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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사랑(롬8:31 ~ 39)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사람-그 사람은 나름의 확실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귀한 고백의 결과로 하나님의 높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깨닫는 가운데 사랑을 깨달은 그것이 모든 지식에 만족을 이루고, 모든 감정에 충족을 이루고, 그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곧 그의 삶의 실천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통합적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느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입니다. 사랑은 곧 생명력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속에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지식도 있고, 능력도 다 따라오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힘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와 같이 마침내는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사랑에서 출발하여 선을 생각합니다. 선 아닌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바로 형통함이며, 만족이며,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모든 일이 선을 이룬다고 넉넉한 고백, 여유 있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은 찬양이며 간증이며, 동시에 새로운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하고 간증하게 되며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생활과 현실 속에서 간증해나가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31절)"-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 엄청난 이 사랑을 깨닫고 보니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극대화하면서 모든 문제를 그 속에 다 흡수해버리고 만다 함입니다. 이것은 깊은 감격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아무 할말이 없다-내 은혜가,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얼룩진 과거요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마는 그 과거 속에서도, 내가 살아온 과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나를 보호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어요. 이는 너무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또 미래에는 이미 확증된 것입니다. 지금 순간 순간 되어지는 모든 일들도, 작은 일 큰 일, 사사로운 일 공적인 일 가릴 것 없어요. 구속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다 하나님의 손길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보우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순간 순간 새롭게 깨달으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하리요"-그런고로 아무 소원도 없다 함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시편 23절 1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영어로는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입니다. "I Shall not want"-'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함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번역에는 "I want nothing"-'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새 새로운 영어 번역에는 "I have everything"-'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다 가졌습니다.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네 번역에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조금 미래적이에요. 현재에 부족함이 없다, 현재에 아무 소원도 없다, 그 말입니다. 앞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I shall not want, I want nothing-아무 소원도 없다 함입니다.
우리가 기도 많이 하는 것은 좋지만, 때때로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인가?'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 해주랴'-다 해주었는데 무엇을 더 해주랴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 주었는데, 넘치도록 주었는데 무엇을 더 해주랴.' 그런고로 구원 얻은 사람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모든 욕망과 소원, 이런 것까지도 다 반납해버렸어요. 이제 만일 주님께서 '어떻게 해주랴"하시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디로 인도해주랴'하시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살게 해주랴'하시면 '뜻대로 하십시요'-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구구하게 이래야 되겠습니다. 저래야 되겠습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 소원까지도, 그 소중한 자유까지도 다 반납해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시편 8편 4절에 보면 다윗은 아주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도대체 사람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입니까? 나는 그실 아무 것도 아닌데, 너무도 허물 많고 형편없는 존재일 뿐인데 왜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함입니다. 그 옛날 전설에 따르면 성 안토니는 산에 올라가서 3년을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소리를 사람이 들어봤는데, 성 안토니는 오로지 딱 한마디의 기도만 하더랍니다. 한마디 기도하고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또 한마디하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또 한마디하고,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시며 나는 무엇입니까?"-하나님께서는 누구시기에 이렇듯 나를 사랑하십니까,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인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까, 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아무 할말이 없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체험했고, 내가 이미 하나님 안에 있고, 내 지혜에 넘치고 지각에 넘치고 능력에 넘치고 자격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너무도 만족하고 충만해서 이 일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함입니다.
자, 이런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보세요.
