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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비유(갈라디아서 5:19-24)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본 비유는 인간의 문제를 가장 본질적이고도 실존적으로 다룬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경험하는 대로 씨앗과 열매는 언제나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을 땅에 심으면 거기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맺히고, 그 맺혀진 열매는 다시 처음 종자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씨앗과 열매는 양적으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는 같으며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씨앗과 열매와의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씨앗은 이미 맺혔던 열매중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땅에 심을 때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게됩니다. 그 때문에 종류에 따라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동안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구분이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절을 바꾸어 가면서 자란 다음 결실을 하게되면 그때에 가서는 본래 심었던 씨앗과 똑같은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를 심고 열을 얻을 수도 있고 백, 이 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고향에서 본 바에 의하면 제일 작은 씨앗으로 제일 많이 거두어들이는 것이 조였습니다. 씨앗이 작으니 만큼 얼마 되지 않는 씨앗으로도 온 밭을 뿌릴 수가 있고 훗날 거두어 드릴 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을 거두게 됩니다. 그것은 그 작은 씨앗에서 나온 이상이 매우 크고 수천의 새로운 씨앗을 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많이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늘 같은 것을 보면 한 쪽을 심어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겨우 여섯 쪽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늘은 정말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씨앗과 열매는 질적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그 양에 있어서는 같지가 않으며, 또한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것임을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신(마태복음 7:16)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전문가는 싹만 보고도 알고 줄기나 나무만 보고서도 어떤 식물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전문적인 특수한 경우이며 일반적으로는 마지막에 열매가 맺힌 것을 보고 비로소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여 '열매를 보고 그 종자를 안다'라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을 하여도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양적인 비판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 결과 언제나 양적인 인식이 앞서서 우선 수확의 많고 적음에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사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그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땀흘려 거두어들인 열매가 무엇보다도 충실하고 우수한 것일 때에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계속 더 좋은 종자를 심고자 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있는 과학자들은 보다 우수한 종자의 개발을 위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종자가 좋지 않은 것을 심어 놓은한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꾼다하더라도 마지막에 나타나는 추수는 시원치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에게 있어서 이 '종자 개량'이라는 문제는 최고의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여러 가지고 벼의 품종도 바꾸어 오고 있는 것이며, 최근에 와서는 특별히 유전공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과일의 맛이나 크기를 더해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을 보면 양적인 평가에 치우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적인 것으로 종자 자체의 문제입니다. 만약 가라지를 심어놓고도 알곡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열매의 문제는 종자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에 바울의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이에 로마서 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나고 있는 소위 도덕적, 윤리적 혹은 사회적 행위의 열매를 보면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아름다운 것이요 선한 것인데, 막상 내가 하고 있는 생활은 왜 이렇게 추하고 악한 것이냔 말입니다. 화해를 하고 사랑을 하겠다며 덕스럽고 부드러운 말을 준비하고 갔었는데 어쩌자고 더 큰 불화만 생기게 하고 돌아와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로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애절한 절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곤고하다고 하는 말의 뜻은 불행과 비참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떤 영어 번역에서는 불쌍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쌍한 사람아! 이 비참한 인간아! 어쩌다가 평생동안 원하는 바는 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행동과 말만을 하는 이런 정도의 인간 밖에 되지를 못했는가? 나는 계속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안타까운 자기 비판을 고백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왜 이럴까? 왜 이럴까 하여 때로는 실망도 하고 낙심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문제로 인한 고민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로 인해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는 중 그는 마지막에 가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악이 함께 있다! 이것은 뿌리, 곧 종자에 아직도 악한 것이 들어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회개하지 아니한 죄와 뿌리 뽑지 못한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회개한 것 같으나 아직도 못 다한 것이 있고, 나로서는 십자가 밑에서 완전히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 이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항상 즐겨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만은 책에서 읽은 것으로 일본사람들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교회에 별명이 감사 할머니로 알려질 만큼 예수를 잘 믿는 할머니가 한 분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별명 그래도 매사에 감사를 하는 터이어서 아무개가 죽었습니다 라고 하여도"감사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와 보니 자기 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목조로 지은 집인지라 삽시간에 전체가 벌겋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때에 이 할머니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한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나무아미타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나무아미타불이 그 동안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종자가 있었던 것이란 말입니다. 그 할머니는 본래 나무아미타불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다 빼어버리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큰 사건에 부딪히게 되자 남아 있는 본색이 불쑥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그저 충실히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돈푼이나 있는 것으로 감사 감사하면서, 사실은 그 깊이를 보면 다 가식된 것이지만 그럴듯하게 덮고 살아 나오다가 엄청난 사건이 나타나자 지금까지 잘 감추어져 있던 것이 그만 그대로 보여지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말과 이것저것 생각해 가면서 하는 말을 비교 할 때 무의식 중에서 하는 말이 진실 된 말이라고 합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맑은 정신일 때 하는 말은 꾸며진 것이요, 거짓인 경우가 많지만 술에 만취가 되었을 때 하는 말은 진실 된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교양이나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근본적인 깊은 뿌리의 문제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이렇게 나타난 열매가 있다면 그것을 있게 한 씨앗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씨앗이 없고서야 싹도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았을 뿐 저 깊은 곳에 종자가 있었기에 이와 같은 열매가 맺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일에 우연은 없습니다. 오직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그렇고 사회학적, 신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의 윤리를 두고는 일반적 윤리라고 하지 않고 신학적 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이란 뿌리가 있고 종자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치 않는 무슨 일을 저질로 놓았거든 실수라는 말로 넘기려 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뿌리 뽑지 못한 죄의 종자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결코 실수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그리고 더욱 깊은 의미의 말은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5)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내 어머니가 부정한 행위로 자기를 낳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죄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깊은 곳에 있던 죄가 밧세바를 보는 순간 발동을 한 것이지, 밧세바를 보게됨으로 새롭게 처음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타락은 이미 있었고 오늘 이 시간 그 열매가 맺혀진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회가 없었고 용기가 없었던 것이지 그 속에는 이미 죄의 씨앗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회개요 그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잇는 열매란 바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는 그 질이나 양상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연한 것으로 보거나 순간적인 실수로 흘려 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부정적인 행위는 저 깊은 곳에 있는 죄악에서부터 그 순간, 거기에서 그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저 깊은 뿌리, 씨앗으로 돌아가서 본질적으로 그것을 빼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질적 죄의 문제요 회개의 문제이기 단순한 도덕적 차원이나 인격수양의 차이에서 