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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원리의 비유(갈라디아서 6:7-9)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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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원리의 비유(갈라디아서 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진리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일 것입니다. 그 때문에 비록 농사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진리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불변하는 자연의 법칙이요, 가장 명확하면서도 완전한 원리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계의 현상이 영적인 세계에 가르쳐 주는 교훈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계의 법칙인심은 대로 거두어지는 이치를 보면서 비로소 원인을 생각하고 결과를 생각하는 소위 인과율에 관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과를 보면서 원인을 규명하고 또한 원인을 보면서 그 결과를 미리 내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생각하기를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이 간단한 이치 앞에 모든 사람들이 겸손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살기 어려운 소란한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과율 앞에 억지를 부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농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겸손합니다. 왜냐하면 농사는 진실해야 하고 자연 앞에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것이 농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었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었으면 팥이 납니다. 또한 부지런히 가꾸었으면 많이 거두고 게을러서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었으면 수확 또한 기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많이 뿌렸으면 많이 거두고 안 뿌렸으면 거둘 수가 없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 앞에 농부는 겸손합니다. 그러기에 아시는 바와 같이 농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법이 없어도 잘 들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 같은 도회지에는 한 집 건너 파출소가 있어도 도둑이 많은데, 농촌에는 파출소 한 곳 없어도 다들 잘 살아가는 것은 이 심은 대로 거두는 엄연한 이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면에서 억지를 부린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어느 한 주인이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서 각각 그 능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가 돌아와서 그 종들과 회계를 하게 됩니다. 그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언제나 실패한 사람이 말이 많듯이 주인에게 아뢰기를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라며 한 달란트 그대로를 주인께 내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종이 말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다는 것은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땀 흘리지 않고 번다는 것이며, 농사하지 않고 추수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능력이 그렇게 많으신 데 그 마술적인 능력으로 살면 되지 꼭 제가 땀을 흘리며 일할 것까지 없지 않습니까 하는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크게 책망을 하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며 내어쫓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가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에 역행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만을 의지하겠다며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은 데서 모으며, 땀을 흘리지 않고도 잘 살겠다는 마음으로 나올 때 주인은 크게 책망하며 내어쫓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심은 대로 거두는 거기에 있는 것이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이네 사도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만홀히 여긴다는 헬라 원어의 뜻은 코를 돌려대고 비웃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신다는 것은 그러한 비웃음이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흔히들 사람들이 "내가 뿌리지 않았는데 왜 이런 것이 났느냐?"는 식의 생트집 같은 불평등을 하는데 그럴 이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지 않은 것이 어떻게 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생각할 때마다 신학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한 경건회 시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는 합니다. 언제나 강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기도를 하든 '설교를 하든' 눈물을 흘리기가 일쑤여서 별명이 예레미야인 김치선 박사께서 그날은 울리는 대신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웃기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부잣집 외며느리가 요란하게 아이를 낳는 장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느 부잣집 외며느리가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산모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과 남편에 대하여 마구 쏟아놓는 험악한 욕들을 이 김치선 박사께서 그대로 흉내를 내면서 웃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부잣집 외며느리의 해산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가족과 집안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까지도 좋은 아들을 하나 낳아 주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요란스럽게 한 후에 아이를 낳고 보니 깜둥이를 낳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제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이래도 변명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극적인 사건이나 이야기를 대할 때에는 "정말 그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를 실감합니다 만은 진작우리 생활의 하나 하나 살아가는 전부가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남들이 나에게 불친절하다면 그것은 내가 남에게 불친절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잠깐 동안 수화기를 들고 전화 한 통화를 걸어도 내가 친절하게 하면 저쪽에서도 친절하게 나오지만, 내가 조금만 불친절하게 하면 당장에 저쪽에서도 좋지 않은 반응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 역시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내가심은 것을 거두고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 진실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불평이나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나는 심지 않았는데 왜 났느냐고 하는 그러한 불평이나 원망이 있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다면 그것은 원인을 부정하고 있음인 것입니다. 즉 나는 많이 뿌렸는데 왜 적게 났느냐? 나는 수고를 많이 했는데 왜 결과는 적으냐는 불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많이 뿌린 것 같아도 분명히 무엇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일에 곡식이 자라는 일에 무슨 거짓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원인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하고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뿌렸는데 적게 거둔다며 아쉬워하거나 억울해 하지 마십시다. 