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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한복음 21장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우리는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공부해왔습니다. 오늘 삼십오 회로서 그 공부를 마치게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성경에 나타난 대로만 보아도 이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마는 성경에 뚜렷하게 기록된 것만 추려서 생각하는 가운데 각각 특징이 있는 것을 취급해보았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 써놓은 책들을 보면 대개 서른 가지 내지 서른세 가지 정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예수님의 이적은 단순히 그 사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 사건은 하나의 계시적인 사건이요 말씀 자체라는 것입니다. 귀로 듣는 말씀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말씀이요 몸으로 체험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사건을 계시로 읽을 줄 아는 안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 마지막 이야기에까지 오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 마지막 이적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론삼아 이루어진 것이요, 이 이적으로 말미암아서 그 다음에는 제자들을 통하여 그 이적이 다시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집 상으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적이 마지막 이적이 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서 행하신 이적 중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부활 이후의 유일한 이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귀한 역사를 인계하시는, 맡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또 이적을 행하며, 표적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물고기 잡는 이야기올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꼭 이적이라고 꼬집어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린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물고기 못 잡아서 애쓰는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한마디하시고, 그래서 던졌더니 많이 잡았다-이것은 어찌 보면 이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엄청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계시적 사건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똑같은 이야기,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도 역시 베드로가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밤새껏 물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고, 맥이 빠져 아침에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 현실적으로는 이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상황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물고기를 주로 밤에 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낮에 그물을 던지라시니 상식적으로 당찮은 일이요, 거기다가 이미 그물을 다 씻은 다음입니다. 밤새껏 수고한 그물을 다 씻어서 일껏 정돈해놓았는데 다시 던지자니 달가울 리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반드시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못잡을 게 뻔하니까 베드로가 궁색한 소리까지 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밤을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말씀을 하시니)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 : 5)." 이렇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잡고 못 잡고의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하시니까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생각해서 일단 그물을 내리기는 하겠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그물을 내렸더니 보십시오. 그물이 찢어질 만큼 잡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고 맙니다. 여기서 확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나를 따르라" 하신 적도 있고 예수님과 동행한 때도 있었던 듯합니다마는 내 사생활을 모두 내버려두고 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물고기 잡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업의 실패로 비롯되어 주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업의 성공으로 비롯되어 따르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우리들 가운데도 이를테면 이 사업 저 사업 다 해보고 안되니까 '나도 목사나 할까?'하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안되니까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고 말이 좋아 하나님의 일 한다고 나서는데, 이게 될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고기 아무리 잡아도 안 잡힙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에잇, 이거해서 먹고살기는 다 틀렸다. 주님이나 따르자." 하나님은 이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물고기는 넘치도록 잡았습니다. 밤새 못 잡았다가 지금은 횡재를 했습니다. 이 푸짐한 물고기를 내버려두고 따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기를 바라십니다. 실패하고 병들고,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니까 '이젠 주의 일이나 하자'하고 나서는 것 원치 않으십니다. 끝물 따는 것과도 같이 좋은 것은 다 제가 가지고 마지막에 가서 못 쓸 것이나 갖다바치겠다는 격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의 의미가 그렇게도 소중할 수 없어요. 물고기를 못 잡고, 완전 실패를 하고, 그래서 손들고 나와 주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요. 만족하게 잡았습니다. 만선(滿船)입니다마는 자진해서 버려두고 나섭니다. 그 가치를 다 부정해버리고 나섭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귀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긴 합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따르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주의 일 안하고 천방지축하다가 병들면 그제야 아이구, 이제라도 주의 일 하라시는가 보다 합니다. 병들어 가지고 무슨 일 하겠습니까? 병들었다가도 건강해진 다음에,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가도 돈번 다음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스스로 다 버려 두고, 스스로 부정하고, 마침내 기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설 때,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물고기 못 잡고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잡았으며, 잡은 물고기를 내버려두고 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또다시 갈릴리로 갑니다. 다시 밤새 한 마리도 못 잡고 있다가 이번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기를 잡습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실 때까지도 그는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한번 던져보지 뭐, 될는지도 모르지 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정말 기대 이상으로 백쉰세 마리나 잡았습니다. 자, 이렇게 잡았지마는 그물을 내버려둔 채 끌어당길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 일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다 내버리고 이제야말로 참된 예수님의 제자, 사도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에서 물고기 잡았다는 사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주를 따르고 주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이적입니다. 이적 중에서 가장 귀한 결론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물고기 잡게 하시는 장면을 보면 하나 하나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예수, 살아 생전의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지금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인데 부활하기 전의 예수님이나 부활하신 다음의 예수님이 똑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니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절)"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똑같으니까, 십자가 지시기 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더라고 말씀합니다. 너무나도 확실하니까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또 다른 주제는 곧 부활사건의 현실성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생전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입니다.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그 모습이 살아생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런 관계로 이어지면서 나타나셔서 그로써 부활사건을 역사적인 사실로 확실하게 설명해준다는 것이 본문 내용의 뜻입니다.
