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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로 자랑하는 자(6장 11~13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오늘 드릴 말씀과 다음 시간에 드릴 말씀은 사실상 갈라디아서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소극적인 면에서, 다음 시간에는 좀더 적극적인 면에서 결론의 말씀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이라 하는 것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종합해서 그 요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둘째는 그것에 대한 실천 분야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살펴보았고 중요한 교리의 내용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이것을 어떻게 생활에 옮겨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말씀을 합니다. 셋째는 소망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받은 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실제로 그 말씀대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가능성을 보여주고, 빛을 보여주고, 소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결론이라고 합니다. '결론에 가서는 항상 소망적이어야 한다'-설교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결론에까지 어두운 면을 말하는 설교는 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화를 볼 때에도 중간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든지간에 마지막에 가서는 해피엔드로 끝나야 좋습니다. 악한 사람이 죽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아야 됩니다. 결국에는 선한 사람이 잘되어야 영화 보는 재미가 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실존주의 철학이다 뭐다 하여 마지막에 그만 착한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그러면 며칠 동안 기분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괜히 돈만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결론이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뜨거운 애정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가 너희를 지극히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특별히 사랑한다-그 뜨거운 마음을 필히 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간혹 자녀들을 책망하고 꾸짖지 않습니까? 권면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다 좋습니다마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나중에 이 한마디를 꼭 해야 합니다. 이 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일에 그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한 채 꾸중만 잔뜩 듣게 했다면 그날의 교육효과는 제로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지독하게 미워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힐까"라고 생각하며 자녀가 문을 나섰다면 그날의 잔소리는 완전히 무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교훈, 어떠한 진리를 강력하게 피력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교훈 하는 자의 뜨거운 사랑을 교훈 받는 자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편 늘 하는 이야기올시다마는 사랑하라는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사랑의 의무보다는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하는 그 감격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열심히 말해도 그 말 때문에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쉬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그러나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 됩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때에 사랑할 마음을 가지게 되고 사랑의 지혜, 사랑의 능력까지도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에는 책망하는 말씀도 있고 심하게 비판하는 말씀도 있고 마음을 찌르는 말씀도 있고 권면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여러 귀한 말씀을 하고 끝에 가서 비로소 사도 바울의 강조하는 바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이 모든 말들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뜨거운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전달되지 않으면 이제까지의 교훈은 다 무효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 사랑만 저들의 가슴에 닿아서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있으면 이때부터 그 교훈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 제목으로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고 별의별 간청을 다 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언제나 한마디로 돌아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이 응답인줄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병들었다고 해봅시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날 밤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병들어서 몹시 아프겠구나. 그것도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 이 말씀을 듣고 '아멘'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아마도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까짓것 몇십 년 더 앓아 누워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증거일진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어쩌면 그 말씀과 함께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들려오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꼭 벌받은 것만 같습니다. 저주받은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병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는지 보십시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내가 큰 글자로 쓴다는 말은 친필로 쓴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큰 사랑과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큰 글자'라는 말이 나오게 된 연유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충 이런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직접 쓰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대필(代筆)시키고 마지막에 서명만은 직접 했습니다. 서명은 사도 바울이 했다고 전설로 알려져 내려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인 11절에서 마지막 부분까지는 사도 바울이 좀 불편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손수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글자로 쓰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형식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므로 대문자로 쓰겠노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없지만 영어에도 소문자와 대문자가 있습니다. 그처럼 헬라어에도 소문자와 대문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큰 글자로 쓴다고 하는 말은 이제부터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대문자로 써내려가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결론을 맺으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조점을 더욱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야기가 너무 많고 복잡하므로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이 한마디 말만은 꼭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강조함으로써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큰 글자로 쓴다-이제부터 하는 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른 말은 듣고 혹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도 이 말만은 잊어서는 안된다 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들을 해석할 때에는 이제부터 하는 말을 염두에 두고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조명해서 해석하고 여기에 뿌리를 두고 중심을 두면 어느 구절 어떠한 말씀이라도 다 해석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본문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글자로 쓴다고 하는 말의 뜻인 줄 압니다.
