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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욕을 기뻐하는 자(사도행전 5장 33절~42절)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戶籍)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한 사람의 인간됨은 그 사람의 행복관 여하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행복관은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자 인생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의 사회학자들이 연구해서 발표한 논문 가운데, 사람이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기뻐하며 사느냐에 대하여 통계적으로 써 놓은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대략의 요점을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일 때에는 어머니의 젖가슴만 기뻐한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젖만 입에 물면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조금 더 자라면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또 좀더 자라면 같이 노는 또래를 좋아합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오지 않고 제 또래와 어울려 노는 데만 마음이 팔립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더 자라나면 이성(異性)과의 교제에 열을 올립니다. 좋아하는 이성과의 교제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때입니다. 좋아하는 상대와 함께 있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20대 전후의 연령층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30대가 되면 사업을 좋아합니다. 무엇이건 일을 해야 됩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합니다. 만들고 싶어합니다. 일이 없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는 세대입니다. 40대가 되면 성취욕(成就欲)이 승합니다. 무엇인가 되어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손에 잡힌 것, 이루어 좋은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해도 꼭 남의 일만 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독립적으로 뭘 좀 해 보고자 하는 연령층입니다. 50대는 공통 적으로 명예를 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이 보기에는 변변치도 않은 명예를 위하여 엄청난 대사를 지불해 버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그만한 돈 가지고 편안히 살았으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런 식으로 써 버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는, 명예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제일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름을 내려 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60이 넘으면 유감스럽게도 주로 먹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뭘 가져 봐도 그렇고, 이루어 봐도 그렇고, 뭘 걸쳐 봐도 시원치 않습니다. 오직 먹는 것이 제일 낙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음식 대접을 잘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기뻐하거나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나름대로 여서,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하여 돈에다 가치 기준을 두고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즐기고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소유(所有)를 탐하여, 넉넉히 가졌는데도 더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지는 것보다 깨닫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깨달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일(安逸)을 즐기고 어떤 사람은 성취감을 즐깁니다. 그저 무사하게 편안하면 그만인 사람이 있고,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을 즐겨서 틈만 나면 잠을 자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을 피워 일을 합니다. 일을 즐기기 때문에 쉴새없이 뛰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유형들을 두 갈래의 범주로 나누어 양분해 볼 수 있 습니다. 첫째,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고 이타적(利他的)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먹어도 자기가 먹어야 하고, 입어도 자기가 입어야 하며, 누려도 자기가 누려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이타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먹이고 다른 사람을 입히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를 즐기는 타입입니다. 둘째, 어떤 사람은 현재만 즐기는 데 반하여 어떤 사람은 미래를 중요시합니다. 현재만 즐기는 사람은 미래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없고 오늘만이 중요합니다. 순간을 즐깁니다.
이 순간 이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그 다음에야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찰나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미래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오늘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가치를 생각하고 오히려 현재는 좀 괴롭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복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기뻐하고 살아가십니까? 어떤 기쁨을 추구하십니까? '이것만 이루어지면 다른 것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있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도들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세상에 욕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매맞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핍박당하고 순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 자체를 기뻐할 수 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들은 고난을 기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참고 견디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기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명예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수양이 잘된 사람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도 아닙니다. 철인(哲人)이거나 고명한 스승도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性情)이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인데, 고난을 기뻐하더라,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더라고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신비롭게 여겨질 정도로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저들은 본래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촌마을의 한낱 어부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성격도 제각각 이요, 인간성도 갖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잘 깨달아 알아들었던 특별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고난이 다가올 때에 도망을 가기도 했고,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저 모른다고 부인만 했습니까? 딱 잡아떼고 맹세했으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볼 것이 없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인데 어떻게 그처럼 달라질 수가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갖가지 이적(異蹟)을 보았습니다. 장님이 눈뜨는 것도 보았고, 5천 명 먹이시는 것도 보았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것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희한한 능력도 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들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만한 능력을 가지셨으면 큰일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노라면 천지개벽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면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고 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기대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런 기대를 채워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사람들이나 하나씩 만나서 병을 고쳐 주신다거나 하며 사소한 일에만 마음을 쓰십니다. 도무지 큰일을 하실 마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토록 큰 능력을 가지고도 어째서 이렇게 시시한 일이나 하고 계실까?' 그들은 불평이 많았습니다. 병자 몇 사람 고치신다고 해서, 5천 명 먹이신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무엇이냐 싶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능력을 가지시고도 나중에는 십자가에 말도 없이 죽어 가십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던 분이 왜 십자가 죽음을 고분고분 당하시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처럼 비참하게 죽으시고 말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19-20)" 하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실망 낙담하였듯이, 그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하던 그들이 오늘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도 사람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경제적으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민족적으로도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흑암이요 무질서요 죄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베드로, 요한의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능욕을 기뻐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을 그토록 이나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 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같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어요. 어떻게 역사한 것인지, 예수님의 부활이 저들에게 무엇을 말해 줬는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적용되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실제화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하고 율법대로 배운 바대로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런 하나님, 저런 하나님, 하고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 특별히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멀리 계신 하나님이었지마는 지금은 순간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야기할 때에도 여기 계시고, 골방에 있을 때에도 거기 계시고, 감옥에 있을 때에나 고난을 당할 때에 나, 어떤 형편에 처할 때에도 거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임재 의식이 구체화, 현실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죄 사하심을 느끼게 되고,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 의식을 가지게 되고, 여기서 구속받은 자신에 대한 감격을 소유하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신비적인 초월성과 능력에 대해서 긍정을 하게 되고, 새로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자기 정욕, 자기 고집, 자기 중심적인 욕망 등의 세속적인 것을 이제는 다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이적은 신비한 것입니다. 전에는 그 이적 자체를 신비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적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그 이적이 말하는 계시적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이적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십자가 안 지는 능력만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부활케 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못 하는 일은 하나님도 못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자, 너희 집에." 하고 말씀하시면서 야이로의 집을 향하십니다.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마주 달려오면서 제 주인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 수고를 끼칠 것 없습니다. 따님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야이로는 난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죽어갈 때에는 모시고 가려 했지만, 이젠 죽었다고 하는데 모시고 갈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야이로는 주저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래서 야이로의 집에 이르시게 되고 죽은 딸을 일으키십니다.
