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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이단의 괴수(사도행전 24:1~9)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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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이단의 괴수(사도행전 24:19)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본문 가운데 "나사렛 이단의 괴수(5)"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의 별명입니다. 사실은 역으로 주어진 이름입니다마는 그러나 생각하면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진 이름인지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고 그리고 가이사랴로 호송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천부장 앞에서 심문 당했는데 소란하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본 천부장이 심문을 일단 멈추고 자기보다 상위에 있는 총독에게 바울을 호송하여 넘기고 맙니다. 이렇게 되어 바울은 이제 가이사랴에 왔고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재판다운 재판을 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 체포되었을 때 대제사장 앞에서, 즉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천부장 앞에서 심문 받고 답변한 일도 재판다운 재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로마총독 앞에서 비로소 재판이라는 것을 받는 셈입니다. , 오늘의 본문에 보면 고소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대제사장이 원래는 성전에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데 자기의 기능과 본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중요한 직무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보면 가이사랴까지 갑니다. 가서 로마총독 앞에 섰습니다. 우선 이 거동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엄격히 말하면 유대사람들은 이방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마땅치 않습니다. 더구나 정치적인 능력과 권세를 가진 여기에, 타의로 끌려간다면 몰라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사람들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사람 총독부, 이방의 정치적 근거지가 되는 이 재판정, 그것도 기소하는 사람으로, 고소인으로 서게 됩니다. 이 사실 자체부터가 이미 대제사장으로서는 신분의중요한 위상을 떠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한 변사와 함께 왔다고 합니다. 변사라고 하는데 이는 뭐냐하면 로마식 재판이기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언어가 다양했기 때문에 재판하는 재판장이 사실을 알아보기 어려운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샛말로 말하면 통역이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단순한 통역만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변호하는 사람, 곧 변호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변사와 함께 왔고, 총독 앞에서 아나니아가 원고이지만 앞에서 말하는 것은 더둘로라고 하는 변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더둘로의 말은 전부 아나니아의 말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6절과 7절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없으나다른 사본이나 많은 번역물에는 6절과 7절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지마는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래서는 그를 고소하는 사람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본문에 보는 대로 15절의 긴말이 아첨하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아첨할 수 있을까 싶어요. "벨릭스각하 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니다(3)."

예나 오늘이나 아첨하는 사람은 말이 길어요. 참으로 제사장답지 않은 아첨의 말입니다. '벨릭스 각하'를 한껏 치켜세우는 소리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런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 하나만을 생각하여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이룰 수 있다면 무엇을 포기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언제나 악한 사람 혹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어떻게 하든 바울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바울을 죽여야겠다는 것 한 가지만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전혀 가리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는 지위, 명분, 위상, 신앙, 거룩한 체통이 상관없습니다. 다 내버리고, 심지어는 민족주의도 내버리고,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전혀 고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대제사장이라면 명색이 유대민족의 대표자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유대나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하나뿐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있는 그 거룩한 종교 의식 그 하나뿐입니다. 그런고로 대제사장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유대민족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밉거나 곱거나 온 민족이 대제사장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로 추앙하고, 높이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희망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모습인데, 그런 대제사장이 오늘 와서 한 사람 로마총독 앞에서 이렇게 아첨을 해도 되는 것입니까? 얼마나 반민족주의적입니까? 식민지 총독에게 애국심, 민족애 다 내버리고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라니 이 무슨 한심스러운 소리입니까? 내심으로 볼 때에 대제사장과 로마총독은 원수지간입니다.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원수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에 와서는 이 같은 아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이 또 있습니다. 무릇 아첨에 깊은 악의가 들어 있습니다. 이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민족의 장래나 민족의 대망이나 자기를 향한 선망 같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이 옛날에 한국미술협회 발회식에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일본 고관들과 우리가 매국노라고 하는 이완용, 송병준 같은 사람들도 함께 이 식전에 참석했습니다. , 그런데 민족주의자 이상재 선생이 여기 참석 안 할 수가 없어서 참석을 하고 보니 일본 고관들도 있고, 특별히 이완용도 거기 있는 게 영 못마땅하거든요. 그러니 이상재 선생이 그냥 넘어갈 턱이 없습니다. "대감들"하고 이완용, 송병준 등을 보고 말합니다. "동경으로나 가시지 여기에는 왜 오셨습니까?" 매국노들이 그 말뜻을 얼른 못 알아듣고 "동경으로 가다니요?"하고 반문합니다. 이상재 선생이 다시 말합니다. "당신들은 망쳐버리는 일에 천재가 아니요? 당신들이 동경 가면 일본도 곁따라 망할 것이니 얼마나 좋소?" 일본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내 목숨 하나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항상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고----그것이 이상재 선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꼴은 무슨 꼴입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다지도 원수될 것도 아닌데 그 하나 없애고 싶어서 민족의식도 다 내버리는 순간입니다. 벨릭스는 지난 시간에 말씀한 바와 같이 악명 높은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어요. 노예 출신으로 로마총독에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이로써도 그가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한 자이며 얼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충성되게 보였으면 여기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어쨌든 그는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라든가 로마 역사가들까지도 이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잔인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요나단이 벨릭스의 폭정을 비난했다가 벨릭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목숨을 잃은 일도 있습니다. 유대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선배인 요나단을 해쳤던 그 벨릭 앞에 가서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합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생각에 매이기 시작하면 이렇듯 인사불성이 됩니다. 이렇게까지 타락하고, 이렇게까지 변질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아첨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첨이 결국은 반민족 행위가 된다는 것, 하나님 앞에 엄청난 범죄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울을 없애야겠다는 일념입니다. 그 옛날 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님을 해치려고 빌라도 앞에 서서 그랬습니다.

