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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양자됨의 비유(로마서 8:12-17)

by 【고동엽】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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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됨의 비유(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지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이 말은 그의 구원관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인간의 공로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전제를 완전히 배제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구원관을 서명함에 있어서 단순히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로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이고 확실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기 위해 바로 이 자녀, 곧 양자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중 가장 확실한 사랑의 보증이 되는 말은 '자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저런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마는 뭐니 뭐니하여도 가장 변치 않는 사랑, 또한 변할 수 없는 사랑은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이요 관계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쓰게되는 것입니다. 더러는 잘못된 부모가 있기도 하고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라며 불효한 언동을 하는 자녀들이 있기도 합니다마는 부모 없이 태어난 생명이 어디 있으며,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모로부터 받는 이 수직적인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절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크고도 깊은 불변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자녀들이 속을 썩이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이면 좀 과격한 부모들은 "너 낳은 것을 후회한다."느니 심하면 "나가 죽으라."며 지나친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진심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어떤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가공부도 하지 않고 말썽만 부린다며 줄곧 혹한 말로 다잡다가도 그 자녀가 갑작스레 큰 병이라도 앓게 되면 그 때에는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다오."라며 슬슬 빌기까지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침내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자녀는 속으로 "진작 그럴 것이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아무튼 부모는 자식의 상태나 정도에 관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병들고 건강하고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며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혹은 출세를 하고 못하고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무작정 사랑할 뿐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자식이 남의 자식만큼 못하다고 하여 자식을 바꿔치기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바의 절대적인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확실하게 사랑하신다는 그 개념과 관계성을 설명하려 할 때,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비유로 "너는 내 자녀다."혹은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녀의 개념은 하나님의 그 절대적 사랑을 말해 주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곧 하나님의 가정이 일원이 되고 한 식구, 한 권속이 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Harnack)은 기독교란 무엇이냐라고 할 때 그에 대한 해답은 기독교의 교리를 다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이간단한 세 마디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깨끗한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모두 비유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항상 드리는 기도인 주기도문에도 보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로 시작하여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는 "아버지"로 끝나고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말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앙 고백은 바로 아버지 앞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났든 못났든, 허물이 있고 없고 간에 변함없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귀하게 생각하며 즐겨서하는 한 실화를 생각해 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애에 실패를 하게 된 캐시라는 한 처녀가 상심한 나머지 "딸 하나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라는 간단한 쪽지를 남기고 나간 채 10년이 되도록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이 딸은 그 길로 나가서 되는 데로 살다보니 창녀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는가하면 마지막에는 아편 중독자까지 되어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다 이제는 나이도 삼십이 넘고 보니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게 되어 먹고살길 조차 막막해 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다행히도 이때에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우리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늙으셨을까를 그려보며, 마지막으로 먼 빛으로나마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보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어두운 밤에 자기 집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저 만큼 멀리에서 자기의 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인지 집 안팎으로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캐시가 오늘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대문을 조금밀어 보았더니 대문도 잠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좀더 열어보려고 다시 밀었더니 삐걱하는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어머니가 "캐시야!"하면서 맨발로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캐시는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어머니에게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캐시는 어머니에게 "제가 한 번도 편지나 전화를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오늘 올 것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의 대답이 "네가 집을 나간 후로 단 한 번도 불을 끄거나 문을 잠근 일이 없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미는 기다립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딸이 꼭 잘 되어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좋으니 무조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딸의 생각은 자기가 방탕하고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절대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딸은 그것을 몰랐기에 그 동안 그런 모습으로 방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란 자녀 된 그것만으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에게 고민이 있으니, 그 첫째는 자녀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비기독교적인 