사람들에게는 죽음까지가 한계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거기까지요, 가능성도 거기까지요, 지혜도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제자들이 믿게 된 것은 부활케 하시는 능력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살아가는 것도 유익합니다.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얼마든지 크게 역사 되고 있다는 것을 그 능력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부활케 하시는 신비로운 능력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서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야 되고, 십자가에 달리셨더라도, 그 때에 함께 달린 강도가 빈정거렸듯이, 능력 있으시다면 감쪽같이 뛰어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 끝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26)" 하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능력 없어서가 아니고, 십자가를 지신 것 그대로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능력은 예수님께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지금에 와서는 제자인 자신들도 경험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 자리에 모여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셔서 "평안할지어다" 하고 인사하십니다. 이것만해도 신기하고 굉장합니다마는 어디 그뿐입니까? 사도행전 5장과 12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힙니다. 천사가 밤중에 나타나 "일어나라"고 합니다. 이 천사를 따라 나왔는데, 옥문은 닫힌 채로입니다. 옥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가 귀신도 아닌데, 이런 희한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꿈도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는 생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을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일어나라'고 하는 말 한마디로 일으켜 세웁니다.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들이 매맞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맞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요,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당하고 순교하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병들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매맞을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거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고난 당하는 현장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그 현장에 부활의 능력이 그대로 임하고 있음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맞는 것이 아니요, 죄가 있어서 맞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맞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매맞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에 순교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매맞으면서도 기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출교(黜敎)라는 것은 교인을 교적부(敎籍簿)에서 삭제하고 내어쫓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원래는 출교를 당하고 나면 문밖에서 매맞아 죽어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에게는 출교 당하는 것처럼 욕이 되는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와 같은 출교를 당하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
왜입니까? 부활의 능력 안에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은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초월적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전능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수천 년에 걸쳐 예언되어 오던 십자가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 십자가를 통하여 만백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역사가 바뀝니다. 그리고 주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의 역사를 볼 때에 십자가를 대가로 지불한, 피로 산 교회는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러한 구원의 역사에 내가 가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내가 쓰이고 있습니다. 나는 허물이 많습니다. 그런 내가 쓰이고 있습니다. 지나 날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했던 허물이 있습니다마는 이제는 알 바 아니요, 다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손에 들리어 소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나의 고난이, 나의 현실이, 나의 이 모순된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인다고 생각하니, 이처럼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에 하도 감격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소망교회는 누구의 공로로 세워졌습니까? 특별한 공로자는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큰 역사에 내가 조금이나마 쓰이었다는 것---이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에 대해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어려서 가운데서 이 오르간을 수입했고, 지금 이렇게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함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련할 때에는 교회 돈으로 하기가 어려워서 개인적으로 모금을 했었습니다. 그 때에는 저도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마는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가끔 어떤 분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오르간을 위해 모금할 그 때, 저에게는 왜 돈 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라고 하셨더라면 저도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을 텐데요" 하고요. 제가 그때 몇 분에게 부탁을 드렸었는데, 이상하게도 거절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참 좋지요.
이 예배당에 들어오실 때마다 자기만이 아는 비밀한 행복이 있을 것이니까요. 언젠가 제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아, 이 자동차 참 좋습니다. 우리 나라 자동차도 이젠 수준이 높군요" 하고 자동차를 칭찬했더니 그 사람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 자동차, 제가 만든 것이지요." "그래요? 언제 만들었습니까?" "제가 이 자동차 회사에 다니잖습니까." 저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옳은 말이거든요. 작게든 크게든 어떤 일을 이루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는 모로든지 어느 구석에서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는 것, 합당한 자로 여김받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예수 이름을 위하여 매맞고 고난받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한 본회퍼 목사는 그의 마지막 편지 가운데서 '이제 나는 나의 신앙에 관하여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신앙은 무거운 짐 아래서도 깨어지지 않고 항거한다. 주저하거나 절망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는 감옥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하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는 신학자로서 강단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참된 확신은 감옥에서 얻었습니다. 조금도 의심이 없을 만큼 분명한 신앙은 바로 죽음을 앞두고 깨닫게 되었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거나 말거나 고난 중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더라 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기뻐하고, 그의 궁극적인 구원을 기뻐하고, 그의 영광에 가담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고난 당하느냐, 그 결과가 무엇이냐, 그 의미가 무엇이냐, 그리고 그 누구와 함께 고난 당하느냐, 어떤 대열에서 고난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모든 선지자들도 핍박을 당했다, 그런고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이 충만할 때에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고 여유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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