그리고 일곱 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2절). 부활하신 이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제자들 앞에 세 번째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3절)에 보니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합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만났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부활사건과 나와의 관계가 이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부활하셨으니 어쩌라는 것인가? 예수님이 부활했으면 했지, 그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2천년 전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셨다는 이야기가 백번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과 내가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건과 나와의 관계,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할 때에 '역사적 사건과 신앙 사건'이라는 말을 씁니다. 'historical event, a faith event'-어떤 사건이든지 내가 믿지 않을 때에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사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사건이 사건화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달나라 갔다온 사람이 있다 할 때에 그 사실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사건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픈데, 약을 먹으면 낫는데, 누가 그 약을 준다 할 때에 내가 낫지 않는다며 그 약을 안 먹으면 그 약은 끝까지 나와의 관계에서 낫는 약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 중에서 제일 고쳐 생각하기 어려운 의심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오늘이라도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보고 "당신이 정말 내 아버지요?" 이렇게 한번 심각하게 물어보십시오. 이거,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믿고 사니까 그렇지 일단 그것을 의심하기로 든다면 믿음을 가질 만큼 그것을 증명해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믿고 사니까 그 믿음 위에다가 믿음을 쌓고 다시 그 다음 믿음을 세워서 질서를 유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지 않으면 그것이 내게는 사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그 역사적인 사건과 나와의 관계는 특별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활절 때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부활절과 오순절이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활절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부터는 이 부활 사실이 나에게 믿어지면서 비로소 그 사건과 나와의 관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한다, 그가 첫 열매 되었으니 나도 부활할 수 있다-이렇게 나의 부활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순교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하나 믿고 내가 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기 때문에 순교합니다. 이 관계가 오순절부터 이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나섭니다. 물고기를 잡아야 먹고사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 베드로가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영광을 받았고 나는 이대로요, 나는 나대로인데다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비참한 존재가 뭘 하겠습니까,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지요-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고 나서지만 아마도 베드로는 마음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어쩌다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 하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을 만나보기야 했습니다마는 다시는 저를 찾지 말아 주십시오. 나 같은 제자 두었다가는 예수님께서 망신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나 베드로는 사양합니다, 제자, 더구나 수제자라고들 하지만 저는 사양합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갑니다-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일이 못내 걸립니다.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저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기 쉽습니다.' 베드로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내가 실수해서 세 번 모른다고 했지만 그것은 과거입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까지 만나보았으니까 이제는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 잘못한 것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내 일생에 이런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라고 쉽게들 맹세합니다마는 이처럼 어리석은 맹세가 없습니다. 지난날의 일을 내가 후회합니까? 똑같은 일이 앞으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겸손해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겠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여기서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난날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맹세할 수 있다면 왜 물고기 잡으러 가겠습니까? 도무지 그 말을 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압니다. 앞으로도 시험이 있으면 넘어질 것입니다. 앞으로도 또 누가 와서 "너는 갈릴리사람이다"라고 을러메면 또다시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기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의 본질, 나의 나약한 모습을 꿰뚫어본 것입니다. 