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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와 엉겅퀴(마태복음 7 : 16 - 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은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오늘 주신 말씀 역시 앞장에 이어 산상 보훈의 부록이라 하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도 언제나 거짓 선지자가 함께 있어 우리의 마음을 현혹시킨다는 입장에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하라"는 내용의 "양과 이리"를 비유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시는 본 비유에서는 그 색채를 조금 달리하여 나무와 그 열매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의도는 앞서 경고하신 바의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시고자 함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으로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얼굴에 거짓이라 쓴 것도 아니요, 가슴에 이름표를 붙인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문제를 내용으로 하여 이제 거짓 선지자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부득불 그 열매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전제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양상과 그 성격을 살펴보면 먼저는 그 종자와 뿌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출발점부터, 근원적으로 그 뿌리가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린 후 마지막에 가서 보면 거짓 선지자는 그 결과가 또한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거짓 선지자는 종자도 다르고 뿌리도 다르고 그 열매도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비슷하여 현혹되기 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줄기라는 것입니다. 이 줄기는 뿌리와 열매 사이에서 잠깐 자라는 동안의 것으로 이 과정에서는 어떤 면에서 비슷한 데가 있고 그 때문에 현혹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논에 심은 벼와 그 사이에 끼여든 돌피가 종자나 뿌리, 그리고 그 열매도 다르지만 자라는 동안의 줄기는 비슷하고 게다가 오히려 더 충실하게 잘 자란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아리송함이 있고, 구분하기 힘든 점이 있으나 사실은 뿌리와 열매, 처음과 마지막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그러노라면 마침내는 알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에서만도 수차에 걸쳐 이상한 이단 교파들에 의한 그러한 현상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박태선"이다, "신앙촌 운동"이다, 혹은 "통일교"다 하면서 기독교의 이름을 빌어서 굉장하게 나타났는데, 그 뿌리가 이미 다른 것이어서 조금 기다려 보노라니 그 마지막도 다르더란 말입니다. 소위 박태선 장로교에서는 십자가까지 내려놓고는 이상한 비둘기 한 마리를 올려놓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던 것도 집어치웠지요, 그런가 하면 통일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기독교라 자처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교주 문 선명 내외를 뜻하는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가장 진실한 기독교 운동으로 시작을 하고 특별한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마지막에 가서 보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며 그 결과를 두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를 못하고 오히려 그 이상한 것에 현혹이 되어서는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비참해지고 마는 그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지금 서울에도 박태선 교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 수치심 때문에 차마 일반 교회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실제적인 모임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것을 알면 더더욱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역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조금은 기다려야 하고, 그렇게 잠깐만 기다리노라면 그 본색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너무 서두르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그 열매라는 것은 곧 행위를 말하는 것이며 그 본 목적, 본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종자와 열매는 같은 것이요, 동질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매가 맺혀진 것을 보면서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몰랐었지만 본래는 그랬던 것을 거짓 선지자이기에 잘 꾸며서 가장 성실한 복음의 사도인 것처럼, 진실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위장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그 열매가 본색을 알려줄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는 매우 실제적인 말씀이요, 평범하면서도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마찬가지로 또한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며 누누이 설명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말씀은 "맺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절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선한 나무에서 악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며 결코 열매를 바꾸어 맺을 수는 없다는 그 불가능성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를 보아 그 나무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가장 분명한 것이요, 그에 따른 평가에는 더 다른 의심의 여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열매가 맺혔다면 그 열매대로 그 나무를 평가하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고 특별히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고 하신 그 강한 표현을 우리가 잘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제 썩은 나무에서는 썩은 열매밖에는 맺을 수가 없고, 병든 나무에서는 병든 열매밖에는 맺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말하는 나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교훈과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나타나기 이전, 그 속 깊이에 들어 있는 뜻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속마음에 불순한 사상이 흐르고 있으면 불순한 말, 불순한 행위가 나오는 것이요, 따라서 불순한 행위가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그 생각 속에 무엇인가 불순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훈이 들어가면 거짓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는 사상과 교훈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에 갈라디아서 6장 7절 이하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만약에 어떤 열매를 거두워 놓고서도 그것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세상에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번은 이화대학 부속병원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돈 많은 집 외동 며느리가 아들을 낳게 되자 그 축하 분위기가 대단하더랍니다. 