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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사도행전 13:16~23)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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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사도행전 13:1623)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 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오십 년간)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야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 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사도 바울이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구브로를 거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로마의 중심 도시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이 안디옥에 갔을 때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설교를 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지키는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면서, 또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을 중심해서 모이는 그 모임을, 기성 공동체 혹은 기성 종교 규례를 지금 기독교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이 먼저 있었고 그 안식일에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문화적 형식은 그대로 두고 의미를 바꾸어서 주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사람들의 안식일 예배가 차차 기독교인들의 예배 의식으로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져 말한다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의식도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지정해주셔서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안식일 예배 순서를 그대로 기독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5대 행사가 전부 이스라엘사람들의 회당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회당이라고 하는 기존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점입니다. 교회를 당장 예배당부터 짓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안식일, 이미 있는 회당을 사용해서 시작함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는 안식이니 회당이니 하는 것이 다 기독교의 교회를 위해서 미리 예배되었던 기구다---라고 기독교 중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이제 그 교회 의식을 찾아가는 데도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에 안식일이니 회당이니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안식일이다 회당이다 하는 것의 중심이 되는 것 내지 목적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특징은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16)"라고 말씀합니다. 회당이라면 그 때에도 큰 회당이 있었지만 크지 않은 회당도 있었어요. 특별히 랍비들은 대체로 나이가 좀 많아서 앉은 자세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태복음 5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하고 말씀합니다. 팔복(八福)을 말씀하실 때에 그리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지금 이 강단 위에 서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에서는 앉아서 이야기하듯이 설교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나 손짓하며 말씀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정열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간절한 마음, 이 말씀은 꼭 들어야 되고, 꼭 깨달아야 되고, 또 당신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되겠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어나 손짓을 할만큼 정열을 쏟아 설교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있고, 7장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는 바울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들을 모아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모두가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브라함 때부터 해서 도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그 역사의 초점을 예수그리스도께 맞춥니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하는 역사 의식인 것입니다.

왜 역사를 이야기하느냐---첫째, 기독교의 교리는 바로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무슨 영감을 얻었다던가, 어느 도사가 어디 가서 7년 동안 도를 닦고 내려왔다던가, 환상을 보았다, 굉장한 걸 깨달았다 하는 따위의 추상적인, 관념적인 헛소리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다른 말로 말하면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요. 우리가 예루살렘을 가거나 베들레헴을 가거나 혹은 여기저기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찾아 다녀보면 그 생전을 상기할 수 있는 흔적들이 충분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비록 2000년 전의 일이지만 그 이전 이야기까지가 전부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는 어떤 인간의 생활 규범이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래야 마땅하다 저러면 안 된다---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역사 그것입니다. 역사에 뿌리를 두고 역사를 토대로 전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역사성을 말하기 위해서 구구한 철학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함께 하셨다, 이 민족의 역사 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役事)하셨나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경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의 시점에 우연하게, 뜻밖에 이루어졌던 일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임을 강조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역사 하셨으며, 인류역사뿐만 아니라 우주의 역사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연한 일이 아니고 온 인류의 역사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役事)와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륜적 사건이다----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를 들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역사를 이끌어오시고 예언하시고, 예표를 들어 말씀하시고, 그림자로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실제의 사건으로 성취하셨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거기서부터 설명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혔으면 짐승()이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피가 묻은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육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죽옷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생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뿐입니까?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제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야말로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자다--이렇게 설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그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바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의 그림자요 예표인 것이다, 그 모든 사건이 예비, 준비해 두셨다가 오늘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이렇게 설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다, 역사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다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라고 누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역사 의식이요 역사관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비록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된 일이지만, 장소는 안디옥이지만, 모인 사람은 유대사람들이요 장소는 유대 회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 역사를 다 알고 있어요.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외었거든요.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따로들 다 외고 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왜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냐--여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듣는 자들이 다 안다고 전제하고 본문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니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내사"하고 설명하거든요.

듣는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해서 그 의미를 알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의미를 몰라요. 읽기는 읽는데 뜻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뜻을 알게 하는 것이며, 알게 하되 어떻게 알게 하는 것이냐, 궁극적으로 무엇이 초점이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냐----이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보세요. 저 구스의 내시가 마차를 차고 가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읽습니다. 양이 사지(死地)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것과 같다---양의 희생에 대하여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 때에 빌립이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희생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줍니다.

