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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모으는 자(마태복음 12장 30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이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오늘의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잠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면서도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십니다.
간혹 우리는 특별히 귀신들림으로 벙어리도 되고 장님도 되고, 혹은 꼽추도 되고 몸이 비틀어지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마는 그럴 때에 정말 능력이 있어서 단 한마디로 그 귀신을 제압하고 병을 깨끗이 고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교역자로서 해야 될 참으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도 3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종종 귀신들림으로 질환이 생긴 분들을 봅니다. 그 때마다 영적인 능력이 있어 단 한마디로 그것을 제압하여 깨끗이 낫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신학대학에서 저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가운데 한 분이 개척교회를 열어 목회활동을 하는 초기에 겪은 일입니다. 그리 많지 않은 교인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한가운데서 어떤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러대더랍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에게 좀 데리고 나가달라고 부탁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 젊은 목사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교역자가 된 지 얼마 안되어서인지 좀 서툴렀습니다. 설교를 하다말고 그 가운데로 들어가 귀신들린 사람 앞에 딱 서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대로 귀신이 오금아 나 살려라 하고 나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신들린 그 사람은 오히려 "네가 누구냐?"하고 더욱 크게 소리지르고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목사는 신도들 앞에서 망신만 당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와서는 큰일났다고, 이제 부끄러워서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고 탄식하기에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권세가 없어서 안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단 한마디의 말만으로 귀신들린 사람이 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요즘도 대개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간혹 귀신들린 사람을 붙들고 기도를 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합니다마는 그런다고 호락호락 낫습니까?
바로 몇 달 전에 저희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새벽기도회 때인가, 단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설교를 하려고 단상 앞에 섰는데 교인들이 자꾸 이상한 눈으로 제 쪽을 보기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제가 앉았던 그 자리에 웬 여자가 앉아 있습디다. 그 때 만약 제게 달리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 여자를 보고 "귀신아, 물러가라"하고 말했겠는데 그런 능력도 그런 마음도 없어서 부목사님 보고 나와서 이 사람 좀 데리고 나가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부목사님이 그녀를 데리고 나가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았더니 "내가 바로 옥황상제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놀음이 아닙니까? 그래도 다행히 부목사님이 이끄는 대로 나갔으니 망정이지 소리를 지르고 대들었다면 어땠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병고치는 일과도 다릅니다. 영적 권세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기 위하여 나서시기만 하면 모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다 쫓겨납니다. 마치 우리가 어두운 데에 등잔불을 켜고 나가면 어두움이 물러가면서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그 악령의 역사가 예수님 앞에서는 다 물러갑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어떤 악령도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른 척하고 숨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악한 마귀와의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2장 22절에 귀신들려서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 곧 철저하게 귀신들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몸도 마음도 모두 귀신에 매인 이 사람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더니, 예수님께서 그저 "나가라"고 한마디를 하심으로 그는 깨끗해집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 반응이 함께 따릅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할 때에 긍정적인 반응만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까? 언제나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해도,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 해도 긍정적인 반응만을 보고자 하지는 마십시오. 반드시 그 뒤에는 비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부정적인 반응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도 그러한데 우리 같은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떻게 좋은 소리만 바라겠습니까? 반드시 부정적인 반사작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메시야를 본 것입니다. 4백여 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이 끊어지고, 그 오래도록 어두운 세월을 보내면서 기다리던 메시야, 오늘 오시려나 내일 오시려나 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야를 저들은 그 사건을 통하여 보았고, 이분이야말로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메시야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적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 사람의 정신을 깨끗케 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데에 이적의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적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여기 이렇게 계시기에 악령의 역사가 도저히 그대로 존재할 수 없어서 나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자는 고침을 받게 됩니다. 저들은 이 같은 이적을 보고, 바로 이분이 메시야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단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가하면 그 뒷전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는 못마땅해서 비꼬아 말하기를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합니다. 바알세불이 무엇입니까? 