마치 무슨 왕자라도 태어난 것처럼 화환이 오는가 하면 선물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참으로 굉장했는데, 그 후에 아이의 혈액형을 조사해 보니 그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낳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일을 보고 계시던 전도사님이 조용한 시간에 찾아가서는 "당신은 이 어린아이에 대하여 이러이러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하고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 산모는 생사람 잡는다 며 펄펄 뛰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이 전도사님은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나와도 이것이 사실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이 아이가 자기 혈액형을 알게 될 것이고, 어머니 아버지의 혈액형도 알게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나는 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여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니 그런 줄이나 알고 대비하라고 하였더니 그제서야 할 수 없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결혼한 얼마 후에 옛날 애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서 애기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변명의 말이 있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눈앞에 낳아 놓았으니 그것이야말로 사실이지 어떻게 그 열매를 보고도 아니라고 할거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 "아니라"라 하는 것에 문제가 많아서 "실패는 사생아다" 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따름이지 처음부터 사생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은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구인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자그마치 1/5이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섯 중에 하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 소리를 못하고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부정해졌고 우리는 또한 이러한 세상에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 아버지가 없는 것이겠습니까? 분명 그런 것은 아닌데도 하도 복잡하게 살다 보니 모르는 것이에요.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실패했다는 것인데, 이는 일이 잘될 때에는 자신을 밝히며 내가 공로자라고 나서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저마다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제는 별수 없이 사생아지요. 이처럼 실패한 일에는 저마다 아니라며 주인이 없으니 사생아란 말입니다.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아무튼 이것은 나 때문이라며 원인자가 나서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만이 시정이 가능하고 같은 실수의 반복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 잘못이 아니랍니다.
그러면서 쉽게 하는 말이 다 팔자탓이라고 합니다만 반드시 그 원인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인정하고 찾아내어 시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의 큰 실수를 하게 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어디엔가 분명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뼈를 깎는 아픔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며 그 원인의 사실성만은 시인하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의 교만 때문이요! 나의 허영 때문이며!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불같은 나의 욕심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분명히 뿌리가 있음에도 이것을 부정하려고 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른 것으로는 "맺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에 주신 말씀을 보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만약, 나무는 좋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나쁜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이제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나쁜 나무라고 인정을 해버려야 될 터인데 이것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것입니까? 아니면 이것도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까? 우리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그 원인을 깨끗이 시인하는 그러한 겸손과 진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 : 7). 우리가 선한 씨를 뿌렸는데도 아직 열매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조금만 더 기다려 보노라면 반드시 그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의 말씀 중에서 참으로 매우 깊이 생각하여야 할 요점은 나무됨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종자의 문제요, 뿌리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령 여기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나쁜 나무라면 그것은 나쁜 종자에서 싹을 낸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햇빛을 받고, 물기를 빨아들이며, 또한 다른 나무들처럼 거름을 주고 잘 가꾼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나쁜 열매만 더 많이 맺게 할 뿐 나쁜 나무 그 자체가 변화되거나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환경을 탓하거나 방법이 나빴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습니다만 실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것은 종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개꼬리 3년 두어도 황모가 못된다는 속담이 있지를 않습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근본이 못된 것을 두고는 아무리 가꾸어도 소용이 없으며 이러한 때에는 교육학도 무색할 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특별히 기독교 교육은 일반 교육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교육에서는 좋은 환경을 마련하여 잘만 이끌어 주면 기대하는 바의 변화가 오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마는 기독교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근본 뿌리의 문제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으로 친절하게 하였어도 악한 것은 본래대로 악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진정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던가를 말입니다. 원체 못된 녀석은 아무리 좋은 것으로 잘 해주어도 끝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친절하게 잘 해준다고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제 잘 해준다는 것이 좋은 것에 더 좋아지게 할 수는 있겠으나 나쁜 것이 좋아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결코 환경으로 사람을 바꿀 수가 없어요. 이제 똑같은 환경에서 평등한 물질 관계를 이루게 되면 사람의 인격이나 생각도 평등해질 것이라는 것이 공산주의 유물사관입니다마는 어디 그것이 그렇게 되어지더냐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인간은 결코 환경의 동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길은 오직 하나, 그 종자를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을 하지 않는 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되는 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 올 수도 있고, 때로는 교양 삼아 드나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 가지고 되더냐는 말입니다. 친구를 위해 주니 되던가요? 혹은 명설교를 들었다고 돌아오던가요? 