로 비롯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폭력 사건 뒤에 행하신 유일한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사건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귀가 잘린 사람과 귀를 잘라버린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요한복음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귀가 잘린 사람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였고, 귀를 자른 사람은 성미가 급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 베드로는 칼을 내리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떨어진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누가 귀를 붙여주라고 청하는 사람도 없고, 본인도 붙여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적이 일어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에 대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정신병자에게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지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그 기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믿음을 보고 고쳐주셨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치유 받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일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적은 받을만한 근거나 그릇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는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주님 편에서 행하신 철저하게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는 특히 예수님의 참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을 칭찬하거나 욕했을 때에 어떻게 감당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광을 누릴 때에 실수하기 쉽습니다. 굴욕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할 때에도 실수하기 쉽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경황 중에 얼마나 침착할 수 있느냐, 그 때에 얼마나 태연하게 자기 마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자기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대부분은 침착하게 자기 본분을 다하다가도 사태가 다급해져서 당황하게 되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자기 페이스를 잃고 본분을 헌신짝처럼 내버립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본분이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본분이 있습니다.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의 본분이 있습니다. 어떤 경황 중에도 우리는 자기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체포되어 가는 순간에도 말없이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하시고, 놀라운 은혜의 인격을 가지신 분입니까? 본분으로 볼 때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위로하는 치유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 어디에서나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기분이 내킬 때에만 능력을 행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는 환자도, 정신병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상여를 붙들고 '일어나라'하시는 분이 예수님, 바로 능력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도 예수님이 무능해서 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항상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도 능력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은 항상 살아 있고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닌데도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상황을 보십시다. 당장 체포되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엄청난 사건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귀 하나가 떨어지든 붙든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소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소한 일을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 유다가 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 뺨에 입맞춤을 합니다. 참을 수 없는 배신의 행위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며 경거망동을 합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황 중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본분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요, 살리시는 분이요. 능력을 행하시는 뿐입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십니다. 주변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고 본래 하던 일을 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끔 선하고 좋은 일을 하려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거나 조금 당황하게 되면 '에라, 모르겠다' '그 까짓것, 앞뒤 가릴 것 있나'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일을 하게 됐나' 하고 맙니다. 여기에 우리의 약점이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장군이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할아버지가 삼촌댁에 계란을 갖다드리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계란을 한 보따리 싸서 등에 지고 갔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소년을 놀라게 하려고 서 있다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왔습니다. 소년은 장군감이라서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용기가 있고 대담했다고 합니다. 놀라서 '' 하고 뒤로 넘어질 만한데 소년은 등에 진 계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더니 ', 놀랐다'하더랍니다. 그냥 넘어지면 계란이 다 깨지니, 넘어져도 계란은 내려놓고 넘어진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실수를 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을 내려올 때의 일입니다. 백성들이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화가 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십계명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계란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서 놀라던 그 소년만큼의 여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는 흔히 큰 일 때문에 작은 일을 무시하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남의 일을 소홀히 여깁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경거망동으로 예수님의 주위는 어지럽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횃불을 들고 따라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의 위치와 본분,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입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여전히 자비를 베푸시고, 병을 고치십니다. 위로하고, 가르치시며, 본분을 다하고 계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불의한 행위나 실수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내가 맡은 본분, 내게 맡겨진 사명은 끝까지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또한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캄캄한 새벽, 가룟 유다가 군사들을 안내하여 예수님께로 옵니다. 너무 어두워서 횃불을 켜도 누가 누군지 식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만이 예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내가 가서 인사하는 사람이 예수다. 그를 잡아라"하고 군호를 짠 뒤에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춥니다. 