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기독교를 가리켜서 일부에서는 "박애주의(博愛主義) 종교다 또는 무저항주의 종교다"라고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본문 때문입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고, 오 리를 가자 거든 십 리까지 가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라는 이 말씀들이 얼핏보기에는 무력하게 느껴져 무저항주의로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는 결코 단순한 무저항주의나 박애주의가 아닙니다. 구태여 이름을 붙여 말한다면 신앙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에서 신앙적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악에 대해 무조건 무저항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옛 법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법을 새롭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옛 법을 말씀하시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다"라든지, "간음하지 말라"는 법에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라고 해석을 덧붙이셨습니다. 역시 이 본문에서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옛 법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이야기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가령, 누가 나의 눈을 상하게 하면 나도 그의 눈을 상하게 하고, 실수로라도 그가 나의 이를 부러뜨렸다면 나도 그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입니다. 이 법은 출 21:24, 레 21:20, 신 19:21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이 법을 렉스탈리오니스(Lextalionis)라고 합니다. 렉스탈리오니스는 보상적이고도 보수적인 율법이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문화사를 읽으면 함무라비(Hammurabi: B.C 2285~2242, Babylon통치) 법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법전에도 렉스탈리오니스의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의 법이 구약과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되어 있다 해서 일부 사람들은 구약이 함무라비 법전에서 왔느냐, 함무라비 법전이 구약에서 왔느냐고 서로 연결 지어 생각하려고 합니다. 두 법이 같다는 것만으로 서로 연결 지어 억지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같은 예로, 불교의 팔만대장경에서도 기독교의 십계명과 같은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경이 구약으로부터 왔다고 하겠습니까, 또는 구약이 불경으로부터 왔다고 하겠습니까? 억지로 서로 연결 지어 관계성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함무라비 법전과 구약의 내용은 얼핏보기에는 같은 말 같지만, 잘 살펴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이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사가 신사의 이를 부러뜨렸을 때에는 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려라, 또 신사가 신사의 갈비뼈를 부러뜨렸으면 그 사람의 갈비뼈도 부러뜨려라. 그러나 신사가 천한 노동자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은한 닢만 주라"고 신사와 노동자를 차별하고 있습니다. 같은 수준의 사람일 경우에는 공정하게 이는 이로 갚지만, 신분이 다를 경우에는 이 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로서 성경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해 차이를 두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에 대해 출애굽기 21:23-25을 보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에 이어서 십계명을 좀더 자세하게 풀이한 내용으로 십계명 해석편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대로 눈을 상하게 하고,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불에 데인 것은 데임으로 공정하게 갚으라는 말입니다. 이 법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것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입니다. 요즈음도 가끔 뉴스를 통해 봅니다만 유대사람들의 복수작전은 틀림없습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했다 하면 당장 목숨 걸고 복수합니다. 이것은 곧 율법이므로 복수 이외에는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슬람의 율법의 기초도 렉스탈리오니스이므로 도적질한 자에게는 그대로 손을 자르는 처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는 도둑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유혈적인 엄한 율법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이를 상하게 했다고 해서 이를 빼고, 불로 데였다고 해서 그대로 불로 데이게 하는 처사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법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기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법은 복수의 제한성을 말해 주고있습니다. 가령, 내가 매를 맞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장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문제는 한 대 맞았는데 나는 두 대, 세 대 때리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은 제동을 거십니다. 한 대 맞았으면 반드시 한 대만 때리라는 제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복수심이란 언제나 내가 당한 그것보다 가중하게 갚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작은 싸움이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 욕을 먹고, 한 마디로 대응하기란 어렵습니다. 적어도 다섯 마디 이상의 욕을 해야 속이 후련하고, 그래야만 갚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의로써 한계가 분명합니다.
둘째로, 이 법은 개인적인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대 맞았다고 해서 내가 바로 한 대 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재판장에게 주어진 형법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대 맞았으면 고발하여 재판장이 불러서 너도 한 대 맞아라는 재판장이 시행하는 형법인 것입니다.
