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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와 그 자녀(고린도전서 4:14-1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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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와 그 자녀(고린도전서 4:14-17)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위하여 내가 주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인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서 세운 교회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마을 어느 도시를 가든 들어서기가 무섭게 복음을 전했으며 특별히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가 하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고린도에 거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였습니다. 이에 고린도 전서 2:3 말씀에 기록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공연히 시험에 빠져서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마지막에는 복음을 전할 용기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막을 만드는 업을 하면서 지내는 줄에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면서 일을 하는 중 복음을 전한 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16개월을 유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나 나약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8:9-10)고 하시는 강한 권면을 받아가면서 선교 사업을 지속하게 되고 그 결과 세워진 곳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서 세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앞에 놓고 자기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말하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와 사도의 교훈을 받은 성도와의 관계, 지금으로 말한다면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 전도자와 전도를 받은 자와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비유하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히브리적인 가정 내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극히 동양적인 수직적 관계의 사랑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개념은 대체로 수평적입니다. 그 때문에 전부가 후렌드(friend)로 통합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보고도 원수만 아니면 후렌드(친구)입니다. 그러니까 원수와 친구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서양 사람들의 인간 관계 내지 사랑에 대한 개념은 전부가 수평적입니다.

그러나, 동양적인 사랑의 개념은 전부가 수직적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수평적인 것 같으나 그것도 동양적으로는 수직적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랑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것이 동양적 사상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아버지와 자녀의 수직적 사랑의 관계로 자신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는 결정적이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일만 스승이 있다는 것은 선생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선생이라면 유치원 선생에서부터 대학 교수까지, 뿐만 아니라 사람은 일생을 통하여 배워야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스승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아비는 많지 않다는 것인데 아버지야 어쨌든 하나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와 자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승과 아버지 역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전 교인들에게 읽히며 암송케 한 그의 대요리 문답서 중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풀이하는 항목에서 부모가 넷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첫째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 둘째는, 왕이 부모이며 셋째는, 내게 지식을 전해준 선생님, 그리고 넷째는 목사가 부모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다보니 그렇게 부릅니다 만은 영어로는 그냥 파더(father;아버지)하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파더가 아들을 보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이래라 저래라며 "해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수직적 관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공경하라'고 할 때의 공경이란 수평적인 사랑이 아닌 수직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높이 존경하며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경은 사랑은 사랑이되 자식이나 형제, 부부간에 오가는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 마음으로 갖는 존경을 겸한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부부의 관계입니다. 이 부부의 관계란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상당한 질투와 계산이 있어서 사랑한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잘못되는 날이면 미워지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성간의 사랑이란 대단히 뜨거운 것 같으면서도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형제간의 사랑 역시 시기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짓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변함없이 진실하며 여기에는 깊은 생명적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스승"이라 하지 않고 "아비"라고 말한 것은 지식을 배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우리가 세상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지식을 배웠다면 그것으로 인해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고 나아가서는 돈을 벌고 출세를 하며 명예롭게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다면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는 한 마디로 천당을 가느냐? 지옥을 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그렇게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말만 골라서 듣는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허구한 날 같은 목사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한 안 닮으려야 안 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교회에 3년 이상 나온 사람은 소망교회 스타일의 신앙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제가 가끔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은 새벽 기도까지 나오는 분의 입장에서 보면 새벽기도를 비롯하여 주일 낮, 밤 수요일 저녁까지 계산하면 줄잡아서 1년에450번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곽 목사의 얼굴을 30분씩 쳐다본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보통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 누구가 어느 한사람을 30분 동안이나 똑바로 쳐다보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아무리 죽자 살자하며 사랑한다하더라도 자기 남편, 자기 아내의 얼굴을 30분 동안 쳐다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같이 있었고 눈을 감고 잤을 뿐이지 쳐다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볼때 1년에 450번을 30분씩 쳐다보고 있었다면 어찌 닮지 않고 배겨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러고도 닮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며, 또한 닮지 않겠다고 바동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잘못 찾아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 교회의 교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그 교회의 교역자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요, 너희는 내 자녀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고린도 교회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사도 바울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낳았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를 대하고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며, 자신과 고린도 교회와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난산을 한만큼 말썽도 많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한 교회입니다. 