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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장 3절~14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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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314)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라즈니쉬라고 하는 사상가가 쓴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여우와 사자가 함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다가와 묻습니다. 여우가 저 먹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주문하면서 "일인 분만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웨이터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두 분인데 어째 일인 분을?"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허허, 그 웨이터 참 눈치도 없네'하는 표정으로 여우가 설명을 합니다. "이보시오 웨이터 양반, 저 사자 양반이 배가 고팠다면 내가 어찌 이렇게 살아 있겠소!" 사자는 맹수입니다. 맹수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맹수입니다마는 배가 부르면 착합니다. 배부른 맹수는 코앞에서 토끼가 뛰놀아도 해치는 법이 없습니다. 맹수가 배부르면 온 동산이 평온합니다. 계속하여 라즈니쉬는 설명합니다. "맹수는 식사를 위해서만 살생을 한다. 맹수는 욕심이 없다. 맹수는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다. 맹수는 치부하지도 않고 저축하지도 않는다." 맹수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인간이 동물만도 못한 예가 무수히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가 어느날 식인종 추장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을 때입니다. 식인종 추장은 전쟁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백인들이 서로 총을 쏩니까?"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까?" "그럴까봐 두렵습니다."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머리를 흔들면서 "그것 참 이상하군요. 백인들은 원수의 시체를 먹지 않으면서 왜 서로 잔인하게 죽이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합니다.

왜 전쟁이 있습니까? 왜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싸우는 것입니까? 한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나나요?" 이에 아버지는 전쟁에 대하여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1차세계대전은 이렇고 제2차세계대전은 저렇고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아들이 통 못 알아듣습니다. 자꾸만 묻습니다. "아버지, 전쟁이 왜 일어나냐구요." 옆에 있던 어머니가 갑갑해서 끼여듭니다. "여보, 아이한테 설명을 하려면 분명하고 솔직하게 해야지, 그렇게 설명을 해서 알아듣겠어요?" "참견하지 말아요! 얘야, 잘 들어봐라." 열이 난 아버지는 또 설명을 합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다시 튀어나옵니다. 결국 역정들을 내면서 부부 간에 싸우다가 아버지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립니다. 이제 어머니가 아들을 붙들고 말합니다. "내가 설명해줄께."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빠 엄마가 다투는 걸 보니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아요." 아들의 기막힌 답변이었습니다.

여러분, 욕심이 문제입니다. 정욕이 문제입니다. 욕심 플러스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감정과 기분이 작동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를 챙긴답시고 형편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입니다. 야고보서 41절을 보면 이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 욕심, 정욕이 싸움의 원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전쟁은 욕심입니다. 더 많은 땅, 더 많은 부,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안정, 더 많은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겠다고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전쟁은 곧 욕심입니다.

두 번째로 전쟁은 폭력입니다. 법의 질서가 완전히 부재합니다.

모든 법의 질서가 다 무너지고 마는 '법 부재'입니다.

세 번째는 경제학적으로 전쟁은 불안과 혼란입니다. 경세의 질서 안에는 소유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안에서는 가진 자도 없고 못 가진 자도 없이 모두가 혼란 속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소유가 다 백지로 돌아가는 시간 -바로 전쟁입니다. 노력과 수고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는 것이 전쟁입니다.

