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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뜻(사도행전 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어느덧 사도행전 강해도 77회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학습 교인'이라는 제목으로 아볼로라는 사람이 유대교에 학자로서 성경을 많이 알고, 율법을 알고, 메시야를 알고, 세례 요한까지도 아는 사람인데 그는 배워서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른바 학습 교인으로, 공부해서 된 교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미완성 교인 혹은 불완전 교인(incomplete christian)에 대한 이야기를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왔습니다. 와보니 거기에 벌써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기독교인을 지칭합니다. 전에도 말씀한바와 같이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라 함은 열두 제자를 지칭하는 것이요, 사도행전에서 '제자'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어는 같지만 그 개념은 다릅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그 사람들은 불완전 교인들입니다. 완전한 교인들이 아니예요. 분명히 교회에는 출입합니다.
또 교인들의 공동체로 모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들은 성결하게도 살고봉사도 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러나 불완전 교인들입니다.
미완성 교인들입니다. 그 이유인즉 성경에 명백히 문자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볼로가 여기에 다녀갔기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여기에있으면서 성경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아볼로가 바로 미완성 교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미완성 교인들을 만들어놓았던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열심도 있고, 지식도 있고, 바르게 믿으려는 진실함도 있는 편이지만 여전히 참 복음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불가피하게 미완성 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교역자를 잘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울 사도를 만났더라면 참 교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볼로를 만났기 때문에, 배워서 그 같은 불완전한 교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벙어리가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 90퍼센트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귀머거리입니다. 귀머거리가 돼서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입의 구조는 탈이 없는데도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완전하고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진실한 자세를 가졌다 해도 복음을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저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별로 좋은 예는 아니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무당이있지 않습니까? 이 무당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서울에만 해도줄잡아 몇만 명일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떼에 인천에만도 삼천여 명이었어요. 개업한 무당이 그만큼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금까지내는 사람들이었어요.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무당들의 90퍼센트가 '습득무당'이라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있어요. 이것은 접신(接神)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춤추는 것, 중얼거리는 것 따위를 배워가지고, 말하자면 습득해가지고 무당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에 걸리면 공연히 돈만 달아나는 것입니다. 겨우 10퍼센트 정도가 이른바 강신(降神) 무당이랍니다. 접신한 자들이지요. 일단 귀신한테 붙들리고나서 그 귀신한테 순종하면서 무당 노릇을 배운 자들입니다. 이게 진짜 무당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좋은 비유일 순 없지만, 무당에 습득 무당, 강신 무당이 있듯이 기독교인에도 습득 교인이 있고, 강신 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습득 교인은 남 하는 대로 찬송 부르고 하지만 속은 그게 아니지요. 언젠가 제가 잘 아는 친구 장로님이 우리교회에 나오는데, 보아하니 웬 예쁜 아가씨가 곁에 앉아 있더래요. 찬송을 부르는데 목청도 높게 얼마나 잘 부르는지 '오늘은 참 복도 많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옆에 있고 또 찬송도 잘 부르고…… 참 좋다'싶더랍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신약 몇 쪽 마태복음 몇 장 하니까 성경책을 들고는 신약, 구약도 몰라서 이쪽 뒤졌다가 저쪽 뒤졌다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페이지라고 말했는데도 못 찾아 가지고 자꾸 헤매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내가 찾아드릴까요?"하고 찾아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더랍니다. 이 아가씨 같은 사람이 습득 교인일 것입니다. 음악성은 있어서 찬송을 부를 수 있지마는 그 뜻을 알겠습니까, 그 은혜를 알겠습니까, 감동을 받겠습니까?
습득교인이 있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역자에도 습득 목사가 있고 강신 목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학교는 나왔어요. 저도 신학교에서 30년 동안 가르칩니다마는 분명히 신학대학도 나왔어요. 안수도 받았어요. 정규 목사, 교역자가 됐어요. 그러나 아직 중생하지 못했어요. 아직 성령을 몰라요. 아직 은혜를 몰라요. 정말 성령을 받고, 그리고 신앙간증이 있고, 또 신학 공부도 하고…… 이럴 때에 능력 있는 교역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내가 만난 목사가, 내가 처음 만난 교역자가 습득목사였다고 합시다. 어떻게 될까요? 그 설교는 전부가 지식을 전하는 것뿐이오, 윤리 도덕이나 운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회 부정이 어떻고, 도덕이 어떻고, 윤리가 어떻고, 세상의 부조리가 어떻고…… 이런 식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메시지라는 것이 지극히 지식적인 것에 불과해요.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이렇게 될 때에 교인들은 점점 차지고 말아요. 열심이 생길 일없어요. 중생의 역사가 일어날 일도 없어요. 비판의 눈만 밝아져요. 서로서로 비판하게 돼요. 사회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눈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요.