우리에게는 왕은 가이사 밖에는 없다고, 당신이 만일에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로마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래가면서 마치 자기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아첨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하고는 세 가지로 고소합니다.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괴수""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이런 식입니다.

우선 소요케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시끄럽다고 소요죄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을 지어서 염병이라고 했습니다. 염병이라고 하는 헬라말 '로이몬'은 영어로 페스트입니다. 흑사병이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흑사병 같은 것이다, 그런 전염병이다, 그런고로 이거 빨리 없애야지 그냥 놔뒀다가는 온 시민 다 죽는다, 로마시민 다 죽고, 유대사람 다 죽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소요를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이 사람 가는 곳은 으레 시끄럽다는 것이지요. 문제가 시끄러워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미 우리가 사도행전을 죽 공부해온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의 회당에 들어가서도 복음을 전했어요. 사실로 소요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일어난 이유를 가만히 보면 바울 때문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극렬주의적인 유대사람들 때문에 난 것이지, 유대사람 자기들 때문에 소요가 난 것이지 바울 때문에 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들이 문제를 일으켜놓고, 그 책임을 바울에게 돌립니다. 또 한 가지, 소요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긴 것이지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지요. 그 동안에 자기네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들에게 피해의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 사건, 은혜의 사건이 생긴 것일 뿐입니다. 생명적 사건이요, 소망적 사건이요, 축복된 사건이 생겼는데, 이것을 소요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회를 혼란케 하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염병이라고도 합니다. 왜요? 내게 손해가 오니까.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진리성은 아랑곳없습니다. 내게 오는 이익과 손해, 그것만 생각합니다. 옳으냐 그르냐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 가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내게 손해가 오면 안되고, 내게 이로우면 좋은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만 위주로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옳으냐 그르냐가 먼저 아닙니까? 사실이냐 아니냐가 먼저 아닙니까? 진리냐 거짓이냐가 먼저 아닙니까? 이런 것은 전혀 아랑곳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줍니다. 예수가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왜요? 성경은 재판의 결론에서 말씀합니다. 민란을 일으킬까 하여----라고. 시끄러운 것이 싫어요. 문제가 되는 게 싫어요. 무조건 조용한 게 좋아요. '그까짓 한 사람 죽여서 조용하다면 죽이는 게 좋지뭐'----이 생각입니다. 의인이냐 죄인이냐, 진리냐 거짓이냐----전혀 개의치 않아요. 다만 조용한 것만 좋아요.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왜요? 문제가 생기면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면 총독 자리에서 떠나야 돼요. 그런고로 그는 오직 한 가지, 민란이 없게 하기 위하여----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된 것입니다. 로마사람으로 볼 때, 로마의 총독으로 볼 때에는 그저 조용한 것이 제일 중요해요. 그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50절에 보면 가야바가 유명한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이 좋다고. 이것은 공리주의적 판단입니다. 진리도 신앙도 아랑곳없이 판단하는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그 한 사람이 의인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다만 죽어서 온 민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이 옳다----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오늘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시끄럽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소요가 일어납니다, 그런고로 죽여야 하겠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 여기 염병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역설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밉게 보아서 염병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이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 가루 속에 던져진 누룩과 같다고. 가루 속에 누룩이 조금만 들어가도 어느 사이에 좍 퍼져나가요. 전체를 누룩으로 만들어 나가요.