먼저 오늘의 본문에 보니 '모든 것'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특별히 본문말씀 32절은 아주 귀중한 요절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또 외어보세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아들을 주셨어요. 그것도 외아들을 주셨어요. 아들까지도 내어주셨어요. 이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삭이 어느 만큼 장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래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고자 했습니다. 굉장한 일이지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손대지 말라, 네 독생자 외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나에게 바치고 있구나,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들을 바친다-이것은 지고(至高)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니까요. 더구나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적, 또는 동양적 관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질적으로 지고요, 양적으로도 지고입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상징적인 것만이 아니에요. 적어도 우리의 신앙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이미 다 받았어요.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이신데 무엇을 아끼시겠어요? 무엇을 안 주시겠어요? 문제는 그 받은 바를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분-그런고로 우리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앞으로도 주실 것입니다. 'Why not'-왜 안 주시겠어요? 아들까지 주신 분이 무엇을 안 주시겠어요?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주의 사랑이나 그 크신 은사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큰 것을 주신 분이 작은 것을 안 주시겠어요? 그까짓 이 모든 것, 이 물질… 이런 것이 뭐 대수로운 것입니까? 그 크신 희생까지 내게 주셨는데 무엇을 안 주시겠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사랑을 크게 깨닫고, 동시에 십자가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그 간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주신 주님이시기에 앞으로도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는, 넉넉하게 주실 것이라는 그런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본문을 보세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바로 '의롭다 하심'입니다. 지고의 사랑, 최대의 사랑은 무엇이냐, 지고의 은혜는 무엇이냐-'의'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니에요. 모름지기 가장 귀한 것은 '의'입니다. 요새 우리는 '의'라는 말 대신에 가끔 '인권'이라는 말을 해요. 별걸 다 준다 하더라도 소용없어요. 딱하나, 인권이 무시당하면 안되지요. 내 삶의 존재가 무시당하면, 내 의가 무시당하면 안돼요.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런고로 준다고 할 때에 가장 큰 것을 주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의를 주는 거예요. 죄인을 의롭다 하는 것-이보다 더 큰 게 없어요. 이것만 얻으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다른 것을 다 받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받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요새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아요? 별것도 아니고 상대적인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나름대로 자기 의가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정직하게 살았다-그 사람은 떳떳해요. 돈을 벌었는데 못할 짓 많이 했다-그 사람은 죽을 때에 힘들게 죽어요.
어렵게 살아요. 이 '의'가 우선이에요. 의가 무너지면 안 되는 거예요.
떳떳해야 해요. 오늘도 방송에 그런 게 아옵디다. 어떤 사람이 미술상을 받았는데 규칙을 어겼다 해서 스스로 상을 반납했어요. 나는 의롭지 못하니까, 나는 떳떳치 못하니까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보세요.
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의를 너무 소홀히 여길 때가 많아요. 무릇 의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예수로 말미암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가장 큰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시면 죽어도 좋은 거예요. 만일에 내가 죽지 않고 오래 산다 하더라도 주께서 '너는 죄인이니까 고생 좀 더하라고 오래 살리겠다'하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살아도 복이 아니지요. 자, 어떤 고난을 당하든 상관이 없어요. 의인의 고난이라고 하면 그것은 당할 만해요.
그런데 어디서 고민이 되느냐 하면, 내 죄 때문에 고난 당한다는 것을 변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고난 당할 때에 고난이 고난 되고, 아픔이 아픔 되는 것은 내 죄가 많아서입니다. 분명 내 죄 때문에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바로 그 마음 때문에 고통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혹 병에 걸렸다든가 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좀 쉬라고 병든 것이다. 이 괴로운 세상에 너무 오래 두고 싶지 않아서 내가 너를 데려가련다'--만일에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마음속에서 마치 저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에요. 그런고로 '의롭다 함'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나를 의롭다 하셨어요. 가장 크고 놀라운 의를 주신 하나님께서 변변치 않은 조그마한 물질,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안주실 리가 있겠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루신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잘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굉장한 말씀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누가 나를 송사하리요.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누가 이 사랑에서 나를 끊으리요"-'누가'라는 말을 세 번 말하지 않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33절)"-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이라고 하시면 의인이지,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할 것이냐 함입니다. 또 "누가 정죄하리요(34절)"-아무도 정죄할 자가 없어요.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자가 없어요. 또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렇듯 깊은 사랑의 관계가 맺어졌는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절)"-아무도 끊을 자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 요절은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어요. 첫 번째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대신 죽으셨어요. 나는 이제 죽을 필요가 없지요. 예수께서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 죄는 완전히 사함 받았어요.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그렇듯 죽기만 하신 게 아니에요. 부활하셨어요. 이는 내 의를 확증해주신 거예요. 나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그는 부활하셨어요. 의를 확증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어요. 세 번째로,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에요. 첫 열매가 되셨어요. 그 속에 우리를 향하신 영원한 약속이 있어요. 네 번째로, 그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지금도 간구하고 계셔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게을러서 기도 않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중에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 있습니다.