남의 허물만 자꾸 보입니다. 나만 잘난 것 같습니다. 지식은 교만을 부추기게 마련입니다. 자꾸 지식적인 이야기만 하니까 점점 교만해져서 문제가 점점 심각해집니다. 습득 교역자는 결국 습득 교인을 만드는 것이지요. 이것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 기독교인들은 별수 없이 성령을 모르는 미완성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배운 대로 될 수밖에 없고, 본대로 닮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부정을 해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 이것입니다. 보고 듣고, 보고 듣고 하면 알게 모르게 닮아갈 수밖에요. 교회도 그래요. 여러분, 소망교회라는 교회에 다니다보면 아마도 소망교회 스타일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어요. 미국 가니까 그런 얘기 많습디다. 거기에 우리 소망교회 교인들이 많아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행히도 좋은 얘기들입니다. 소망 교인들은 참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뭐가 잘됐습디까?" 물어보니 우선 시간을 잘 지킨 대요. 그것은 맞아요. 소망 교인 치고 시간 잘 못 지키면 소망교인이 아니예요. 또 예배 시간에 앞에 나와 앉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좋은 얘기입니다. 어쨌든 뒤에 앉는 사람은 소망 교인이 아니예요. 앞에 앉는 사람이 소망 교인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어요. 우리 소망 교인은 앞으로 가기 좋아하지 뒤로 가는 것을 좋아 안 합니다. 2층에 앉은 사람들은 다 손님이예요. 가까이하여 말씀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제가 앞으로 나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저마다 앞에 나와 앉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보면 몇 차례 "앞으로들 나오세요"합니다. 그렇게 서너 번해야 겨우 몇몇이 앞으로 나와 앉아요. 우리 교인들은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모르게 벌써 소망교회 나름의 체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대요. 바로, 봉사하고 이름을 숨기는, 익명성(匿名性)이랍니다. 듣기 좋습디다. 무슨 일을 하든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대요. 그래서 소망 교인들 참 훈련이 잘돼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훈련을 받았으니까요. 이상의 몇 가지가 겉으로 나타난 특징입니다마는내적으로도 꼽을만한 것이 참 많아요.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늘 시끄러운 교회가 있어요. 기도를 해도 큰 소리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그런 체질이 된 사람이 있잖아요? 들은대로 본대로 배울 수밖에 도리가 없는 거예요. 오늘의 본문도 말씀합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었거든요. 아볼로로부터 메시지를 받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말하자면 습득 교인들은 그 나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와서 묻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그런데 성령이 있다는 말도 저들은 못 들었습니다. 그 점을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그래 사도 바울이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하니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매 저들이 마침내 성령을 받아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여기까지는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예수를 알지 못했으니까, 복음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가 무엇입니까? 아시는 대로 요한은 아주 협박적입니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태복음 3장 7절로 12절, 누가복음 3장 3절로 14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하고 광야에서 외칩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서 임박한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회개하지 않으면 찍혀버린다고 외칩니다. 임박한 심판에 대해서 아주 강렬하게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도덕적인 말씀을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와서 울고불고 이러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우리는 어떡하면 좋으냐 하니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고 합니다. 세리가 와서 우리는 어떡할까요 하니 정한 세 이외에는 더 받지 말라 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우리는 어떡하면 좋으냐 하니 강포하지 말고, 무소하지 말라 하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합니다. 도덕적 메시지입니다. 가장 적절하고, 가장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 윤리적 메시지입니다. 바르게 살아라, 욕심부리지 말아라, 정의를 위하여 살아라, 그렇다고 직장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있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 합니다. 윤리적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거라고, 내 뒤에 오신다고, 내 뒤에 메시야가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 아니예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of Christ―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이 때는 얘기가 다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지금 천국이 왔다,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은혜를 전했고, 복음을 전했고,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더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포도나무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빛이요 생명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전하고 예수님 자신이 구주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한번 같이 생각을 해봅시다. 사실상 무릇 설교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혹은 모든 기독교인의 신앙에도 두 단계가 있습니다.
two stage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를 합니다마는, 성경 강해시간입니다마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마는, 주일 낮에 설교할 때에 자세히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언제나 두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 단계이고, 하나는 긍정적 단계입니다. 하나는 율법적 단계이고, 하나는 은혜의 단계입니다. 반드시 두 면이 있습니다.
두 단계란 이렇습니다. 모든 설교가 그렇고 신앙이 그렇습니다. 우선 내 부족과 허물과 죄인 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같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첫째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의 전반부는 이 면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교회에 와서 들어보니 나는 죄인이요, 용납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잘했다는 것까지도 죄입니다. 그래서 내가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 아마도 나는 구제불능이다, 죄인의 괴수다, 율법으로써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선한 일 한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위선입니다. 뭘 좀 바로 해보겠다고 한 것도 빗나갔고, 한 번 더 맹세한 것도 빗나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는 의라는 것이 없어요.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 아래 있고,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의, selfrighteousness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 두 번째 단계는,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내가 그렇게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하면 나는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죄 짓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셨다,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지 그대로 벼락을 치셨으면 끝났을 것이다―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죄인됨도 있고 잘못됨도 있었지마는 은혜가 더 커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커요. 내 잘못이 있는 곳에 은혜가 더 넓어요. 더 크고 무변광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로 삽니다.
