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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뜻입니까(신명기 6장 16절~25절)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미국 보스턴 해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이면 머리가 하얀 백발 노인 한 사람이 통에 가득 싱싱한 새우를 가지고 나와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갈매기들은 이 노인을 알아보고 으레 그 시간이 되면 해안에 모여서 노인이 주는 새우를 맛있게 받아먹습니다. 하지만 싱싱한 새우를 왜 갈매기들에게 매일같이 먹이는지, 아무도 노인에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없는 어린아이 하나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 싱싱한 새우를 왜 매일같이 저 갈매기들에게 먹이는 거예요?" 노인은 어린아이에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는 2차 대전 때 미군 함정의 함장이었단다. 그런데 내가 탄 배가 일본사람들이 쏜 어뢰에 맞아서 그만 침몰하고 말았지. 많은 부하들이 죽고, 나와 몇몇 사람만이 구명보트를 타고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햇볕은 뜨겁고 식량은 다 떨어져서 거기에 남은 사람들마저도 하나둘씩 죽어 가는 형편이었다.
나 역시 너무나 힘들어서 정신이 몽롱해졌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어깨에 갈매기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더구나. 쫓으려고 했지만 영 도망도 가지 않고, 좌우간 못 견딜 정도로 배가 고파서 그 갈매기를 잡아먹고 기운을 차려서 마침내 살아남았단다.
그래서 나는 갈매기를 볼 때마다 그 때에 갈매기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고, 또 갈매기에게 감사한다. 내가 잡아먹은 그 갈매기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너무도 고마웠던 그 때의 일을 기억하여 이렇게 새우를 사다가 갈매기들에게 먹이고 있는 것이란다." 여러분, 다시 한번 우리의 생을 돌아보십시다.
존 애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을 생각할 때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너의 선조와 후손을 생각하고 행동하라." 우리는 이 현대에 너무나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지칠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말합니다.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면 되지 무슨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다면 살찌는 게 문제지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풍요가 어디서, 어떻게 해서 주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뿌리를, 그 근원을 꼭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에 한 가닥 실오라기를 감았거든 항상 베 짜는 여인을 생각하라. 하루 세 끼 밥을 먹었거든 매양 농부의 수고를 생각하라." 잊지 말 것입니다. 밥상에 밥이 거저 놓여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사는 하루하루의 생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수고와 피땀의 결과로 여기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한 대학생이 들판에 벼이삭이 나온 것을 보면서 "야, 이 쌀 나무 좀 봐"라고 말합디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밥 먹을 자격이 있나 싶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풍요가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좀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앞에 자손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교육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부끄럽지 않게 살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나라가 6일 전쟁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인구 오 백만의 이스라엘이 3억의 아랍인과 대결하여 싸우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산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국에 전쟁이 터졌다는 말을 듣고 온 세계, 각 나라에 유학을 가 있는 이스라엘 청년들이 자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위의 친구들이 그들을 말립니다. "너 하나 군대에 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무엇 하러 이렇게 편안한 곳을 두고 그 험한 전쟁터로 일부러 나가려 하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청년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나간다고 해서 우리 나라가 전쟁에 이기는 것도 아니고, 이 민족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이 나에게 묻기를 "아버지, 우리 민족이 6일 전쟁을 치를 때에 아버지는 어디 계셨나요?"라고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이냐? 나는 재수가 좋아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무사히 살았다, 이런 소리를 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낫다." 얼마나 소중한 간증입니까? 여러분,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십시오.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어떻게 삽니까? 그 추한 생을 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고로 과거를 잊지 말 뿐더러 우리의 후손과 앞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부끄럽지 않은,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는 그런 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도의 교육철학자 케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에게 정신적 죄악이 세 가지 있다. 하나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요, 하나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할 수 있으면서 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알아야 하겠고, 이제는 또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귀중한 유산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 지식이 거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많은 경험에 부딪힙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많은 역경 속에서 배우고, 깨닫고, 훈련받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 소중하고 값을 치르면서 소중하게 깨달은 한마디의 진리, 하나의 소중한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고, 쉽게 잃어버려도 안됩니다. 또한 후손에게 길이길이 물려주어야 합니다.
며칠 후에 히로시마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보면 원자탄 떨어졌던 곳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폐허가 된 그곳에 당시의 건물 몇 채를 그대로 남겨놓았습니다. 앙상한 건물이 그냥 서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6․25때에 폭격 맞은 건물을 몽땅 다 헐어버린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어요. 어쨌든 일본은 이런 건물과 함께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기념관까지 지어놓았습니다. 또 그곳에 가보면 비석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한 비석에 이런 기도문이 하나 씌어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어요. 그 소중하고 많은 교훈을 본인도 잊어버렸고, 후손에게도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악순환을 겪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스라엘이 강하다고 합니다. 인류학자들이 과연 사람이 달라서 그런지, 풍토가 달라서 그런지 아무리 연구해봐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 전승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겪은 일, 조상들이 경험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무슨 토론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이것은 tradition(전승)이다"하고 말하면 토론 끝입니다. 내가 이 시간에 뭘 안다고 비판하고, 옳다 그르다 할 게 없습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이 깨달은 진리,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른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상놈이요, 역사의 교훈을 저버리는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소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책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미쉬나, 탈무드. 탈무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주전 오 천 년부터 주후 오 백 년까지 무려 오 천 오 백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들이 겪은 이야기, 그 속에서 깨달은 진리들을 천 명의 학자가 10년 동안 수집해서 책으로 만들었어요. 분량이 책 스무 권에 페이지 수가 만 이천입니다. 특별히 이 탈무드의 원전은 이렇답니다. 한 페이지는 기록해놓고, 한 페이지는 비워놓습니다. 이 공백, 이 자리는 바로 네가 채워라, 네 경험에서 써넣으라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만인이 기록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페이지를 기록해야 됩니다. 이것이 지혜의 전승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남은 민족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들의 역사는 계시적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수난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많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후일에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자손들이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읽어보세요. 그 대답의 제1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옛날에 애굽의 종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교훈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선민이요, 하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라, 너희는 애굽의 종 되었던 사람이다--노예 출신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 족보 자랑을 많이 합니다.