이러고야 어찌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제자의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따릅니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지난날에도 그들은 베드로가 "다 부인할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맹세할 때에 "나도" "나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심리 상태에서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제대로 잡히겠습니까? 심리 상태가 불안하고 편안하지 않거든요. 그런 어수룩한 사람들한테 잡힐 물고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일, 예수님을 떠난 일 해서 이것저것 착잡한데다가 물고기까지 못 잡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마음이 상해 있는 판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멀리 서서 흔히들 추리하듯 아마도 안개 속에서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림으로도 그렇게 그린 사람이 있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저쪽 언덕에 선 사람이 "여보시오, 거기 오른편에다가 그물을 내려보시오."하고 소리칩니다. 그래서 이판사판으로 오른편에 그물을 내려보았더니 웬걸, 많이 잡혔어요. 날이 밝아왔습니다. 밝아지면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이렇게 이름을 숨겼지만 아마도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그 제자가 "주님이시다" 소리칩니다. 보십시오. 그 순간에 베드로가 옷을 걸치고 달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동은 베드로가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요한은 스스로 이름을 숨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좋은 일 할 때에, 선한 일 할 때에, 남보다 조금 더 나은 일할 때에는 되도록 내 이름을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신문 지면에 잘난 내 얼굴 내밀려고 돈푼을 들고들 나서니 문제가 많습니다. 나 장한 일했습네 하고 기자회견부터 서두르는 세태입니다. 제발 그러지들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교인들은 그러면 못씁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참 어렵게 사는 분인데, 그렇게 넉넉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분이 삼 년 동안이나 계를 들어서 삼 백만 원을 타 가지고 안구은행(眼口銀行)에 갔습니다. 눈 못 뜨는 사람으로 돈 있으면 눈뜰 수 있는 사람들 눈 좀 뜨게 개안수술을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원장님이 고맙다며 받았습니다. 받고는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름은 알 것 없어" 대지 않으니까 원장이 자꾸 대라고 조릅니다. 권사님은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소망교회 권사라는 것만 아십시오." 이름은 끝까지 대지 않았습니다. "선한 일에 내 이름을 왜 댑니까?"하고는 돌아 나와버렸습니다. 돌아온 다음에 그 원장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원장님,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우리 안구은행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가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고 돌아간 분은 이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더니 한소리 더 붙입니다. "소망교회 교인 참 잘 키워놓으셨더군요." 턱없이 제가 영광을 얻은 셈이 됐습니다. 좋은 일 하고 내 이름 대지 않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멋입니다. 멋진 멋이지 않습니까? 참 좋은 권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여러 차례 이와 같은 멋을 보입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 보면 여러 번 대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체포되던 날 밤, 베드로는 저 밖에서 숯불을 쬐고 있었고 요한은 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을 쓰면서도 요한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만 "또다른 제자가 저들과 안면이 있어서 안에까지 들어갔다"라고만 말합니다. "베드로는 바깥에 있었지만 나는 안에까지 들어갔노라"-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무덤에 갈 때에도 요한이 먼저 갑니다. 그 대목에서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의 사랑하는 그 제자"라고만 말합니다. 21장 끝에 가서도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길에 앉아서"라고만 말하고 맙니다. 자기 이름에 대해서는 늘 익명으로 언급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맨 먼저 알아본 이가 요한입니다. 알아보고 말한 이는 요한이요, 달려간 이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도 무덤까지 달려가기는 요한이 먼저인데 그는 들여다보기만 했지 무덤에 들어간 이는 베드로입니다. 묘하지 않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나는 요한이 베드로한테 양보한 것이라고 보고 싶어요. 이게 좋은 마음입니다. 요한이 먼저 알아보고 "주시다"하면서 앞서 뛰어나가지, 더구나 젊은 사람인데 왜 베드로가 뛰어나가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늘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각성시켜주면서 좋은 일을 할 때에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다른 사람을 내세웠어요. 그지없이 아름다운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보면 "주시다"라고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말했지마는 겉옷을 걸치고 물에 텀벙 뛰어들어간 이는 베드로다, 역시 베드로는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명예를 양보하는 마음, 의를 양보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선한 일 할 좋은 기회가 있어도 그 일 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일단 그 사람이 먼저 하게 하고 나는 뒷전에 서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에 요한은 백 세가 가깝도록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 있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지 않았나 싶습니다.