그와 같은 것이다, 복음은 누룩과 같다고 하심입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말하면 '복음은 염병과 같다'입니다. 그렇잖아요? 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쁜 말이지마는 이건 아주 좋은 말입니다. ? 반드시 변화하니까.

복음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하니까요. 변화 안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예수 믿고 달라지지 않았다면 문제 있는 것이지요. 성격도 달라지고, 세계관도 달라지고, 심지어는 건강도 달라지고, 인간관계도 달라집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요.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흔히 예수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 안 달라진 사람이 있지요. 그것은 제가 잘 알아봅니다. 어떻게 알아보는고 하니 예배시간, 바로 지금 보면 알아요. 보아하면 그런 사람은 꼭 남의 뒤에만 앉아요. 아무튼 목사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자리 다 놔두고 꼭 남의 등뒤에 턱 앉아서 얼굴을 피해 있어요. 제가 눈이 밝아서 다 보거든요. 저 뒤에까지. 자리 많은데 조금 옮겨 앉으면 안되나요? 좌우간 그 자리에 꼭 앉아 있습니다. 사람 얼굴 꼭 비켜 가지고 있어요. 이런 사람이 십 년 왔다갔다하면 뭘하겠어요? 말씀을 듣지 않으니 변화가 없을 수밖에. 말씀을 믿지 않으니 변화가 없을 수밖에.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니 변화가 없을 수밖에. 분명한 걸 아셔야 됩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나요. 안 일어날 수가 없어요. 염병이라니까요. 병균이 들어가면 병 걸리게, 열이 나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흑사병과 같다, 이 말입니다. 병은 변화를 일으켜요. transforming, revitalization----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명적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innovation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또 하나는 반드시 전파돼요. 여러분, 벙어리 교인은 있을 수 없어요. 옛날에 최권능 목사님이 버스를 타고 그 복잡한 데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어요. 마침 채필근 목사님이 그 버스에 앉아 있었어요. 최목사님은 채목사님이 앉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소리쳤어요. 최목사님이 채목사님한테도 배운 바 있는 터수이니 서로 얼굴을 모를 턱이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진 채목사님 왈 "최목사! 나야 나"----자기를 못 알아보고 그러는 줄 알았지요. 그랬더니 최목사님 한마디 더하십니다. "벙어리 교인이구만." 채필근 목사님이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해요. 바로 채필근 목사님이 쓴 글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했노라'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벙어리 교인은 없는 법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소금 먹은 녀석 물 안 먹겠나'----복음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은혜 받은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 즐거운데 어떻게 말 안 할 수가 있어요? 전에 보니 고아원에 있는 어떤 학생이 학교 갔다오는데 아, 이 녀석이 가방을 메고 오면서 종잇장 하나를 들고 흔들며 와요. 내가 아는 아이이기에 가까이 가서 ", 너 학교 갔다오냐? 뭘 그렇게 흔들고 오냐?"하고 물으면서 보니 성적표입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전부 ''입니다. 이 녀석이 이걸 자랑하고 싶은데 어디 자랑할 데 없어놓으니 그러고 다닌 것입니다. 내가 칭찬해주었더니 어떻게나 좋아하는지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받은 은혜를 어떻게 자랑 안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말을 안 할 수 있어요? 자꾸만 전파하게 마련입니다. 동시에 승리하게 마련입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깁니다. 비판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복음이 승리합니다. 복음이 이겨요. 조금 비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이제 북쪽 '수령님'이 갔으니 한마디합시다. 제가 평양 갔을 때에 그 사람들하고 얘기하면서 ", 그러지 말고 이제는 교회를 좀 세우세요. 교회가 평양에 둘밖에 없는데 이거가지고 되겠소? 인구가 얼만데요. 좀 많이 세우시오"하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데요"하기에 "내가 한 도시에 하나씩 세우도록 가령 거기에 천만 원 짜리 교회가 필요하다면 내가 일억 원을 보내겠소. 90퍼센트로는 다른데 쓰고, 10퍼센트로만 예배당을 지으면 될 거 아니요? 내가 모금을 할테니까 말이오. 또 물가도 싸지 않소? 아무튼 간에 그렇게 합시다. 어떻소?" 그랬더니 "그거 참 근사한 생각이오"하면서 그걸 글로 쓰라고 해요. 그래 글로 써서 줬어요. 그러나 실천되지 않았어요. 그 때에 얘기한 것이 또 있어요. ", 왜 교회를 두려워하는 거요? 당신네 공산주의가 강하다면서요?" 그들은 묘한 말을 해요. "우리가 이거 사십 년 동안 새빨갛게 교양을 해놓았습니다." 사실입니다. 다른 말 못 듣게 하고 공산주의 사상만 확실하게 듣도록 했어요. 