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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 나라의 뜻(요 18:28-38상)

by 【고동엽】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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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의 뜻(18:28-3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앞에서 공부한 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예수를 체포한 가야바의 군사들은 예수를 제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고, 다음 가야바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갔다가 다시 가야바에게 와서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갑니다. 이렇게 새벽에 여러 곳을 끌려다니며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는 몇 가지의 모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 재판인지 알 수가 없는 재판입니다. 사실 이 재판은 보통 죄가 아닌 사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불투명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체포하기도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그럴듯하게 누명을 씌워 합법적인 것으로 위장하려 하는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을 해서 죄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한 결과에 죄를 맞추는 불법 재판이란 말입니다.

둘째는, 새벽에 재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법에는 절대로 밤에 재판을 하지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여러 가지로 감정이 흔들리기 쉬우므로 반드시 재판은 낮에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판을 낮에 했다가는 그의 추종자들 때문에 폭동이나 데모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새벽에 일사천리로 진행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밤중에 비밀 재판을 했으면 좋겠지만, 율법에 걸리므로 부득불 사람이 가장 적은 새벽을 택한 것입니다.

셋째는, 무고한 자(예수)를 죽이면서 자기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828) 지금은 유월절 기간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의 관정(법정)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관정에 출입한 것이 되어, 이것은 부정한 일로서 유월절 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고, 예수님은 안에 있어서 빌라도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재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날 무죄한 예수를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로마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 조심하여 거룩한 척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18:29) 그야말로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약대는 통째로 삼키는 외식하는 자들의 소행입니다.(23 : 24)

여기서 잠깐 이스라엘 사람들과 빌라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하에 식민지로 있는 때이라, 이스라엘 자체의 독립적인 헤롯왕이 있고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적 재판기관이 있지만 크게로는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자치적으로 죄인을 잡아 여러 가지 처벌을 하는 등 재판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사형집행만은 로마 총독의 지시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제도 때문에 빌라도에게 의뢰하여 그로 하여금 사형 집행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18 : 31)

넷째로, 또 한가지의 모순은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훼방하는 자라면, 그들 법으로는 군중들이 모여서 돌로 쳐죽여야 했습니다.(24 :16) 이스라엘의 법으로는 십자가에 못박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법이요, 역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에도 없는 십자가형으로 하나님을 훼방했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했으니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재판하는 장면으로써 다음 장까지 이어지겠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ː33)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재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기 입장에만 서서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가야바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네가 메시야냐?"고 묻습니다. 가야바는 종교인이므로 예수님이 메시야냐 아니냐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빌라도는 역시 정치가였기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왕권에 대해 관심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관심사만 묻고 있습니다.

왕국이라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은 갖추어져야만 합니다. 첫째로 백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땅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왕(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헬라어로 왕국은 바실레이아라 하고, 왕은 바실리우스로서 두 말이 비슷합니다. , 나라는 왕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곳으로서 혼자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릴 백성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갖추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잘 아는 대로 도시국가가 많았습니다. 마을마다 왕이 세워져서 나라가 생겼다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면 병합해서 또 하나의 나라가 생기곤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왕을 중심으로 해서 왕이 둘이면 두 나라고, 왕이 셋이면 세 나라가 되어 심지어 성경에 보면 분봉왕이라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한 나라를 나누어 세 사람이 다스릴 경우 분봉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마다, 지방마다 왕(영주)이 있었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이런 입장에 있는 왕으로서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이것은 정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황제가 지명한 헤롯왕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왕이 생긴다는 것은 로마 정치에 대한 반역 행위가 되므로 빌라도 입장에서 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하며 선동을 일으키게 되면, 이것은 죽을죄가 되는 것으로 로마의 정부가 다스려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 : 36) 이 말의 뜻은, 왕은 왕이로되 영토가 다르고 백성이 다른 것으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왕은 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스림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지정학적이요, 물질적이며, 땅에 속한 것으로 시간적인 왕국이며 일시적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은 모두가 임시로, 오래가는 주권이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은, 로마 정부인 가이사 황제가 임명한 헤롯왕과 같은 물질적이요, 일시적인 그런 왕이 아니라 신령한 왕이요 영원한 왕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를 가만히 보면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특히 공관복음에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대제사장이 질투하고 음모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의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건에 휘말려 그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십자가에 못을 박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3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빌라도의 두번째 질문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 37)고 서로 의미 있게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왕으로 주권적으로 행사합니다. 우리가 세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만 가장 구체적인 의미는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선서입니다.