나오는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그것 자체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깨끗한 역사를 다시 이루지 않고서는 이 악순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채 그런 상태로 내어 버려진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수양이나 의지, 혹은 결단으로 이겨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이기에 그 근본적인 뿌리를 빼내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신학적 윤리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요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이 내 안에 씨앗으로 거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나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만 내 안에 거하시면 특별히 인격 수양을 하거나 선을 향한 노력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만은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인 줄이야 다 알지 만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흔히들 사랑하라 혹은 봉사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디 억지로 되는 것이더냔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타인의 권고나 내 자신의 결단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본문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좋은 씨앗을 받으라, 그리하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맺히게 될 것이라는 이치가 됩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나무가 나고 거기에는 좋은 열매가 맺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시원치 않은 나무를 심어 놓고 열매는 좋은 것을 맺겠다고 기대를 하며 애를 쓰고는 하는데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는 많아지고 결국 교만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죄를 더하게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역사가 없이는 기독교적 윤리의 열매는 절대로 맺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좋은 씨앗이 있어야 하고 좋은 나무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선한 노력, 즉, 사랑합시다. 봉사합시다. 혹은 겸손합시다. 하는 캠페인(campaign)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내 마음의 깊은 곳에 성령이 계시고 그리스도와 함께만 한다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맺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는 일을 이제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성령을 받았다는 생각으로 그와 같은 열매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열매는 맺히지 않고 엉뚱한 열매가 맺혀진다면, 그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고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악이 도사리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성령을 받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물을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8)라고 말합니다. 이 간단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길, 성령을 받는 길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말합니다. 회개의 중요한 점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잘못된 결과를 놓고 내가 본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실수를 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새 사람이 되고자 한다하더라도 자기의 죄 된 그 본래성을 인정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새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와 철저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럴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말은 물에 잠긴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은 신학적 의미로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세례를 받을 때에는 회중 앞에서 서약을 하고 또한 공식적인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둘이 사랑하는 것만으로 가만히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앞에서 결혼식을 하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비밀히 사는 것과 공포를 하고 사는 것과는 같지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숨어서 믿는 기독교인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스스로 공포하며 살 때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비밀로 비밀로, 어떤 사람은 아예 믿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고 보면 성령이 충만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동안은 결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원한다면 비록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나에게 어떤 손해와 굴욕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확실한 자기 천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가정에서의 핍박을 피하고 소위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지금은 좀 숨어서 믿으면 무사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월도 한이 없거니와 자기의 신앙도 자라기 못하고 결국 가정도 구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순간부터 어떤 핍박과 고통이 오더라도 끝까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밝히 할 수 있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그리고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많이 해야할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다가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큰 은혜를 받고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있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열심히 듣고 배우십시오. 그럴 때에 분명히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될 때 거기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변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본래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자,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면서 고넬료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또한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많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놀라운 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는 것이 오라며 자기들의 걷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걷게 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자신에 대한 경이의 시선을 사양합니다.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성령 받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제 성령 받은 베드로에게는 교만이나 우월감 같은 것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지난날의 실수와 수치에 대해서도 극복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도 극복을 하지만 실망도 극복합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이 성령의 역사가 있기 불과 50여일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수제자로서, 더욱이 죽더라도 주님과 함께 가겠다며 큰소리치던 자가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해버린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제 와서 무슨 체면으로 감히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러한 기색이 없이 수천 명을 앞에 놓고 회개하라! 회개하라!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칩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외침을 듣고 있는 무리들 중에 똑똑한 사람이 있었다면, 저 양반이 며칠 전에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더니 요즈음에 와서는 무슨 딴 소리냐며 내심 반문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엔들 왜 그와 같은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 받은 베드로에게는 그 같은 과거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나의 과거를 두고 무엇이라고 하든 성령 받은 지금에는 자기에 대해서 실망했던 일까지도 다 극복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정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 마음 밭에 성령이 충만해진다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자연히 맺게 될 것입니다. 그 아홉 가지 열매를 구분해 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묶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의 뿌리는 사랑인 것이며, 사랑과 그 희락의 결과로 화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 직선적 관계를 말함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오래 참음, 즉 인내와 자비와 양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란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도 참고 원수에 대해서도 참으며 무슨 일, 누구에게나 오래 오래 기다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 대하여 자비한 마음을 가지며 적극적으로는 양선을 펴 선한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있습니다. 이는 신실한 인격과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제 문제에 있어서, 즉 경제적으로나 심리적, 혹은 육체적인 생활에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때에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인내와 자비와 양선의 열매, 자신에 대해서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열매가 나에게 있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이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가 맺혔다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저 속에 있는 깊은 뿌리, 그 잘못된 씨앗을 빼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그 옛사람을 다시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 버려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살아서, 성령과 함께 이와 같은 귀한 열매를 맺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씨앗에게 물어보고 그리고 우리의 열매를 점검해보십시다. 우리에게 맺힐 좋은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귀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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