'위하여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은 절대로 그릇되지 않는다'-실제로 그의 어머니가 그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줄기차게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더 깊이 빠질 수 없었어요. 마침내 그는 주님께로 돌아왔고 성자가 된 것입니다. 자,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실족함이 없도록,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께서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사랑을 우리가 받고 살아요. 그런데 무엇이 또 부족합니까? 조금도 낙심해서는 안돼요. 문제는 여기서 담대함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자신이 있어야 해요. 여러분,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랑을 확인해보려고 이래저래 애씁니다. 절대로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지 마세요.
가끔 보면 이런 경우가 있지요? 남편이 내 생일날을 기억도 못하고 그대로 슬쩍 넘어갑니다. 그러면 아내는 '저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보다'해서는 한 달 동안 남편하고는 말을 안 해요. 이런 여자하고 살려면 힘들어요. 고작 그것 가지고 사랑을 평가하려고 해요? 내 생일도 기억 못하는데 누구 생일을 기억해요? 다 그런 거지, 그 사람의 성격이려니 해야지요. 그것을 놓고 사랑하느니 안 하느니, 이게 뭡니까? 이래서는 안되지요. 유치해요. 어린아이들은 그래요. 곤히 잠을 자다가도 손을 휘저어봐요. 어머니가 내 옆에 있나 없나 하고요. 그래서 손에 딱 닿으면 안심하고 그대로 잡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닿으면 '으앙'하고 울어요.
여러분, 그렇듯 유치하게, 뭐가 좀 이루어지면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다가도 내 뜻대로 잘 안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보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저주받았나보다'-이렇게 변덕을 부려서야 되겠습니까? 좀 든든하게 넉넉하게 생각해야지요. 사랑을 확신해야지요.
사랑 안 하실 리가 없어요. 왜요? 십자가가 있지 않아요? 사랑 안 하실 이치가 없어요. 그런고로 이미 다 받았어요. 앞으로도 받을 거예요.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인도하실 거예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이미 말씀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내가 하나님과 원수될 때,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 내가 하나님을 배척할 때에도 이미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어요. 모름지기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절)"-사랑의 줄이 얼마나 강한지 절대로 끊을 수 없다 함입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교목인 더위스 목사가 어느날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어떤 나이 많은 노부인이 앉아 있었어요. 이 노부인은 지금 손녀를 낳은 자기 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딸이 또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딸네집에 가서 손녀도 보고, 딸도 보고, 그리고 지금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노부인은 조용히 자기의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제 엄마 뒤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독일군은 총으로 위협하며 앞서 걷던 이 어머니를 체포했습니다. 그 순간, 이 어머니는 뒤를 돌아봤습니다. 어린 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좋아라고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속으로 질겁을 했습니다. 그실 그녀는 유태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녀를 끌고 가던 독일군이 물어봤습니다. "저 아이가 네 딸이냐?" 그러자 어머니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내 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서 있던 한 폴란드여자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저 여자 딸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의논이라고 한 것처럼 폴란드여자가 이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홱 돌리고 아이 쪽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속절없이 그냥 끌려가고 맙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는 어머니가 저만큼 멀어진 다음에야 엄마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울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지요. 그 후, 이 아이는 폴란드사람의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가 "내 딸이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홱 돌리고 자기를 버리던 그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버렸다'라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성장을 한 그녀는 시집을 갔고, 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지금의 자기 어머니(養母)를 불렀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이 딸은 두고두고 가슴에 품었던 그 때의 얘기를 꺼내며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까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어머니가 왜 나를 당신의 딸이 아니라고 했는지를… 내 딸이라고 하면 분명 죽거든요. 내 딸이 아니요, 저 폴란드여자의 딸입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제가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야 나는 어머님의 사랑을 알았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버렸어요.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살았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오늘까지도 나를 계속 사랑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에 있어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식들은 부모에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요. 심지어는 사랑한 일조차 없다고 해요. 그리고 조그마한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는다고, 이까짓 것 하나 안 들어준다고 억지를 쓰는 거예요. 그러나 안 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못 들어주는 것이지요.