그가 누구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언젠가 한번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부딪쳐 만나지는 그런 관계가 있고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 하면, 이것은 뿌리의 문제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끝까지 가라지일 뿐 잘 가꾸었다고 하여 알곡이 되는 것도 아니요, 알곡 역시 가라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종자는 결코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뿌려지는 씨앗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예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생명이 들어가지 않고 여타의 인간 교양이나 수양을 가지고는 절대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사람은 듣는 대로 변하고 보는 대로 달라진다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속 깊은 곳에 있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 밭의 한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뿌려져야 하고 중생의 뿌리가 내려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거기에 진정한 출생이 있고 영원한 생명의 탄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심으로 자연히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갈 5:22-23)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은 내 임의로 맺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경험을 두고 보아도 당연히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여도 사랑해지지 않아서 더욱 괴로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받음으로 내 마음에 사랑의 씨앗이 심겨지고, 그 씨앗이 사랑의 생명으로 작용하게 될 때에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랑의 맹세를 거듭하여도 원하는 바 그 사랑은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꼭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임의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들이 사랑한다고 지금 시작은 하였지만 이 사랑이 당신들의 힘에 의해서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말 것이며 오직 사랑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하고 거기에서 맺혀지는 사랑의 열매를 서로 나눌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는 분명 내 마음대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를 않습니까?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악한 나무에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악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그거야 장삿속이지 어떻게 참 사랑이라 하겠습니까? 이제 목숨걸고 사랑한다며 몇백 번을 외워 보아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사실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그런 사랑이라야 진짜 사랑인 것이지 이 세상 사랑이라는 것은 가만히 보면 참으로 멀쩡하기만 합니다. 그러기에 "직장 생활도 시원찮고 나이만 먹어 가는데 에이 시집이나 갈까!"하는 처녀의 넉두리를 들을 수가 있고, 또한 남자들도 결혼 생활이 불편하다고 야단입니다. 언젠가 한번 참으로 못된 대화의 내용을 글에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대화의 내용인 즉 저 사람 만나서 사니까 너무 불편하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택시 타다가 자가용 사야겠구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러고도 사랑한다고 하니 이게 무슨 사랑이며 여기에서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이런 식으로 만나서 결혼이라고 하니 전부가 멀쩡한 짓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니 그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는 티격태격하다가 증오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생명의 변화를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는 역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이에 에베소서 2장 3-5절 말씀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억할 말씀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의해 중생 함으로 비로소 오늘의 나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 역사는 결코 지식이나 교양,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생명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위로부터 다시 출생하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짐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17절에서 "또 한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진노의 자녀인 돌감람나무가 생명의 접붙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인 참감람나무가 되었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명 자체로, 씨앗을 받듯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양이나 수양적인 차원에서 내 인격에 어떤 더함을 위해서 듣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밭에 뿌려져야 할 생명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제는 그 말씀이 중생할 능력이 되고, 성화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며, 100%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친히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감정이나 의지와 지식도 다스리게 될 때에 이제는 말씀이 지배하는 왕국으로 그러한 인격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직 말씀 속에서 출생하고 말씀으로 성장하며 말씀에 의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는 선해 보겠다 스스로 노력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으로는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남기면서 결심을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하여 성령의 은사를 힘입게 되면 어느 사이에 더러운 행위는 버리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 나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이요, 생명이며 또한 윤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책을 대할 때에 일반 세상 서적을 보듯이 그렇게 대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와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고 그리고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온전히 나를 주관토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더 걱정할 것 없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말씀의 열매입니다. 이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 말씀의 결론으로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으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고, 좋은 나무가 되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원로 한 경직 목사님께서 후배 목회자에게 항상 일러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세요, 그러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맺혀질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억지로 열매를 맺겠다고 애를 쓰는데 그럴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저 좋은 나무만 되세요. 그렇게 되면 좋은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어느 시간에 주렁주렁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이제 말씀의 씨앗이 생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 모든 은사가 합쳐져서 유효하게 될 것이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그 깊은 뜻을 생각하시면서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은혜와 더불어 그 말씀의 열매로 살아가는 위로부터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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