이민을 가는 경우에도 살고자 하는 그 나라의 시민권을 얻으려면 이민국에 가서 그 나라의 국민된 법을 다 지키겠다고 선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서를 하고 나야 비로소 그 나라의 백성이 되듯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선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표로 아주 중요한 예식이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왕이로되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모든 조건을 초월한 만왕의 왕으로서의 왕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왕의 백성으로 일명 크리스천으로 불리웁니다. 크리스천의 원래 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곧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그 백성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권하에서 절대 충성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알고 보면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마치 한 군대가 어느 마을을 쳐들어가면서 ", 회개하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지금 왕으로 섬기던 사람을 배반하고 이제부터 새로 군림하는 새로운 왕,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뜻입니다. 회개를 눈물이나 흘리고 한탄하고 후회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회개란 낡은 주권을 배반하고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여 새로운 시민이 되자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무조건 항복하고 새로 오시는 왕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은 며칠 후에 온다는 말이 아니라 벌써 여기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시간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공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문을 열고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부터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재판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왕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이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으면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꽉 차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청년이 친구와 함께 산 속에 있는 조그만 아버지 별장에 놀러갔습니다.

산 속이지만 바람 한점 없는 무더운 날씨에다 모기가 들끓어 잠자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모기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어찌나 더운지 도저히 잘 수가 없어, "모기가 들어오더라도 할 수 없다" 하고 밤중에 일어나 문을 여는데 잘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덥기는 하고 미칠 것만 같아 급한 김에 문을 깨고서는 이제 "시원하다" 하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은 그대로 있고 옷장 문이 부서져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 밤에 창문을 부수웠으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겠거니 하고 자기 생각에 집착되어, 실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빌라도도 정치가이므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제발 반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그가 이해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서 서로 전혀 다른 관점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정치가요 군인으로서 소위 로마 철학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 철학은 강자 철학으로, 강한 자가 진리요, 승자요, 의인입니다. 사실 혁명이란 승리하면 애국자요 실패하면 역적입니다. 우리도 여러 번 경험하듯이 정치 세계에서는 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누가 승자이냐에 의해 진리가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철학인데, 빌라도의 생각으로는 초라하게 붙들려 온 33살의 갈릴리 청년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기고 나서 진리를 논한다면 말이 되지만, 십자가에 죽게 된 약자의 모습으로 무슨 진리를 논하겠느냐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눈치가 없거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철학이 틀리고 수의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과 많은 힘이 진리이지 혼자서 죽어 가는 마당에 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수가 진리이지 소수는 진리일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참 진리란, 혼자서 주장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공리주의에 따라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몰리게 되고 그것이 옳게 보이며 수가 적으면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화의 함정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도저히 진리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말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의미가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물론 빌라도가 이 말을 했을 때의 그의 심정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질문 뒤에 있을 수 있는 말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3년 동안 진리를 말했는데 너와 함께 죽을 사람이 그렇게도 없더냐, 다 도망가고 혼자 와서 진리를 운운하니 우습구나"라며 예수님을 조롱하는 눈빛으로 보았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 일입니까? 이 말에는 예수님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디 엘 무디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질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한도 베드로는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적어도 바로 며칠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이 장면에서 조용하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적어도 이 시간에 나타나서 "빌라도 각하,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바로 얼마 전에 죽었다가 이 분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나사로인데, 정말 이 분은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살든 죽든 한 마디쯤 했어야 했습니다. 이 정도의 구실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필자는 이 일만 생각하면 나사로를 괜히 살려 주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가장 어려운 이 시간에 예수님 혼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조롱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난처했겠습니까? 베드로나 나사로 이하 그 많은 제자들, 고침을 받은 환자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적을 본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가 침묵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당당하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다 배반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고 진리를 알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진리란 수에 의해서나, 권세에 의해서나, 정치적 능력에 의해서나, 부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모두가 우러러보아 훈장을 주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 죄인이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고 조롱하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면 의인인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를 압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만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성령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3:6-7) 진리에 뿌리를 둔 자라야 진리를 알고, 사랑에 뿌리를 둔 자라야 사랑을 압니다. 죽은 자가 어찌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왕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한 번 더 다짐해야 할 우리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나라의 뜻(18:28-3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앞에서 공부한 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예수를 체포한 가야바의 군사들은 예수를 제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고, 다음 가야바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갔다가 다시 가야바에게 와서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갑니다. 이렇게 새벽에 여러 곳을 끌려다니며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는 몇 가지의 모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 재판인지 알 수가 없는 재판입니다. 사실 이 재판은 보통 죄가 아닌 사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불투명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체포하기도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그럴듯하게 누명을 씌워 합법적인 것으로 위장하려 하는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을 해서 죄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한 결과에 죄를 맞추는 불법 재판이란 말입니다.