둘째로 큰 글자로 쓴다는 말은 글씨 자체를 크게 쓴다고 하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대문자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글자 자체를 지금까지 써온 것보다 더 크게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만을 크게 써서 모든 사람이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고 꼭 알아야 되는 것이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 같습니다
셋째는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는 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워낙 눈이 나빴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위로부터 오는 밝은 빛을 보고서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돌아가서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기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뜹니다. 뜨기는 떴습니다마는 하늘로부터 오는 강한 빛을 이미 한번 받았기에 시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평생 시력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돋보기 안경이라도 하나 끼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그런 안경이 없었으니 그냥 침침한대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쓸 수도 볼 수도 없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는 눈이 이렇듯 침침하여 곤란할 때마다 예수를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밝은 빛을 받던 그 어느날 정오의 사건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을 늘 마음에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하고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가 하게 될 말을 친필로 쓰고 싶은데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부득불 지금까지 써온 글자와는 다른, 좀더 큰 글자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큰 글자로 써서 마지막 결론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봅시다.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쓴 것이 무엇이냐,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역시 갈라디아서의 주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교회 안이 할례의 문제로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할례 문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대비하여 설명합니다. 왜 사람들이 할례를 강조하는가, 왜 우리가 할례를 받지 말아야 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 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이런 것을 간단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심층에 있는 발상과 그 동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주 예민하게, 또한 심리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분석하여 그들을 비판합니다.
그 첫째 이유로 12절 하반절에 보면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사람은 본래 이방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므로 더는 왈가왈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이 와서는 예수만 믿어 가지고는 안된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자꾸 들쑤십니다. 이 말을 듣고 '아마 그런가보다'하면서 할례 받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놓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할례를 받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자아(ego)가 편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때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복잡하게 부딪칠 필요가 뭐 있느냐, 좋은 것이 좋지-대충 타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태도입니다. 그까짓것 받으라면 받지-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저 적당히 받으라면 받고 하지 말라면 말자는 것입니다. 단지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핍박을 받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온 세계를 지배하던 때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는 특별히 유대나라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계를 지배하면서 각 나라의 자치권을 인정하였고 종교에 대해서는 유대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했고 대제사장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로마정부는 공식적으로 유대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의식, 즉 모든 예배와 제사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고로 유대교는 로마법 앞에서 당당하게 믿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신흥종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어렵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것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기독교를 믿는 것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기독교를 믿으려고 할 때에 유대교의 규례에서 벗어나 믿게 되면 곤란해집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종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데에는 핍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늘어나고 그 힘이 커져서 로마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게 될 때까지 기독교는 아직 공식적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많은 핍박이 따랐습니다. 아시다시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황제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기독교가 공인을 받습니다. 이제 온 시민이 기독교를 마음대로 믿어도 된다 하고 공포를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로마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이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초기 역사는 매우 험난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용으로는 예수를 믿어도 형식으로는 할례를 받아버리면 그만 유대교의 한 분파가 되어버립니다. 대신 그 순간에 그는 핍박받을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면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묘한 것입니다. 믿기는 예수를 믿고 형식적으로는 유대교의 형식을 딱 취해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면 핍박받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우리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저 왜정 말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 때에 신사참배라는 것을 강제로 시켰습니다. 동네마다 '신사(神社)'를 만들어놓고 거기 대고 절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어떻게 우상 앞에 절을 하느냐 하며 결사반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감옥에 들어가거나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국민의례라 생각하고 좀 하면 어떠냐, 잠시 묵도하면 된다, 어차피 나무쪼가리밖에 없는데 하나님 아버지하며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면 핍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습니다마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모든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죽어갔겠습니까?
