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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다(요 13:1-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의 기간은 33년입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시고 사역을 이루신 기간은 잘 아는 대로 3년뿐입니다. 이 공생활 3년 중에서, 복음서에서 거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역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일주일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총 21장 중, 13장인 늘 본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즉 9장이나 되는 많은 부분이 유월절 전날의 이야기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복음서의 초점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체포되기 바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 : 1) 예수님은 바로 내일, 자신이 체포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고를 들으면서도 전혀 몰랐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내가 이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이런 포도주를 마시는 일이 없겠다."고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유월절 음식을 잡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중대한 사건을 앞에 놓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시간은 대단히 불안하고도 비극적인 시간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순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상상하며 주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였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때의 제자들의 생각과 행동은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번 유월절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 나라의 왕이 될 것을 꿈꾸며 서로 중요한 직위에 앉겠다고 자리 다툼이나 하며, 세상적인 영광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필자 생각에는 요한과 야고보가 제일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12제자 중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형제를 사랑하셨는데, 그 중 베드로는 수제자이니 예수님 우편에 앉는 것은 당연한 처사입니다. 그러니, 좌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에 대해 형인 요한과 동생 야고보의 자리다툼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형은 당연히 자기가 앉아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고, 동생은 그래도 예수께서 자기를 조금 더 사랑하신다고 믿고 은근히 자리를 탐내며 형이 양보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제간에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것을 본 그들의 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께 교섭을 하게 됩니다.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양편에 앉히기 위해 베드로를 제쳐놓는 일을 서슴지 않고 청탁을 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갈수록 태산인 것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의 12제자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제일 좋은 자리에 앉겠다는 최고욕과 독점욕으로 형제간의 의리나 동료간의 신의는 아예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소원을 들고 나왔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마시려고 하는 잔을 마시겠느냐?"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잔"이 십자가임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단순히 포도주잔으로 가볍게 생각하여 "네, 마시겠습니다"라고 제일 먼저 대답합니다. 야고보는 잔의 의미를 모르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이루어져 12제자 중 제일 먼저 순교했습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형인 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배가 고픈 것만 생각하여 대답한 것이 그만 장자의 명분을 쉽게 팔아버리지 않았습니까?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말한 것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기에 한 말로써 그 때는 자기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야고보도 주님께서 마시는 잔이면 나도 마시겠다고 잔의 의미를 모르고 말했지만, 그는 후에 순교 제1호로 그 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잔을 마시겠다는 제자들에게 이 잔은 마실 수도 있지만, 인자 우편이나 좌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은 서로 내가 크냐, 네가 크냐고 자리다툼으로 질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질투하면, 이성을 잃게되고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므로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도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잔치 음식을 먹으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발을 씻어야만 했습니다만, 질투하는 마음으로 팽팽하게 맞선 그들이었기에 누군가가 먼저 발을 씻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지대인데다 샌들을 신고 다니므로 조금만 걷다 보면 발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반드시 씻고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지금 식사는 보통 식사가 아닌 유월절 잔치이니 더욱 씻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속으로는 자기 발을 자신이 씻지 않습니다. 만일, 종(slave)이 있으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고, 종이 없으면 서로서로 씻겨 줍니다. 남편은 아내 발을, 아내는 남편 발을 씻겨 주고, 친구끼리도 서로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상대방의 발을 씻겨 주지만, 먼저 씻겨 주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베드로는 아마도 야고보에게 네가 먼저 내 발을 씻기면 나도 네 발을 씻기겠다 하고 버티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요한대로 안드레에게 네가 먼저 하면 나도 네게 하겠다고 팽팽하게 맞섰다고 추측을 해봅니다. 질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기에 서로 긴장관계에 있게 되고 자연히 사소한 일에까지도 양보하지 않아 서로 먼저 발을 씻겨 주기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모두가 더러운 발을 그대로 하고 상에 마주 앉으니,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하셨겠습니까? 이런 한심한 사람들을 3년 동안 제자라고 가르쳤고, 이제 두고 떠나야 하니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친히 대야에 물을 가져 오시어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발을 내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이 성만찬이 끝나면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어 밤새도록 기도하시며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피땀 흘리시어 간구하는 대단히 어려운 시간을 앞에 놓고 있는 순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정말 마음 아픈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태연하게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격이 바로 된 사람은 내게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먼저 상대방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변치 않은 사람은 자기 화풀이를 남에게 쏟아 놓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상황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경우인지 제자들은 전혀 모르고 네가 크냐, 내가 크냐로 질투하고 있었으니,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이며 형편없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당장 보답이 있고 상대방이 알아주는 사랑만을 하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 : 2)라고 벌써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까지도 알면서 예수님은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12제자의 발을 씻겼을 때, 과연 누구의 발부터 씻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교부 크리쏘스톰의 말에 의하면,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고 상당히 의미있는 제의를 했습니다. 필자는 크리쏘스톰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12제자가 모두 한심했지만, 특히 형편없는 가룟 유다를 예수께서는 우선적으로 씻겼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자를 먼저 사랑해야 전체를 사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자들 가운데서 스승의 사랑을 알고 그 뜻을 깨닫는 자부터 사랑하셨다면 가룟 유다는 사랑할 수가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룟 유다의 발을 먼저 씻겼기에 전체를 씻길 수가 있는 것이지, 만약 베드로의 발부터 씻겼다면 가룟 유다의 발은 씻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의 자세로 사랑을 베풀면 모두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할 만한 자를 찾아서 사랑 받아 가면서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제한적이요, 지속성이 없습니다. 아마 때로는 시작도 못하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사랑할 만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어느 교만한 청년의 질문처럼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면 이웃입니다. 