귀신의 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중에서도 왕 마귀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작은 마귀를 쫓아냈다고 말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미치광이 중에서도 최고 미치광이로 취급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아프신 예수님께서 저들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요 자신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했기 때문에 귀신이 물러가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행사되는 바로 이 현장에 악령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기에 물러가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의견으로 이 사건에 응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내쫓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의 편이냐, 아니면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바리새인들의 편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이슈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절대로 중도(中道)는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중간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믿든 안 믿든 둘 중의 하나요, 하나님의 자녀든 마귀의 자녀든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뉴트럴리즘(neutralism)은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색분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회주의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편이 아니면 마귀의 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곁에 같이 있었던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마귀의 편이 하나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단의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중간 존재나 회색적인, 기회주의적인 입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볼 신앙적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입니다. 충성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들은 그저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만 있으면 족하다고 합니다마는 그런 정도의 동의만으로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충성이 따라야 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시간도 바치고 정성도 바치고 물질도 바치고 몸도 바치고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간혹 보면 충성은 없이 그저 '예수 믿는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북경을 방문했을 때에 평양에서 나와 직접 경영하는 「평양랭면집」에서 냉면을 먹었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냉면'이라고 하지 않고 '랭면'이라고 합니다. 전에도 이 음식점에서 냉면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년 전에 북경에 갔을 때에도 들렀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또 달라서 음식점의 손님 가운데 90퍼센트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영하는 사람도 북한 사람이요 주방장 할머니 역시 '김일성주석'에게서 '민족적인 랭면을 잘한다'고 훈장까지 받은 분입니다. 성격이 아주 좋으신 할머니로 이번에 가서 보니 조리사가 되셨더군요. 그런데 그때 저를 그곳으로 안내한 분이 제게 농담 겸 진담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여기서 식사할 때에는 눈뜨고 속으로만 기도하세요. 눈감고 기도하시지는 마세요. 누가 옆에서 보고 목사님인 줄 알고 납치해 가면 모시고 왔다가 괜히 제 입장만 난처해집니다"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알았다고 말하고 그 냉면집으로 갔습니다. 냉면을 앞에 놓고 눈감고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그 말을 안 들었으면 모르거니와 들었으니 더 오래 기도해야죠. 기도가 끝나자 그분이 냉면이야 식을 걱정은 없지만 왜 그렇게 오래 기도하느냐고 묻기에 특별히 이 집에서 기도할 제목이 많아서 그랬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만 사랑한다든지, 마음으로만 믿는다든지 하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시간이 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 충성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신앙에 충성이 따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충성 없이 지식적으로, 관례적으로, 혹 어떤 때에는 그것이 옳을 거라는 정도의 판단만 가지고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에는 분명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유부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부모, 형제, 자매, 더 나아가 자기 목숨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간혹 우리는 이런 일이 있으면 이대로, 저런 일이 있으면 저대로 하고 나서 신앙을 지킨다고 합니다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분명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다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자신이 가진 것을 두 손에 모두 쥐고 있으려 합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A라고 하는 사람이 B라고 하는 사람에게 "술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B가 대답하기를 "술에 밥을 말아 떡을 안주 삼아 먹겠다"라고 하더랍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둘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도 얻고 명예도 얻고 세상도 얻고 하나님나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름지기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버려야 될 것이 많습니다. 끊어버려야 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깝지만 끊어버려야 합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배우기 위해서는 버려야 될 것이 아주 많습니다. 요즘 보면 모두를 휴가라고 들떠 있습니다마는 저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요란스레 휴가를 갈 만큼 일을 많이 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갑니다. 하루는 놀고 하루는 쉬면서 시간을 보내놓고는 딴 소리 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공부하는 사람들은 지금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데 빈둥거려서야 되겠나 하는 염려까지 듭니다. 남이 놀 때에 공부하고야 진정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남이 놀 때에 같이 놀아놓고는 무슨 공부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끊어버려야 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할짓 다 하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절대성입니다.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도 그만, 철학도 그만, 물질도 그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제가 여러 해 전 계룡산 신도 안에 갔을 때에는 거기에 2층으로 된 집이 한 채 있었습니다. 안내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 시치미를 떼고 그 주인에게 좀 배우러 왔다고 했더니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주더군요. 어떤 방인가에는 한쪽 면에 할아버지 사진이 몇 개 죽 걸려 있더군요. 