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마태복음 24 : 29 - 36)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 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 본문 역시 앞장에 이어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산 아래의 예루살렘 도성을 내려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시골 바닷가 갈릴리를 고향으로 한 촌사람들인지라 1년에 몇 차례 육로를 걸어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보면 그저 놀랍고 감격스러우며, 또한 부럽기도 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처럼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노라면 예루살렘성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저들의 가슴을 부풀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어쩌면 예수님께서 저 예루살렘성을 왕도로 하여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일으키실 때에 우리도 예수님과 더불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요행과 청운의 꿈을 꾸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여러번 여러번 회개의 기회를 주었건만 계속 회개하지 않는 이 도성은 망하리라! 예수님께서는 40년 후이면 이 예루살렘성이 깨끗이 망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40년 후에 망한 이 예루살렘은 얼마나 철저하게 잔멸되었던지 멸망한지 100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거기에서 사람 100명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원자탄이 떨어진 것도 아니요 그 재가 남아 있으므로 위험해서 못 들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사람과 사람이 맞대어 찌르고 베고 하는 육박전일 뿐인데 아무튼 얼마나 철저하게 잔멸되었던지 100년이 지난 후에까지 사람 100명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로마 사람들이 중동을 다스리려 할 때 이스라엘나라를 두고는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려면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성이요, 하나님의 도성이요 하면서 흠모를 하고 순례를 하기 때문에 이 성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말씀 그대로 깨끗하게 그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다 쓸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멸망의 그 날을 내 보시면서 슬픈 마음을 가지신 채 역사의 끝, 곧 주의 날에 나타날 사건들을 예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미 앞장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역사의 끝인 '그 때'와 그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징조'와 그리고 세상의 끝과주님의 재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세 가지의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것은 직선적으로 또 어떤 것은 암시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큰 환난, 특별히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하시면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할"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예측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동서의 관계, 아니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이데올로기 싸움이라면 이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민족간의 싸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후의 전쟁은 국경이 문제시되는 싸움이 아니라 이 민족과 저 민족간의 싸움이 되리라는 것이 역사가들이 보는 견해요 전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쟁을 설명하시면서 두 가지의 양상으로 나누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가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나라가 나라"를 대항하여 싸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백만을 죽이는 사건을 두고 저들은 "민족이 민족을"이라는 이 말씀에 적용을 시켰던 것입니다. 분명 나라도 없이 다니는 백성들인지라 이는 나라와 나라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일 게르만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진멸 하려는 그러한 싸움이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민족이 민족을 대항하는 싸움이어서 이러한 일들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당시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씀이 응하는 것을 보니 지금이 세상 끝인가 보다"하는 생각을 했었다고도 합니다. 당시의 사태로 보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아무튼 앞으로 있을 전쟁은 국경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 있든지 간에 민족과 민족간의 싸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며, 환난이 있고 배교가 있으며, 도덕적인 타락과 사랑이 식어지는 비인간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게다가 종교적으로는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들을 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이만하면 끝이 된 것같이 보이는 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난의 시작이라!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보편적인 사건이더란 말입니다. 엄격히 따져 말하면 역사적으로 보아 이러한 때가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어느 한 시기인들 전쟁이 없었습니까? 또한 기근이 없었습니까? 재난이 없었습니까? 그리고 사랑이 식어지는 일이 어찌 오늘에만 나타나는 일이겠으며,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러한 사건들을 말씀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반복되는 사건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이 다시 있고 지난 사건이 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단들의 특징을 두고 생각해 보면 대개 세 가지의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 하나가 긴박한 위기설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재난이 있게 되던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양상을 볼 때이면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면서, 이런 일들이 있는 것을 보니 말세가 분명하며 따라서 이제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임박한 종말을 고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에는 시한부 종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날과 그 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이단들은 대체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하는 식의 이야기를 잘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자기를 메시야, 곧 재림 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 바의 메시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신데 저들이단들은 자기가 메시야요 이 말세에 보내진 유일한 심판자요 주인이 된다고 하는 것 등이 대부분의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다 지금이 말세인가보다 하는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지난 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제는 주님이 오시려나 보다하고 세상 끝이라고 하던 것이 다시 2차 대전의 발발을 보게되자, 또 다시 이제는 끝이다! 