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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비유(마태복음 16 : 5 - 12)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리라.」
우리는 이미 마태 복음 13장 33절에서 누룩에 대한 비유를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말씀하신 누룩은 복음을 뜻하는 것으로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밀가루 속에 들어가 그 전부를 부풀게 하는 것과 같이 복음이 전파된다는 의미의 비유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 누룩은 똑같은 누룩이기는 하지마는 그 내용이나 의도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이 누룩이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뜻으로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누룩이라는 용어 자체는 같은 것이지마는 그 내용은 정반대의 것이며 그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장면이 있기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무리들이 배고파할 때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가지고 여자와 아이 외에 4천 명을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에 차도록 남았던 기사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호수 이편 마가단 지경에서 맞은 편으로 건너가면 거기는 이방인의 땅이 되는데 그리로 향하시는 배 안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어쩐지 시장기가 있지 않았나 하는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아무튼 그런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로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하여야 할 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완전히 동문서답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주의하라 하실 때에 분명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시라며 저들의 교훈을 삼가 주의하라고 하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앞뒤를 생각할 것도 없이 "누룩"하니까 그저 "떡"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떡을 상기하게 되자 떡이 없으므로 인해 서로 시비가 벌어지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다 듣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고 이제 말씀하신 누룩은 우리가 먹는 빵에 넣는 그런 누룩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였음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 알고 넘어갈 것은 이 제자들이 누룩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왜 곧장 빵을 생각해 내었느냐는 것으로 그 이유는 저들이 끼니때마다 먹는 빵이 바로 이 누룩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1년 중 유월절에 한 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 외에는 언제나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빵을 구워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누룩"할 때에 "빵"하고 생각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반응은 조금도 무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룩"하실 때에 빵을 생각하면서 또 한 가지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규례에 엄격하게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만든 빵 외에는 먹지 않으려고 듭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는 나누어 먹기도 하고 사서 먹기도 하지마는 특별히 이방 사람들이 만든 빵은 먹지 않는단 말입니다. 일반적인 생활 필수품은 서로 사고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먹는 음식에 관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의 음식은 안 먹으려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배를 타고 가서 도착할 곳이 이방 사람의 땅이고 보면 응당 빵을 준비했어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깜빡하고 준비를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 하시는 이 시간에 와서 "아이구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하며 사실은 이것 때문에 서로 시비가 벌어진 셈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모름지기 가롯 유다를 향해 "네가 회계가 되어 가지고 왜 제때에 준비를 안 했느냐?"며 책망을 했을지도 모르겠고, 이 말에 기분이 상한 가롯 유다 또한 "당신이 수제자로서 왜 제때에 챙기지 않았느냐?"며 한 마디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빵이 없는 것으로 인해 제자들 간에 서로 시비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자기들의 빵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여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요즈음에 와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엄격히 자기네의 빵을 먹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베이겔(Bagel)이라는 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특유의 빵입니다. 이 빵의 특징으로는 크게 자랑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밀가루의 어느 한 부분, 즉 말하자면 강력분, 중력분 하는 식의 어느 한 부분의 가루를 골라서 만든 것이 아니라 마구 갈아진 밀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양을 고루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베이겔 빵의 특징으로는 방부제를 전혀 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밤중에 만들어서 아침에 배달을 하는데 오전 11시만 되면 굳어져서 제 맛을 잃게 되고 오후에는 아주 딱딱하게 굳어져 억지로나 먹지 맛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시간 후에는 아예 먹을 수 없는 그때 그때의 신선한 빵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이 빵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 많은 외국인들까지도 즐겨 애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 경영하는 빵집을 보면 무슨 빵집이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아도 베이겔이라는 글자는 크게 써 붙인 것을 보게 됩니다. 저들의 이 빵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한번은 비행기 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이 1등석에 앉아서는 빵을 청하면서 베이겔을 달라고 하자 스튜어디스(stewardess)가 베이겔이 무엇이냐며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이스라엘 사람이 "그래 그 유명한 베이겔도 모르느냐?"며 어떻게 나무라든지 결국은 매니저(manager)까지 나와서 사과를 하며 빌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어쨌든 이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네가 먹는 음식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며 어디를 가나 이것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2천여년 전부터도 자기네가 먹는 음식은 가지고 다녔으며 가능한 한 이방 사람들의 상점에서는 그들이 먹는 음식을 사먹지 않는 것으로 고집스러운 자기네 규례를 지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이 배 안에는 빵이 없으니 저 건너편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는 그러면 무엇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충분히 문제가 될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저 "누룩"하니까 "옳지! 빵이 없지 않느냐?"며 이 빵에만 연연하여 그것만 생각하느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 같은 것은 이해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준비하지 못한 것, 소위 말하는 콤플렉스에 매여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의 성격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를 보시는 예수님께서 너무도 답답하여 하시는 말씀이 9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그리고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은 "어찌 내가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누룩을 말하든, 떡을 말하든, 포도를 말하든, 그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내가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는 알아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적어도 이 성경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들의 그 주제가 어디에 있다는 것쯤은 알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그 동기가 먹고 마시는 데에 있고 내 소원 성취, 그것도 물질적인 것에 있다고 한다면 그게 언제 철이 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찌 내가 한 말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아주 직선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물질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마치 개가 코를 땅에다 대고 냄새를 맡으며 어디까지나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독수리가 아무리 높이 날으는 것 같아도 그 눈은 언제나 아래를 보면서 썩어진 몸뚱이만 찾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날으는 독수리가 위를 보고 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보는 것은 땅이요, 그것도 썩은 것을 찾아 살피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이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만약 우리의 신앙 생활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결국은 이렇게 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분명히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그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요, 신령한 것이며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예수님과의 대화가 되고 성경을 이해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질 중심, 육체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신령한 생활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참으로 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다시 한번 사람의 생각을 두고 정리를 해본다면은 모든 것을 물질에서 물질로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물질적이어서 시작도 물질이요, 마지막도 물질, 그저 전부를 물질로만 생각하는 그러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신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물질 생각만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의 문제입니다.