물론 이 세상에는 공의가 백퍼센트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심고 판단함에 있어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이치만큼 우리로 하여금 가장 진실하고 겸손하게 해주는 진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 때에 보면, 대체로 공부를 잘한 학생들은 시험 문제에 대한 불평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험이든지 간에 치르고 나올 때마다 시험 문제를 잘못 냈다며 그 교수님은 어떻고 하면서 불평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하나의 버릇입니다. 그저 솔직하게 공부를 안하고 못했으면 못한 것이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내 수고에 대한 결과는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나는 선을 베풀었는데 내게 돌아오는 결과는 악이냐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 또한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속는 일은 다른 사람을 속이고자 함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변명하고 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속이는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적게 수고하고도 많이 수고한 것처럼, 좋지 못한 씨를 뿌리고도 좋은 씨를 뿌린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의 양심은 자기를 압니다. 그런데도 계속 자기를 변명하며 옹호하고 나오는 인격을 볼 수 있는데, 사실상 보다 무서운 것은 그러한 자신의 변명이 막상 속이고 있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시이라고 하는 그렇게 된 원인을 두고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교만하고 회개하지 못한 누적된 타락성이 자기를 밝히 볼 수 있는 안목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내가 무엇을 좀 아는 줄 알았었는데 어느 시간에 와서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제법 있는 줄 알았었는데 어느 순간이 와서 보니 믿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그래도 교양이 있는 줄 알았었는데 이제 와서보니 교양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나는 무슨 일에나 부지런한 것으로 알았었는데 오늘 이 일 앞에 서고 보니 게으르기가 짝이 없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속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끔 27세의 젊은 나이로 모든 교역자들의 필독서로 되어있는 불후의 명작인 기독교 강요를 쓴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는 합니다. 저도 무엇인가 열심히 한다고 해 보았지만 그의 기독교 강요를 읽을 때마다 5백여년 전에, 그것도 27세의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명석하게 성경을 분석하며 쓸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하며 너는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했는가하는 자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무엇을 좀 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 와서보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법 아는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동안 스스로 속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뿌렸고 무엇을 심었으며, 무엇을 가꾸고 있었는지 이제 가을에 와서보니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는 말입니다. 분명 먼 훗날 인생의 가을에 이르러 나의 잘못 심은 그 봄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심는 일과 거두는 일 사이에 있는 과정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심고 내일 당장에 거둔다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를 누가 부정하겠습니까만은 문제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고, 또 어떤 것은 가을에 심어 봄에 거두게 되는 긴 시간 동안의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를 저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어 놓고는 잊어버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건망증이 심하다는 뜻으로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들은 바에 의하면 노인은 건망증이 심한 관계로 자기가 한 말도 30분밖에는 기억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소위 잔소리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른봄에 심은 것을 어떻게 가을까지 기억을 하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봄에 심을 때에는 심어 놓고도 가을에 가서는 이것누가 심었느냐고 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쩡한 억지를 쓰고있는 것입니다. 진정 심었나? 안심었나를 놓고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분명히 심었고 그리고 오늘 내가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누구에게 배신을 당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언제이고 누구를 배신한 일이 없는가를 조용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건망증이 심해서 자기가 심은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있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거두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심는 일과 거두는 일 사이에 조금 긴 시간이 걸려서 때로는 1020년 후에 거두어 지는 경우가 있을 뿐 내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것은 결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이 길었다고 하여 내가심은 것을 거두면서 마치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것처럼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심은 것은 자유이지만 거두는 일은 심판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심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뿌렸고 심을 수가 있었지만, 그 결과인 열매는 내 마음대로 바꿔치기 할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간의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어도 거두는 일만은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심었으면 이제는 심은 바에 의해서 거두어야 할뿐입니다. 저는 이를 닦을 때이면 가끔 생각나는 일이 하나있습니다. 신학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인데 동기 학생 중 저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 한 학생이 이를 닦다가 이빨이 세개나 빠진 것을 들고는 눈물을 흘리며 시무룩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제가"왜 그렇게 이빨이 빠지느냐?"고 물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심은 대로 거두는 거지!"하고서는 "내가 젊었을 때에 죄 많이 지었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부끄러운 병도 가졌다가 치료를 받고 나았다는 것인데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보니 잇몸이 전부 상하여 양치질만 하여도 이빨이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친구의 "심은 대로 거두는 거지!" "내 죄! !"