원자탄이 터지니 이제는 정말끝이다!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특별히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을 하게되었을 때에는 이에 관한 많은 유우머(humor)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잎이 푸르러면 재림하시리라 하셨는데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을 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끝이라 하여 한 동안 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전쟁이나 재난, 환난 등을 들추어 계속 위기를 고조해 나가면서 지금의 처지가 마지막인 것처럼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종말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합니다. 본문 29절 말씀에 보면 "이 날 환난 후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환난의 1막이 다 지나갔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난의 사건들이 반복되면서 말세가 된 것 같지만 말세가 아니요, 끝에 있는 것 같으나 아직도 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쟁과 기근, 환난이나 배교, 그리고 사랑의 식어짐과 부도덕한 일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계속 있어 왔던 일들로서 이 정도의 반복되는 사건 가지고 마지막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 환난 후에"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날 환난 후에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할 때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혼들리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결정적인 말씀으로 바꾸어 말하면 천지개벽이 있겠다는 것이요 하늘의 질서가 무너지겠다는 것입니다. 해라고 하면 적어도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태양계에 있어서는 중심이 되고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이 우리 인간은 해가 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해를 중심으로 춥고 덥고 하는 기온의 조화와 여름과 겨울이라는 각각 다른 계절의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름과 겨울이 갖는 태양과의 관계를 두고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을 해보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여름이란 간단히 말해 해가 바로 위에서 비취는 것이요, 이렇게 바로 위에서 비취던 해가 비스듬히 옆으로 비취면 겨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비취던 것이 조금만 그 각도가 기울어져도 추워서 죽겠다는 것인데 거기에서 좀 더 기울어지게 되면 아주 얼어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를 중심으로 각도만 조금 틀려도 죽느니 사느니 하는 처지이고 보면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4계절이 분명한 좋은 기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마는 어쩌다가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들을 여행할 때이면 이렇게 더워서야 어떻게 사는가 할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기후에 익숙지 못한 저로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을 것만 같은 기후요 온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의 모두는 태양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태양과의 거리나 각도에 관계된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태양이 있어서 모든 것의 균형을 잡아주며 거기로부터 주어지는 빛과 열에 의하여 우리의 생명을 받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태양이, 그 해가 어두워진다면 이것은 그 순간에 아주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구름이 해를 덮어 가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해 자체가 어두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달도 그 빛을 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햇빛을 받아 반사되는 것이 달빛이고 보면 참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또한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실로 굉장한 말씀이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히 말해온 전쟁과 재난, 환난이 있고 하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문제요 사건입니다. 해가 빛을 잃고 달이 빛을 잃으며 그리고 별들이 떨어지는 사건! 이것이 진정 마지막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혹은 나라 밖의 어려운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 쉽게 이제 말세인가 보다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그림자적인 작은 징조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계속 경고하는 의미의 징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은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주의 질서가 깨어지고 체질이 녹아지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10-12)에도 보면 주의 날에는 하늘이 풀어지고 체질이 녹아지리라는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기회에 천문학자들이 모여 강연을 하고 토론을 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많은 이야기 중 저에게 깊은 관심을 끌게 하여 두고 두고 생각하며 기억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블랙 홀(black hole)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범주가 물질계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물질계와 정신계가 하나로 만나지는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정신계는 무한하고 물질계는 유한하다는 도식적인 이야기는 잘못된 것으로 물질계도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아리며 몇억만개, 몇억만개하고 계속 이야기해 보아도 그 끝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지경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우주 공간의 저 편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도로 블랙 홀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 구멍이 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알 수 없는 구멍입니다. 이제 빙빙 돌고 있던 별이 그 가까이에 가기만 하면 홱 돌아서는 쑥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랙 홀이라는 것인데 그러고 나면 다시 나오지도 않거니와 도대체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주에 이와 같은 검은 구멍이 있다면 거기로부터 이어지는 그 다음은 어디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헤어질 때 웃으면서 주고받는 말이 "블랙 홀이 무엇입니까?"