과거 생활이 항상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육신으로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빚진 죄인이라는 강한 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빚을 지게 되면 마음이 거기에 쏠리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인이 아닌 빚진 죄인인 것이며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된 과거가 우리를 계속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면서도 자신이 없고 늘 마음에는 꺼림직한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고민은 나는 아무래도 구원받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자기를 돌아 볼 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는 하지만 나같이 못된 조인은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스스로의 판단과 자격지심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무자격을 논하며 사람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625때 군대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뼈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최일선 지역에서 폭격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대대장의 어린 자녀가 밖에 나가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니 폭격 소리를 들은 대대장의 부인이 아무개야 하고 아이를 부르러 나갔다가 불행하게도 다리에 기관총을 맞아 부득이 두 다리를 모두 자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의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나 같은 병신을 데리고 살면 일생 동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니 이제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남겨두고는 북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대장은 두고, 두고 울면서 괴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원망을 하기를 "저만 생각을 했지 내가 저를사랑하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발이 없다고 사랑하지를 않나? 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엄연히 자식을 둘이나 낳았는데 왜 도망을 가냐?"며 통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두 다리가 없다고 하여 사랑 받을 수 없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에게서 허물과 부족, 그리고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잘못되는 이유와 방탕의 길로 가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구제불능성을 진단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나면, 그 결국은 마귀의 종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고민은 경건과 성화의 발전이 없을 때에 갖게되는 낙심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바르게 살아보겠다며, 욕심을 부리거나 거짓말도 하지 않고 화나는 일도 참으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마는 하면 할수록 더욱 안 되는 것을 느끼게 되니 답답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대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며 탄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누구라도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분명 교만인 것입니다. 진정 외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의는 물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쉽게 하지를 않습니다. 아무튼 성화를 위한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하므로 스스로 포기하거나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도 바울은 양자됨의 비유를 들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너는 아들이다! 양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은혜요 강권적 은혜이며, 주권적 혹은 효과적 은혜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제는 무자격하여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딸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라는 뜻의 말은 신약 성경 중 다섯 번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섯 번이 모두 바울서신(8:15, 23, 9:4, 4:5, 1:5)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됨'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 특유의 전문용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아들과 종이라는 두 신분을 두고 비교를 해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항상 부자유한 가운데에 강한 의무에 매여 주인을 두려워하며 주인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어지는 대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좋지 못한 종으로 평가를 받게 되면 그나마 팔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있습니다.

아들은 기뻐하고 사랑을 받으며 유산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됨에는 잘나고 못나고 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저 잘났으면 잘난 아들, 못 났으면 못난 아들일 뿐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녀'라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말해 주고자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에는 나면서부터의 본래적인 자녀와 양자와 입적된 자녀가 있습니다. 양자 제도는 우리 나라에서 많이 해온 것입니다 마는 로마나 유대 나라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물론 요즈음에 와서는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마는 남성 위주의 족보를 중요시하던 옛날에는 비록 딸자식이 있다하더라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데서라도 기어이 남자를 데려와 양자로 입적을 시킴으로 그 자리를 메우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양자가 된 이 자녀는 직계의 본래적인 자녀는 아니면서도 완전한 자녀로 행세를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비유로 말합니다. 양자란 그 관계성을 알고 보면, 참으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아들이기에 아들 되는 것과 양자로서 아들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만약 고아원 같은 데서 자라던 불쌍한 아이 하나가 어느 가정의 양자로 들어갔다면 그 이후에 그 아이가 갖는 권한은 대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양자 됨을 비유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양자란 낳은 것도 아니요, 피가 섞인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혀 상관도 없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 무자격자에게 완전한 자격자로 옮겨오는 것이 양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특혜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되는 사람이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호적에 올리게 되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들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그것이 곧 나요, 우리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의 양자됨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의 결과인 동시에 신자의 최고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양자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첫째는 양자가 되면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신분, 즉 고아였거나 형무소에서 나왔거나 간에 이제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양자를 주선하는 기관이 있습니다마는 대부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모르기를 바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 되기 전의 자격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는 것이 양자됨의 특징이며, 따라서 이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 옛날 유대와 로마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봅니다. 