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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수난의 뜻(사도행전 13:42~5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 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과 결과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교(宣敎)가 무엇인지, 말씀 전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교신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선교사는 기본적으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당면한 현실의 상황을 선교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를 상고하게 됩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야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경험한 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반드시 그 두 사람만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는 심령마다 어느 현장에서든 똑같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이 같은 일은 알게 모르게 반복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의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히 알고 늘 상고해야 할 줄로 압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실로 대표적인 설교말씀을 전했습니다. 아주 영감 넘치는 귀중한 설교말씀이었습니다. 쉽게 쓰는 말로 하자면, 설교 한번 참 잘했습니다. 은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설교 잘했다 못했다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첫째는 쉽게 생각해서 한마디로, 듣는 사람이 졸지 않았으면 잘한 설교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은혜받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하품을 하거나 몸을 뒤튼다면 그 설교는 타작인 것입니다.
둘째는 모두가 잘 알아듣는 설교가 잘하는 설교입니다. 후배 목사가운데 공부를 많이 해서 아주 해박한 박사 목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는 웬일인지 영 부흥이 되지 않아요. 이 사람, 결국은 일년에 한두 번씩 교회를 옮겨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방랑을 하느냐고 했더니 "우리 교인들 가운데 내 설교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 몇 안돼요."합니다. 그래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해야 교인들이 알아듣는지, 그것도 모르나? 자네야말로 참 무식하구만. 교인들이 설교를 못 알아듣는다면 못 알아듣는 책임은 그 교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셋째는, 그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다음 주에도 들으러 나와야 그 설교가 잘하고 있는 설교입니다. 한번 듣고는 다시는 안 온다----이렇게 된다면 제아무리 천사의 방언을 한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마르틴 루터는 짧게 해야 잘하는 설교라고 말했습니다. 설교 길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한번 길게 해놓으면 다음 주에는 지레 지겨워져서 안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또한, 설교들은 사람이 다음 주에는 한 사람 더 데리고 나와야 그 설교는 잘하는 설교가 됩니다. 나만 듣고 그만 이라면, 듣고 나서 남에게 한마디도 전도하는 것이 없는 설교라면 잘못하는 설교인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 잘했으면 들은 사람들이 가만있겠어요?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안 먹겠습니까? 알아들었으면(소금을 먹었으면) 전도하게(물을 먹게)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한 말씀 들었으면 가만있을 수 있나요? 가서 소문내게 돼 있는 것입니다. 말 아니치 못하는 것입니다. 가자! 무슨 방법으로든지 내가 들은 말씀, 당신도 들어라--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네 가지가 갖추어져야 설교 잘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설교 썩 잘했습니다. 보세요.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또 와서 전해주시오--말을 바꾸면, 다음 시간에도 우리 나오겠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은혜 받고 감동 받고 돌아가면서, 다음 시간에 또 나와야겠다. 또 와서 말씀해주세요---설교 잘한 것이지요. 그뿐입니까? 저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다고 합니다(43절). 자기네가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을 버리고 바울 편을 택합니다.
바울이 가르치고 바울이 생각하는 말씀을 좇았어요. 나도 당신처럼 되겠어요, 나도 당신처럼 믿겠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당신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겠소--그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저들은 자기 생명을 위탁하게 되었어요. 실로 성공적인 설교였습니다.
또한 44절에 보니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안식일에 왔던 사람들이 돌아가서 열심히 소문냈으니 그렇게 모인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냈겠습니까? 온 성이 다 모였다고 합니다. 이 성에 큰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온 성이 다 모일만큼 지난 안식일에 들은 사람들이 나아가 열심히 전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확실히 영감 있고 능력 있는 설교였습니다. 모이되 저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여,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보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의 말씀을 저들은 벌써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누가 설교하든지 설교말씀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울의 이야기, 바나바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고 좇고 전도하고, 다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온 성이 다'모인 것입니다. 간단한 말씀이지만 귀한 말씀입니다.
무릇 교회 나오는 사람의 마음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런 동기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 예배가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그런 관계가 아름다운 은혜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 성이 모여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소중한 사건이 있는데, 여기에 또 핍박이 따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핍박이 있습니다.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데는 핍박이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에는 반드시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듣고 회개하고 수용하고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찬송하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듣고 완악해져서 변박하고 비방하고, 마지막에는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누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누구는 더 완악해집니다. 누구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고 누구는 시기 질투하고 마침내 완악한 사람이 됩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이것을 전적으로 받아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금도 여기 앉아 있으면서 마음이 틀어져 가지고 고생하는 사람이 있어요. 불쌍한 사람이지요. 그러니 내가 전도를 하든 설교를 하든 사람들이 그것을 일백 퍼센트 다 받아들이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맥락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라도 그러했고, 베드로의 설교라도 그러했으며 바울의 설교라고 그러했습니다.