하고 누군가가 묻자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하고 대답을 하자 다른 한 사람이 농담겸 진담으로 하는 말이 "그게 지옥이지요"하고 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주의 질서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적고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주의 질서가 깨어져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니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의 나타나심은 누구나 다 알아 볼 수 있게, 믿는 자이건 믿지 않는 자이건 모두가 다 친히 알아 볼 수 있도록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자의 징조"라고 할 때의 이 "징조"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사실상 물을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내용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과는 비슷한 것이 없기 때문에 비유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는 역사의 마지막에 단 한번 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징조조차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일 것이며, 이러한 징조는 어느 곳의 누구이든지 충분히 알아 볼 수가 있을 것이니 혹시나 하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징조가 나타나게 되면 땅의 모든 족속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통곡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가서 아무리 통곡을 하여도 이미 때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롯 유다에게 계속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그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그 다음에야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때에 받은 돈을 제사장에게 되돌려주어도 소용이 없으며, 누구를 붙들고 그게 아니었노라고 아무리 하소연을 하여도 돌이켜질 길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목을 매달아 죽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예수를 믿을껄""그렇게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며 통곡을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땅의 족속들이 통곡을 할 것이라는 것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징조를 분명하게 보고 그리고 통곡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징조에 대하여 물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모든 족속이 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씀드리지마는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못 보았다거나, 혹은 어디에서 보았다는 등의 그런 소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때와 그 징조는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관한 한 아무리 내노라는 사람이 이제다 저제다 하며 무슨 말을하여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오시는 재림의 주님은 아기 예수로 베들레헴에 오신 것처럼, 그렇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온 인류가 동시에, 밝히 볼 수 있도록 구름을 타고 능력있게 큰 영광으로 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은 물론 어떤 이들은 이것조차도 비유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이 말씀까지도 상징이고 비유라고 한다면 실로 비유란 어디까지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이나,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 그리고 나팔소리나 천사까지도 비유라는 말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그거야 죽을 지경이 되면 해가 안보이니까 없는 것 같지 뭐!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으니 하늘이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어? 그저 노랗게 보이지"하면서 이 말씀에 대한 풀이를 정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이는 다 헛된 소리이며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전후를 관계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쟁이 있을 것이다! 재난이 있을 것이다! 지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다! 그리고 진짜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단계적으로 말씀하시는 의도가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단계적인 말씀을 결정적으로 결론짓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앞에 주신말씀의 장면을 정리해보면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모아서, 다시 말하면 한 편에서는 믿지 않았던 자들의 통곡이 있는가 하면 이제 믿는 자들은 다 함께 모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굉장한 우주적인 종말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마지막 심판을 말씀하심입니다. 최후의 심판!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떤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라고 하는 윤회같은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어디까지나 직선적입니다. 성서는 창조가 있고 끝이 있는 직선적 역사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끝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비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끝은 단 한번뿐인 사건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에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사건은 예언적인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구약성서 이사야 13:9-13, 34:8-10, 에스겔 32:7-8, 시편 18:7-15 등 이 외에도 주의 날에 있을 무서운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든지 예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여기에서 성취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언의 성취로서의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한편으로는 심판을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믿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통치자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시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할 때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인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조그마한 푸른 잎이 돋기 시작하면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타난 현상이 그렇다면 모름지기 잎이 커지면서 열매를 맺는 그 때까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는 잎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면 자랄 것이요 자랐으면 나무에는 열매가 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서 파릇파릇 잎을 내기 시작하면 벌써 여름이 가까웠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최후의 사건! 그 징조를 아는 길은 그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은 사건들이 계속 나타날 때 이것을 징조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중한 병에 걸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만히 보면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방탕하기도 하고 거짓되기도 하다가 어쩌다가 한번 어려운 병에 걸리게 되면 거기로부터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병 중에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과 의식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맛보는 순간 바로 내 앞에 있는 죽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연습이요 그 징조입니다. 