맨 위에 큰 사진이 하나, 그 밑에는 그보다 작은 사진이 네 개가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천하통일교'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맨 위에 있는 사진은 하나님이요, 그 밑에 있는 사진은 공자, 맹자, 야소(예수), 석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도 되고, 석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도 되고, 야소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리스도를 상대적으로 이해하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구원도 절대적인 것이요, 예수님 말씀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날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순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답답하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넘어가면서 살면 될 터인데 굳이 그렇게 안타까이 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을 보십시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어디 예수님을 실제로 뵈기나 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그린 그림을 갖다놓고 이것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아니면 죽이겠다고 했을 때에 그들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그 그림은 예수님의 참모습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당히 밟고 지나가도 될 듯한데 그들은 그렇게 넘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 절대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복음의 절대성,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이것을 상대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주의적인 철학, 이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해도 사랑만큼은 일원화하지 않습니까? 이 여자도 괜찮고 저 여자도 괜찮고,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고…… 적어도 사랑의 욕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절대적이듯이 너희도 절대적으로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에는 전도의 필요성이 깊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함께 하고, 함께 모으고'라는 것은 전도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필요성을 모르는, 전도할 줄 모르는 교인은 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진정 믿음이 있다면 전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소망교회에 나오니까 전도하라고도 안하고 헌금하라고도 안 해서 아주 편하다고 합디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목회를 잘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는 전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전도를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있다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에게 모이 먹이는 것을 보십시오. 암탉이나 수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먹이를 챙겨주는 것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먹을만한 것을 발견하면 먼저 어미 닭이 쪼았다놓았다 하면서 병아리들에게 와서 먹으라고 시킵니다. 자기가 꿀꺽 삼켜버려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었다놓았다 쪼는 시늉을 해 보임으로 병아리들에게 먹는 법을 배우도록 합니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은 내가 남에게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절대적이고 생명적이고 영생의 문제라고 한다면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도 안하고 데려오지도 않을 수가 있습니까? 벙어리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를 오래 믿으면서도 전도를 안 해보신 분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내가 진정 예수를 믿고 있나?'라고.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이라면 전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오래 전 제 아내가 버스를 탔는데, 옆에 앉은 웬 여자가 "할머니, 교회에 다니세요"하고 아내에게 열심히 전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소망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래요. 아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한번만 나와보라고 열심히 전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나가도록 힘쓰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분 참 좋은 교인이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을 옆에 앉혀놓고 그렇게 전도하는 것,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러분, 함께 모아야 합니다. 방관자라든가, 넓은 마음의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관대와 지성은 필요 없습니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런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적입니다. 오늘의 본문과 똑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 : 23)." 이를 가리켜 병행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이와 비슷한 말씀이 복음서에는 또 한 군데 있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위의 병행구절에 비하여 다소 소극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두 말씀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대명사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말씀에서는 '나'라는 단어가 쓰인 반면 마가복음의 말씀에서는 '우리'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제자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 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이 말씀도 병행구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소극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 두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나와 함께하다'와 '나와 함께 모으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나와 함께하다'라는 이 말은 소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편이냐 남의 편이냐, 이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특별히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더 강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소속은 아주 중요합니다. 모름지기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 소속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 거침없이 "예수님 소속이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래 '크리스찬'이라는 말은 '크리스찬루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크리스찬루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소속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마음, 나의 입장 모든 것이 예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와 함께 모으다'라는 말은 한결 적극적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 16절은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온적인 상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는 존재를, '함께 모으는 자'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함께'라는 말이 두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영어에 보면 'Who are you?' 