즉, 형의 한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누구도 개인적으로 복수할 권리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맞았다고 해서 내가 그를 때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빼앗겼다고 해서 내가 남의 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간혹 보면 내가 사기 당했다고 해서 엉뚱한 사람에게 가서 사기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개인적으로 복수 권한이 없습니다. 다만 관가에 고발해서 법으로 하여금 공정한 법을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 법은 하나의 민법으로서 일종의 경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생각나는 예화가 있습니다. 뉴질랜드 가까이 솔로몬 아일랜드라는 곳에 피지족속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중앙에는 언제나 피가 흐르고 있는 킬링스톤(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여기는 사형이 집행되는 곳입니다. 사형할 죄수를 꽁꽁 묶어서 이 바위로 끌고 와, 머리를 바위에 찧게 해서 죽이는 비참한 처형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바위에는 항상 피가 묻어 있는데 누구도 그 피를 닦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동네 한 가운데 있는 그 피바위를 보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를 받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잔인하고 야만적이기는 하지만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들에게도 좀 자극적인 경고가 필요합니다. 이 피지족에게 파송된 한 선교사는 그 사람들에게 세례식을 할 때, 바로 킬링스톤 앞에서 행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여기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보다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이 장소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의미는 모두가 경고장입니다. 절대로 남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이 법은 옛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유혈적이고 복수적이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레 19:18이나 잠 24:29절등 여러 곳에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심지어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들도 어디까지나 옛 법을 소개하며, 옛 법은 그러한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옛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 법과 새 법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일이 있으면 그 순간에 내 이도 부러져야 함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의 이가 남의 이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순간 내 이도 부러져야 하므로 남의 이는 곧 내 이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법의 기초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 역시 표현 방법은 다릅니다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보려는 똑같은 내용입니다. 내가 남의 팔을 부러뜨렸다면 그 다음에는 내 팔이 부러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남의 팔은 곧 내 팔이요 남의 아픔은 곧 내 아픔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귀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그를 받들고 위해 주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점점 크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동네 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때려서 곧잘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라고 나섰습니다. 그 날도 이 외아들은 같이 놀던 친구를 별 이유 없이 심하게 때렸고, 이것을 본 청년은 그를 불러 사정없이 몇 대 때렸습니다. 그리고서는 매맞은 느낌이 어떠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비록 친구를 때렸지만, 이 청년에게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얻어맞았으니 억울하고 분하고 아프기도 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남을 때리기만 했지 맞아 보기는 처음이니 맞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 느꼈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친구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을 때릴 줄만 알면 어찌합니까? 맞아서 아픈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가 부러지는 것으로 연결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여기서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과,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똑같은 의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표현이라면, 또 하나는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표현으로 문화권의 차이에 따라 표현의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필자는 법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습니다만 법은 표현에 따라 상당히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가령,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사형법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문화권에 따라 사형법을 없애도 좋을 나라가 있고, 또 그 법이 없으면 정말 질서 유지에 곤란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이 나쁘다고 그 법만 나무랄 것이냐, 아니면 여기에 인도주의를 걸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 문화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 방법을 보면 자식이 어릴 때는 매를 사용하되, 장성하게 되면 매를 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매로 키우고, 점점 자라면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아이의 수준에 따라서 사랑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정적으로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훈계하고, 일단 자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에 따라서 표현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의 부정적인 표현일 뿐 내용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설명되는 내용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옛 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내 눈이 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또는 내 이가 부러질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이 법을 지키게 되지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는 기뻐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그를 때렸다가는 나도 얻어맞을 것이니 때리지 않는 것과, 그를 사랑하여 그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므로 때리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가 예수님의 교훈으로 오늘 세 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 : 39) 대단히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 윌리암 버클리의 해석이 있어, 꼭 긍정하고 싶은 내용은 아닙니다만 재미있는 해석이라 여기 소개합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 주어라는 말에서 조금 깊이 생각하면 때리는 사람이 오른 손잡이냐 왼손잡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잘못으로 어떤 사람의 오른 뺨을 때렸다고 합시다. 