특별히 로마정치시대에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실제로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나 예수님의 사진은 지금까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예수님의 초상화들은 전부가 다 상상화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렇게 생기셨을 것이다 하여 상상해서 그린 것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림을 떡하니 그려놓고는 기독교인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 그림을 땅바닥에 갖다놓고 한 사람씩 밟고 지나가게 했답니다.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못 지나가면 죽이는 것입니다. 이때에 지나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얕게 생각합니다. '저것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예수님이라고 그려놓았을 뿐이지 진짜 예수님 사진이 아니다.' 종이조각인데 어떠냐 하며 밟고 지나갈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잘 그렸든 못 그렸든간에 예수님 사진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종이를 밟는 것이 곧 예수님의 얼굴을 밟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자굴에 들어가 죽어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적당히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순교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보십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깨끗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정정당당하게 믿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습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믿는 사람은 핍박받을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유대교에 편승하여 공식적인 종교의 옷을 입고 지내보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핍박을 안 받으려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은 고난받지 않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의 삶에 고난이 없다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그 핍박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면 그 손해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 깨끗한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읍시다.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예는 아니지만 용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일날만 돌아오면 별일도 없이 학교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교회에 못 나가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사실 교회에 가서 첫 시간 예배를 드리고 다시 학교에 가도 됩니다마는 저는 일부러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교회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월요일날 학교에 가서 하루종일 매를 맞고 벌을 섭니다. 한참을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오히려 재미가 납디다. 이력이 날 정도였습니다. 월요일에는 숫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담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는 왜 그렇게 예수를 요란하게 믿느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너만 유독 왜 그러느냐? 아침 일찍 교회에 갔다가 좀 늦게라도 학교에 나오면 내가 '출석'이라고 기록해줄 것이 아니냐? 왜 안 나와서 이 말썽이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학교에 안 나온다고 하는 것이 저의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하루종일 뭐하겠습니까? 공차기하며 놀았습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왼 종일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학교 안 가고 교회 뜰에서 공차기를 하며 노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 마당에서 하나 교회 마당에서 하나 공차기는 같습니다마는 학교 마당은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학교에 나가는 것이 그토록 나쁘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핍박을 받을지언정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적당히 타협할 때에 핍박은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할례를 받은 첫째 이유가 핍박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두 번째 이유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적으로는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사람이 못박았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재판하였고 로마군인이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럴진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전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정부에 대해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전하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외치며 다니는 기독교를 적어도 로마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유대종교의 일부로 편승해야만 무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오직 십자가, 오직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고 믿고 나아가면 로마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당신들은 메시야를 죽인 사람들이오' 하고 떠들고 다니는 격이 되고 맙니다. 로마정부를 향해서 조용하게 그리고 강하게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핍박을 안 받기 위해서 그처럼 할례를 받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할례를 받고서 유대사람의 신분을 가졌습니다. 유대교인으로서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는 마치 패스포트, 여권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어디서든지 편하게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설령 핍박이 있을지라도 오직 예수만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의 핍박이 있습니다. 바로 유대사람들의 핍박입니다. 끝내 유대사람들은 로마정부와 야합을 하면서까지 기독교인을 핍박하였습니다. 이 유대인들의 강력한 핍박을 면하려면 부득불 유대인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고 타협을 해서 무사하게 안일하게 편안하게 예수 믿어보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고, 개혁적으로 살고, 창조적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독실하게 살고자 할 때에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반드시 핍박이 뒤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핍박을 면해보려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교리적으로 보아 유대주의 교리와 타협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둘 다 믿자, 할례도 받고 예수도 믿자 - 교리적으로 일종의 혼합주의가 형성되고 맙니다. 혼합주의, 싱크리티즘(syncretism)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시작부터 고집스러웠습니다. 우상숭배를 절대 금지 시켰습니다. 심지어 제사도 못하게 하고 가정에서 섬기던 잡다한 우상은 모두 불태운 후에 예수를 믿도록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렇듯 시작을 참 잘했습니다. 저 동남아시아의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쪽에 가보면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오직 예수'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절간에 나가면서 동시에 교회에 나와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를 심어주었습니다. 거기서는 오전에는 교회에 가고 오후에는 절간에 가고 합니다. 시작부터 그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교회가 흔들흔들합니다. 교회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단호히 잘라내고 오직 예수만을 믿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가끔 제게 물어옵니다. "목사님, 차례드리면 좀 안되나요? 산에 가서 잠깐 절하고 오면 안되나요?" 여러 사람이 묻습니다. 참으로 대답하기가 난감합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버리자니 박해가 옵니다. 