와 'What are you?'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하기 다소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Who are you?'는 소속을, 'What are you?'는 직업을 묻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What are you?'라는 말이 '너는 뭐야?'라고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는 뭣하는 사람이냐,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대해서 그 존재와 사역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Who'와 'What'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한 자입니다. 우리의 사역 또한 예수님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말씀에 나오는 '함께'의 의미는 첫째가 동거한다는 것이요, 둘째가 함께 사역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함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음으로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함께 모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신학자 바르트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다 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는 딴사람을 본다면, 그것은 짝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릇 사랑이란 마주보고, 자신의 마음을 다 주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고, 마주보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사랑이랄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해야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요즘의 부부들을 보십시오. 이혼하는 쌍들도 늘고, 부부간에 크고 작은 갈등으로 여간 시끄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을 지속해나가기 위하여 함께 사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사역한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녀가 결혼을 합니다. 사랑함으로 같이 살다가도 그 사이에 아기가 안 생긴다든가 하면 사랑은 식어지게 마련입니다. 공동작품이, 함께 노력함으로 만든 작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올수록 부부간에 문제가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조상들을 보십시오. 남편이 들에 나가서 일하면 아내가 점심을 싸 가지고 들로 나갑니다. 남편이 땅을 일구면 아내는 씨를 부립니다. 저도 아버지가 땅을 파면 어머니가 그 속에 씨를 넣고 발로 흙을 덮는, 그렇게 공동작업 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베를 짤 때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베는 아내가 짜지만 그 전 단계까지는 남편이 해주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잘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부부들은 함께 하는 일이 없습니다. 모두들 제 각각입니다. 심지어는 남편이 어느 직장에서 얼마만큼의 월급을 받는지도 모르는 아내도 있습디다. 이게 남이지 부부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함께 일할 줄 알아야 하고, 함께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함께 일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는데, 요즈음은 분리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이 '함께 일한다'라는 말은 전도요 봉사요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를 헬라어로는 '수네르곤'이라고 합니다. '순'은 '함께하다'라는 말이요, '에르곤'은 '일하다'라는 말입니다. 곧 'working with' 'doing together'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으다(gathering togeth-er)'의 헬라어는 '순아고게이'입니다. 여기서 '아고'는 '인도하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순아고게이'는 '함께 인도함을 받는다' '함께 모으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브루스는 '사단은 낭비가의 대장이요, 예수님은 모으시는 추수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단은 자꾸만 흩어지게 분열시키는 자요, 예수님은 모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모아야 합니다.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려고 애쓰시던 바로 그 마음으로 오늘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리도 모자라는데 무슨 전도를 또 하나. 이만하면 됐는데'하고 우리 소망교회 하나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마는 여기 모인 분들만이 교인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분이 하시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함께 모아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는 모으려고 애쓰시는데 이를 헤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귀입니다. 교회의 부흥을 반대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마귀가 아니고는 교회의 성장을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당이 터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는 부흥해야만 합니다. 예배당에 다 앉을 수 없어 마당에 나앉을지언정 교회는 부흥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끼리 모이면 넉넉한데 전도는 왜 하나, 우리끼리 가만히 믿다가 천당가면 그만이지'하는 사람들이 천당 갈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갈 천당은 없습니다. 이 사역을 반대하는 자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요 교회에 대한 파괴주의자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 도전하는 바리새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으면 이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모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모으려 애쓰고 있는데 너희는 헤치려 하고 있으니 너희는 마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마귀에 씌어서 벙어리가 된 사람도 있고, 귀머거리가 된 사람도 있고,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겉보기에는 멀쩡한데도 마귀에 씌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숫제 모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헤치려는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는 소극적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적극적이며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중도가 없고 중용이 없음은 이 때문입니다. 신앙에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존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봅시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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