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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장 29절~34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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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2934)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한 성도가 세상을 떠나 제가 장례식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라가서 하관을 합니다.

일생을 통하여 가장 비장한 순간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이 었습니다마는 생명이 떠난 시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땅을 깊이 파고 광중(壙中)으로 관을 달아 내립니다. 이제 관뚜껑을 열어놓고 마지막 예배를 드립니다. 하관 예배라고 합니다. 이때에는 주로 부활에 관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권면의 말씀을 드린 다음에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헤어집니다마는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슬픔으로 헤어집니다마는 주님 앞에 가서 영광스럽게 만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먼저 가고 뒤에 가고 합니다마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공중에서 부활하여 다 같이 함께 만나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를 드린 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를 마칩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전혀 낯선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모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심각하게 두 가지의 질문을 저에게 합니다. 그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가 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추상적인 진리요 관념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생명으로 믿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둘은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부활할 것으로 믿는가보다'라는 것입니다. "부활할 것을 믿지요." 이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심각해졌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내가 부활할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까?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생명의 문제로부터 가치관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로 사느냐, 가난하게 사느냐 -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공평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늙지 않고 가난한 사람만 늙는다고 해보십시다. 억울해서 못삽니다. 제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고 마사지를 하여도 늙기는 일반입니다. 도리 없이, 누구나 늙어간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평성입니다. 가령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죽지 않고 무식한 사람만 죽는다고 하면 억울해서 못 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생명문제 앞에서 사람은 공평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문제를 크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타의 문제를 작게 여길 수 있습니다. 잘살면 어떻고 못살면 어떻습니까? 잘입으면 어떻고 못 입으면 어떻습니까? 명예를 가지면 어떻고 못가지면 어떻습니까? 잠깐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마다 이 중요한 생명의 문제는 등한히 하고 오히려 별로 중요치도 않은 시시한 문제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건강을 잃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죽음을 재촉하면서까지 명예를 얻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좋아하여 산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산에서 비를 만나면 큰일입니다. 경사가 가파른 산이고 보면 삽시간에 계곡 물이 붇습니다. 마구 흘러내리는 물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아래로 거센 물살이 지나갑니다. 밤새도록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나무가 부러질까 걱정하면서 밤을 지새우는데 춥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참으로 괴롭습니다. 더욱이 잠까지 옵니다. 여기에서 졸면 죽는다 싶어 허리띠를 풀어 나무에 몸을 붙들어매고 밤을 새웁니다. 물이 다 빠진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죽을 뻔한 이야기를 주욱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이렇게 묻습니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려울 때에 내 생각 좀 했습니까?" 그러자 그 남편이 대답합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소. 단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소."

그렇습니다. 생명의 문제, 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시한 걱정은 안하고 살아도 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현실적입니다마는 신비롭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현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는 날마다 죽음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스럽다느니, 평안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불행하다느니, 명예롭다느니, 수치스럽다느니 -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가 최우선적임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생명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신분에 따라 죽음을 일컫는 말이 각기 다릅니다. 다섯 가지의 명칭이 그것입니다. 왕이 죽으면 붕()이라고 합니다. 제후가 죽으면 몽()이라고 합니다. 우리말에도 몽거(蒙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벼슬아치가 죽으면 졸()이라고 합니다.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고 합니다. 이제 녹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통사람이 죽으면 사(), 곧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죽음에 대한 명칭이 다른 것입니다. 알건 모르건 우리 한국사람들의 표현에도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면 보통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웃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개 어른이 돌아가셨다, 나보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으면 뭐라고 합니까? 잘 뒈졌다고 합니다. 죽었다고 하지 않고 뒈졌다고 그럽니다. , 여러분은 어느 쪽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런가하면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요새 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소천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과 삶은 항상 곁에 있습니다. 서로 맞서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곧 죽음의 문제요,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 무슨 말씀입니까? 살라고 생명을 내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생사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때에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의 법에서 떠날 때에 죽음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중에도 얼마나 많은 죽음이 내 앞을 지나갔는지 모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것, 오는 것, 이 모든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삽니다. 어찌 생각하면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그 과정을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죽음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마음이 아프고 듣기 괴로운 말이 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사람을 방문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아주 심각하게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당신은 이제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말씀을 다 드리고 나면 맨 마지막 반응이 어떤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목사님,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더라면 왜 욕심을 부렸겠습니까?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마는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왜 미워했겠습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과거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다시 내게 생이 주어진다면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생을 살아볼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싶습니다. 오늘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것 하나 몰랐다니 말이나 됩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몰랐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입니다. 천치요 바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죽음을 남의 이야기로만 듣지 마십시다. 나는 그 시간에 과연 무슨 말을 하게 될 것입니까? 이대로 죽어도 되는가? 여기에서 끝내도 문제가 없는가? 나의 생 전체를 죽음 앞에서 재평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죽음을 잊고 살려 합니다.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폭력을 씁니다.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일부러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과 마약, 폭력과 방탕으로 살아갑니다.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하는 역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억지로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로마사람들이나 헬라사람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 소위 지성인들은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모리(Memento mori)' - '메멘토''리멤버(remember)'라는 말이요 '모리''죽음(to die)'이라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리멤버 투 다이(remember to die)'라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나도 당신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십시다. 혹 부부싸움을 하십니까? 둘 다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아마 휴전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더는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이대로 끝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메멘토 모리'---이것이 인사였습니다. 아침인사요 저녁인사입니다. 죽음을 잊지 말고 살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믿게 되자 이제 인사말이 바뀝니다. '마라나타(Maranatha)'-성경에도 나오는 유명한 인사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번역이 됩니다마는 좀더 자세히 살피면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임을 기억하고 사십시다. 우리가 다 주님 앞에 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십시다'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로써 서로 유무상통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순교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오렌지카운티에 그 유명한 척 스미드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 입니다마는 교회에 직접 가보면 갈보리 채플 글자 옆에 괄호하고 '마라나타 커뮤니티 (Maranatha community)'라고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생명력 있는 교회입니다. '마라나타 커뮤니티' -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중심이 있고, 거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안에 사는 생명,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혹자는 어느 성경말씀대로 죽음을 의식하기에, 다시 말하여 내일 죽을 것이기에 오늘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것을 의식하며 가장 신령한, 가장 경건한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를 지칭해서 종말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확증하며 살아갑니다. 시인 괴테는 말하였습니다. '죽고 다시 사는 도리를 알기까지 나는 처량한 나그네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죽고 사는 이치를 깨닫기까지는 누구나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생명의 문제부터 해결하여야 합니다.