그래서 적당히 얼버무려 일년에 한번 차례를 드리러 갑니다. 같이 엎드려 절도 합니다. 그저 한 해 동안 온 가정이 무사하게 해달라고 꾸벅합니다. 글쎄올시다. 제가 꼭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꾸벅꾸벅한다면 당신이 걱정하는바 가문 전체가 교회에 나올 날짜가 점점 늦춰지는 줄만 아십시오. 현재는 무사할지라도 당신이 위하여 기도하는 그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혼합주의적으로 믿을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 이방 종교와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세속적인 것과 기독교를 혼합해서 믿으려 할 때에 할례받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의를 이루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흡하다고 느낍니다. 무엇인가를 더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더 잘 행해야 되겠거니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시작하였는데 그 다음에는 선행, 구제, 봉사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이것이 공로가 되는 줄 알고, 이것을 통해서 의가 이루어지는 줄 알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서 축복을 받아내려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를 받게 된 이유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퍽 재미있습니다. 본문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12절)"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13절)"라고 합니다. 육체로 자랑하려고 자기도 할례 받고 다른 사람도 할례 받게 만듭니다. 그 이유가 전부 육체로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마는 실상 갈라디아사람들은 다른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원래가 이방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율법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단지 할례만 유대사람들의 규례를 따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특권층인 양 합니다.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 할례를 받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할례받은 사람이 '나는 할례받은 사람이다'하고 안 받은 사람에게 자랑합니다. 그 자랑이 대단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보면 자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별것을 다 자랑합니다.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뵌 사람이다 하며 자랑을 합니다. 서로 시기하고 분쟁이 났다고 합니다. 자랑거리도 여러 가지요 쓸데없는 자랑을 꽤나 합니다. 이 자랑에는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이 항상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데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를 가지고 자기를 높입니다. 좋은 집을 가졌다든지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려 듭니다. 요즘 보아하니 자동차 경쟁이 굉장합니다. 누구나 서로 더 좋은 차를 가지려고 합니다. 좋은 차를 못 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자기가 가진 소유만큼 넉넉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있는 것을 자랑하여서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를 높입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가 남보다 지식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기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을 자랑합니다. 양반이니 어쩌니 하며 떠벌입니다. 또 지위를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소속을 자랑합니다. 혹은 친척을 자랑합니다. 자기가 훌륭한 것이 중요하지 자기 아버지 자랑을 해서 무엇합니까? 친척이 어떻고, 가문이 어떻고 자랑합니다.
그 다음에 또하나가 종교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수차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을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거리에서 선행을 합니다. 종교적인 자랑이 대단합니다. 요즘도 '나는 10일 금식했다' '나는 40일 금식했다'하며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디다. "안녕하십니까 목사님, 저 아무개인데 모르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40일 동안 금식기도한 사람입니다." "아 그러세요." 말로는 응수해주었지만 속으로는 '아예 명함에다 새기시지요' 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어떤 사람의 명함을 받고서 한참 웃었습니다. 명함에다 '미국 대통령 조찬기도회 참석'이라는 문구를 새겨놓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어지간히도 자기자랑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봅디다.
무엇보다도 육체로 자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자랑 가운데서도 특별히 육체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자랑입니다. 이렇게 자랑하다보면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자기 자랑에 빠지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생각으로 급급합니다. 사람이 인정해줄 때는 좋아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만 마음이 약해집니다. 사람이 인정하는 평판, 레퓨테이션(reputation)에 자기의 온 생명을 걸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자기를 좀 인정해달라고 알아달라고 매달립니다. 참으로 힘듭니다. 어느 교회에나 이런 문제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먼저 알아달라, 나는 이만큼 훌륭하다 - 이것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로 18절의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또 사람에게 칭찬 받으려고 기도를 하거나 선행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사람을 너무 의식하는 동안에 외식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내적인 충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외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받은 것, 세례받은 것, 오래 믿은 것, 무슨 직분을 받은 것, 이러한 관록에만 집중을 하다보니 마침내 내적인 충실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외적인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깊이 생각하십시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고 곧잘 말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많이 했다고 다 기도가 아닙니다. 응답을 받아야 진정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여야 됩니다. 시작할 때 '감사합니다' 한마디하고는 밤새도록 달라고만 합니다. 이것이 훌륭한 기도입니까?
잠도 안오고 마음도 갑갑해서 몸부림친 것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조금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할례를 장식품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종교의식을 액세서리로 여겼습니다.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내실을 기하여야 합니다. 외적인 경건보다는 내적인 경건이, 밖으로 나타나는 의식보다는 내면의 충실함이 더 중요합니다. 그 진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로 자랑하는 것에 빠지게 되면 자기 모순에 빠져서 의식에 치우치고 외면에 치우치고 끝내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마지막에는 현주소를 잃고 맙니다. 나의 페이스(pace), 나의 존재를 잃고 맙니다.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외식에 눈이 멀어 멍청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랑을 조심할 것입니다. 자랑은 전부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1:14)"-그리스도의 날에 가서 무슨 자랑을 하게 될는지 그것이 중요하지 오늘 하는 자랑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가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땅에서 받는 영광보다 하늘에서 받는 영광이 크게 해주시고 땅에 쌓는 재물보다 하늘에 쌓아둔 재물이 더 많게 해주시옵소서." 진실로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는 언제나 하늘에서 받을 영광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땅에서 받는 영광, 칭찬은 이제 좀 잊어버리고 삽시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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