신령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 항상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며칠 전에 죽은 염소 새끼가 생각나서 울었다는 할머니!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은혜를 받아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지르는 것을 보니 염소가 죽을 때에 내던 소리와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었다고 하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이 진정 어디에 가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신령한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생각은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세상적인 것에 가 있어 심지어 처음 교회에 나오시는 어떤 분은 저에게 "목사님 하시는 말씀 가운데 좋은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것 그대로 하면 돈 벌겠던데요"하는 그런 이야기까지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령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물질적인 것으로 돌려버리는 생각! 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리고 이제 또 하나는 물질을 보면서 신령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새를 보면서도 하나님이 먹이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금을 볼 때마다 정말 소금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며 옷을 입으면서도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계를 보면서도 항상 신령한 것을 생각해 내는 그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물질을 항상 비유로, 상징으로 보는 영적인 안목을 지닌 그러한 사람이 날마다 향상되는 신령한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만나지는 그 모든 것, 우리의 사는 모습의 전부가 다 신령한 세계를 말해 주는 훌륭한 교훈들이예요. 언젠가 한번 버스를 타고 가는데 잠시 후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곁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 앉으라고 권유를 합니다. 이제 한 사람이 "앉으세요"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나는 곧 내릴 텐데요 뭐" 하면서 앉으시라고 권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또 "나는 좀 멀리 갈 터이니 댁에서 앉았다가 내린 다음에 앉지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곧 내릴 터이니 앉아서 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곧 내릴 터이니 서서 가야 합니까? 생각해 보면 인생사는 게 다 그런 것이예요.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상징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에서 신령한 진리를 듣고 볼 줄 아는 영적인 감각과 영적인 생활이 요구됩니다. 요한 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여인은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며 전혀 다른 차원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답답한 여자와 이야기를 하시거나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절대로 내 말의 주제는 아니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수님 앞에서는 떡 문제에 관한한 이야기하지 말 것입니다. 이에 가능한 한 우리의 기도 제목에서도 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다. 더 잘 살게, 더 오래, 더 건강하기를 원합니다마는 글세 건강해야 좋을지 병이 들어야 좋을지도 잘 알 수가 없으니 적어도 예수님 앞에서 물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애써 기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으로 깊이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찌 내가 한 말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 신령한 세계에 관하여, 영원한 가치의 것을 말씀해 오셨고 이 시간도 그 내용의 말씀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직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답답한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곧 교훈을 일컬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누룩은 발효되는 것이요, 섞이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썩어 부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누룩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적은 것으로부터 전체에 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양의 밀가루 속에 조그마한 누룩 한 조각을 집어넣어도 어느 사이에 쫙 퍼져서는 전체가 다 부풀어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두 번째는 조용히 퍼진다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 특징은 결국은 전체를 이물질화(異物質化)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누룩이 밀가루를 누룩으로 다 변화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악한 교훈을 누룩으로 지칭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나쁜 교훈이 누룩과 같은 것이어서 적은 것이 하나 어느 기회에 퍼지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어느 사이에 전체에 퍼져서는 모두가 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의 사상으로 화해 버리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이 악한 영향력이 그렇게 쉽고도 빨리 번져 나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주의하라! 깨어 살피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쁜 일, 나쁜 습관은 배우려 하지 않아도 쉽게 배우게 되지만 좋은 뜻, 좋은 습관은 의지적으로 애를 써도 잘 배워지거나 익혀지지를 않습니다. 이는 마치 알곡은 열심히 가꾸어도 잘 자라지 않는데 비해 잡초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지만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은 악한 동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서도 겉은 아름답고 근사합니다. 