그는 억울해서 고소하여 재판장 앞에 두 사람이 섰습니다. 재판장은 내가 그의 오른 뺨을 때렸으니 벌을 내릴 때에도 나의 오른 뺨을 때려야 하는데, 불행히도 그는 오른손잡이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오른손으로 나의 오른 뺨을 때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손등으로 때리면 오른 뺨을 때릴 수 있지만 랍비의 교훈에 보면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배로 아프다고 되어 있어, 이것은 율법에 저촉이 됩니다. 그래서, 손등으로 때릴 경우에는 때리는 강도를 절반으로 줄여서 때려야 하는 복잡하고도 까다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에, 그로 하여금 오른손으로 반드시 나의 오른 뺨만 때릴 수 있도록 할 것이 아니라, 대신 왼 뺨을 대어 주라는 해석입니다. 쉽게 말하면, 까다롭게 굴지 말고 상대방이 편리하도록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맞아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때렸으니 나도 맞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순한 마음으로 기쁘게 당하라는 윌리암 버클리의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형벌을 될 수 있으면 기피하거나, 되도록이면 감해 보려고 기회를 엿보지는 않습니까? 이런 자세는 회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하나라도 두 개의 형벌이 오면, 뉘우치는 마음에서 달게 받아야 합니다. 나에게서 얻어맞은 사람이 그보다 더 심하게 나를 때려야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잘못 해석하면 엉뚱한 오해를 일으켜서 문제를 더 확대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누가 나의 뺨을 때렸는데, "이 쪽도" 하며 뺨을 돌려댄다면 어찌되는 것입니까? 쉬운 예로, 부부 싸움 도중에 화가 난 남편이 자기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이 쪽도 때리라"고 뺨을 돌려 대면, 이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반항입니까? 이런 자세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싸움을 확산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행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숨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형벌을 감하려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또한 복수하는 마음이나 분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고 오직 뉘우치며 회개하는 자세로 겸손하게 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 여기서는 송사 하는 상황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상대가 옷을 공짜로 가지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먼저 잘못했기 때문에 그가 고소해서 나의 옷을 불가피하게 내놓아야 할 형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먼저 그의 옷을 빼앗았기에 이제 내가 벗어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 때에 그가 요구하는 속옷만 주지 말고 겉옷까지 주라는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얇은 메리야스 같은 것을 떠서 속옷으로 입고 겉옷은 두터운 담요 종류로써, 누우면 이불이고 일어나면 겉옷이 되는 모양의 옷을 입고 다닙니다. 겉옷은 주로 몸에 휘감고 다녔는데 대단히 비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서 송사의 문제로 속옷을 요구할 때 속옷에서 머물지 말고 겉옷까지 주는 마음을 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벌을 받는 입장에서 시비를 벌이거나 벌을 감하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두 배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빌리거나 얻을 때는 후하게 얻고 싶고, 줄 때는 인색하게 주려는 옹졸함이 있습니다.
셋째,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며", 이왕 가는 것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되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 주라는 말입니다.
이상으로 말한 세 가지 해석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것과, 둘째는 우리가 송사에 걸려 있다는 조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대어 주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도 주어서 자기의 잘못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공짜가 좋아서 거저 달라고 하는데 다 벗어 주고, 잘못도 없이 오른 뺨을 맞았는데 왼쪽까지 돌려댄다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때리는 죄를 하나 더 짓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한 경우인가 아닌가를 분명히 알고 이 본문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이 말씀 때문에 박애주의다 무저항주의다라는 오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3)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전에 보았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 5:39)는 말씀과 연결하면 매우 귀한 교훈이 됩니다. 즉, 악한 자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구할 때 이를 거절하여, 악한 자 때문에 나까지 악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는 이유는, 악한 자를 대적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까지 악해진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손해입니까? 심지어는 악한 자를 대적하다가 내가 그보다 더 악해지고 그래서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됩니다. 상대방의 악이 나에게로 와서 내가 악해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남이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같이 그를 미워하면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리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시나 정말 필요해서 누군가에게 꾸러 갔다가 거절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꾸지 못하고 돌아서는 마음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 아픔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꾸어 주는 입장에만 있지 말고 꾸고자 하는 입장에 서서 그 마음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여겨서, 꾸고자 하는 자를 물리치지 말아야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거절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이웃의 기분을 내 기분처럼, 즉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율법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박해하는 자도 저주하지 말 것이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할 권리와 긍휼히 여길 의무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깊은 뜻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 생활에 옮길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값진 진주 비유(마태복음 13:45-46) (0) | 2024.03.17 |
---|---|
거듭남의 뜻(요 3:1~13) (0) | 2024.03.17 |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 7:15~23) (0) | 2024.03.17 |
거울 비유(고린도전서 10:1-11) (0) | 2024.03.17 |
검과 원수(마태복음 10 : 32 - 38) (0) | 2024.03.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