네 번째로 전쟁은 무지(無知)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아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전쟁은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들이 하는 못된 짓입니다. 독일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쟁 후에는 세 가지의 대부대가 남는다. 불구의 대부대, 애곡의 대부대, 도적의 대부대가 그것들이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생기고, 가족들을 잃어버려서 울고불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에 도적이 난무합니다.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얻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전쟁은 혼란을 일으킵니다. 가치관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왜 전쟁을 하겠습니까?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승자가 없습니다. 이겨본들 허무합니다. 빼앗긴 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 뒤에는 승자가 없는 잿더미만 남을 뿐입니다. 그런데 잿더미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이 전쟁을 왜 하는 것입니까? 무지하고 몽매하며, 그 위에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정의가 있습니다. 전쟁은 메시야니즘(Messianism) 입니다. 모두들 자기가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독재자들마다 다 '내가 메시야다, 내가 그리스도다' -나야말로 정당하고 의롭다 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약속을 제시합니다. 더 밝은 세계, 더 잘사는 세계, 더 강한 나라, 더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면서 집단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독재자들이 전쟁할 때마다 꼭 내세우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정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한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 독재자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얼렁뚱땅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이와같은 메시야니즘이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불신앙적인 공리주의입니다. 적은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적은 손해를 만들어 큰 이득을 얻겠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공리주의가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전쟁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살펴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평화주의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상으로 무저항주의입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원형극장에서 순교를 당하였으나 그 누구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누가 왕이 되건, 어느 나라 어느 정치가 어떻게 바뀌건 상관없습니다. 교회는 항상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고, 이 성에서 쫓아내면 저 성으로 피하고, 누가 빼앗으려 하면 그대로 다 주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면서,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절대평화주의, 무저항주의 - 전쟁에 대한 이같은 이해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의로운 전쟁이라는 이념입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에 교회와 정치가 밀접히 관계하면서 생겨났습니다. 평화 회복을 위하여, 정의 수호를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전쟁은 필요악으로서 정당화하여야 한다는 이해입니다. 교회는 전쟁을 이렇게 해석해왔습니다. 한걸음 나아가 세 번째 사상은 십자군의 이념입니다. 교회가 세계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하나님 중심의 이념입니다. 중세 서구의 기독교도들이 하나님의 사지(四肢)로 자처하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 스스로 인정하면서 이른바 성전(聖戰), 거룩한 전쟁이라고 부르던 많은 싸움을 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것입니다.

2차세계대전 시에 히틀러가 온 세계가 소란하게 전쟁을 하였습니다마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독일 나치스군의 마크가 무엇입니까? 갈고리 십자입니다. 이 마크를 가슴에, 목에, 등에 붙이고 다니는가 하면 깃발로도 만들어 펄럭이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 육백만 명을 학살할 때도 바로 그 깃발 밑에서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킬 때에 스스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후예라고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 소위 거룩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하였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저 후세인 역시 그가 저지른 전쟁을 스스로 '성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군 이념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며, 나는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거룩한 전쟁으로 정당화해나갑니다. 이러한 이해들이 역사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전쟁을 포함한 모든 혼란에 대해서 친히 예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요지를 찾게 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종말에 대한 징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환난, 더 무서운 종말에 대한 예표요 징조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참된 종말, 참으로 무서운 환난은 더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있는 엄청난 환난이 대환난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있는 사건입니다. 징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전쟁 속에 또다른 징조가 있고 이 전쟁은 다가올 사건에 대한 상징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초연하라고 하십니다. 있을 것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 놀랄 것 없다고 하십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 앞에 없어도 전쟁은 늘 있어왔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오겠지'-아니올시다. 동서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는가 싶더니 어느새 또 터집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또다른 전쟁이 있습니다. 또다시 전쟁이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건은 오히려 재난의 시작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이 사건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자세하게 예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음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말라-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6)"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많은 환난과 배신, 그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충성되고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태연하게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무엇입니까? 끝까지 충성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마지막날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한편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전쟁은 이렇습니다. 사무엘상 1747절에 보면 어린 다윗이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 장군 앞에 나가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이스라엘의 전쟁 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붙이실 때에 거기에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나아갔던 사건들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아모스서, 미가서, 다니엘서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흐르는 맥락이 있습니다. 당시에 앗수르 왕이 일어나고 산헤립의 무서운 침략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벨론이 일어나고 메데가 일어나고 애굽이 일어났습니다. 이렇듯 숱한 전쟁의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 마침내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전은 다 불타버렸습니다. 성전 기명(器皿)까지도 약탈당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엄청난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줄기차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요점은 이러합니다. '이 모든 사건은 내가 만든 것이다. 이 전쟁은 내가 일으킨 것이다. 기근과 질병도 내가 보낸 것이요 바벨론을 일으킨 것도 나다. 너희들을 포로가 되게 하여 가게 한 것도 나요 다시 돌아오게 한 것도 나다. 모든 책임은 나 하나님이 진다. 내가 한 것이다. 내가 역사의 주인이다.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하나님인 줄 알리라.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많은 백성으로 하여금 알고 믿고 순종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같이 큰 비상한 사건을 꾸미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망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요, 일으키는 것도 하나님이시요,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8장과 9, 에스겔 3025, 그리고 모든 말씀에서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십니다.

