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기쁨이 되리라(요 16:16-24)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본문에서 "조금 있으면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잠깐이라는 시간적인 의미로서 잠깐 지나가면 못 보겠고, 잠깐 지나가면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무슨 의미인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요 16:17) 예수님은 제자들이 묻는 내용을 아셨지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조금 있으면 못 보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고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므로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약 9시간이 지나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조금 있으면 못 본다는 것이고, 또한 나흘 후에는 부활하심으로 조금 있으면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9시간 후에는 못보겠고, 나흘 후에는 보겠다는 내용입니다.
9시간도 잠깐이고 나흘도 잠깐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평안한 10년과 병든 1년을 비교한다면 병든 1년이 훨씬 더 긴 세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비록 6시간이지만 이 시간은 우리의 일생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긴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잠깐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지나간 생을 잠깐이라고 말을 합니다. 벌써 여름이 지났고, 또는 1년이 잠깐 지나갔고 아니 그보다 10년이 꿈과 같이 흘러갔다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의 전 일생을 잠깐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리 슬프다 해도 잠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리 기쁘다 해도 잠깐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이 번뜩번뜩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려운 고통도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순교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꼭 껴안고 순교자의 대열에 서 있습니다.
저쪽에서는 굶주린 사자들이 입을 벌리면 성도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이 때 어린 아이가 무서워서 울며 어머니 가슴으로 얼굴을 묻자, 어머니가 조용히 타이릅니다. "얘야, 잠깐만 참아라. 곧 밝아질 것이다." 사자가 물어뜯는 순간 아프겠지만 그 순간 잠깐만 지나면, 하늘 나라가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고 주님의 영접을 받을 것이니 잠깐만 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일생을 단축해서 보면 잠깐과 같은 것입니다. 일생이라고 해야 몇년입니까? 잠깐만 참으면 곧 밝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눈앞에 십자가를 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조금 있으면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고 십자가의 고통을 잠깐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입니다.
잠깐이라는 말은, 우선 시간적으로 짧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적으로는 큰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몸이 아프거나 내 육체가 썩어지는 것은 큰 일이 아닙니다. 정말 큰 일은 하나님의 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큰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큰 일이며 무엇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귀한 명예를 잃거나 신앙을 잃으면서까지 더러운 물질을 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얼마만큼 잘못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생명이 죽어 가는 십자가의 고통 앞에서도 잠깐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목숨 하나 죽는 것은 작은 일이고,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큰 일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또한 잠깐이란, 제한된 시간을 말합니다. 반드시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고통이 아무리 심해도 끝은 있습니다. 가끔 죽는 순간에 대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고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는 것은 잠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죽음과 함께 의식은 없는 것이므로, 어떤 고통이라도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다. 빌라도나 로마 군인이 아무리 예수님을 괴롭힐찌라도 숨이 넘어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영혼이 떠난 다음에는 계속해서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이며, 죽으면 육체의 고통은 끝납니다.
제한된 고통이란 말입니다. 사실 끝없는 고통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으로 "이 세상의 원수들이 아무리 너희를 핍박하여도 죽이는 것은 몸뿐이며 영은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는 잠깐 지나가는 제한된 것이므로 고통을 더해 보아도 한계가 있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죽음은 생명에 이르는 과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이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으면 낮이 가까와 오듯이 밤과 낮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진 들판에서 밤을 지새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칠흑같은 어두움이 있은 후에라야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곧 아침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어두움이 지나가고야 아침이 옵니다. 다시 말하면, 빛으로 향한 과정으로 어두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에로 가는 과정으로 어두운 밤, 즉 죽음과 고통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은 지금 어두움 속에 있을 것이 아니라 저 밝은 아침에 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앞서서 저 앞에 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적어도 10년 후 아니 죽은 후에 그리스도 앞에서까지 길게 내다보자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만 바라보지 말고 저 멀리 밝은 날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잠깐이란 말은 필연적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위해서는 죽음이, 빛을 위해서는 어두움이, 앞에 있는 영광을 위해서는 오늘 이 고통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6에 보면, "이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고 베드로도 잠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으로 얼마간의 고통이 꼭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도리어 기쁨이 된다고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 : 20 하반절)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소위 전화위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전화위복이 된다면 잠깐의 고통을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 라는 말처럼 감래하는 것으로 끝이 날 수만 있다면 고통을 나무랄 자가 없습니다. 즉 기쁨으로 연결된 근심, 행복으로 끝나는 슬픔, 뜻이 있고 약속이 있는 고통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필자가 지난 여름에 미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나니 이틀 반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습니다. 