그래서 모두가 다 공산당이 됐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공산주의로 꽉 찼어요. "그렇다면"하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만했으면 이제는 자신 있지 않겠소? 열어봐서 누가이기나 보지요, 복음하고." "이렇게 새빨갛게 교양을 해놓았는데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오면 안되지요"하기에 "그래요? 허허 참…… 당신들 사십 년 가르쳐 놓은 것,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와서 한 시간 얘기하고 무너진다고 한다면 공산주의에 문제 있는 것 아니오?" 어쨌든 기독교하고의 싸움은 이기기 어렵다고 토로합디다. 중국이 실패했습니다. 중국이 1950년에 통계를 냈어요. 교회 문을 닫을 때에 중국 전체의 기독교인이 삼백만이었어요. 그런데 40년 동안을 공산주의로 살았어요. 교회 없이. 그래 이제쯤은 상관없을 거라고, 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꽉 찼으니까 이제는 문 열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해서 안심하고 열었어요. '82년에 열고 보니 웬걸요. 육천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네가 그렇듯 강하게 했는데도 이미 복음은 보다 더 깊이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 이제 염병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겠지요? 이렇게 세요, 이게. 복음이 세다고요. 강해요. 생명력이 강해요. 공산주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교양을 해도 안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여러분, 이걸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합니다. 또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합니다. 이단-'하이레세오스'라는 말의 뜻은 파벌, 당파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당'이라고. 신약에 그리스도인을 나사렛 당이라고 호칭한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갈릴리사람들이라고 한 일은 있지마는 나사렛 당이라고 부른 일은 없었는데 여기서 그렇게 부릅니다. 저들은 이 당성(黨性)을 메시야니즘의 일부분으로 보려 했습니다. 메시야 운동이 많았거든요. 유대나라를 회복해 보고자한 것입니다. 구약적 예언의 맥락을 따라 유대나라를 회복하고자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것을 빌미로 저들은 바울의 그것을 정치적 운동, 메시야 운동의 하나라고 몰아붙이려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사건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굳이 그것을 정치적 사건으로 몰아붙여 고소함으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핍박을 할 때에는 꼭 그렇습니다. 단순한 신앙적 이유로만 핍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꼭 정치적이라는 구실을 붙여서 처벌하고 핍박했던 것이 기독교 박해사의 맥락입니다. 본문에는 맨 마지막에 성전을 더럽혔다고도 합니다. 바울이 성전 더럽힌 일없습니다. 유대사람들과 이방사람들 사이에 담이 있어요. 절대로 이방사람들 장소에서 유대사람 있는 곳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사람을 데리고 들어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덮어놓고 바울은 성전을 더럽혔다고 죄목을 만들어 고소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농부에게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하루는 변호사네 개가 이 농부네 개를 물어 죽였어요. 이 농부,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는 그 변호사한테 가서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미안하지만 우리 집 개가 당신네 개를 죽였습니다" 변호사는 노발대발합니다. "저런 몹쓸 개가 있나! 그럼 개 값을 물어줘야지. 삼만 원을 내놓으시오." 농부는 이 때다하고 "아차, 내가 말을 좀 실수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당신네 개가 우리 개를 물어 죽였습니다. 그러니 삼만 원을 주셔야겠습니다." 순간 변호사는 ", 그 미물 짐승들끼리 싸우다 죽었는데 그걸 가지고 뭘……"하고 말을 뒤집습니다. "아니지요. 분명히 당신 입으로 말했습니다. 개 값 삼만 원을 내놓으시오." 변호사는 꼼짝못하고 삼만 원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잘못된 재판, 이런 재판이 그냥 넘어갈 줄 알고 있지마는 재판하는 자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그가 이런 못된 말로 고소하고 있지마는 이것을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재판장 위에 재판장이 있습니다.

고소인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기네가 이렇게 음모를 꾸민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기네가 고소한다고 고소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사건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정말로 심은 대로 거두십니다. 그대로, 자기네가 한대로, 자기네가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면서도 이걸 몰랐습니다. 사람의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앞에 대항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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