이래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경험하기도 하고 읽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해석상의 문제가 따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을 말씀합니다. 역사의 초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본문에 누누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선택'은 보상과 달라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할 때에 아브라함이 남보다 더 나아서, 시험을 보여서, 의가 높고 경건이 높아서 합격했으므로 선택하셨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의가 높아서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이란 원래 무자격 가운데에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 경륜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과 예정을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선택은 구원과는 별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택받았다고 해서, 선택받았으니까 나는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만방에 하나님 살아 계신 역사를 전하도록 하셨어요.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그가 얼마나 믿음으로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았습니다. 분명히 선택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확실히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선택받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고 못 받고는 그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선택받아서 하나님의 일 하는 사람이 많아요. 본인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그것은 하나님께서 들어 구원 사역에 쓰신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어요. 선택받은 양으로는 가장 귀하게 선택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의 왕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구원받을만한 왕이 몇이나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어 쓰셨어요.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높은 경륜 안에서 높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인도해내셨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뭐 잘나서 구원받았습니까? 애굽에서 나온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이스라엘사람들은 참 한심해요. 저는 성경 읽을 때마다 슬며시 부아가 치밀고 때로는 욕이 나가요. 보세요.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를 건너고…… 이만했으면 그 감격이 적어도 1년이라도 가야 하겠는데 금세 물이 좀 없다고 해서 원망을 합니다. 고작 열 나흘만에 나오는 원망입니다. 감격이 열 나흘밖에 안 갔다는 것이 아닙니까?

미국에서, 고속도로로 차 타고 가다보면 때없이 어디선가 꽝하고 사고가 납니다. 그런 사고가 나면 시커멓게 연기가 나고 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빨리 몰고 가다가도 속도를 줄입니다. 본래 운전할 수 있는 속도가 55마일인데 그렇게 사고 나는 것을 보고 나면 전부가 45마일로 몰아요. 살살 가지요. 그런데 그렇게 얼마나 가나 보자 하면 한 5분쯤 뒤에는 또 속도가 더해집니다. 자제하는 것이 고작 5분밖에 못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때에 은혜를 받고 감격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합니다. 그리했으면 그 감사가 하다못해 1년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침 다르고 저녁 다릅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금세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하나님 원망하는 것을 보면 한 방 냅다 쥐어박고 싶어요. 세상에 이런 못된 것들이 있나 싶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니 "광야에서 약 사십 년 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그렇듯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죄짓는 대로, 하나님 원망하는 대로 내려치셨다면 진작에 다 끝났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래오래 참으셨어요. 못돼먹게 굴어도 참으시고, 원망해도 참으시고, 하나님을 저주해도 참으시고---하나님께서 이렇듯 무던히도 참고 참으신 나머지에 그나마도 남아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갔지, 그렇지 않았으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아남았을 사람 하나도 없어요.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참으셨다, 하나님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선택하시고 인내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다음으로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어요. 이스라엘이 빼앗은 게 아닙니다. 저들이 가나안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주시고 저들은 눈만 껌뻑이며 들어가 차지한 것뿐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겼고, 용맹해서 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저들은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제는 또 왕을 달라고 부르짖어요.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섭섭해하셨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왕을 달라고 할 때에 저들이 나로 하여금 왕 되지 못하게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하셨습니다. 왕이 왜 필요하냐, 율법대로 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다 평안할 것인데, 원수가 쳐들어와도 내가 다 막아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왕이 필요하냐--그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딴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 왕 세우고 만세 부르고 으스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왕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졸라대니 하나님께서는 양보를 하십니다. 크신 허락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울이 처음과 다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십니다. 이 다윗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리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의 왕권을 모델로 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다윗의 왕권과 왕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되시고 제사장 되시고 왕이 되십니다.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 사람(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23)"--''라고 합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구주를 세우신다 함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역사를 말씀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폐하시고, 이렇게 아주 용의주도하게 인도하시다가 일찍부터 그림자로, 예표로, 예언으로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 오시는데, 바로 내가 증거 하는 예수다--바울의 이 설교야말로 일등 설교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증거 하게 됩니다.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들어서 확인하게 하고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적, 구속사적 의미를 들어서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사울과 다윗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세우시고 또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세워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을 손수 세우시고, 또한 손수 폐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910장에 보면 분명히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받아 기름부음 받습니다. 그가 택함 받을 때의 모습으로 보면 그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무릇 아버지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효도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바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직장에 나가서 상사에게 순종할 줄 모릅니다. 순종의 덕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은 결코 사회생활에서 성공을 할 수 없습니다. 제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 무엇이나 제멋대로만 하는 사람이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해내겠습니까? 하물며 한 나라의 왕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부모에게 잘 순종하는 사람, 아버지를 위하여 잃은 암나귀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데도 그 마음 씀씀이를 보아하니 여간 기특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순종의 사람입니다.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정처 없이 두루 다니며 찾기를 사흘, 게다가 제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는데 '아하,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합니다. 자상하기도 이를 데 없는 아들입니다.