비행기 표는 미리 예약된 것이라 차를 빌려서 그랜드케년으로 구경을 갔습니다. 사전에 어떻게 가면 그랜드케년을 잘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비행기로도 갈 수 있고 버스로도 갈 수 있지만 고생을 하면서 12시간 동안 사막을 뚫고 지나가야 눈앞에 전개되는 그 곳의 장관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훌쩍가서 보는 것보다는 역시 사막을 횡단한 뒤에 그랜드케년을 보는 맛이 좋을 것 같아 그 길을 택했습니다. 해피 엔드로 끝날 수만 있다면 고생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고생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거리도 많고 자랑거리도 많으므로 마지막만 보장된다면 그 고생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6․25때 약 8개월 동안 최일선에 있었습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남자로서 한번 해볼 만한 것이다라는 것을 경험하고 느꼈습니다. 전쟁이란 없어야 되겠지만 죽지만 않는다면 정말 배울 것이 많고, 느끼는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마지막에 절망으로 끝날까 해서 두려운 것이지, 이것이 뒤집혀서 아름답게만 끝난다면 고생할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고생이 클수록 기쁨도 크고 고난이 무거울수록 영광과 자랑이 큰 것입니다. 더우기 그리스도인의 고통이란 저주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것이므로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고, 상급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필자가 신학대학에서 몇년간을 요한계시록을 강해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계시록을 한 마디로 말하면, 순교자의 예찬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이것을 가르치는 동안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천당을 가더라도 순교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많이 당해야 합니다. 고난이 곧 훈장이니까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그것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중요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 16 : 21) 요즘 같이 의학이 발달해도 해산날이 가까와 오면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 걱정은 분명히 값진 것입니다. 필자는 언젠가 여집사님이 맹장수술을 해서 병 문안을 갔었습니다. 마취가 풀리고 난 뒤라 계속 아픔을 호소해 왔습니다. 이 때 함께 갔던 또 한 분의 여집사님과 대화 중에 출산의 고통이 심한가, 아니면 맹장수술로 인한 고통이 심한가 하고 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제가 판정하기를 분명히 맹장이 더 아프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애기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 목사님이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힘든가를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출산의 고통이란 아이만 낳으면 끝난다는 기한부이며, 또한 약속이 있는 고통입니다. 이 수고만 지나면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이 있는데 비해, 맹장이란 의미 없는 고통입니다. 고통이란 저울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시간으로 따질 것도 아닙니다만, 문제는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또는 부끄러운 것이냐 영광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통은 비록 작아도 무거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고통은 좀 무거워도 견딜만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 자체를 물량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고통의 성격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은 아프고 괴롭지만 잠깐 후에는 그 고통이 도리어 기쁨이 되므로 고통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해산 후의 기쁨이란 사람 난 기쁨, 즉 생명의 기쁨입니다.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해도 시든 꽃은 예쁘지가 않습니다.
꽃이 예쁘다 함은 생명에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생명이 기본입니다.
사람 난 기쁨은 생명의 기쁨으로 최고의 기쁨임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형은,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자식을 왜 반기느냐고 화가 났지만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은 자식이므로 살았다는 것만 가지고도 기쁜 것입니다. 생명의 이 기쁨을 최고의 기쁨으로 기뻐할 줄 아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이 기쁘고 또 영원한 생명이 기쁜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가난하면 어떠하고, 병들면 어떠하며, 좀 일찍 가면 어떠합니까? 일찍 죽었다고 슬퍼할 것도 없고 오래 살았다고 복받았다고 야단할 것 없습니다. 건강하여 오래 살다가 죄많이 짓는 것보다는 병든 가운데라도 회개하고 천국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가 복받은 사람입니다. 어쨌든 해산과 같은 의미있는 고통은 기쁜 일이므로 지난 날의 모든 일을 소화하고 전부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은 생명의 기쁨으로 기억하지도 않는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해산의 지독한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면 몇년 있다가 또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귀한 생명을 품에 안는 순간 고통은 눈녹듯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을 소화하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또한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 : 22) 너무 기쁘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한 기쁨, 즉 영생에 대한 기쁨은 칼이나 기근이나 굴욕이나 죽음까지도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런 절대적인 기쁨이 있습니까? 너무나 큰 기쁨이기에 순교로도 이 기쁨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게 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이제 물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종합적이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다시 물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물을 필요가 없는 충족한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중보자가 되고 기도의 대상이 되어 축복의 주체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가 주리라." 얼마나 기분 좋은 말씀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모두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잠깐으로 생각합시다. 고난은 잠깐이요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언제나 마지막은 우리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조금 있으면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 등 정말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큰 기쁨으로 작은 슬픔과 고난을 소화하고 이겨서 늘 영생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 설교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자유(8:1 ~ 4) (0) | 2024.03.18 |
---|---|
기도의 부탁(롬15:22~33) (0) | 2024.03.18 |
끊을 수 없는 사랑(롬8:31 ~ 39) (0) | 2024.03.18 |
끝까지 사랑하시다(요 13:1-11) (0) | 2024.03.18 |
그리스도인의 뜻(사도행전 19:1~7) (0) | 2024.03.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