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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와 부자 비유(마태복음 19:16-2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있느니라.」
여기 주신 본문 말씀은 한 젊은 청년이 예수님께로 나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17절 이하와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들 본문을 대조해 보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간단하게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마는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라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달려나와서 아주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달려나와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질문한 것을 보면 얼마나 간절하게, 그리고 꼭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물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영생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흔히들 묻는 것처럼 "내 병을 고쳐 주십시오"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내 아들이 죽게 되었나이다"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구한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영생을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가진 바 고민이 영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고민이 없었습니다. 몸도 젊고 건강하며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명예도 지위도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 되면 특별히 부러울 것이 없는 처지입니다마는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영생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묻고 있는 영생이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를 생각할 때 우선 히브리 사람의 개념으로서는 두 가지로 생각하게 봅니다.
그 첫째는 미래지향적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처지를 놓고 생각해 보면 대개 가난하고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은 "그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혹은 "오늘 밤 눈감은 채로 갔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을 쉽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도 있고 명예, 지위 등 가질 것 다 가지고 보면 이제 남은 것은 죽으면 어떻게 하나가 걱정입니다. 그래서는 되도록 안 죽겠다며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면서온 정성을 건강관리에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얼마나 오래 살게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튼 문제는, 이 아까운 것들을 다 놓고 죽어야한다고 할 때에 부딪히는 문제는 곧 영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 소원을 대충 다 이룬 처지라면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늘나라에 가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것이 궁극적 의미에서의 관심거리요 가장 중요하고도 큰 문제란 말입니다. 이상 더 잘살고 못 살고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영생의 문제이기에 이 궁극적 문제에 대하여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영생과 함께 현재 마음속에 있는 영생입니다. 이는 곧 평안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신 평안한 마음! 영원한 약속을 받고 사는 사람의 안정된 심령!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도 있고 명예와 지위도 있으며, 존경과 칭찬도 한다는데 나의 마음은 괴로움 뿐 도무지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께로 나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게 된 것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나 예수님의 평소의 의도로 보아 그저 간단히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왜 이 사람에게는 유독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조금 후에 나오는 설명들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의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자 다시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물음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 몇 가지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모두 십계명에 포함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계명을 요약한 것으로 계명의 주심이 이 사람에게 향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핵심적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사람은 별다른 생각도 없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며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이 다른 복음서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1절에 의하면 다 지켰다고 하는 그 사람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진정으로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끝내 못한 채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 사람이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본론으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 어려운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가 하는 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며 예수님을 향하여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할 때에 그것은 이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말하는 거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가 가지는 착각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부자가 가지는 착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즉 말하자면 돈이 많다는 것과 그 사람의 인격과는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보면 돈이 좀 있고 보면 인격까지 높아진 것처럼 생각하려드니 그것이 바로 크나큰 착각이란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하다고 하여 인격까지 낮은 것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그것 또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언젠가 경영학 책을 읽어 가는 중에 매우 인상 깊고 재미있는 내용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회사의 사장님이 자기의 부하직원을 불러놓고 책망할 일이 있을 경우 "이것, 이것 잘못했네. 다시 서류 고쳐 가지고 오게"라고 이야기하면 좋은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사람이 그러면 못써"하고 나오면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 "사장님, 미안합니다마는 돈이 많아서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았지 인격이야 내가 낫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장이라고 하여 그 인격이 저 문전의 수위보다 나은 것이라고 하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로 인해 한치인들 더 나을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돈과 인격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있으면 마치 인격도 높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욱 무서운 것은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돈이 있음으로 스스로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업이 잘되고 돈이 잘 벌리어질 때에는 의인 같다가 형편이 꼬여들고 물질적 손해를 보며 막혀 돌아가는 처지가 되면 마치 죄인인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도덕적 문제를 대함에도 마찬가지여서 부유한 자를 대하여는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가 하면 가난한 자를 향해서는 아예 죄인 취급을 하려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부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부자인 여기 이 사람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오니이까?"