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오천 명을 먹이심(요한복음 6장 1~15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 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 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저 디베랴 광야의 기적-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에 한결같이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3절 이하에, 마가복음 6장 32절 이하, 누가복음 9장 10절로 17절, 그리고 요한복음 6장, 이렇게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은 어느 것이나 다 네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적이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든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적을 요한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은 네 복음서의 어느 복음서를 펼쳐보아도 찾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이 질을 바꾸신 기적이라 한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기적은 양을 바꾸신 이적이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오 천 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는 실제 인원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린아이가 다섯 덩이의 떡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소한 일인당 다섯 덩이씩을 먹었다고 가정하면 이만 오 천 덩이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일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라든가. 에너지 불변의 법칙 같은 과학적인 법칙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함께 하고 있는 이상 물량을 늘리시는가 하면 질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도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질과 양 그 어느 쪽으로든지 공히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광야에 모일 수 있었겠습니까? 오 천 명이라면 굉장한 숫자입니다. 그 옛날, 더구나 2천 년 전의 시골 광야에 몇백 명도 아니고 오 천 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모일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년에 세 차례의 명절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에는 열두 살 이상이면 예루살렘으로 거의 다 모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근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런 순례 도중에 디베랴 광야로 모였던 것입니다.
왜 모였던 것이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본문 2절 말씀 가운데 그 중 하나의 대답이 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큰 무리가 따랐던 것은 그들이 이적을 보았거나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다든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다든가 하는 소문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때마침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를 지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인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점도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을 향하는 유대인들, 이들은 나라 잃은 백성들로, 로마사람들에게 핍박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늘 갈망합니다. '언제가야 우리는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가야 우리를 제대로 이끌어줄 왕이 나타날 것인가?' 이런 탄식과 기대 속에 메시야의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무성합니다. '아, 그분은 선지자다. 그분은 능력 있으시고 말씀도 잘하신다, 죽은 자도 살리는 이적을 행하신다,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다'-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도 그곳에 모였던 오천 명의 마음속에는 이분을 모시고 가서 유대나라 왕을 삼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을 메시야의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욕구가 가득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갈릴리사람 이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고 감격에 차 있었을 법합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오천 명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깊이 생각해봅니다. 목회자들이 이따금씩 야외 예배를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조용해도 마이크 없이 설교를 하면 공중으로 소리가 흩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설교 말씀을 못 듣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천 명의 신도가 모일 경우만 해도 마이크가 없으면 뒷 분들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목사님들은 대개 목이 쉬었다고 합니다. 몇백 명만 모여도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설교를 해야 했으니 목소리가 허스키 하게 되어버렸다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배당이 이렇게 규모가 커진 것도 바로 이 마이크라는 괴물이 생긴 이후의 일입니다.
하물며 실내도 아닌 광야에서 맨 목소리로 설교를 하셨으니 그 상황이 어떠했을는지 쉽게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사람 몇 명이 대표로 들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 저 앞에서 좋은 말씀을 하시고 계실 것이라는 추측이나 하며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이롭게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설교를 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완전히 도취되고 맙니다. 온전히 심취한 사람들은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때가 가까워온다는 것마저 잊어버린 채 흠뻑 예수님의 말씀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스름녘이 되어서야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만큼 시간이 경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끝낸 다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보고 걱정을 하십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돌아가다가 지칠까 걱정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넓고 황량한 광야에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을 걱정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각기 다릅니다.
문제에 대응하는 자세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한 첫번째 반응은 회피적인 반응입니다. '배고픈 거야 자기들이 정신없이 앉아 있다가 그렇게 된 거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 먹는 것까지 신경쓸 건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고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村)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막 6 : 36)"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굶건 말건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 그냥 보내자는 무관심한 반응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계산적인 반응입니다. 요한복음 6장 7절에 나오는 빌립의 말을 보십시다.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장기를 없앨 정도로만 먹어도 이 무리를 먹게 하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들겠다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문제를 회피하려 하고 있고, 한 사람은 될까 안될까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사람이요 이성적이며 똑똑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유형은 세 번째, 안드레와 같은 유형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요 6 : 9)." 이어서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예수님께 해결방법이 없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문제를 가지고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어떤 문제를 놓고 내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로 회피하려 들거나 약삭빠른 계산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로울까 해로울까, 이렇게 해주면 다음에 또 요구할 텐데...' 반면에 진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문제의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나옵니다. '당신께 문제의 해결이 있다고 믿습니다. 당신께서 해결해주십시오.' 요한도 모든 것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던 기적은 이러한 일면을 또 한번 상기시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이 문제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하라고 명하고는 가버립니다. 이때 만약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대답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제가 당장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말씀하시는 대로만 하면 뭔가 해결이 있을 거라는 마리아의 이 아름다운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건 내가 먼저 해결의 길을 찾을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먼저 예수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의 협박 편지를 성전에 가지고 가서 펴놓고 하나님 앞에 내보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저 산헤립이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내보이는 것입니다. 당연히 '보리떡 두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그대로를 내밀었던 안드레의 태도가 조금은 바람직스럽습니다.