스승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가장 존경한다는 뜻이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 사랑의 행위를 배신의 표지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그 순간에 유다같은 가증한 사람을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주먹으로 한대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마음은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우신 채 너의 입맞춤이 나를 파는 배신의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말씀의 뜻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벌써 정신이 어둡고, 눈이 흐려졌습니다. 무엇엔가 붙들린 마음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라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것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그는 죄의 노예, 악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 유다의 회개를 구하고 있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모두 공포에 떨었고, 베드로는 칼을 내리치는 만용을 부립니다.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갈 때에 예수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검 두 자루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족하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어려운 시간이 올 것이니 마음의 무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검을 사라고 하신 말씀의 뜻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하신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저 잠만 잤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만용을 부리는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서 휘두를 때에는 그실 제사장의 종 말고의 목을 치려 했던 것입니다. 칼이 빗나가서 귀 하나가 떨어졌지만 이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입니까? 이런 행동으로 예수님을 구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무책임한 만용을 부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할 길도 없고, 자신도 없고, 책임도 없는 그런 일시적인 만용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자는 제사장에게 팔리리라." "인자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대해 예언하시고 경고하셨습니까? 그 말씀들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모독하였기 때문에 그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명하신 일도 있습니다. 이제 칼을 휘두른 베드로의 행동 때문에 예수님은 폭도의 괴수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폭도의 무리가 되고 맙니다. 왜 예수님께 이런 더러운 이름을 드리려고 합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입니다. 털 깎는자 앞의 조용한 양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만용이 예수님을 폭도의 괴수로 만들 뻔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칼이 빗나가서 머리에 맞지 않고 귀 한쪽만 떨어졌습니다. 이 경황 중에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사실 치유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가 귀 한쪽이 떨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예수님께 귀를 고쳐달라고 간구한 것도, 요청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 하나 "이 사람의 귀를 붙여주십시오"라고 말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십니다.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남의 일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있지만 그것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나보다 남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는 괴로운 길에서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고 예루살렘의 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우는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했지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메 달린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얼마나 괴롭고 억울하고 아픈가를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당신을 해치는 자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닥칠 장래의 일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선한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기 근심, 자기 일에 너무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종종 그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일 좀 하자고 하면 돈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저것 써야 할 데가 많은데 남 도울 게 어디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 하는 일 끝난 다음에 보자고 합니다. 3의 입시생 자녀를 둔 어머니들도 그렇습니다. 봉사활동 하자고 하면 고3이 있는데 지금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선한 일, 중요한 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이 고3 이라는 것만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서 다른 일은 전혀 모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해치는 사람들, 당신을 체포하러 왔다가 귀가 떨어진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원수에 대한 미움에 집착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미움을 당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움을 받아도 미워하시지 않고, 욕을 당해도 욕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치였습니다. 내가 억울함을 당한다고 남을 억울하게 하지 않고, 내가 빼앗겼다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미워하는 한 그 사람은 남을 불쌍히 여길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동안에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치유자요 메시야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치유하시는 이적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속에서 모범을 보이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고 제자에게 말씀하시면서 귀를 붙여주십니다. 참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는다면서 '이 망할놈의 세상' 하고 한탄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분할 때에 돌아서서 욕이라도 한번 하십니까? 그것까지 참으십시오. 너무 괘씸해서 말이라도 한마디 해버리고 싶으십니까? 그것까지 참아야만 합니다.

"이것까지 참아라" 하신 말씀은 두고두고 깊이 새길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 그것도 참아야 합니다. 제사장들의 가증한 행위, 유다의 간사한 웃음…… 모두 참아야 합니다. 로마 군병들의 만행,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 이것도 참아야 합니다. 의분도 분노입니다. 의로운 분노라고 분노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억울함을 당해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충성하느라고 혈기를 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위한다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한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은 죄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이유로든지 폭력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끝까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경황 중에도 떨어진 귀를 붙여주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는 원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말씀하시기를 "어두움의 권세로다"하십니다. 악도 하나님이 허용하셔서 악이 악으로 역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는 악의 세력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지막 이적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면서 귀를 붙여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본분을 다하시는 모습-이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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