그런데 내가 죽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율법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내가 은혜 안에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압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 2천 년 전 사건과 나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아무 관련을 맺을 수가 없어요. 그 많은 날 공부하고 그 많은 날 신학을 연구해도 중생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온 인류를 위하여 예수께서 선한 일 하시고, 어떻게 하시고―까지는 나가지만 그가 구속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2천 년 전에, 내가 나기도 전에, 내가 죄 짓기도 전에 된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납득이 안가는 것입니다.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누구의 것이냐―누구에게나 그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선물입니다.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지식을 주고, 증거를 대도, 논리적으로, 개연성으로, 당위성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봐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져야 믿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데는 도리가 없어요. 누구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생명적 관계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도덕적 의무와는 관련이 없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구원을 내가 영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이루어집니다. 보세요. 설교한 한쪽으로는 '당신은 죄인이오'하고 한쪽으로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합니다. 한쪽으로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형편없다, 이렇게 심각히 비판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제가 인사를 하는데, 어느 대학 교수님이 결석을 하지 않고 늘 열심히 나오는 것을 알고 제가 이렇게 칭찬을 해봤습니다. "역시 지성인은 다르군요. 한번 시작하더니 틀림없네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저요? 저는 그저 목사님한테 얻어맞는 재미로 교회에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어디 가서 가르치고 하면 '교수님, 교수님'하면서 잘했다고 칭찬 받는 편인데 여기만 오면 형편이 없단 말이예요.
형편없는 죄인으로 취급을 한다는 말이예요. 그 재미에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손을 붙들고 "교수님, 예수 참 잘 믿으십니다" 했어요. 사실입니다. 다 죄인입니다. 높고 낮고 부하고 가난하고가 소용없습니다. 다 죽을 죄인입니다. 완전히 죄인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한 깨닫습니다. 율법과 은혜, 죄인과 구원―이것이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하는 저 에베소사람들은 율법만 알고있었어요. 열심히 회개하고, 율법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없었어요. 구원도 없었어요. 기쁨도 없었어요. 감격도 없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세례를 주는 동안, 세례를 받는 동안 그들은 예수와 함께 연합해서 율법 앞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 사람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이더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인 쳐진 것입니다.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이라면 1901년에 태어나서 1987년까지 사셨던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는 중등학교 다닐 때에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 인도할 때에 서울에서 그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예수를 믿고 3년 동안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그는 세례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3년이 지나도록 세례를 안 받았습니다. 어느 날, 김영구 목사님이 세례 받으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그런데도 "안 받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필요 없습니다"했더니, 목사님께서 설명해주기를 남녀가 연애하고 동거할 수는 있지만. 결혼식을 안 하면 그 사랑은 무효라고 비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감동이 돼서 "그러면 결혼식을 해야지요"하면서 세례 받았대요. 두고두고 생각하는 것은 그 목사님의 세례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오묘한지 '맞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같이 살아도 소용이 없다. 결혼식을 해야지. 결혼식을 해서 만방에 고해야지. 나는 아무개의 아내요, 나는 아무개의 남편이라고. 이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꼭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완전히 공인 받아야 되겠다. 공인된 예식을 가져야겠다'―생각을 해서 세례를 받았더니 더 큰 은혜를 받아서 확실한 교인이 되었고 마침내 신학자요 목사님으로 일평생 큰 역사를 이루는 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했더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더라는 말씀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합니다. '방언'이라 하면 우리가 하는 방언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분명히 사도행전적 방언과 고린도서적 방언이 다릅니다. 개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행전적 방언은 못 알아듣는 사이에 성령을 받음으로 알아듣게 됐다는 것이고, 고린도서에 있는 방언은 알아듣는 말은 그만두고 못 알아듣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전혀 틀립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 방언도 하고 예언도하더라는 말씀은 이제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 모든 말씀을 그대로 다 알아듣더라, 말이 틀린데도, 언어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다 알아듣더라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온 회중이 자기나랏말로 알아들었어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다 알아듣게 되었어요. 그것이 방언입니다. 듣는 방언이지요. 예언도 하더라 한 것은 간증을 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간증을 한 것입니다. 설교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완전한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성령을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그대로 받아지는, 수용되는 방언의 역사가 있어야 되고, 그리고 자기의 영혼에 부딪히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증언적 역사가 있어야 돼요. 그랬을 때에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교인인 것입니다. 자, 오늘도 가만히 보면 불완전 교인이 있습니다. 출석도 하고, 봉사도 하고, 형식적으로는 된 것 같지마는 아직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는 불완전 교인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죽으신 것을 확신할 때, 그 안에서 죄 사함 받는 체험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택받은 기쁨과 감격에 살아가게 될 때, 이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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