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프게 생각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에 심어 놓고 나이 많아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변명이나 다른 말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며, 젊어서 심고 늙어서 거두며, 오늘 심고 내일 거두는 이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 거두는 일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원치 않아도 거두어야 하고 뼈가 쑤시고 아파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무엇을 심었느냐하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심어놓고 영생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효자가 효자를 낳는다"라는 말을 합니다 만은 나는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내 자식은 나에게 효도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내 자식이 또한 나를 아프게 할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효자가 효자를 낳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밝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이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인 일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늙어 두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간단히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 냅니다. 그래서는 목과 손을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꾸며 몸에 털이 많은 형 에서처럼 하고서는 아버지가 요구한 별미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타납니다. 너무 빨리 나타난 것에 의아해한 아버지 이삭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었느냐고 할 때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는 근사한 거짓말까지도 해가면서 아버지를 속입니다. 지금 아버지가 장님이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속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몹쓸 불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삽시간에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은 훗날 그 아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속고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 염소의 피를 묻혀와서는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를 보소서"하면서 속일 때에 그대로 속아 내 아들 요셉이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며 애통하기 시작한 이래 그는13년을 울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속일 때에는 잠깐 속인 후에 곧장 탄로가 나고 말았으나 아들들에게 속을 때에는 자그마치 13년을 속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거두어들임에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 대상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심고 내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 지나서 거두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며, 거두는 장소에 있어서도 여기서 심고 저기에서 거둘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대상의 바뀜인데, 예를 들어 내가 갑이라는 사람을 속였다고 해서 반드시 갑으로부터 속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갑이 아닌 다른 을로부터 속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는 갑을 속였는데 왜 을로부터 속느냐하는 여기에 우리의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속느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남을 억울하게 하였으니 또한 억울함을 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심은 대로거두는 것은 분명하되 그 대상은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문제에 대해서 진실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동시에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거두는 것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심고있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은 분명히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감수하느냐 하는 문제에 앞서서 어떻게 인내하느냐 하는 결과에 따라서 미래를 위해서 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설명을 하자면 내가 과거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했던 것으로 인해 지금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내가 한 것에 비하여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억울함이 아무래도 조금 지나치단 말입니다. 나는 50퍼센트 정도로 억울하게 하였는데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억울함은 70퍼센트이고 보면 20퍼센트는 부당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20퍼센트까지도 그저 내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지 하는 생각으로 겸손히 참고 넘기면 이 20퍼센트가 앞에 있는 축복을 위해서 심는 것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계속 당하고 있는 사건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자세를 감추느냐에 따라 결국은 미래를 위해서 또 다른 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육체를 위한 것을 심었기에 오늘 이렇게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있지만, 그것을 거두는 현장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된 자세로 바로 서게될 그 자리가 곧 신령한 것을 심는 자리가 되어 앞에 있는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썩어질 것이요, 세상적인 것으로 결국에 거두어 드릴 것은 썩어지는 사망인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말씀을 심고 진리를 심으며, 사랑과 겸손, 의와 화평을 심어 나가는 것으로 마침내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될 결론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선을 심었다면 기다리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은 바를 주저 없이 거두어드릴 차비를 겸손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심고는 싹이 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썩을 것을 심고는 싹을 내며 열매가 맺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선과 의를 심어놓고 왜 이렇게 그 열매가 늦은가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튼 염려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심은 대로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 126:5 말씀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오늘 내가 심어야 할 것을 열심히 심어 보십시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을 전후한 6절과 10절 말씀에 보면 그 구체적인 대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는 것인데, 이것은 곧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드려서 좋은 것을 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는 말씀 역시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기회 있는 대로 심을 것입니다.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도 말고, 낙심하거나 불평함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심을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언젠가는 그 아름다운 결실을 땅에서도 거두고 나의 후손에게서도 거두며 하늘 나라에서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서는 자손이 거지가 될 수도 있으나 여러분이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하고 나면 여러분의 자손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절대로 거지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심은 선을 내 자녀가 거둘 수도 있고, 아니면 하늘에서라도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농사의 이치를 가지고 오늘 우리에게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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