라는 말을 감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부자이기에 '내가 율법을 다 지킴으로 복 받아서 부자된 것이 아닙니까?'라는 허튼 소리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부유하면 복 받은 것 같고 가난하면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일이 잘 되고 부유할 때에는 회개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일이 잘 안되거나 몸에 병이 들게 되면 그때에는 10년, 20년 전에 지은 죄까지를 다 생각하면서 '죄 때문에 저주받았는가 보다'라며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느냐하면 그것은 바로 돈이 가져다주는 유혹과 영향력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이 사람은 부유하고 보니 인격까지 높은 것으로, 의인으로, 그리고 복도 받았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이유는 율법을 너무 쉽게 생각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두고 이르기를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며 그저 쉽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한 마디의 말씀을 좀더 귀담아 들었더라면 감히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좀 문제가 있음직도 합니다. 게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 "내가 율법을 다 지키었나이다" 하고 나오니 이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진정 그가 다 지켰다면 지금 그의 집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물건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옆집에는 지금도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네 집 물건들이 창고에 남아 있느냐? 이렇게 하고서도 나에게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지켜보라는 뜻에서 이 율법을 들어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내어 걸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 사람이"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하는 진실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추측컨대 예수님께서 율법들을 지키라고 하실 때에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주여 어찌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은 지킬 사람도 없거니와 더욱이 저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저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들아 착하도다"하시고 또 "나를 믿으라!" 하시고는 만족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건방지게도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함으로 어디 정말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를 보자시는 뜻에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갖는 문제는 부요하다고 하는 이 문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 속의 이 사람은 소극적인면에서는 율법을 지켰습니다마는 적극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지킨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부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가난한 자에게는 시험이 많고 부요한 자에게는 시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자가 못되어 보아서 그렇지 사실은 부자에게 더 많은 시험이 있고 걱정거리도 더욱 많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야 방문이든 대문이든 다 열어 놓고 다닌들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마는 부자들이야 어디 그렇더냔 말입니다. 그저 잠시라도 지키지 않으면 누군가가 와서 이것들을 다 가져갈 것만 같은 불안함 때문에 예배에도 나올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요할 때에 시험이 더욱 많다는 것은 부요할수록 시험이 많고, 시험이 많을수록 그 만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옛날 솔로몬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잠 30:8)라는 참으로 지혜로운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부유해짐으로 교만해서도 아니 되겠고 그렇다고 가난하여 도둑질을 해서도 아니 되겠으니 그저 언제나 필요한 정도에서 적당한 것이 좋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어느 편에 더 많으냐?" 둘 중에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유한 편에 시험이 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유한 사람이 신령한 생활을 함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 말이 됩니다. 이는 매우 상식적이고도 참으로 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가난은 두려워할 줄 알면서도 부요함은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에 처할 지경이 되면 여러 모양의 걱정을 하지만 부자가 된다고 하면 그로 인하여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택복권에 1등으로 당첨이 되었다면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 참 경사났다"며 좋다고들 하지만 "이제 복권이 당첨되었으니 큰일 났구나!" 하고 염려하는 소리를 들어볼 수 있더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큰 시험이요. 이제 그 집에는 망조가 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놀고먹기 인생이 되었으니 사람을 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그 어떤 돈도 땀 흘려 벌어들이지 않은 것은 나의 돈이 아니며, 결코 나의 가문을 평안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많은 공짜 돈이 생겼음에도 "이것 큰일났구나!" 하며 걱정할 줄을 모르니 그것이 바로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부요함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사실은 이 부요함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기적인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인심을 잘 쓰는 것에 비해 부자는 그렇지를 못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먹는 것까지도 바들바들 떨면서 아까워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재산이 늘어가는 재미 때문인데 그러자니 이웃은 물론 친척, 심지어는 부모나 자식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완전히 재산에만 매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돈이 만능이라고 생각할 때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돈이 어떠한 일들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물건을 살 수도 있고 가고 올 수도 있으며, 이런 저러한 일들을 상당히 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다는 아니며, 돈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죽을 사람을 살릴 수가 없으며, 못하는 공부를 잘하게 만들 수도 없거니와, 잘못된 인간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고 보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쉬운 예를 들자면, 십일조를 두고 생각을 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제 천원을 벌어서 백원을 바치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만원에서 천원, 십 만원에서 만원 바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쉽습니다. 