둘째는, 새벽에 재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법에는 절대로 밤에 재판을 하지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여러 가지로 감정이 흔들리기 쉬우므로 반드시 재판은 낮에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판을 낮에 했다가는 그의 추종자들 때문에 폭동이나 데모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새벽에 일사천리로 진행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은 밤중에 비밀 재판을 했으면 좋겠지만, 율법에 걸리므로 부득불 사람이 가장 적은 새벽을 택한 것입니다.

셋째는, 무고한 자(예수)를 죽이면서 자기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828) 지금은 유월절 기간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사람들의 관정(법정)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관정에 출입한 것이 되어, 이것은 부정한 일로서 유월절 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고, 예수님은 안에 있어서 빌라도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재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날 무죄한 예수를 죽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로마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 조심하여 거룩한 척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18:29) 그야말로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약대는 통째로 삼키는 외식하는 자들의 소행입니다.(23 : 24)

여기서 잠깐 이스라엘 사람들과 빌라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하에 식민지로 있는 때이라, 이스라엘 자체의 독립적인 헤롯왕이 있고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적 재판기관이 있지만 크게로는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자치적으로 죄인을 잡아 여러 가지 처벌을 하는 등 재판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사형집행만은 로마 총독의 지시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제도 때문에 빌라도에게 의뢰하여 그로 하여금 사형 집행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18 : 31)

넷째로, 또 한가지의 모순은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훼방하는 자라면, 그들 법으로는 군중들이 모여서 돌로 쳐죽여야 했습니다.(24 :16) 이스라엘의 법으로는 십자가에 못박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법이요, 역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에도 없는 십자가형으로 하나님을 훼방했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했으니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재판하는 장면으로써 다음 장까지 이어지겠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ː33)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재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기 입장에만 서서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가야바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네가 메시야냐?"고 묻습니다. 가야바는 종교인이므로 예수님이 메시야냐 아니냐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빌라도는 역시 정치가였기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왕권에 대해 관심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관심사만 묻고 있습니다.

왕국이라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은 갖추어져야만 합니다. 첫째로 백성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땅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왕(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헬라어로 왕국은 바실레이아라 하고, 왕은 바실리우스로서 두 말이 비슷합니다. , 나라는 왕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곳으로서 혼자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릴 백성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갖추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잘 아는 대로 도시국가가 많았습니다. 마을마다 왕이 세워져서 나라가 생겼다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면 병합해서 또 하나의 나라가 생기곤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왕을 중심으로 해서 왕이 둘이면 두 나라고, 왕이 셋이면 세 나라가 되어 심지어 성경에 보면 분봉왕이라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한 나라를 나누어 세 사람이 다스릴 경우 분봉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마다, 지방마다 왕(영주)이 있었습니다. 지금 빌라도는 이런 입장에 있는 왕으로서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이것은 정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황제가 지명한 헤롯왕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왕이 생긴다는 것은 로마 정치에 대한 반역 행위가 되므로 빌라도 입장에서 묻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하며 선동을 일으키게 되면, 이것은 죽을죄가 되는 것으로 로마의 정부가 다스려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 : 36) 이 말의 뜻은, 왕은 왕이로되 영토가 다르고 백성이 다른 것으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왕은 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스림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지정학적이요, 물질적이며, 땅에 속한 것으로 시간적인 왕국이며 일시적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은 모두가 임시로, 오래가는 주권이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은, 로마 정부인 가이사 황제가 임명한 헤롯왕과 같은 물질적이요, 일시적인 그런 왕이 아니라 신령한 왕이요 영원한 왕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를 가만히 보면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특히 공관복음에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대제사장이 질투하고 음모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기의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며,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건에 휘말려 그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십자가에 못을 박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37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빌라도의 두번째 질문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 37)고 서로 의미 있게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왕으로 주권적으로 행사합니다. 우리가 세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만 가장 구체적인 의미는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선서입니다.