가령 어떤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나기고 죽었다면 그 아들이 대신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으면, 부득이 노예로라도 팔려가서 갚아야 하는 것이 아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붙들려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와서 아들 중 하나를 골라 이 아이는 내가 양자를 삼겠다고 하면 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강한 의무와도 상관없이 양자로 입양된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거운 짐의 빚도 양자가 되는 순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로 온 집은 가난하고 과거의 집은 부유하다 하더라도 과거의 집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연히 나를 낳아주신 친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하더라도 이제는 이 집 아들이므로 그 앞에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양자는 이와 같이 과거와는 깨끗하게 끊어져야 합니다. 이 끊어짐이 없고서는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가정에서 불쌍한 아이 하나를 소개받아 양자로 입양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리며 속을 썩히는 것이 아무리 참고 가르치며 노력을 하여도 고쳐질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뒤를 쫓아 보았더니 그 아이의 친어머니가 학교 문전에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나가 먹을 것을 사주고 하면서 1시간씩 같이 놀다가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니, 이 아이가 거기에서부터 거짓말을 배우며 이중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분들은 그 어머니를 불러 다시 이 아이를 데려 가라며 돌려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양자가 되었으면 깨끗이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여전히 들락날락 하는 처지라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결국은 양자됨의 특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양자의 자격에는 아무 것도 상관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를 원하는 아버지가 "네가 내 아들이다."하는 한 마디만 해 주면 그것으로 양자 되는 일은 끝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단 한가지의 조건도 필요치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자기 자녀가 있으면서도 양자를 데려다 키우시는 분들을 보며 감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분은 "다른 사람이 양자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하나 주세요."해서 데려 왔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을 때에 저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양자를 하되 참으로 깨끗한 양자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나고 못나고 예쁘고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양자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남아 있으면 그 아이를 내게 주십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키우겠다며 다리가 온전치 못한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자격은 아버지가 사랑함으로 자격이 있는 것일 뿐이지 자신이 갖춘 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양자 되어 간 그 집의 족보에 나타난 아들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른다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뜨거운 말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르는 그 자체가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누구이든 일단 양자가 되어 가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만약 임금의 집에 양자로 간다면 그날부터 그는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네로 왕도 클라우디우스(Claudius)왕의 친아들이 아닌 양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왕의 아들이기에 훗날 왕아 된 것입니다. 왕자라고 하여 이것은 양자이기 때문에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 어떤 신분이든 양자된 그 집의 모든 특권을 백퍼센트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후의 남은 문제는 양자 되어 간 그 집의 가풍을 익혀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옛날의 생각이나 생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문, 새로운 신분에 맞는 생활을 익혀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잘하든 못하든 이제부터는 아들은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네 번째는 당당한 기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자로서 아들이 된 이상 이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재산은 아들의 것이며, 심지어 가문의 혈통이나 모든 전통, 그 족보까지도 그를 통해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기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양자는 아들로서 사랑을 받고, 권세를 행사하며, 기업을 이어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게되는 징계가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만약 징계를 하지 않는 아들이라면 그것은 사생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12:5-8).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바들 때이면 내가 아들로서 이 징계를 받는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마음 한 구석에서라도 내가 주워온 자식이기 때문에 이러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는 벌써 양자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이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이 때에 우리가 조심할 것은 우리의 마음 어느 구석에서라도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령이 계셔서 우리의 아들 됨을 확증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16절을 말씀에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를 향하여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라며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14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세 가지 세계관이 생기게 되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며 자신 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웃을 형제와 자매로 보게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우주 만물 대자연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외국인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는 중에 당신 나라에도 이런 것이 있느냐는 미국 사람의 질문을 받고는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것"이라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의 우스운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이 없는 자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표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요, 나는 아버지의 