7절에 보면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물에 뛰어내릴 것이면 옷을 벗고 뛰어내릴 것인데 오히려 입고 뛰어내렸다 합니다. 그 행위는 곧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예의를 갖추는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마음에 이제는 물고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잡아놓았지만, 그리고 그게 얼마 만큼인지, 그걸 팔면 얼마나 될 것인지, 잡은 고기는 일단 팔아서 용돈 해 가지고 예수님 따르지-그런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버려 두고 따르겠다, 돈벌었지만 버려 두고 미련[없이 주님을 따를 마음이었습니다. 이것도 아름다운 이야기 아닙니까? 특별히 본문을 다시 한번 보면, 예수님께서 미리 물고기를 잡아다 갖다놓고, 거기에 떡도 있고 숯불도 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와서 조반 먹어라"하십니다. 저는 이 대목에 참 아름다운 휴머니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 있는 물고기나 지금 있는 떡도 예수님이 어디서 가져오셨다기 보다는 이적으로 있는 것 같은데,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아예 배고프지도 않게 하시면 되지 왜 굳이 받아먹으라고 하시는가? 그래서 휴머니티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장하다는 문제와 이적과의 인간성적인 관계를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이적을 행하실 바에는 있는 것 가지고 끝났으면 됐지 다른 것 또 가지고 오라 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적을 과장하거나 과시하고자 하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은 이적으로 채우고, 가능한 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채우기를 바라십니다.
흔히 우리는 될 수만 있으면 인간적인 일은 다 제쳐놓고 이적으로만 채우기를 바랍니다. 전부 다 주님이 해주시기만 바랍니다. 전부를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만 바라는 경향이 있으나 그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의 본문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부분은 당신이 하시고 나머지는 자연스러운 방법을 통해서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라십니다. 희떱게 이적을 과장하시거나 능력을 과시하시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본문의 요점은 이러한 식사시간에 "당신이 누구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감히 물어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식사가 끝나자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하십니다. 일찍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할 때에는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내 교회를 그 반석 위에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네가 세우리라"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렇게, 도망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엄청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 말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물고기 잡으러 왔느냐? 물고기는 잡을 수 있어. 오늘 못 잡았으면 내일은 잡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양은 누가 먹여야 되겠느냐'하신 것입니다. '네가 물고기나 잡고 있으면 내 양은 누가 먹이겠느냐? 너는 내 양을 먹여라.'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숯불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에 숯불을 쬐고 있었지요? 그 숯불을 생각나게 해주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같은 물음과 명령을 세 번 반복하신 것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들 연계해서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하고 여기까지 도망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실패의 원인이, 사명의 길에서 실족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씀 속에는 이런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깨쳐주려 하심이었습니다. '장담은 했는데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뿐이니라. 네 의지를 믿을 것도 아니고 네 결심을 믿을 것도 아니고 네 지혜를 믿을 것도 아니다.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가 맡겨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베드로는 걱정이 많습니다.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주저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따르기만 해라.
사랑하기만 해라. 순종만 해라. 그러면 네가 맡은 사도직, 네가 맡은 사명,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지레 걱정할 것 없다. 나를 사랑하고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라.' 이렇게 이적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끝까지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어찌하여 물고기 잡으러 왔느냐'하고 문책하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주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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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은사〈고린도전서 12장 31~13장 3절〉 (0) | 2024.03.17 |
값진 진주 비유(마태복음 13:45-46) (0) | 2024.03.17 |
거듭남의 뜻(요 3:1~13) (0) | 2024.03.17 |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0) | 2024.0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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