이민을 가는 경우에도 살고자 하는 그 나라의 시민권을 얻으려면 이민국에 가서 그 나라의 국민된 법을 다 지키겠다고 선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서를 하고 나야 비로소 그 나라의 백성이 되듯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선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표로 아주 중요한 예식이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왕이로되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모든 조건을 초월한 만왕의 왕으로서의 왕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왕의 백성으로 일명 크리스천으로 불리웁니다. 크리스천의 원래 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곧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그 백성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권하에서 절대 충성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처음에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알고 보면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마치 한 군대가 어느 마을을 쳐들어가면서 ", 회개하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지금 왕으로 섬기던 사람을 배반하고 이제부터 새로 군림하는 새로운 왕,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뜻입니다. 회개를 눈물이나 흘리고 한탄하고 후회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회개란 낡은 주권을 배반하고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여 새로운 시민이 되자는 군사적 용어입니다. 무조건 항복하고 새로 오시는 왕을 영접하는 일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은 며칠 후에 온다는 말이 아니라 벌써 여기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시간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공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문을 열고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부터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재판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왕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이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으면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꽉 차 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청년이 친구와 함께 산 속에 있는 조그만 아버지 별장에 놀러갔습니다.

산 속이지만 바람 한점 없는 무더운 날씨에다 모기가 들끓어 잠자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모기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어찌나 더운지 도저히 잘 수가 없어, "모기가 들어오더라도 할 수 없다" 하고 밤중에 일어나 문을 여는데 잘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덥기는 하고 미칠 것만 같아 급한 김에 문을 깨고서는 이제 "시원하다" 하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은 그대로 있고 옷장 문이 부서져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 밤에 창문을 부수웠으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겠거니 하고 자기 생각에 집착되어, 실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빌라도도 정치가이므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제발 반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그가 이해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서 서로 전혀 다른 관점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정치가요 군인으로서 소위 로마 철학에 젖어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 철학은 강자 철학으로, 강한 자가 진리요, 승자요, 의인입니다. 사실 혁명이란 승리하면 애국자요 실패하면 역적입니다. 우리도 여러 번 경험하듯이 정치 세계에서는 누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누가 승자이냐에 의해 진리가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철학인데, 빌라도의 생각으로는 초라하게 붙들려 온 33살의 갈릴리 청년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진리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기고 나서 진리를 논한다면 말이 되지만, 십자가에 죽게 된 약자의 모습으로 무슨 진리를 논하겠느냐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눈치가 없거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철학이 틀리고 수의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과 많은 힘이 진리이지 혼자서 죽어 가는 마당에 진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수가 진리이지 소수는 진리일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참 진리란, 혼자서 주장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공리주의에 따라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몰리게 되고 그것이 옳게 보이며 수가 적으면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화의 함정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도저히 진리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말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는 의미가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물론 빌라도가 이 말을 했을 때의 그의 심정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질문 뒤에 있을 수 있는 말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3년 동안 진리를 말했는데 너와 함께 죽을 사람이 그렇게도 없더냐, 다 도망가고 혼자 와서 진리를 운운하니 우습구나"라며 예수님을 조롱하는 눈빛으로 보았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 일입니까? 이 말에는 예수님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디 엘 무디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질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한도 베드로는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적어도 바로 며칠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이 장면에서 조용하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화가 납니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적어도 이 시간에 나타나서 "빌라도 각하,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바로 얼마 전에 죽었다가 이 분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나사로인데, 정말 이 분은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살든 죽든 한 마디쯤 했어야 했습니다. 이 정도의 구실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필자는 이 일만 생각하면 나사로를 괜히 살려 주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가장 어려운 이 시간에 예수님 혼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조롱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난처했겠습니까? 베드로나 나사로 이하 그 많은 제자들, 고침을 받은 환자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적을 본 무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가 침묵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당당하게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라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다 배반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는다"고 진리를 알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진리란 수에 의해서나, 권세에 의해서나, 정치적 능력에 의해서나, 부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모두가 우러러보아 훈장을 주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면 죄인이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고 조롱하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면 의인인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를 압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만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성령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3:6-7) 진리에 뿌리를 둔 자라야 진리를 알고, 사랑에 뿌리를 둔 자라야 사랑을 압니다. 죽은 자가 어찌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왕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한 번 더 다짐해야 할 우리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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