자녀이며,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세계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갖게 되는 여기에 양자 됨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양자됨의 비유(로마서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지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이 말은 그의 구원관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인간의 공로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전제를 완전히 배제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구원관을 서명함에 있어서 단순히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로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이고 확실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기 위해 바로 이 자녀, 곧 양자의 비유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중 가장 확실한 사랑의 보증이 되는 말은 '자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저런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마는 뭐니 뭐니하여도 가장 변치 않는 사랑, 또한 변할 수 없는 사랑은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이요 관계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쓰게되는 것입니다. 더러는 잘못된 부모가 있기도 하고 "나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라며 불효한 언동을 하는 자녀들이 있기도 합니다마는 부모 없이 태어난 생명이 어디 있으며,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모로부터 받는 이 수직적인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절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크고도 깊은 불변의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자녀들이 속을 썩이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때이면 좀 과격한 부모들은 "너 낳은 것을 후회한다."느니 심하면 "나가 죽으라."며 지나친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진심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어떤 부모님들은 자기 자녀가공부도 하지 않고 말썽만 부린다며 줄곧 혹한 말로 다잡다가도 그 자녀가 갑작스레 큰 병이라도 앓게 되면 그 때에는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다오."라며 슬슬 빌기까지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침내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자녀는 속으로 "진작 그럴 것이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아무튼 부모는 자식의 상태나 정도에 관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병들고 건강하고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며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혹은 출세를 하고 못하고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무작정 사랑할 뿐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자식이 남의 자식만큼 못하다고 하여 자식을 바꿔치기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바의 절대적인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확실하게 사랑하신다는 그 개념과 관계성을 설명하려 할 때, 이러한 부모의 사랑을 비유로 "너는 내 자녀다."혹은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녀의 개념은 하나님의 그 절대적 사랑을 말해 주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곧 하나님의 가정이 일원이 되고 한 식구, 한 권속이 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Harnack)은 기독교란 무엇이냐라고 할 때 그에 대한 해답은 기독교의 교리를 다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이간단한 세 마디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깨끗한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모두 비유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항상 드리는 기도인 주기도문에도 보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로 시작하여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하는 "아버지"로 끝나고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말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앙 고백은 바로 아버지 앞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났든 못났든, 허물이 있고 없고 간에 변함없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에서 항상 귀하게 생각하며 즐겨서하는 한 실화를 생각해 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애에 실패를 하게 된 캐시라는 한 처녀가 상심한 나머지 "딸 하나 죽었다고 생각하십시오."라는 간단한 쪽지를 남기고 나간 채 10년이 되도록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이 딸은 그 길로 나가서 되는 데로 살다보니 창녀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는가하면 마지막에는 아편 중독자까지 되어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다 이제는 나이도 삼십이 넘고 보니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게 되어 먹고살길 조차 막막해 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다행히도 이때에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우리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늙으셨을까를 그려보며, 마지막으로 먼 빛으로나마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보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어두운 밤에 자기 집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저 만큼 멀리에서 자기의 집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인지 집 안팎으로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캐시가 오늘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대문을 조금밀어 보았더니 대문도 잠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좀더 열어보려고 다시 밀었더니 삐걱하는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어머니가 "캐시야!"하면서 맨발로 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캐시는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어머니에게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캐시는 어머니에게 "제가 한 번도 편지나 전화를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오늘 올 것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의 대답이 "네가 집을 나간 후로 단 한 번도 불을 끄거나 문을 잠근 일이 없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미는 기다립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딸이 꼭 잘 되어 가지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좋으니 무조건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딸의 생각은 자기가 방탕하고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절대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딸은 그것을 몰랐기에 그 동안 그런 모습으로 방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란 자녀 된 그것만으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에게 고민이 있으니, 그 첫째는 자녀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비기독교적인 과거 생활이 항상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육신으로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향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빚진 죄인이라는 강한 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빚을 