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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사도행전 7:1~10)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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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사도행전 7:110)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父兄)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時方) 거하는 이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의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이 시간에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7장 전장에 걸쳐서 스데반이 긴 설교를 합니다. 설교인 동시에 유언입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끝내면서 바로 끌리어나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래서 첫 순 교자가 됩니다. 대단히 장엄한 시간입니다. 생각해보면 스데반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설교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깊은 진리를 다 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신학, 사도 바울의 신학방법론 이 바로 이 스데반의 설교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한번 설교하고 죽었습니다마는 그의 설교는 사도 바울에게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이 내용과 함께 그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역시 로마에 가 순교합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하고 죽습니다마는 분명코 그는 훌륭한 제자를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입니다. 유언과 같은 설교입니다. 마지막 순 간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펴는 설교입니다. 생명을 건, 위험을 느끼면서 펴는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얼마 전에 이 자리에서 이 재판을 받으시고 끌려나가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현장입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사람도 여기에 나오는데, 바로 가야바인 줄로 압니다. 가야바는 그 후 36년까지 제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본문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요, 가야바가 지금 예수님을 심판하던 그 입으로 심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무서운 질문입니다. 질문 아닌 질문입니다. 내 것을 양보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그도 죽으리라, 그런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는 한 그는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알면서도 그 원수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긴 설교입니다.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성경적 지식을 다 동원합니다. 자신의 신앙 고백이자 성경에 대한 이해요 기독교에 대한 구약적 해석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 이해한 기독교 -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곧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 모습인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로써 족합니다. 다른 소리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에 대하여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누구를 시기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인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 지식으로 가득합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믿고 있던 성경 지식이 여기서 완전히 충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족합니다. 당연히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분노의 기미도 증오의 기미도 없는, 순수하게 밝은 얼굴, 곧 천사와 같이 빛나는 그런 얼굴로 이 긴 설교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입니다. 공회 앞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용합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 당장에 돌을 던질 것입니다. 그 당장에서 예수를 믿으라 한다면 돌부터 먼저 던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 하고 말문을 엽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아브라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러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저네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칭하고 있는 터이라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엄숙해집니다. 일단은 엄숙해지는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이……"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 - 이것은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 소재가 저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들의 문화권에서 출발합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종교적 문화, 전승적 문화를 스데반은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곧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무릇 선교의 기본이 그러합니다. 선교를 한다면 누구나 그러해 야 할 줄로 압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득 방법의 기본입니다. 스데반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저들이 가장 우러르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하고 입을 열자 당연하게 모든 사람은 일제히 주목합니다. 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할까? 지금 스데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기독교 신앙의 모델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스데반이 운을 뗀 것이요, 바울이 이것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바울 신앙은 그실 아브라함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스데반이 먼저 들춥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할 때에 먼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합니다. 아주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긴 역사를 한눈에 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론, 그 맥락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약속이 있고 명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순종, 믿음이 있습니다. 약속, 명령, 순종 - 이렇게 해서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성 이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에 복 그대로를 현장에서 주시지 아니하고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요샛말로 바꾼다면 여러분이 많이 쓰는 말로 '현금으로 주지 않고 어음으로 주었다' 그 말입니다. 