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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듣고자 하노라(사도행전 25:13~22)
수 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아그립바 왕이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 베스도를 예방합니다. 이 때에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이 설명을 다 들은 아그립바 왕이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하는 말로 오늘의 본문이 끝을 맺습니다. 전반적으로 오늘의 본문은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 대하여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 설명은 어디까지나 자기 처지에서, 자기 입장에서, 자기 정치적 위치를 생각하면서 한 말입니다마는 그 말속에 진리가 있고 또한 깊은 계시적 의미가, 요샛말로 하면 선교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상고하게 됩니다.
또 그 주고받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 이 되어진 상황이 그렇게도 못마땅할 수가 없습니다. 베스도도 그렇고, 벨릭스도 그렇고, 아그립바 왕도 그렇고, 여기에 아그립바 왕과 동행한 버니게라는 여자도 그렇고, 주변사람들이 다 못마땅합니다. 재판할만한 자격도 없는데 권세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다들 이 말 저 말 하고 있지마는 도대체가 영 마땅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윗자리에 있어야 하나, 이런 사람들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나, 이런 재판에 순종해야 되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 앞에서 천명을 하고,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또 복음을 전하고, 다시 설명하고 하는 바울의 입장도 생각하면 참 어이 없습니다.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나의 본분, 나의 증인된 본분을 다하려고 하는 바울의 신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만 본다면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할 가치가 없어요. 설명할 것도 없어요.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하고, 또 여러 사람 앞에 설 때마다 다시금 복음을 정중하게 깨끗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된 성실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주변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가 어떤 환경에 있든 지는 묻지 않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만 성실하게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울의 모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 왕을 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또 혹은 역사가들이 증명하는 대로, 중요한 몇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기록도 많고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바가 있지만 직접 관계되지 않은 부분들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구구하게 말씀드리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의 본문에 관계되는 부분만 말씀드립니다. 원래 아그립바 왕은 사도행전 12장 20~22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지을 때, 이름 하나를 지어놓고 그 아들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또 손자도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렇게 같은 이름일 때에는 첫 번째 사람은 1세이고, 두 번째 사람은 2세이고, 또 그 다음에 세 번째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되면 그는 3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름을 중심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간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건너뜁니다. 같은 이름이 너무 많으니까 넘버 1,넘버 2……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없이 주소를 붙여 불러요. 신사동 아무개, 압구정동 아무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튼 아그립바 1세가 성경에 나타나는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그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입니다. 역사학적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헤롯 아그립바 2세, 이것이 정확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2세는 주후 48년부터 70년까지 꽤 오랫동안 로마 황제의 비호로 보좌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자기 능력으로가 아닙니다. 비록 허수아비 같은 왕이지만 왕은 왕입니다. 로마사람들이 이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기 위해서 왕 제도를 놓아두고 총독을 두었어요. 총독이 실권을 가지고 있고 왕은 그저 형식적 권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사람은 로마에 대해서 순종을 잘했던 것 같아요. 저들과의 관계가 좀 무난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렇게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아그립바 2세, 그는 황제 비호로 비교적 넓은 국토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총독이 새로 왔습니다. 벨릭스가 해임되고 베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부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의 비호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아그립바 2세가 당연히 예방을 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예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의 나이가 어립니다마는 그 이야기는 좀 뒤에 가서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따라 같이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꼭 둘이 같이 붙어 다닙니다. 이 버니게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가 다른 사료(史料)에 의해서 좀 알아볼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록된 대로 보면 왕후인양 되어 있어요. 왕과 그를 수행하는 부인, 이렇게 됩니다만 이게 아리송합니다. 왜냐하면 이 버니게는 특별한 인물이니까요.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리자면 버니게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큰딸입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2세하고는 사실상 남매간입니다. 본래는 남매가 아닙니다만, 버니게는 벨릭스의 아내였던 드루실라의 언니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그립바 2세와는 남매 관계입니다. 역사를 조금 연구해보면 버니게는 마르쿠소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가 그가 죽자마자 바로 재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남편도 죽었어요. 팔자가 조금 기구합니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면서 지금은 혼자 지내는데 그 동생인 아그립바 2세의 궁전에 와서 같이 살고 있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누나가 동생 집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보통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버니게의 나이 20세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두 번 과부가 됐으니 팔자가 기구하다고 할 수 밖에요. 문제가 있지요. 이렇게 남매가 같이 살고 있는 것은 근친상간에 속한다고 해서 온 유대사람들이 이것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아그립바 2세는 비교적 제사장들과의 관계도 좋았고 로마와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누나와 산다고 하는 바로 이 관계 때문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고, 특별히 버니게는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아무튼 그들은 궁전에 같이 거하게 됩니다. 결혼한 것은 아니었으나 요샛말로 동거한 것이지요. 그리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혼자 지내는 자기 동생과 함께 여왕 행세를 하면서 나타납니다. 그래 오늘 '베스도 각하'를 예방하는 시간에도 의젓하게 여왕처럼 동행해서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들이다 마땅치 않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뒤의 일들을 살펴보면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못마땅해서 형식적으로 또 다른 남자와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또 자기 남동생과 같이 지냅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로마황제의 정부가 되는 등 많은 추문을 얻습니다. 로마의 황후가 되려고까지 했습니다. 정치적인 욕망이 많은 여자예요. 그러나 로마사람들이 유대 여자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역사가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여기 나타난 이 여자는 부도덕한 여자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유능하기도 하고 욕망이 많은 여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는 사실은 남매간이지만 오늘은 부부간입니다. 이들이 지금 오늘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베스도 각하를 예방하게 됩니다.