그러나 백 만원에서 십 만원 하면 좀 많은데 하게 되고 천 만원에서 백 만원하게 되면 이것은 정말 힘이 드는데 어떻게 좀 감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이제 일억을 벌인 중에서 천 만원을 내야할 경우가 되면 여기에서는 대체로 못 바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를 드리는 일 하나를 두고 보아도 부자가 가난한 자 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실하기도, 겸손하기도 부자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문제, 의와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 더욱 둔감해지고등한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어렵다는 것과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부하다고 하는 그 자체 때문에 자동적으로 지옥을 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생의 영광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쓰는 것만큼 부자인 것이지 손에 든 것만 가지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얼마를 주었는가?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자유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못하여 억지로 준 것은 베푼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것, 다시 말하면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한 만큼 부자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곧 내가 얼마를 남에게 주었다면 준 그것 만큼, 혹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얼마든 바쳤다면 결국은 바친 그것 만큼만의 부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교인들이 부자라 하여 곧 교회가 부자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헌금 낸 것 만큼만의 부자일 뿐 교인들이 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아무리 많은들 그것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되고 많은 문제만 낳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돈이라고 하는 물량 자체와 부와는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왜 그렇게 어려우며,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 어렵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겸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난하여도 겸손하기가 어렵고, 더욱이 부하고 겸손하기는 더 어렵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해지기는 그런대로 쉽습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겸손해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는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위인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돈이 많으면서도 아주 없는 자처럼, 그리고 신분이 높으면서도 낮은 자들과 친교하며 같은 서민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 해석하는 바가 따로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상한 것은 우리는 '바늘구멍' 혹은 '바늘귀'라고 하는 것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어 니들스 아이'(a needle's eye) 곧 바늘귀로 표현하고 있으며 헬라 원문의 '트루페마토스'는 구멍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늘눈' '바늘귀'라는 두 표현을 놓고 보면 우리말인 바늘귀가보다 정확하고 과학적이라는 생각인데 그것은 뚫렸으므로 귀지 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기 이 바늘귀, 바늘구멍이라는 말은 그 크기가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늘귀란 그 구멍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가 실을 낄 때에도 그냥 끼우지를 못하여 손끝으로 부벼서는 되도록 그 끝을 가늘고 뾰족하게 만듦으로 끼우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와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이 바늘귀에 대한 해석에는 이러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하나의 성에 큰 성문이 있어서 아침이 되면 열었다가 필요한 활동이 끝나는 어느 시간이 되면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먼길을 오느라 늦어진 사람들이나 어쩌다 시간을 놓친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위하여 그 옆에 조그마한, 그야말로 비상구인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할 정도의 낮고 작은 문이어서 낙타를 들여놓으려고 할 때에는 낙타의 등에 실린 짐을 다 내려놓은 후에 그리고 낙타의 무릎을 꿇게 하여 끌어 당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그 끌어당기기가 그렇게도 힘이 든다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장면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래도 그것은 결국은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반문하고 있으며, 이에 답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그 해석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아주 바늘귀로 들어가야 할 만큼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통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물질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으로 부유한 사람이 더욱 문제입니다. 가만히 보면 물질은 부유하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 말씀에 보면 부하려는 마음이 문제가 되고 시험이 되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될 때에 마음이 부유하게 됩니다. 돈이 기회이라면 부는 위기입니다. 이는 부유하게 되는 만큼 점점 더 위험한 기회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부유해지지 않도록 더욱 더 겸손하고 온유해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영생을 위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문제로 이 자리에 나왔으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말을 듣고는 근심하며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그야말로 멍청한 사람입니까? 저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하고 한 마디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되고 말고"하시면 다 팔아 나누어주고 오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근심하며 돌아갔으니 그 하는 것으로 보아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영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하여도 좋고, 병들어도 좋으며 그 외의 어떠한 희생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려 놓아야할 짐이 많고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가진 근심은 참으로 쓸데없는 근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서부터 가치와 소유권을 다 부정해 버리고 나면 오히려 그로 인해 부자도 되고 영생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포기하게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 영생을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소유권을 버린 청지기로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으로부터 가난하여질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진 바의 모든 소유권을 깨끗이 포기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고 겸손한 마음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선한 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로 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결코 내게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게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기에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이 나에게는 조금도 걸리는 바가 없으며 "예"하고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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