약속어음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어느 시각에 가서야 돈입니다. 현재는 돈이 아닙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어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당장 돈을 주시고 자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부귀영화를 주시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약속이었습니다. 축복이 약속으로 온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어야지요. 미래적인 것이지만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땅이요 자식이었습니다. 땅을 주겠다, 자식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본문에도 나타난 것처럼 우선 발 붙일만큼의 땅도 주시지 않았어 요. 일생을 나그네로 순례자로 살다 갑니다. 그러면 참 땅이 어디냐, 이것입니다. 땅을 주신다는 데 어떤 땅을 말씀하심인가 - 오늘도 이것은 수수께끼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아직도 이 말씀을 믿고 지금도 '이게 우리 땅'이라며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습니다. 2천 년 동안이나 남의 손에 빼앗겼던 땅을 이제야 찾아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 하는데 영수증이 있어야지요. 땅문서가 있어야 뭘 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데,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냐, 그 말입니다. 2천 년 전에 빼앗긴 땅을 이제 와서 너희 것이라 하는데 그래서 너희 것이냐 - 그리하여 땅 문제는 오늘까지도 숱한 말썽을 빚고 있는 터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는 자식의 문제인데, 자식을 주신다고 했으면 당장 주시지 아니하고 성경대로 보면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주십니다. 말이 25년이지 이것 기다려내기가 쉽습니까? 그러면 다시 말씀 드립니다. 미래가 현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와 약속이 성취되는 그 시각과의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이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사건이 사건화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당장 주시지 아니하고 이렇듯 미래에 주시는 것일까요? 준비해야 될 것 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키워야 하고, 아브라함의 의식도 아브라함의 철학도 아브라함의 세계관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후에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또 엄격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만 말씀하셨지 어디로 가라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약속만 믿고 가라, 하셨습니다. 둘째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고향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보금자리였습니다. 지금처럼 질서 있는 사회가 아니었거든요. 고향 떠났다가 이방 땅에 들어가는 날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맞아 죽을는지 몰라요. 그렇게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입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떠나라, 친척을 떠나라 하십니다. 왜입니까?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유는 그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방 땅에 사는 것이었습니다. Stranger - 낯선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교적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친한 자들 속에가 아니라 오히려 낯선 자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선교사 제1호가 아브라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자식이 없는데 자식을 주리라, 믿고 떠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약속에 대해서 좀 생각해봅시다. 약속은 확실히 미래적인 것입니다. 수평적인 약속이 있고 수직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나와 너,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약속하는 것은 수평적인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로 약속하는 것과 같이 수직적으로 약속하는 거의 대표적인 것은 유언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자식보고 하는 약속입니다. 약속이라기보다는 명령입니다. 요새 보아하니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결혼했다가도 이혼하고 합니다. 약속이 파기되고 버려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속도 이렇게 파기됩니다. 해약됩니다. 그러나 도무지 해약할 수 없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언입니다. 유언한 자가 세상에 없는데 어떻게 해약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수직적인 약속입니다. 해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고향 떠나겠느냐? 떠나려면 떠나라, 동으로 가겠느냐 서로 가겠느냐? - 이렇게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가라, 주리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일방적이지요. 유언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라, 안 믿으면 내 자식이 아니다, 그러고 눈감으면 그만입니다. 그게 유언입니다. 이것을 나는 '그거 취소합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어서 효력을 발합니다. 히브리서 916, 17 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 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사실입니다. 죽음으로 sign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 약속을 지키는 자에게만 그 혜택이 돌아갑니다.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는데 상대방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무효입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지키는 자에게만 약속의 효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발효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약속으로 말미암은 모든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알지도 못하고, 이 약속을 따르지도 못하고, 이 약속을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 상관없게 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 은 많은 생각 끝에 이 약속을 수평적 약속이 아닌 수직적 약속, '디아데케이'라고 번역했던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estament가됩니다. Testamentpromise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promise는 일반적인 약속입니다. Testament는 말 그대로 유언이라는 뜻입니다.

Last word입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 낱말이 '브리트'입니 다. '브리트'라는 말에 대하여 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약 속, 언약을 말할 때에는 '카라트 브리트'라고 쓰인 경우가 단연코 많습니다. '카라트'는 자른다, 쪼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잡아다 놓고 반을 딱 쪼갠 뒤에 그 갈라놓은 사이로 두 나라의 대표가 지나가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여기에는 이 약속을 어느 한쪽이 어기게 된 다면 짐승을 갈라놓은 것처럼 갈라놓을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절대로 깨서는 안됩니다.