베스도는 지금 자기의 전임자인 벨릭스가 체포해 놓아두고 2년 동안이나 보류해놓은 바울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서 비교적 유대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제사장들과 관계도 좋은 이 아그립바 2세의 자문을 구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이래서 바울에 대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설명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 로마사람들이 언제 유대 왕에게 묻고 했던가요? 중요한 문제는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인데 오늘은 왜 이러하냐입니다. 바로 자기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그리고 유대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유대 왕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 18절을 보세요.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나의 짐작하던 악행, 그게 뭡니까? 곧 내가 짐작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요, 로마를 위협하는 사건이요,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요, 민중을 교란시키는 것이요…… 이런 것들입니다, 내가 관심 가지는 것은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그런데 내가 짐작했던 것과 같은 악행, 혹은 사람들을 죽였다던가 하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2년 동안이나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 '베스도 각하'가 하는 말을 가만히 보세요. 19절에서 그는 '오직 문제되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 문제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종교, 이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곧 자기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저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사람 자기네의 종교문제이지 우리의 종교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던가요? 총독이라고 해서 죽지 않던가요? 어찌해서 종교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하게 대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생각하면 어이없습니다.
알고 보면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이 바울에게 있고, 바울로부터 영생의 도리를 들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는데,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그것은 자기들의 문제이지 우리 문제도 아니고 내 문제도 아닙니다'하는 식의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참 답답합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어요. 남편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 아이들하고 부인하고만 나오는데, 그 남편보고"자, 온 집안식구가 다 나오고 선생님만 교회에 안나오시는데 이제는 선생님도 교회에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말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그거요? 그저 애들이나 마누라나 나가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이런 식의 답변을 들을 때마다 참 답답해요. 이 베스도가 지금 그런 꼴입니다. '자기들의 종교 문제입니다'라고 일축해버립니다. 무관심합니다. 문제 아닌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로마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뿐입니다. 헬라사람들의 관심은 철학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관심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종교 문제를 생각하더라도 오늘날에도 보면 이 종교를 믿어서 돈을 번다고 한다면 열심이겠지요. 예수 믿으면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면 열심히 믿겠지요. 관심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예요. 혹 그런 자부심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아,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나온다, 난 남보다 열심이다'하는 자부심. 그러나 여러분, 집에서 나올 때에 보세요. 택시가 다닙니까, 안 다닙니까? 여러분이 구원의 도리를 위하여 새벽 일찍 일어난다고 하지만 돈벌러 나가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일어났어요. 또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도 남산공원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이 "어이 어이 어이"하고 있어요. 좀 오래 살아보겠다고 그렇듯 새벽부터 올라가서 소리지르고 야단하는데 우리가 새벽에 좀 일찍 나온다고 해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복 받는다면 무슨 짓은 안 합니까? 돈번다면 또 무슨 짓은 안 합니까?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마다 종교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가장 우선적인 문제인데, 절대적인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돈 많은 부자가 사는데 그 집에 머슴아이가 하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 집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녀석이 어떻게 알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거예요.
또 교회를 다니기 위해서 애쓰는 거예요. 토요일에 주인이 일을 시키면 주일날 교회에 가기 위해서 밤새껏 일을 다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일 낮에 교회를 나갑니다. 주인이 "너 일 안하고 교회 나갔냐?"하면 "다 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 나무랄 수도 없어요. 좌우간 교회 한번 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일을 더 많이 하는지 몰라요. 이것을 본 주인이 그 머슴아이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미련한 놈아,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주제에 교회는 나가서 뭘 하니?" 그것도 말 되는 얘기예요. 무슨 복을 받겠다는 것이냐, 출세를 하겠다는 것이냐, 돈을 벌겠다는 것이냐,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주제에 교회는 뭣하러 나가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주인은 머슴아이를 어리석다 여겨 자기 지팡이를 하나 내어주면서 "이 녀석아, 너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거든 이것을 주어라"했습니다. 머슴은 "알았습니다"하고 받아 가졌어요. 그러던 얼마 후에 그 주인이 죽게 됐습니다. 방안에서 쿨럭쿨럭하고 있는데, 이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 "너 왜 들어오느냐?" "인사드릴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주인님이 저한테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이 지팡이를 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묻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는 이치를 알고 있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그렇다면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주인님이 아닙니까? 이 지팡이 받으세요." 사실 그래요.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합니까?