으레 수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왜 핍박하고 반대합니까? 이유인즉 치사하기 짝이 없어요.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은 하는데 시기 질투는 안 빠집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연면히 내려오는 족보 있는 죄입니다. 엄청난 죄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부자지간에도 있어요. 조손(祖孫) 간에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워요? 목사와 교인간에도 있어요. 어디에든 있어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는 마귀의 힘입니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몹쓸 시기 질투가 악의 원천입니다. 원죄를 가리켜 죄의 원인이 되는 죄라고 합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죄는 불신앙적 교만입니다. 불신앙적 교만이 부정적으로 역사할 때에 시기 질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역사할 때, 적극적으로 역사할 때에 교만이 됩니다. 이게 적극적으로 역사 하면 교만이 되고, 이게 안으로 들어와 소극적으로 나타나게 되면 시기 질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주전 6세기에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된 다음에 헬라사람, 로마사람, 유대사람들이 주로 모여서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로마의 것이었습니다. 정치는 로마요, 학문과 철학은 헬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가 세계를 점령했지만 문화는 헬라 문화를 전파했어요. 로마 정치와 헬라 철학이 조금도 어렵지 않게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당시의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유대 종교입니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유대사람들이 단연 우세합니다. 헬라사람이든 로마사람이든 저들은 우상을 많이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긴 나머지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특히 성생활이 엉망이었습니다. 하도 타락해서 문란했기 때문에 종교의 자리가 없었어요. 전적으로 문란한 성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희생자가 되는 것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좀 생각이 있고 공부도 했고 지체가 있는 여인들이 그런 생활에 환멸을 느꼈고, 그래서 저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깨끗해 보이는 도덕생활이 마음에 들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본문에도 50절에 잠깐 비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라고 말씀합니다. 귀부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사람 귀부인들이 개종해서 히브리 종교 즉 유대교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핍박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인들은 종교에 관한 한 단연 자기네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에서는 자기네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를 전파하고 있으니 자기네 쪽으로 왔던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 질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자기네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방사람들을 향하여 유대교로 개종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개종을 하고 할례를 받고 해서 유대교인이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고, 안식일을 지키게 되는데, 그렇다 해도 한 가지 벽을 두었습니다. 곧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5절)"라고 자랑한 것처럼 유대교인이라고 다 유대교인이냐,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다, 순종 유대교인이 있고 개종한 유대교인이 있다고 차별을 두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자기네가 선민(選民)이라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같은 회당에서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면서도 엄연히 구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샛말로 하자면 순수한 본종 유대교인은 특권층이 되고 헬라사람으로 개종해서 들어온 사람은 일단 한 급 낮은 의미의 유대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전도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 따로 없다고, 남녀도 따로 없다고, 아주 통틀어 가지고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평등하게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히브리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괘씸하거든요. 영 맘에 안 들거든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느냐? 특별한데 어째서 똑같단 말이냐.' 이것이지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뒤의 사도행전 15장에도 보면 계속해서 이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누구나 온전히 하나가 된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들은 불만이었습니다. 결국은 사도 바울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의 시기 질투는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하는 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6절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여기 "버리고" "자처하기로"의 두 단어가 있습니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력히 들려오고 깨달아지고,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을 버렸어요. 영생 얻는 이 귀한 진리를 받아들임에 합당치 않은 자로 스스로 자처하게 됩니다. 스스로 복음을 포기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의 발걸음이 유대사람들을 떠나 헬라사람들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읽어야 할 중요한 말씀은 그 고난 속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핍박은 사람을 담대하게 만듭니다. 아시는 대로 독일에 교회는 많습니다. 또 엄연히 국교는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이란 예배당은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누가 독일을 여행하면서 비오는 날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하고 딱 둘만이 앉았다 왔다고 합디다. 교회가 그렇게 텅텅 비어요. 예배당 많이 있고 좋은 시설도 있는데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이 너무도 적어요. 더러 천 명 이천 명 모이는 교회가 없지 않으나 열심히 없어요. 늘 그랬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서 핍박으로부터 해방되자 1950년까지 한 5년 동안은 교회마다 하루 3부 5부까지 예배하면서도 사람이 많아 수용을 못한 교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열심히 모였는데 그러구러 잘살게 되니까 휴가 가느라고, 놀러가느라고 이래저래 한 번씩 두 번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교회에 나올까말까 싶게 된 것입니다. 핍박은 꼭 필요한 것인가 봅니다. 핍박이 있어야 확고하고 진실하고 깨끗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개인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핍박이 있었고, 그래서 더 담대해졌다고 합니다. 핍박은 고통입니다. 고통에는 내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있고, 무지해서 당하는 고통도 있고, 선택적으로 당하는 고통도 있고, 불가피하게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같은 고통이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선택적으로 고난을 당한 할 때에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 의미 없이 당하는 고통에는 사람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당하는 핍박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영광된 고통입니다. 두 사람은 선교와 고통의 관례를 이미 알기 시작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선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핍박이 있을 때에 오히려 더 담대해지면서 더 용기 있게, 더 자신 있게, 더 활력 있게 복음 전하는 것을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반에 흐르는 내용입니다. 