죽음을 알고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신앙, 부활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고, 예수 부활과 함께 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증 받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부활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신앙이라는 그 분명한 틀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헬라어로 '카트 헤메란 아포트네스코'라는 이 말씀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나는 매일 죽음에 노출되어 삽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이 그러했습니다. 보장할 수 없는 나날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핍박이 그렇고, 환난이 그렇고, 건강이 그렇습니다. 사실 날마다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삽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수반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다-지혜의 근본입니다. 어제 죽었다-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오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그리스도인의 오늘의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의 죽음을 수반하여 그는 그 옛날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는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순교로 그 생을 끝내고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그는 늘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114)." 자나깨나 그 시간을 마음에 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것은 잠시 주님의 뜻과 경륜 속에 사는, 덤으로 사는, 은사로 사는 사명적인 생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옛사람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삶입니다. 옛 생각, 세상 것, 세상 욕심을 계속적으로 부정하고,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생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부정하고 새사람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확인, 확증하는 생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비행기표를 바로 컨펌(confirm)하는 일을 합니다. 잘못해서 큰 실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늘 이 나라 저 나라 다닙니다마는 토요일에는 꼭 돌아와야 하는 사람이 제가 아닙니까? 한번은 중국 타이베이에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여행사에 부탁을 해놓았는데 여행사 측에서 컨펌하는 것을 잊었던 모양입니다. 공항에 나가보니 컨펌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좌석을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남아 있는 좌석이 없는 것입니다. 비행기에 입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돌아오는 데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간신히 돌아온 일이 있어서 이후로는 컨펌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를 않습니다. 제가 꼭 확인을 합니다. 직접 전화를 걸어서 몇 시 몇 분에 내가 컨펌을 했다고, 잊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는 티켓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컨펌이 되지를 않아서 문제가 됩니다. 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재확인해야 합니다. 시간 시간 확인을 하여야 합니다. 확증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번 확증을 하십시다. 옛사람이 깨끗이 죽었는가? 새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이 날이 끝난다면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재확인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사랑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일리 다이(daily die)'라고 한 반면에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이라고 한 것입니다. 날마다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으로 행하여 죽고 은혜로 살고, 나로 향해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죄로 죽고 의로 살고, 절망으로 죽고 소망으로 사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세례 받는다 - 이렇게 신앙생활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죽어야 할 부분인데 죽지 못하였습니다. 죽여야 할 부분인데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있는데 못 끊고 있습니다. 끝내 끄나불을 못 끊고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한, 부득불 끊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끊도록 비상조치를 취하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가운데 가끔 쓰는 말이 있습니다. '저사람 하나님 앞에 혼났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씩 혼나고야 정신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될 사람인데 교만하고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립니다. 예수는 믿는데 뭔가 좀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 치시면 꼼짝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본체를 향하여 다듬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련 과정, 생명을 정확히 하는 그 역사는 그야말로 정확한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놀라게 하여 겸손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렇게 되어 주님 앞에 불려 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나는 이길 힘이 없습니다마는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나는 끊을 힘이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기어이 끊게 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납니다. 죽음을 부득불 당하는 사람이 있고, 죽음을 깨닫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나를 죽여가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고 생명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알기에 나를 죽이고, 생명을 믿기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무릅씁니다. 이 생명을 알기에 기뻐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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