교역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고린도 전 후서 전체를 읽어보면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장면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말을 다 해가면서,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나는 아버지요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며, 너희는 나를 미워하고 섭섭하게대할 수 있으나 나는 너희를 미워하거나 섭섭하게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자식을 미워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를 대하여 불효하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만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수직적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것은 근본적인 사랑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고린도후서 1:14 말씀에 보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너와 나의 만남의 관계가 주 예수의 날, 즉 재림의 날에 가서도 너희는 나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피차에 자랑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종말론적인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며 저들의 아비된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낳았다'라고 하는 뜻의 헬라 원어 '에겐네사' 는 매우 재미있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있어서는 어머니가 낳았다고 할 때나 아버지가 낳았다고 할 때나 동일한 표현인 '낳았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헬라 사람들은 그것까지도 구분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자가 낳은 것과 남자가 낳은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수고는 많이 하지만 근원적인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인해 '낳는다'는 의미의 말이 남자와 여자의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영어에서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때에는 비갓(begot)이라 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때는 본(born)이라고 합니다. 이는 생리적인 면에서 잘 이해가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할 때에는 비갓(begot)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나로부터 생명이 주어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말은 나의 육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근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복음을 전하므로 너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갖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낳는다'는 것은 생명의 전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생명의 출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배우고 깨닫거나 수도자적인 자세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중생을 말하는 것이며, 위로부터 생명이 태어나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낳는다'라는 것은 그 시작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저들의 생명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된 것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에 대하여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은 특별히 교회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분이 영국에서 교회 성장학 강의를 들은 바에 의하면, 강의를 하는 교수가 교회 성장의 사례를 이야기하는 중에 소망교회를 예로 들면서 크게 칭송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이든지 교회의 성장을 과학적으로 연구해 보면 세 가지의 성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생리학적인 성장으로 결혼 주례를 하고 얼마 있으면 아이를 낳아 유아세례를 베풀고, 그 아이가 자라서 또 결혼을 하게 되는 계속적인 생리적 성장에 의한 성장이 있습니다. 두 번째 성장은 다른 교회로부터 옮겨옴으로 가능해진 성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성장이 회심성장으로 그 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게된 사람에 의한 성장입니다. 이 회심성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것이차지하는 비율이 15%만 되어도 매우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우리 소망교회의 회심성장 비율은 65%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성장학에서는 실로 경이적인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놀라와들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구성원의 95%가 대학 졸업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최고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인 95%가 어떻게 이 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분명 사람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역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이러한 역사가 이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할 때, 이것은 그 처음 믿은 분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말한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낳았음이라"는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 그 영적 생명의 출생이 어디에서부터 이루어졌습니까? 그 생명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소망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소망교회라는 기구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성령의 역사로 중생 하여 새생명이 시작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을 때까지 찬송을 부르고 죽을 때까지 감사를 드려도 다 보답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명의 귀한 역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전해 준 복음으로 인하여 믿게 되었고 내가 가르침으로 인하여 성장해 왔으며, 나의 수고에 의하여 나의 분신처럼 너희가 자라서 오늘 이만큼의 고린도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의 아비요, 너희는 내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말로 표현을 하면 숙명적인 것이요, 성경적인 용어로는 예정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인들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적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같은 한 생명, 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교역자와 교인의 관계인 것입니다.