본문의 보리떡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음식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자동차의 뒤에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헬라어로 '익서스'라고 표기를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 '익서스'가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첫자는 '예수스'-예수입니다. 둘째 글자는 '크리스투스'-그리스도입니다. 셋째 글자는 '써우'-하나님, 넷째 글자는 '오이오스'-아들입니다. 다섯째 글자는 '쏘테리아'-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곧 그 다섯 자가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통례적으로 이 '익서스'라는 말은 물고기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물고기를 '옵사리온'이라고 표기합니다. 역시 물고기라는 뜻이기는 하나, 우리가 명태를 놓고 말리면 북어, 얼리면 동태라고 하는 것이나, 조기를 말리면 굴비라고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옵사리온'이란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 아주 작은 것은 다시 물에 놓아주고 큰 것만 골라 담는 과정에서 버리기도 골라 담기도 어중간한 크기의 물고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어부들은 도로 바닷가에 버립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삭줍기를 하듯 모래밭의 마른 물고기를 주워갑니다.
바짝 마른 그 물고기를 주워다가 적당히 구워먹는 것이 바로 '옵사리온'이라는 것입니다. 곧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작은 물고기입니다.
좀더 좋은 큰 물고기로 할 일이지 왜 그렇게 좋지 않은 음식을 썼겠습니까? 여기에도 역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외에 구약성경에도 음식과 관련된 기적이 많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가운데 민수기 11장이나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를 몰아다 먹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떡을 먹이시고, 여러 해 가뭄으로 굶어죽게 되자 역시 어느 과부를 통해 먹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열왕기하 4장 42절로 44절에 보리떡 스무 개로 1백 명을 먹이신 기적도 이러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특히 일곱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이적을 보이신 의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지칠까 하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정신없이 앉아 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지쳐 쓰러지는 사람이 있겠다'라고 예수님은 걱정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이적의 동기가 바로 긍휼에 있습니다. 고통받는 환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죽은 아들 때문에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겨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속에 이적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적들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다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는 대체적으로 '내가 병을 고쳐주었으니 앞으로는 못된 짓 하지 말고 바로 살아라. 복음 열심히 전해라'라는 명령을 하거나 조건을 붙이시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이적 자체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지 불쌍한 마음이 그 출발입니다. 우리도 선한 일을 할 때에 어떤 조건을 걸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으로만 해야 하겠습니다.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주지 않는 것만 못하다'라는 탈무드의 말처럼 조그마한 선행을 하면서 요란스럽게 떠벌리려 하지 마십시다.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도 말없이, 조건 없이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안드레의 수고입니다. 안드레는 사람들이 지쳐 쓰러지게 된 사건을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전도자의 역할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을 치료받았다던가, 장님이 눈을 떴다던가 하는 이적 뒤에는 어떠한 이적을 행했다던가 어디에 어떤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식의 소문과 소식이 있습니다. 중간에 중보적인 수고를 했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간 역할을 담당하는 전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의 자세입니다. 물론 아주 적은 것이었습니다 마는 그 어린아이의 전부였습니다. '내가 먹으려고 가지고 온 음식을 왜 주느냐, 내 것이니까 나만 먹겠다'-만약 어린아이가 이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내가 먹기보다는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내 놓으면 오천 명이 다 먹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언감생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려 할 때에 반드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적은 물질을 요구하십니다. 시간과 지혜와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적은 것을 가지고 무엇하겠느냐' 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것이 씨가 되고 시작이 됩니다. 엄청난 역사를 이루는 그 씨앗은 우리가 드린 아주 적은 것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삼십 년 전 시월 첫 주일 일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민철 장로님 댁에서 오십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모였던 오십여 명중에는 소망교회인들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나 하여 구경온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첫날이었지만 예배가 끝나고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을 정리하면서 보니 놀랍게도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있습디다. 그 백만 원을 헌금하신 집사님은 아직도 우리 교회에 다니십니다. 겉봉에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하여'라고 씌어 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세웠을 때는 사실 지금과 같이 이렇게 큰 교회는 꿈도 꾸지 못 했습니다. 지금도 장로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가끔씩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은 참 거짓말을 잘하십니다.