병은 계속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도 앓고 머리도 아픕니다. 그저 조금 심하게 앓거나 가볍게 앓는 차이일 뿐 이렇게 앓아 누울 때마다 이러한 사건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앓다가는 낫고 앓다가는 낫고 하다보니 또 낫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갖습니다마는 그래서 또 낫는 것은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 길로 아주 가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무화과나무의 잎이 조그마하게 돋아났으면 그 잎이 크게 자랄 것은 물론 새로운 가지들이 생기기도 하고 그리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작은 사건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을 때에 이 사건을 통하여 저 앞에 있는 궁극적 사건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자주 일어나고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있는 전쟁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저 맨 끝인, 종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참혹한 기근과 지진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럴 때이면 기근이, 혹은 지진이 또 일어났나 보다 하면서 몇 사람 아니면 몇천, 몇 만명 죽고 말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잎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언젠가 그 날에는 세상을 끝내는 그러한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작은 사건을 통하여 큰 사건을 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반복되고 있는 사건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의 질병이 아프고 낫고 또 아프고 하다가 언젠가는 아주 끝이 나고 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제도 제가 서울대학 병원에 들려 의사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사람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의사로서 환자들을 고치느라고 많은 애를 씁니다마는, 그 수고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하나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면 별 볼일 없는 일이 아닙니까? 결국은 기껏 고쳐보았댓자 뺑 돌아와 영안실에서 끝날 것을…, 문제는 다만 며칠을 있다가 오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는 중 국경을 지나게 되어 검문 수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이것저것을 살피며 만져 보고는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왜 그러세요"라고 하였더니 수색하는 사람이 있다가 "걱정하지 마세요, 물건은 빼앗지 않습니다. 그저 무기만 있나없나를 보는 것입니다"하고서는 검색을 하고 난후 "이제는 가보세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였던지라 검사관에게 하는 말이 "나 오늘 좋은것 배웠습니다. 당신네 나라에 들어가는데 지금 나를 검색 하셨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물건들 하나도 다치지 않고 다만 무기만 찾는다고 하였는데 훗날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에도 다른 것은 다치지 아니하고 내 마음 속, 내 생활 속에 있었던 분노 증오, 거짓과 위선 등, 이러한 죄만 수색하고 나를 통과시킬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노라면 무기와 같은 것, 즉 내가 숨기고 있지만 남을 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해하는 그러한 것들은 검색을 당할 것이란 말입니다. 만약 앞서 이야기한 이 사람에게서 무기가 하나 발견되었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나라에 못 들어감은 물론 가진바 모든 것은 몰수되고 그는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무기만 없으면 조금 괴롭기는 하지만 다 뒤져본 다음에는 "미안합니다"하고서는 보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이 일을 경험하면서 "나는 최종 심판에 대한 생각을 하며 은혜 많이 받고 갑니다. 덕분에 고맙습니다."하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반복되는 사건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는 합니다. 그래서는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도 늘 그럴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에도 분명 끝이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나오거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리고 35절에서 매우 강하게 결론지어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반드시 이루겠고 이루어질 것이며 그리고 인자의 날이 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쓰신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칭에는 '예수'를 비롯하여 '메시야''그리스도' '주' 등 많은 지칭들이 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자신에 대한 지칭은 '인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야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마는 예수님 스스로는 "나는 메시야다" 혹은 "그리스도다"라고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에 그런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 뜻을 알아듣던 못 알아들던 간에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식한 사람인 대제사장은 이 '인자'라는 말을 알아듣는 편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 보면 정치가인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반면에 종교가인 대제사장 가야바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상관치 않으시고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 : 64)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며 분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대제사장은 무엇을 좀 알아보는 처지입니다마는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는 곧 심판주를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지칭으로서는 이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이 인자의 징조를 보리라는 것입니다. 인자의 징조란 희미한 것이 아니요, 알고 모르고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정 인자의 징조가 나타나는 그때에는 그것으로 이 세상도 역사도 끝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통곡이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자들에게는 기쁨의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징조는 무엇인가 할 때에 그것이 바로 무화과나무의 징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이제 조그마하게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반복되는 사건들을 보면서 저 끝에 있는 마지막 순간을 내다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해야 하는 지혜는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는데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뜻(사도행전 19:1~7) (0) | 2024.03.18 |
---|---|
그 새끼를 모으는 암탉 /마태복음 23 : 29 - 39 (0) | 2024.03.18 |
나와 함께 모으는 자(마태복음 12장 30절) (0) | 2024.03.18 |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28-44) (0) | 2024.03.18 |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29절~34절) (0) | 2024.03.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