다시 한번 본문으로 돌아가 보세요. 베스도는 "자기들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나와 관계없는 자기들의 종교-'이디아스 데이시다이모니아스'라는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디아스'-자기들의, '데이시'-숭배한다는 말이고, '다이모니아스'라고 하는 말은 demon, 곧 귀신입니다. 그러니까 '데이시다이모니아스'는 '귀신숭배'입니다. 이것은 얕잡고 하는 말이예요. "저들의 종교"라는 말을 직역하면 '저들의 미신'이 됩니다. '저들이 하나님 섬긴다고 뭐라고 하는데 그것은 저들의 미신입니다, 귀신 섬기는 놀음입니다, 그 정도 문제 가지고 시끄럽게 지금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런 얘기예요. 이것은 남의 종교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저들 나름의 종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우스 신입니다. 우리는 제우스신,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이 높은 위치에 있어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저들의 신은 시원치 않아서 약소 민족이 되어서 오늘 이렇게 고생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신과 신의 대결이라고, 그들이 생각할 때에는 제우스가 위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은 귀신 놀음이요, 남의 종교일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참 종교란 우주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국경이나 민족이나 혹은 어떤 인종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민족주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고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보다 백 년 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은 기독교인이 1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25퍼센트다 30퍼센트다 합니다만 일본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적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이렇다 저렇다 얘기합니다마는 그 복잡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공통적으로 제일 크게 말하는 것인즉, 일본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답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잡신은 자기 종교, 기독교는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변변치 않은nationalism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이 '그것은 자기들의 종교, 서양사람들의 종교이고 우리는 우리 종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통계학적으로 80퍼센트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됐을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쉽게 예수를 믿게 됐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3․1운동과 같은 역사 덕분입니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민족을 건질 수 있는 길은 이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에 기독교를 우리 종교로 받아들였고,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로 받아들였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쉽게 nationalism을 극복합니다. 민족주의를 극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가 남의 종교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이것을 넘어섰어요. 대단히 중요한 은총적 계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기독교는 너희 종교, 유대사람들의 종교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베스도가 바로 여기서 실수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종교,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하나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데서부터 선교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오늘의 본문을 보면 참 섭섭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 하는 것 뿐이라(19절)"라고 베스도가 말합니다. 그것뿐입니다-참 유감된 평가입니다. 아니, 죽은 자가 산다는 문제인데 보통 문제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예수는 죽었다고 전제해놓고'예수는 죽었는데 바울은 저를 살았다고 한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시끄럽습니다'라는 얘기입니다. 그것 뿐이요, 그 이상의 관심이 없어요. 죽은 자가 살았다 하는 문제,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어찌 이것을 그냥 들어 넘기겠습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어도 정신차리고 생각을 해야 되겠는데, 문둥병자가 깨끗해 졌다고만 해도 생각을 달리해야되겠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았다 하는 얘기를 흘려들을 수가 있습니까? 내 상식 밖의 얘기라고 해서 '그것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없어. 생각할 여지도 없다'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죽은 자가 살았다 하는 문제, 이런 엄청난 복음을 들으면서 그것은 하나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그저 하나의 소문이나 루머로만 듣고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죽은 것을 살았다고…… 송사 하는 것 뿐이라"-어떻게 그것뿐입니까? 결국은 죽은 자가 산이 사건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온 세계의 역사가 달라진 것 아닙니까?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서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 하나하나도 바로 이 부활의 복음 때문에 변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백홍준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79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으로서 첫 번째로 세례 받은 사람의 하나입니다. 그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당시에 그의 아버지가 만주에 장사하러 갔다가 로스라는 선교사를 만났답니다. 선교사는 그 아버지에게 성경책 한 권과 양초(우리 나라에 초가 없을 때입니다)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초는 자기가 갖고 책은 너나 봐라 하고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들은 이 책을, 즉 성경을 2년 동안 읽어요. 읽는 가운데 큰 변화를 받아요 여기 귀한 진리가 있다고, 바로 부활의 복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좀 더 알기 위해서 만주로 건너갑니다. 거기에 가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의주에서 은밀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부활의 복음을 듣고서 저렇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까? 베스도는 참으로 이런 면에서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참회가 있었는지 모릅니다마는 아그리바가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22절)"-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얘기는 당신을 통해서 들었고, 소문을 통해서 들었소.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만족하지 않소. 나도 직접 이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소. 바울을 만나보고 싶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호기심일 뿐입니다. 이 뒤에 나옵니다마는 아그립바와 왕은 많은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아마도 속으로는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부분이 있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마는 유감스러운 것은 그 정치적인 위치 때문에 그는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구주는 내 구주입니다. - my savior, personal savior.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늘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의 구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내 하나님이요, 내 구주이십니다'--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을 위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오, 예수는 나의 구주이십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내 구주라고 하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항상 확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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