히틀러 시대에 유대사람으로서 유명한 심리학자였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고난 속에서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그에게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의미를 깨닫는 자에게는 그 고난은 놀라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심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고난의 구원적 의미,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 고난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선교의 문이요,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런고로 담대해졌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사업이 좌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때문에 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확장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담대해졌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진리입니다.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이 고난에 대한 섭리적 이해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대강 세 가지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숙명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당할 때, 시련을 당하던가 실패를 하든가 하면 '이건 팔자다' 하거나 '이건 숙명이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참 위험한 일입니다. 원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거든요. 원인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사건이 다음에 또다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둘째는 이성적 이해입니다. 합리적으로 이해합니다. 고난에 이유 있다. 실패에 원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적 이해입니다. 알고 깨닫고 뉘우쳐서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인은 아는데 해결의 길은 없어요. 원인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어려운 고통에 빠져요. 이런 때에는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셋째는 경륜적 이해입니다. 어떤 고난이 있든 지간에 하나님의 섭리(God's dispensation), 하나님의 큰 드라마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다시말 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위대한 말씀을 합니다. 유대사람들이 핍박을 합니다. 유대사람들이 안 믿어줍니다. 그래서 이방사람에게로 갑니다. 유대사람이 안 믿기 때문에 이방사람에게 갑니다. 여기서는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마는 사도 바울은 이 때에 이해한 것을 날로 발전시켜서 신학적으로 체계를 잡습니다. 로마서 9~11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거기 보면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놓고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유대사람들이 안 믿었어요. 잘 안 믿어줍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으로 갔어요. 이방으로 갔으면 유대사람들은 아주 버림받은 것이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면 이방사람들이 더 잘난 것이냐? 그것도 아니--바울은 다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유대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멀리 내다봅니다. 위대한 신학적 전망입니다. 경륜적 이해입니다.
오늘 핍박이 있습니다. 핍박이 거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핍박 때문에 복음이 이방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날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핍박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말하면 모순 같은 사건 속에서 계속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멀리 내다보고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3~34)." 그야말로 감탄, 감탄뿐입니다. 오묘한 것입니다. 유대사람이 안 믿어서 이방사람이 믿게 되고, 이방사람이 믿은 다음에 또 먼 훗날에 유대사람이 믿게 되고--이런 것을 내다봅니다. 그래서 깊도다, 너무너무 깊고 오묘하다 --이렇게 그는 감탄합니다. 반드시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 참으로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48절 마지막에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절대로 뺄 수 없는 간증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간증입니다. 자, 이제 보세요. 선교하든지 목회하든지 그 현장에서 느끼는 일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가르쳐보았습니까? 내가 가르친다고 가르친 대로 됩니까? 내 자식 하나라도 가르치는 대로됩디까? 그래서 '겉을 낳지 속을 낳나'하고는 두손들고 말기 일쑤이지요?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합니까? 여러분, 교육을 너무 그렇게 절대화하지 마세요. 가르치기만 하면 만사가 다 될 줄로 아는데 안 그래요. 특별히 예수 믿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전도하고 봉사하고 서비스 잘하고 친절하게 하고 하면 될 줄 알지만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는 데까지 할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야 믿더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대로 수고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들어서 수고할 뿐이지 수고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부터 벌써 위대한 발견을 하고 있어요. 칼뱅의 말을 빌리면 "제한속죄"라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저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도 하겠고 듣기도 하겠어요. 복음을 받기도 하겠어요.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그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 많은 사람에게 똑같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상하게도 인간적으로 보아 믿을만한 사람은 안 믿고 인간적으로 보아 신통치 않은 사람인데 잘 믿거든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자인데 예수 믿는 데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인데 예수믿는 데는 멍청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간증합니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만이 믿는구나, 내 수고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씨를 뿌리고 물을 줄 뿐이요 싹이 나게 하고 자라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구나--하는 간증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딱 한마디 듣고도 구원받습니다.
임종 직전에 예수 믿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보았습니다. 그 아들이 오라고 해서 가보니까 임종하게 됐는데 거기서 전도했더니 예수 믿어요. 이 사람, 국민학교 3학년때에 친구 따라 교회에 갔었대요. 몇 번 가는데 신입생이라고 연필 한 자루 얻어 왔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언젠가는 교회 나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답니다. 누가 교회 비난하는 소리 들으면 못 참았답니다. 그러면 못쓴다고 나무라곤 했대요, 그리고 그 때 이후로 그는 우상을 섬기지 못했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국민학교 3학년 때인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 사랑하심'을 배웠겠지요.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을 사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말씀을 듣고 다 믿습니다.
끝의 52절에 보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합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복음을 전하고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그 많은 고통과 모순 속에서도 저들은 점점 더 큰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핍박을 견디어 낸 다음에 승리할 때에, 핍박으로부터 승리할 때에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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