역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전쟁은 죄의 극치입니다. 교만의 극치요, 욕심의 극치요, 지혜의 극치입니다. 이것이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악을 심판하고 교만한 자를 심판하십니다. 땅속 깊이 숨겨진 것을 심판하십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귀로 들려오는 말씀만이 말씀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들리는 말씀만이 말씀이 아닙니다. 사건 자체가 말씀입니다. 효과적인 말씀이요 강한 행동을 통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忿恨)이라(105)"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라는 말씀 외에도 여러 곳에도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라는 말씀을 쓰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나의 막대기다, 인생 막대기로 내가 너희를 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막대기로 치면 아픈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아픈가에는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 막대기를 든 주인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매를 맞아서 아프다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 맞느냐를 생각해야 하고 나를 때리는 바로 그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막대기로 치고있다 -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막대기입니다. 그 속에 징계가 있습니다. 그 위에 피치 못할 강한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구원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공의를 이루십니다. 영광을 받으십니다. 갇힌 자로 하여금 나오게 하시고 억울함을 당하는 자로 하여금 자유케 하십니다. 포로된 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회개하는 백성, 구원받은 백성을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가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당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그리고 내게로 돌아오리라,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리라, 그를 내가 구원하고 영화롭게 하리라-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쟁은 선교(宣敎)라는 사실입니다. 굳게 닫은 문을 엽니다. 전쟁은 급한 변화, radical change를 만듭니다.

가치관이 변하고 질서가 변하고 새로운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마치 밭을 갈아엎고 다시 새로운 곡식을 심듯이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 전쟁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놀라운 일들이 여기에서 창출됩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양반 상놈의 구분이 대단하였고 봉건주의, 관료주의의 폐단이 깊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을 아무리 전하려고 해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625전쟁이 나는 통에 양반 상놈이 싹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상놈 집안과도 결혼을 잘합니다. 다 전쟁 덕분입니다. 이 전쟁이 없었다면 아직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서로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모든 교만의 탑이 무너집니다. 모든 고집이 깨집니다. 모든 벽이 다 무너져서 교류하게 됩니다. 여기에 발명이 있고, 발견이 있고, 새로운 교류가 있고, 새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이 속에서 복음이 전해집니다. 복음이 전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가 셋이 있습니다. 유대주의, 모슬렘주의, 공산주의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서만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모슬렘 사회에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선교사가 들어갔다가 한번 발각되면 당장에 목을 치이고 맙니다. 어느 한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발견해도 즉시로 목을 칩니다. 몹시 굳게 닫힌 문입니다.

여러분, 선교적 차원해서 다시한번 보십시다. 굳게 닫힌 문이 이 전쟁으로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비상수단입니다. 엄청난 희생이 따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진리를 나타내시며, 선교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전파의 기회로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전도학에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주택에서 4대 이상을 사는 가정은 예수를 믿지 않을 가능성이 90퍼센트라고 합니다. 반면에 6개월마다 이사다니는 집들, 흔히 아파트족이라고 하는 가정들은 예수 믿을 가능성이 90퍼센트라고 합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마음도 움직입니다. 움직이는 그 사이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해묵은 고정관념, 이것은 초비상 수단으로만 깰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해야 합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탑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134, 5)."

강 건너 불이 아닙니다. 전쟁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디에나 전쟁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되 온유한 방법, 자연적인 방법, 순한 방법 외에도 격한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상한 방법도 있습니다.

전쟁을 통하여 인간의 악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창조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크신 역사에 응답하고, 바로 겸손하고, 바로 회개하고, 바로 진실하고, 바로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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