그 소원을 들어줘서는 안되니까요.
우치무라 간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르러 죽기 직전에 자기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쓴 기도문 가운데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더라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이 꼭 이루어져야 되겠습니까? 이루어져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내 뜻대로 안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거기에 더 깊은 사랑이 있어요. 내가 모르는 엄청난 사랑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사랑은 승리요, 사랑은 용기요, 사랑은 지혜요,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의 힘은 굉장합니다. 사랑을 깨닫는 동안에 병도 낫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시골교회의 종탑 밑에 다 쓰러져 가는 움막집 하나가 있습니다. 한 폐결핵 환자가 외로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어요. 식구들은 다 도망가 없고, 혼자서 힘들게 조석을 끊여 먹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을 기다릴 따름이었습니다. 교회의 종이 땡강땡강 울릴 때마다 이 환자는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제발 저 종을 치지 말아달라고 교회에 요청을 했어요. 교회에서는 이를 양해하고 종을 치지 않기로 했지요. 그런데 한 여전도사님이 시간이 나는 대로 그 집을 방문하는 거예요. 사과가 생기면 사과를 갖다주고, 떡이 생기면 떡을 갖다주고… 그러면서 늘 위로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 집을 방문한 여전도사님에게 이 환자가 사과를 하나 쑥 내밉니다.
그 지저분한 이불 밑에 감추어두어서 다 시들고 말라빠진, 그것도 일전에 여전도사님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이었어요. "우리 집에 늘 오셨지만 이제껏 대접해드린 것이 아무 것도 없군요." 콜록콜록 기침에다 각혈까지 하는 그가 내민 이 사과를 여전도사님은 주저 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은 채 "감사합니다"하고는 그 자리에서 다 먹었어요. 그랬더니 이 환자가 목을 놓아 웁니다. "정말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너무도 고맙습니다." 그 순간, 환자의 얼굴이 환해졌어요. 몸이 뜨거워졌어요. 놀랍게도 병이 다 나은 것입니다. 이 사람, 당장에 교회로 달려가서 이제는 종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종이 울릴 때마다 더 기쁘고 건강해졌어요. 여러분, 참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병을 이기는 정도가 아니에요. 시험도 이기고, 죄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원수도 이기고, 모든 것을 넉넉히 이깁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못이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특별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어요. 먼저 자기 자신의 부족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허물이 많습니다, 나는 형편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사랑 받는 사람은 이런 소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 받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사랑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사랑하는 자가 주는 거예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사실은 그 자체도 교만이에요.
나의 부족함이나, 나의 허물이나, 나의 나약함… 넉넉히 이기는 사랑으로 이것을 충분히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 받으면 그만 아니에요? 잘생기고 못생기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사랑 받는데, 분명히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요? 또 한가지는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떤 조건이나 여건에도, 잘되든 못되든, 건강하든, 병들든, 실패하든 성공하든 모든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무엇이든지, 어떠한 환경이든지, 모든 환경 전부를 다 소화하고 다 극복할 수 있어요. 이 두 가지를 극복하면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있었던 얘기입니다. 교황은 루터를 어떻게든 로마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금으로써, 돈으로써 그를 설득시키고자 추기경을 파견했습니다. 얼마 후, 추기경은 교황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 루터라는 바보가 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금으로서는 루터를 유혹할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추기경은 그를 협박했습니다. "당신은 교황께서 독일의 한 시골뜨기의 의견에 어떻게 대처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오? 교황의 손가락 하나가 전체 독일의 힘보다 강하다오. 당신이 믿고 있는 제후들이 보잘것없는 벌레 같은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오? 결코 그런 일은 없다고 내가 장담하오.
자, 이제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소?" 이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손안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대로 있겠습니다"-이것이 종교개혁의 힘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리라"-왜 그렇습니까?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속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절)"-그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를 사랑하고… 이것은 그 누구도, 그 어떤 환경도 끊을 수 없으리라 함입니다. 그 속에 능력이 있고, 내 삶의 의미가 있고, 내 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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