그런 뜻으로 이러한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이 비슷한 상징이 창세기 15장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약속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시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을 하십니다. 이 약속을 네가 믿고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혜택이 그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2)"라 고, 약속과 함께 혜택을 보증해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약속을 지키면 네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하고도 엄청난 혜택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여러 차례 이러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도, 아브라함이 자식을 얻을 때에도, 특별히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 앞에 이삭을 바칠 때에도 이 약속이 있었습니다. 네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리라----엄청난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약속에는 명령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이냐, 그 말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일생 전부가 믿음 그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적 믿음을, 다시 말해서 기독교 적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주관적입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병 나을 줄로 믿습니다, 돈벌 줄로 믿습니다, 합격 할 줄로 믿습니다 -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 대한 수용적 자세가,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객관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 약속에 대한 주관적이고 진실한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전적인 위탁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될 줄로 밉습니다, 복 받을 줄로 믿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주십사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가다가도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면 돌이켜 그 뜻을 따랐습니다. 받아들이기가 힘든 말씀일지라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 라의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인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 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옳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렇게 율법적으로, 양심적으로 깨끗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북한말로 '전적으로 접수'했습니다. 접수하다, 참 좋은 말인데 북쪽사람들이 쓰니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북경에 갔을 때에 한 가정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설교가 끝나자 어떤 분이 벌떡 일어서서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시다" 하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순종입니다. 확신이 아닙니다.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고, 가라고 하시면 갑니다. 다시 돌아 오라 하시면 ""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버려라 하시면 버립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왜입니까?" 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 순종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오래 오래 기다립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소망적이요 미래적입니다. 당장 받은 것은 얼마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먼 미래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보 다 먼 미래, 그에게는 이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땅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사라가 단산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것을 믿고 25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들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은 참 너무하셔,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너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아브라함은 '아멘' 할 따름입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절대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시니 떠났습니다. 철저히 자기 지식의 판단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때로는 떠나라는 말씀 속에 모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주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사방에 블레셋 사람이 있고 애굽사람이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었는데도, 엄청난 모험이 도사리고 있었는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감행했습니다. 가라 시면 가고 오라 시면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고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또한 그는 조급하게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오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내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먼 훗날에, 나 죽은 다음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 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6)." 아브라함은 발 붙일만큼의 땅도 갖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을 찾아 평생을 나그네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분명히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에 조금도 이 땅에 대해서 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의 약속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생전에 안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믿었는데 그 후손들은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결국 믿음 없는 그 후손들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새겨두고 순종하면서, 기다리면서, 인내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에게도 종종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 하셨는데도 흉년이 들자 그 잠시를 못 참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 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이에 대하여 언약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을 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 백 년 동안 종살이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견디었어야지요. 가긴 어디로 갑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간 것은 잘못 입니다. 애굽으로 가다가 자기 목숨도 잃을 뻔하고 아내 사라마저도 뺏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하나님께서 보우하심으로 무사히 돌아왔지만요. 어쨌든 땅에 대한 그의 믿음이 한번 휘청한 순간이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자식을 10년 동안 기다리다 지쳐서 하갈이라는 여종을 첩으로 취하게 됩니다. 외도를 하게 됩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노라 약 속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치 아니하시고 거듭 자식을 주겠노라 약속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하고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18장을 보십시오. 세 천사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 이 있으리라(10)"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과 사 라가 나이 많아 늙어 사라의 경수는 끊어진 지가 오래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오죽 기가 막혔으면 사라가 장막 문에서 이 말씀을 듣고 웃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는 믿음이 부족해서 웃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 웃기시는구먼' - 그래서 웃은 것입니다. '경수가 끊어진 지가 언젠데 아이를 낳는다는 말인가'하고 웃은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 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3, 14)" 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라는 두려워서 자신이 웃은 일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아마도 사라는 겁이 많은 여인이었던가 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그 때에 저 같았으면 "믿음이 부족한 여자야, 왜 웃느냐? 아들을 주리라고 약속한 것 취소하겠다"하고 말 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실 뿐, 그 잘못을 눈감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약속하십니다. "기한 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이것은 일방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마지막 말씀을 믿었습니다. 엄청난 시간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부활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을 깨닫고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5:9)"하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생산능력에 대하여 사라는 죽은 것과 같은 존재입니다.

부부관계가 없는 지 이미 오래고, 단산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러 한 믿음이 부활을 믿는 신앙이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울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준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 바울 신앙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4:9)"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4:2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2:23)"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아브라함의 불신과 잘못과 휘청거렸던 일을 다 용서해주십니다. 나아가 의롭다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엘 샤다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하십니다.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이 들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참된 믿음을 꿰뚫어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논조입니다. 그리 고 바울에게 넘어가서 이것이 바울 신앙의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아브라함의 믿음 그대로가 크리스찬의 신앙 모델이 되 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지 궁금하거든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 약속을 믿고, 나그네생활 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끝까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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