지게 되면 마음이 거기에 쏠리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인이 아닌 빚진 죄인인 것이며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된 과거가 우리를 계속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면서도 자신이 없고 늘 마음에는 꺼림직한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고민은 나는 아무래도 구원받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자기를 돌아 볼 때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는 하지만 나같이 못된 조인은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스스로의 판단과 자격지심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무자격을 논하며 사람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625때 군대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뼈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최일선 지역에서 폭격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대대장의 어린 자녀가 밖에 나가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니 폭격 소리를 들은 대대장의 부인이 아무개야 하고 아이를 부르러 나갔다가 불행하게도 다리에 기관총을 맞아 부득이 두 다리를 모두 자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의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나 같은 병신을 데리고 살면 일생 동안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니 이제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남겨두고는 북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대장은 두고, 두고 울면서 괴로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원망을 하기를 "저만 생각을 했지 내가 저를사랑하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발이 없다고 사랑하지를 않나? 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엄연히 자식을 둘이나 낳았는데 왜 도망을 가냐?"며 통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두 다리가 없다고 하여 사랑 받을 수 없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에게서 허물과 부족, 그리고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잘못되는 이유와 방탕의 길로 가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구제불능성을 진단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나면, 그 결국은 마귀의 종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고민은 경건과 성화의 발전이 없을 때에 갖게되는 낙심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바르게 살아보겠다며, 욕심을 부리거나 거짓말도 하지 않고 화나는 일도 참으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마는 하면 할수록 더욱 안 되는 것을 느끼게 되니 답답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대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며 탄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누구라도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분명 교만인 것입니다. 진정 외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의는 물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쉽게 하지를 않습니다. 아무튼 성화를 위한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하므로 스스로 포기하거나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사도 바울은 양자됨의 비유를 들어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너는 아들이다! 양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은혜요 강권적 은혜이며, 주권적 혹은 효과적 은혜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제는 무자격하여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딸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자"라는 뜻의 말은 신약 성경 중 다섯 번 나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섯 번이 모두 바울서신(8:15, 23, 9:4, 4:5, 1:5)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됨'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 특유의 전문용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아들과 종이라는 두 신분을 두고 비교를 해보면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항상 부자유한 가운데에 강한 의무에 매여 주인을 두려워하며 주인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어지는 대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좋지 못한 종으로 평가를 받게 되면 그나마 팔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있습니다.

아들은 기뻐하고 사랑을 받으며 유산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됨에는 잘나고 못나고 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저 잘났으면 잘난 아들, 못 났으면 못난 아들일 뿐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녀'라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말해 주고자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에는 나면서부터의 본래적인 자녀와 양자와 입적된 자녀가 있습니다. 양자 제도는 우리 나라에서 많이 해온 것입니다 마는 로마나 유대 나라에서도 있었던 제도입니다. 물론 요즈음에 와서는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마는 남성 위주의 족보를 중요시하던 옛날에는 비록 딸자식이 있다하더라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데서라도 기어이 남자를 데려와 양자로 입적을 시킴으로 그 자리를 메우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양자가 된 이 자녀는 직계의 본래적인 자녀는 아니면서도 완전한 자녀로 행세를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비유로 말합니다. 양자란 그 관계성을 알고 보면, 참으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아들이기에 아들 되는 것과 양자로서 아들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만약 고아원 같은 데서 자라던 불쌍한 아이 하나가 어느 가정의 양자로 들어갔다면 그 이후에 그 아이가 갖는 권한은 대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양자 됨을 비유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양자란 낳은 것도 아니요, 피가 섞인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혀 상관도 없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 무자격자에게 완전한 자격자로 옮겨오는 것이 양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특혜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되는 사람이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호적에 올리게 되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들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그것이 곧 나요, 우리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의 양자됨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의 결과인 동시에 신자의 최고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 양자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첫째는 양자가 되면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신분, 즉 고아였거나 형무소에서 나왔거나 간에 이제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양자를 주선하는 기관이 있습니다마는 대부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모르기를 바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자 되기 전의 자격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는 것이 양자됨의 특징이며, 따라서 이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 옛날 유대와 로마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봅니다. 