1960년을 전후하여 박태선 장로의 바람이 불어서 한때 한국교회 전체가 들썩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많은 목사님들까지도 찾아가서 은혜를 받고는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한강변에서 하는 집회를 찾아가 보았습니다만 은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가짜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1960년에 인천 제일교회의 부복으로 처음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 아무튼 이 박태선 장로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당시에 당회장 목사님으로 계시던 이기혁 목사님께서 박태선 장로는 이단이니 가지 말라고 하자 교인들이 마구 흔들리면서 몇 사람은 기어이 그리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간 사람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하는 말이 "당신들 그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지옥 간다"면서 전도관을 가야 구원을 받고 천당은 간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 교인이 "나는 안가고 이 목사님하고 같이 있을 거예요"라고 하였더니 저쪽에서 하는 말이 "그러면 이 목사님 지옥가면 당신도 지옥 갈거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래 맞아요 만약 이 목사님이 지옥가면 나도 지옥 갈거요"라고 하였더니 그 후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 가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몇 사람 가버린 후 교회가 절대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개 보면, 목사님은 지옥 가더라도 나는 천당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말썽입니다. 어차피 목사와 교인은 처음부터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지옥가도 나는 천당 가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되고, 이단에게 물려가고 맙니다. 이미 이 교회에서 예수를 믿었고 성장해 왔으면 이 교회를 나오는 한 앞으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는 아니다며 온 교인이 가더라도 나는 안 가겠다하고 나온다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마침내 마귀에게 물려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를 선명하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아비 된 입장에서 자녀에게 권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권한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뉴우데토' 로서, 이것은 한번 가르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절대적 관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권면 하는 자와 권면을 받는 자가 서로 사랑과 신뢰로 복종을 요구하고 또한 복종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교육하는 부모치고 "네 마음대로 하려"며 놓아두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 어는 부모이든 "꼭 이렇게 해다오"라며 강한 부탁을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 자식들은 하나 같이 자유분방한 것이 자기 혼자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합니다 만은 그런 것도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 이 수직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사랑이란 절대복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소금 섬을 물로 끌어라해도 끄는 것이다 무슨 군소리가 많으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이지"라며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식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녀가 말을 듣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복종을 요구하면서 권하는 것입니다. 이미 목적과 방향, 결론은 아버지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권면을 하기 위해서 때로는 합리적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마음을 감동시켜 자식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아비된 나 자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이런 저런 모습으로 친히 실천을 해가면서 저에게도 경험케 함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합니다.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권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교육의 방법이며, 여기에 아버지의 소원이 있고 아버지의 아버지 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만큼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을 하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158명의 의료 선교사들에게 선교사가 된 동기를 묻는 물음에 대답한 내용을 보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부모 곧 아버지요, 그 다음이 동료 선교사이며, 그 다음은 의료 선교에 대한 자기 경험, 그 다음은 다른 친구들, 그 다음은 책, 그 다음은 교수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맨 먼저 자기로 하여금 의료 선교사가 되게끔 영향력을 끼친 권면자가 누구냐고 하였을 때 그것은 바로 부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이루어짐이 부모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모 된 권면의 의미를 "나를 본 받는 자 되라"는 표현에 담아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의 사랑의 고백임과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또한 아비 된 인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두 번 권면하고는 물러서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끝까지 권면을 하여 기어이 자기의 목적한 바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마지막 권면으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본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은 본을 받지 말라고 하여도 본을 받아서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본받음이 없는 자녀는 자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황희 정승에 관한 이야기 중에 아버지의 인품을 닮지 않은 아들을 손님으로 맞았다는 일화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높은 덕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시원치가 않아서 주색에 빠진 아들이 아버지의 권면도 듣지 않고 매일처럼 술에 만취가 되어 돌아오고는 하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인 황희 정승이 의관을 갖추고 있다가 술에 만취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맞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이 "아버지 어찌하여 이렇게 의관속대 하시고 저를 맞아 주시는 것입니까?"하면서 죄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에 황희 정승이 하는 말이 "애비 말을 안 듣는 놈을 아들이라 할 수 없고, 아들 아닌 사람이 내 집에 들어오니 손님일 수밖에 손님이 들어오는데 의관을 갖추고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하여 그 후에 아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실 애비 말을 듣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한 모퉁이, 발가락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터이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지 그 아비에 그 자식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은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를 닮으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을 두고 자기가 무엇인데 이런 말을 하느냐며 이것은 좀 건방진 말이 아니냐고 하기도 합니다 만은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적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합니다. 그는 결코 나처럼 혼자서 살아야한다거나 나처럼 선교사가 되어 고난을 겪으라는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신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윤리적인 면이나 사회적 풍습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아량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화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믿는 이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만 구원이 있고 여기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러한 신앙으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고린도전서 11:1에서도 보면"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내 신앙의 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그 아버지를 모델로 삼은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학생이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그 과목까지도 좋아하며 따르게 되어 공부가 잘되듯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랄 때에는 부모님을 전적으로 믿을 수가 있고, 학교에 다닐 때에는 선생님을 전적으로 존경하여 따르며,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역자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떠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바로 선택하는 일과 교역자를 바로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모를 잘 만나야 되는 것 이상의 더 높은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는 그 모델을 우리 앞에 놓아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요, 너희는 자녀이니 신뢰와 사랑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부탁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처럼 믿어다오! 내가 믿는 교리대로 믿어다오! 내가 충성하는 것처럼 충성해 다오! 그리하여 내가 가는 하늘 나라에 함께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자며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과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는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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