누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이며, 내가 누구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사랑을 제한하면, 그 순간부터 사랑은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자들 속에 지금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 신경을 쓰셨다면 12 제자가 다 미워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있음을 아시고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잠언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양의 우리에서 염소새끼를 먹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으로서 양을 많이 키웁니다. 양은 미련한 동물이라서 조금만 추우면 서로서로 한곳으로 모여 가운데 있는 양은 치여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소는 두 마리만 되어도 서로가 질투하여 돌아가면서 들이받아 서로 흩어 놓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 사이에 염소 몇 마리가 있어야 양들이 무사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양의 우리에서 염소새끼를 먹여라." 재미있고도 의미 깊은 말입니다. 사람이 완전해지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느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지 어디나 가룟 유다는 있습니다. 때로는 그저 이 사람만 없으면 편안할 것 같지만 제2의 가룟 유다가 또 생깁니다. 그대로 두고 견뎌야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서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자연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본 자세는 원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팔 자가 함께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의 발부터 씻기시며 사랑하셨다는, 즉 사랑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할 때 수건을 허리에 둘렀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 : 4),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의미를 제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 수건이 겸손이었음을 깨닫고 말한 것입니다. 겸손이 겸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일 수 없습니다. 고자세 또는 교만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랑한다고 하면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사랑은 자기도 피곤하고 남도 피곤합니다. 겸손을 동반한 사랑은 결코 피곤치 않으며 끝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말하기를, 사랑은 끝까지 바라고 인내하고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다면 참 사랑이 아닙니다.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필자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필자가 잘 아는 4대 독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귀하게 자라다 보니 버릇이 없었고, 부모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돈도 무척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정신을 차리더니 군에 입대해서 사람이 되겠다고 자원을 했습니다. 어느날 휴가라고 일선에서 돌아왔는데, 얼마나 잘 놀았던지 돌아갈 날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틀이 지나고서야 생각이 났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 청년이 겁이 나서 아버지께 구했습니다. 어차피 기합은 받아 놓은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감하려면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아 거절했습니다. 다음 어머니께 사정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필자한테까지 와서 다시 한번 사정했습니다. "목사님, 돈 좀 주세요." 대단히 아픈 이야기지만 저도 믿지 않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진실이 통하지 않자 청년은 포기하고 그대로 군으로 돌아갔는데, 기합을 받고서는 바로 약을 먹고 죽어버렸습니다. 후에 청년의 아버지는 너무 마음이 아파 가슴앓이를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두고두고 마음이 아픈 기억입니다. 그 동안 그의 말을 다 믿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그 한 마디는 믿었어야 했습니다. 결정적인 시간의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은 곧 믿음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형편없는 제자들이었지만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배반입니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것이 모자라서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한 마디 정도는 책망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를 전혀 묻지 않으시고 현재의 상태를 물으십니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고, "내 양을 먹이라"고 서슴지 않고 맡기셨습니다. 형편없는 제자였지만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믿으시고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겨 나가시다가 베드로에게 이르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 : 6-8) 베드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사양했습니다. 그의 입장은 자기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지도 못한 형편에 자신의 발을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없다는 똑똑한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에게는 3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사람이며, 세째는, 사랑을 받고도 배신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주지도 않았으니 받지도 않겠다는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이 사고 방식은 죄입니다. 근원적으로 사랑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사랑을 받았고 사랑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받지 않았으니 주지 않겠다니 무슨 말입니까?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많이 받고 많이 주어야 합니다. 요새 똑똑하고 교만한 사람들 중에서는 남의 신세를 지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 베풀지 않았으니 받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자 주님은 귀한 말씀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와는 상관이 없느니라", 즉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받는 체험, 쉽게 말하면 사랑을 받았다는 체험이 없으면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용서를 받았다는 마음이 있고서야 예수님과 우리와 상관이 있게 됩니다. 만일, 주지도 받지도 않았고 내 힘으로, 내 공의로 산다고 한다면, 예수님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생 동안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입었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과 나를 연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형제로부터, 이웃으로부터, 교회로부터, 그저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늘 미안하고 아쉬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그와 반대입니다. 남에게 준 것만 생각나고 받은 것은 항상 부족하여 피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할 일을 다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이 모르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고 인내하시며 소망적으로 멀리 내다보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사랑도 마치 농사처럼 부지런히 심어 놓으면 언젠가는 거둘 것입니다. 오늘 심고 내일 당장 거두려는 데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우물가에서 숭늉을 구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베푼 즉석에서 사랑을 받겠다니 되겠습니까? 좀더 멀리 내다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좋은 일을 하고 내일 당장 상을 받아야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도 똑같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의 심정을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 것입니다. 언젠가 필자가 길을 지나가다가 컴컴한 문밖에 서 있는 어느 여집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둡고 추운데 왜 밖에 서 있느냐고 물었더니 딸이 아직 오지 않아서 기다린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추운데 들어가서 기다리시지, 밖에 서 있다고 딸이 더 빨리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느냐고 저는 들어가시기를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 말씀이 여기 서 있으면서 깨닫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자신이 처녀 시절에 밤늦게 돌아다닐 적에 당신의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나면서 그때 일을 회상하며 회개하면서 서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알리라"는 주님의 위대한 믿음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사랑하고, 부지런히 희생하여 열심히 심어 놓으면 언젠가는 거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사랑입니다. 베드로도 후에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서에서는 "내가 보았다, 체험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깨달았기에 예수를 대신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반복하면, 끝까지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내 처지와 형편과는 상관없이 저들을 사랑하며,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크게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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