가령 어떤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나기고 죽었다면 그 아들이 대신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으면, 부득이 노예로라도 팔려가서 갚아야 하는 것이 아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붙들려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와서 아들 중 하나를 골라 이 아이는 내가 양자를 삼겠다고 하면 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강한 의무와도 상관없이 양자로 입양된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거운 짐의 빚도 양자가 되는 순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로 온 집은 가난하고 과거의 집은 부유하다 하더라도 과거의 집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연히 나를 낳아주신 친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하더라도 이제는 이 집 아들이므로 그 앞에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는 일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양자는 이와 같이 과거와는 깨끗하게 끊어져야 합니다. 이 끊어짐이 없고서는 양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가정에서 불쌍한 아이 하나를 소개받아 양자로 입양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계속 말썽을 부리며 속을 썩히는 것이 아무리 참고 가르치며 노력을 하여도 고쳐질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뒤를 쫓아 보았더니 그 아이의 친어머니가 학교 문전에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나가 먹을 것을 사주고 하면서 1시간씩 같이 놀다가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니, 이 아이가 거기에서부터 거짓말을 배우며 이중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분들은 그 어머니를 불러 다시 이 아이를 데려 가라며 돌려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양자가 되었으면 깨끗이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여전히 들락날락 하는 처지라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결국은 양자됨의 특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양자의 자격에는 아무 것도 상관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를 원하는 아버지가 "네가 내 아들이다."하는 한 마디만 해 주면 그것으로 양자 되는 일은 끝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단 한가지의 조건도 필요치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자기 자녀가 있으면서도 양자를 데려다 키우시는 분들을 보며 감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분은 "다른 사람이 양자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하나 주세요."해서 데려 왔다고 하니 그 말을 들을 때에 저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양자를 하되 참으로 깨끗한 양자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나고 못나고 예쁘고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양자하기 싫어하는 아이가 남아 있으면 그 아이를 내게 주십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키우겠다며 다리가 온전치 못한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자격은 아버지가 사랑함으로 자격이 있는 것일 뿐이지 자신이 갖춘 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양자 되어 간 그 집의 족보에 나타난 아들로서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른다는 것은 보통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뜨거운 말인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르는 그 자체가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누구이든 일단 양자가 되어 가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만약 임금의 집에 양자로 간다면 그날부터 그는 왕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네로 왕도 클라우디우스(Claudius)왕의 친아들이 아닌 양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왕의 아들이기에 훗날 왕아 된 것입니다. 왕자라고 하여 이것은 양자이기 때문에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 어떤 신분이든 양자된 그 집의 모든 특권을 백퍼센트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후의 남은 문제는 양자 되어 간 그 집의 가풍을 익혀 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옛날의 생각이나 생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문, 새로운 신분에 맞는 생활을 익혀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잘하든 못하든 이제부터는 아들은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네 번째는 당당한 기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양자로서 아들이 된 이상 이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재산은 아들의 것이며, 심지어 가문의 혈통이나 모든 전통, 그 족보까지도 그를 통해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기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양자는 아들로서 사랑을 받고, 권세를 행사하며, 기업을 이어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게되는 징계가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만약 징계를 하지 않는 아들이라면 그것은 사생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12:5-8).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바들 때이면 내가 아들로서 이 징계를 받는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마음 한 구석에서라도 내가 주워온 자식이기 때문에 이러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는 벌써 양자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였을 때이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이 때에 우리가 조심할 것은 우리의 마음 어느 구석에서라도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성령이 계셔서 우리의 아들 됨을 확증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16절을 말씀에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를 향하여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라며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14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세 가지 세계관이 생기게 되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며 자신 있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웃을 형제와 자매로 보게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우주 만물 대자연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외국인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는 중에 당신 나라에도 이런 것이 있느냐는 미국 사람의 질문을 받고는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것"이라며 대답을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의 우스운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이 없는 자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표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요, 나는 아버지의 자녀이며,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세계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갖게 되는 여기에 양자 됨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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