오백 명만 모아 설교하시겠다고 하시더니 천 명으로, 천 명만 하시겠다더니 오천 명으로, 오천 명만 하시겠다더니 만 명으로 자꾸 그렇게 늘리시니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욕심을 부려 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는 내게로 올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사람이면 그리로 보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플랜을 짜듯 마음대로,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순리대로,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만큼만 되는 것입니다. 삼십 년 전 시월 첫 주일 아침예배를 헌금봉투를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건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진실로 꿈도 꾸지 못했던 일입니다. 백만 원이란 성전 건축을 놓고 보면 그리 큰돈이 못되지만 필경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의 손에 든 것은 적은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질까를 미리 생각하지 마십시다. 그렇다고 '나의 이 수고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느냐'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충성하십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노력과 시간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금년에는 몇 명, 명년에는 몇 명,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쩐다 하면서 계획을 세웁니다. 다 소용없습니다. 어느 교회는 일년에 만 명이요 오 년이면 오만 명이라고 떠들고 다니다가 겨우 이백 명으로 다른 곳에 이사를 갑디다.
사람의 생각대로 하고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들은 아주 적은, 보리떡 다섯 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주님께 바치면, 주님 손에 들리어지면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 그 씨앗은 지극히 작은 것임을 명심하십시다.
넷째, 음식을 놓고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저 오천 명 앞에 다섯 덩이의 떡을 놓고 축사하시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다. 범인이라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오'입니다. '감사'라는 뜻입니다. 감사가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걱정도 많고 근심도 많고 문제도 많습니다마는 감사가 먼저입니다.
감사가 기적의 요건입니다. 감사에 기적의 역사가 있습니다. 가끔 저는 입원한 환자들을 위해 병원에 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죽어 가는 환자를 보면서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건강한 때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병든 때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 동안 건강하게 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비록 오늘 죽더라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왔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요, 오늘 망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내게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 그렇게 자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데려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합니다. 자랑인지 교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며칠 후, 4월 20일이 되면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지 꼭 30년이 됩니다. 30여 년 동안을 목회해 오면서 주일날 강단에 서지 못했던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앞으로 무슨 병에 걸려 갑자기 죽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건강했습니다. 그만큼 건강했던 것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로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떡 다섯 덩이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감사치 않고 음식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먹어야 합니다. 감사하지 않고 먹는 것은 도적질을 하는 것과 같다-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감사를 앞세우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다섯째,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마태복음 14장 19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예수님께서 손수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떡을 놓아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분배의 수고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전도자들에게 바로 이 전도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저는 가끔씩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섯 개씩, 열 개씩 카세트 테입을 사가는 분들을 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주려는 마음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적으로 만들어놓은 떡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 한 사람들은 것에 자족하지 마십시다. 나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멀리 미국에 가 있는 아들이나 친지, 친구, 또 내 부모에게 우편으로라도 보내야겠다는 정성스런 마음을 가진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현재 매주 나오는「소망의 말씀」이라는 조그마한 설교 책자가 1만 부가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나갈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떡을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여러분의 작은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다.
여섯째,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요한복음 6장 12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흔히 '이적으로 만든 것인데 또 만들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적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적을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부스러기까지 수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볍게 간과해서는 안될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천 명을 앞에 놓고 성찬식을 하는 이 기록의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고 생명의 포도주가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이어 성찬식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떡이고 원천이며 지지자이십니다. 육신이 떡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우리의 영은 말씀을 먹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삽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말씀되심을 보여주시는 성례적 성찬식의 귀한 의미가 여기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하노니 깨끗하여라(마가복음 1장 40~45절) (0) | 2024.03.19 |
---|---|
옷가를 만진 여인(마가복음 5장 25~34절) (0) | 2024.03.19 |
영광에 이르는 병 (요한복음 11장 1~10절) (0) | 2024.03.19 |
열리라(마가복음 7장 31~37절) (0) | 2024.03.19 |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