그러나 누룩처럼 전체를 부풀게 하고 마지막에는 모두를 썩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 대하여서는 바로 앞장에서 그 특성과 차이를 잠깐 말씀드린 바 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여기에서는 그들이 끼치는 악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저들이 끼치는 영향은 첫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준수하고 그 규례를 철저히, 참으로 특별하게 지킵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구별되어 지킨다하여 그 명칭도 바리새인, 곧, 구별한다, 분리한다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과 아주 구별되어서 특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잘 지킨다고 하여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외식적으로 지키게 되고 외적 성결에 치중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에 마태 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를 비난하시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여러 모양의 내용들을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시는가 하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하얗게 잘 장식해 놓았는데 그 안의 죽은 것, 썩은 것, 온갖 더러운 것이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의 것부터 먼저 정결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겉만 깨끗이 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들은 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도 하지 마라, 무엇도 하지 마라 하여 하지 않는다고 하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율법을 지키고 또한 이런 면에서 저들은 매우 능숙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음 두 번째 영향은 공로주의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으로 스스로 자기 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규례를 만들어 지켜 놓고는 그것을 지켰다며 교만해 하면서 못 지킨 사람을 정죄하고 업수이 여기고 있으니 이것처럼 잘못된 게 없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외적인 규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킨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교만해 하면서 못 지키는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주의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목사님께서 주일에 갑작스레 어느 교인 가정을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아주 좋은 수박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생각에는 갑작스레 간 심방이고 하여 미리 준비했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안식일을 범하고 수박을 사온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께서 "주일날 이런 걸 어디서 마련하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심방 받는 교인의 대답이 "옆집에서 외상으로 가져왔습니다. 내일 돈 갔다주기로 하고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외식주의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주일을 깨끗이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며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까? 우리에게 이런 경우가 많음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일을 지켜야겠으니 수고는 당신이 좀 해 달라는 식의 사고 방식이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냐 말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자가용에 운전 기사 두신 분은 웬만하면 주일에는 그분들께 운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들이 말 많이 합니다. 속으로 욕하고 있어요. 자기들은 거룩하게 주일 지키겠다고 교회에 나가면서 우리는 일요일까지 하루 종일 일시킨다고 말입니다. 기사 분들 중에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은 그나마 괜찮겠습니다마는 그렇지 않고 밖에서 서성거리는 기사 분들은 욕 많이 합니다. 그 욕 다 잡수시고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무튼 주일 하루만은 차가 없거니 생각하시고 택시를 타시든 걸으시든 그것은 알아서 하시되 기사 분들께 일시키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는 교회에 가서 거룩하게 찬송하겠다면서 도대체 누구를 일시키겠다는 것입니까? 그래 가지고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내적인 경건, 적극적인 경건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외적인 것에 마음을 쏟는 그런 것은 언제나 주의해야 할 악의 요소임을 기억하고 삼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영향은 저들의 세속주의입니다. 저들은 부자요, 귀족, 특별히 종교적인 귀족입니다. 그리고 정치에 가담하여 문제를 현세적으로 처리하려 듭니다. 부와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겨 부하면 의인이요, 가난하면 죄인으로 보는 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소위 말하는 기복사상입니다. 오늘 우리도 은연중에 기도하며 애쓴 가운데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반면에 사업이 잘 안 되고 병이 들고 하면 이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는 그것이 바로 사두개인들이 준 누룩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종교를 통한 물질적인 부를 생각하면서 한 계단 더 나아가서는 환경, 즉 구조나 제도를 먼저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요, 세속적인 이야기입니다. 물질적 번영이 먼저요, 구조나 제도가 우선적이라는 생각!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생각은 오늘도 있습니다마는 그게 바로 사두개주의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중생이 먼저요, 복음이 먼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으로 그 깊은 뜻의 말씀을 "누룩을 조심하라"는 짧은 한 마디로 전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간단하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외식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기복사상이 통하고 있습니다. 그 교훈, 그 사상이 조용히 영향을 끼치며 복음을 변질시키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이제 우리는 신령한 것에 대한 관심을 넓혀 가십니다. 더는 외식주의에 빠지거나 기복사상에 도취되지 말고, 또한 사회의 구조나 환경을 개혁함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그런 세속적 방법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다. 더디고 답답하게 보여도 역시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 속 사람이 중생함으로써만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한 사람이 먼저 구원받음으로 그 가정, 그 직장이 구원을 받게 되고, 그 가정, 그 직장이 구원을 받음으로 그 사회, 그 국가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구조적으로, 세속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보고 그 다음에야 진리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란 말입니다. 정치적인 제도를 먼저 생각하지 마십시다. 특별히 요즈음에 와서는 개헌 문제를 놓고 헌법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것 다 좋아요.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도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바로 되어야지요. 어떤 인간이 하든 그 제도가 문제란 말입니까? 그 인간 됨이 먼저 바르게 변화되기 전에 제도 몇 번 바꾼다고 이게 되었더냔 말입니다.
우리에겐 더딘 것 같아도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이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복음을 전하시며 구원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한 심령 한 심령에게 복음을 권하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중에 먼 훗날에 완성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너희는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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