잘난 체 많이 하고, 체면 때문에 못사는 게 우리 민족입니다. 여러 절기 때에도 가만히 보면 무슨 대단한 집안이라고 우리 가문이 어떻고, 뼈대가 어떻고, 하며 따집니다. 그실 별것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돈버는 것이 출세입니까? 벼슬 하는 것이 출세입니까? 우리 조상 몇 대 조상이 무엇을 하고, 무슨 벼슬을 하고…… 이미 오래됐습니다. 남은 게 무엇입니까? 일본사람들에게 먹혀 가지고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고생을 했는데 뭘 자랑할 것이 있다고 아직도 뼈다귀 노릇합니까? 깨끗이 잊어버리세요. 아무 것도 없어요. 양반이라야 그저 당파싸움하다 끝난 양반입니다. 남는 게 뭐가 있기에 이 시간에 아직도 족보니 뼈대니, 쓸데없는 소리예요?
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보아라, 지금은 이스라엘이지만 옛날에는 노예였다, 너희는 노예 출신이다, 옛날자랑 하지 말아라,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십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성공의 기준을 돈과 벼슬에 두기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다른 데서 성공사례랍시고 나오는 사람이 전부 돈번 사람들과 벼슬아치들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은 다 실패한 것입니까? 그래서 평민은 소위 콤플렉스에 걸릴 수밖에 없어요. 조용히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착하게 잘 사는 사람, 그가 성공한 사람이지요. 성공을 똑바로 판단하세요. 벼슬아치 별 것 아닙니다. 나라 망친 것도 벼슬아치입니다. 다 잊어버리세요.
깨끗이 비워버립시다. 족보타령일랑 운도 떼지 말아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후손들이 이것이 무슨 뜻이뇨, 하고 묻거든 우리 조상들은 노예였다, 그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다, 우리는 완전히 노예 출신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가 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이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하여 우리가 있다, 하나님의 그 권능과 의만 따라갔으면 좋았을 것을, 종종 하나님을 원망하고, 광야에서 원망하고,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전쟁 위험이 있다고 원망하고, 원망에 원망을 거듭했다, 우상을 섬기다가 형편없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렇게 좀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일러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거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 대적이 어떻고, 원수가 어떻고, 가난이 어떻고, 가뭄이 어떻고, 질병이 어떻고, 걱정을 하지 말아라, 이 모든 재난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데 대한 징계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징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우리를 훈련케 하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대적도 걱정하지 말아라, 질병도 걱정하지 말아라, 재난도 걱정하지 말아라, 오직 주 여호와의 말씀과 규례를 지키라--이것이 성경 주제가 아닙니까? 구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지키라, 똑바로만 지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신다 함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20절)"--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항상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계명을 주신 것은 복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이 길을 정직하게, 선하게, 똑바로 지켜가라, 만일에 삐걱하면 또 얻어맞고, 떠나면 또 징계를 받고, 원망하면 또 형벌을 받는다 함입니다. 그런고로 이 규례의 말씀을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요? 여기에 형통이 있고, 여기에 축복이 있고, 여기에 행복이 있고, 여기에 안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배우고, 이렇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삼가 지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십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잘못한 게 너무나 많습니다. 온통 분쟁의 역사입니다, 당파싸움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옛날 얘기들을 다룬 사극 물은 텔레비전 같은 데서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왜요? 전부 죽이고, 시지 질투하고, 당파싸움하고……이런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쓸만한 얘기가 없어요. 그 뿌리가 이렇게 깊어서 오늘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분쟁, 싸움, 시기, 질투를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생각하면 복 받을만한 그릇이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모든 은혜 가운데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베푸신 기적 가운데 한 가지 드라마틱한 것을 늘 생각합니다. 우리가 6․25로 인해서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유엔에서는 유엔군을 파송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전보장이사회의 소련 외상 몰로토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유엔군을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군인을 파송하려고 결정을 할 때, 소련 외상이 갑자기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참석 안 해도 결정될 줄 알아서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한국 파병이 결정이 되고,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게 조용하게 지나간 사건이지마는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분명히 받읍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오직 은혜로 복음을 전해주시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뇨'--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이것이 무슨 뜻이뇨'--오직 은혜의 말씀이라, 그런고로 이제 정신을 차리고 정직하게 순종할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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