갸륵한 마음씨지요.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 잃어버렸다고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맞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 합니다. 나귀는 못 찾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나를 걱정할 때가 됐으니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서입니다.

우리 장로님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십니다. 일생동안 밥을 먹으면서 밥에 돌을 씹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 부인이 친구들 앞에서 이 자랑을 했습니다. 한번도 남편의 밥에 돌을 넣어본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인즉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로님, 돌을 늘 씹었습니다. 돌이 씹히면 바로 "나 좀 잠깐……" 하고 밖에 나가서 몰래 뱉어버리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돌 씹은 걸 알면 아플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서 였습니다. 괜찮은 남편이지요. 그만하면 일등 남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 불편한 것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의 마음이 어떨까, 그 기분이 어떨까부터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울은 참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경건했었고, 겸손했었습니다.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사환이 청했을 때에 그대로 하는 경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자기가 왕 될 거라고 했을 때 도망가 행구(行具) 뒤에 숨었다고 돼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 달라졌어요. 교만해졌어요. 자기 왕권에 집착했습니다. 시기 질투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은 선지자의 제사드리는 권한까지 스스로 대행한 것입니다. 큰 죄를 지었지요. 자기는 정치적인 왕입니다. 제사는 사무엘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좀 늦게 온다고 해서 '제사는 나도 드린다'하고 실수를 범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했지요. 그런가하면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기념비를 세웠어요. 이 기념비가 또한 말썽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장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기념비니 동상이니 하는 것 세울 생각은 마세요. 이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입니다. 선한 일 좀 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신문에 내고 기자회견 하고…… 그런 것 가 신앙적인 일이 못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무려 8백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다윗을 좋아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종 다윗, 다윗, 다윗……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반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다윗은 그렇게 의인인 것만은 아니었어요. 불행히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다윗의 외모는 초라했다고 합니다. 그 점이 또한 재미있어요. 다윗 왕이라고 하면 우리 생각에는 아주 큰 사람으로 떠오르는데, 사실은 볼만한 풍채가 못되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에 가보라, 그 집에 아들들이 있는데 그 중에 내가 선택한 자가 있느니라 하시면서 기름부르라 하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기름병 가지고 가서 이새 보고 아들들 데려오라 했더니 일곱 명을 데리고 왔어요. 큰아들부터 차례로 살펴보는데 주인공이 그 중에 없어요. 늠름한 아들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또 없느냐 하니 하나 남았는데 그 아이는 양을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더 있기는 있는데 시원치 않다는 투였습니다. 그러나 누구가 보아도 도무지 왕될 재목은 못될 것 같았던 그 양치는 아이, 다윗이 바로 하나님께서 점찍은 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충성,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옷이 벗어지는 것도 모르고,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정도였습니다. 극진히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해서 그 중심을 바쳤습니다.

숱한 실수를 범하지만 다윗은 또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보세요. 즉각적으로 회개할 뿐더러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환경도 원망하지 않고, 밧세바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그것뿐입니다. 참으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에 그 때에 회개를 하지 않았거나 "나단 선지 저놈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라" 했었다면 하나님께서 다윗도 폐하셨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적으로 다윗에서 별명을 지어줍니다.

정직한 사람, 정직한 종 내 다윗, 정직한 종 내 다윗…… 그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충성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회개할 줄 알고, 끝까지 하나님만 사랑했기에 들어 쓰십니다. 이 사람이 유대나라 왕이 되고 그 후손들이 왕이 될 뿐더러 마침내는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납니다. 영적인 왕, 우주적인 왕이 서시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왕을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시게 하십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이름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종말론적인 왕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읽는 것이 구약성경을 바로 읽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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