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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중에 보냄 받은 양(마태복음 10장 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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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중에 보냄 받은 양(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 파송장(派送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내보내시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격언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구구절절 자상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말씀을 하거나 혹은 신학생들에게 설교를 할 때에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수십 번 수백 번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깊이 읽으면 우리 마음 가운데에 와서 닿은 것이 있고 우리 마음에 분명히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있을 줄 압니다.

1절에서부터 5절까지 나가면서 보면 중요한 세 단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라고 하는 말씀이 있고 "권능을 주시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가서 보면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부르사' '주시니라' '보내시며' 'CALLING' 'GIVING' 'SENDING'의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시고-이렇게 위임받은 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서 그 자격이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능력이 있든 무능하든, 그런 것은 따지지 않으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니요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을 보게 해서 합격하면 임무를 맡기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마음속을 보시고 그 과거 현재 미래의 운명을 다 아셔 가지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딴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모세처럼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는데요'하고 꽁무니를 뺄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부르셨으면 ""하고 따를 뿐,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과거가 시원치 않습니다" "나는 용기가 없습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습니다"하고 변명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어느 안전(顔前)이라고 통합니까?

부름 받은 입장에서는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변명할 것이 아니요 나의 능력에 대해서 교만할 것이 아닙니다. 부르셨으니 따라갈 뿐입니다.

내가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보다 더 진실하고 더 충성되고 더 거룩해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부르셨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는 데도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하고 자만하는 꼴도 보기 싫고, 그 반대로 '나는 부족하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아서 나를 사랑하다가는 그대가 실망할 것이다'라고 자기비하를 하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실망하든 낙망하든 그것은 이쪽 사정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복잡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비하도 '교만'입니다. 이중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CALLING하셨으면 오직 한마디의 대답 ""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GIVING' -부르셔서 이제는 주시는 것입니다. 권능을 주십니다. 말할 수 있는 권능, 병 고치는 권능,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권능,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가 본디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하지만 나를 부르신 다음에도 나는 여전합니다.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패가 있나, 사령장이 있나, 면허증이 있나 -부르셔서 임무를 맡기셨는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기가 여전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주셨다고 하십니다.

주셨으니 가라 하십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나 싶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아가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소리질러보아야 압니다. 내가 과연 능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순종을 하고 보아야 알지 그 전에야 어떻게 알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사사(士師)들도 그 때문에 고민합니다. 선지자들도 그 때문에 고민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서 가라 하셨는데 내가 과연 받은 것인지 안 받은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주셨다 고는 하지만, 가끔 "믿사옵니다"하고 소리는 질러보지만, 마음 속은 도무지 시원치 않고 찜찜합니다. 능력 주심에 대한 믿음, 능력 받음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저 원수를 너희 손에 붙였다'하시면 그것을 믿고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싸워보아야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고 나아갑니다. 이 믿음은 아주 은사적(恩賜的)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SENDING' --보내십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그리고 보내십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십니다. 가라는 대로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내가 가라는 대로 가라 하시고 보내십니다. 이렇게 보냄 받은 자가 곧 사도(使徒)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게 보내시면서 주님은 교훈의 말씀을 주십니다. 갈 때는 이렇게 하라, 인정에 끌리지 말라, 걱정도 하지 말라, 노자를 가지고 갈 생각도 하지 말라, 가서 무엇을 먹을까 어디에 머무를까 어디서 잘까, 그런 걱정도 하지 말라, 가라는 대로 가라, 내가 알아서 예비하는 도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는 중에 오늘의 본문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늘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아주 평범한 소재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아는 일, 더구나 이스라엘사람들로서는 누구나 확실하게 아는 일상의 소재를 들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인 16절 한 절에 네 가지의 동물이 나옵니다. , 이리, , 비둘기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것들입니다. 이런 동물들을 비유의 소재로 쓰셔서 제자의 모습, 제자의 태도와 자세, 좀더 깊이 말씀드리면 제자의 본질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교훈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가끔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다면 입빠른 소리 한번 해드리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하시는데, 그렇다면 애당초 보내시지를 말아야지요"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리를 피하게 하시든지, 어떻게 해서 보호할 생각은 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 속으로 떠밀어 넣으시다니요?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십시다. 이를테면 우리네 부모님들, 특히 어머님들이 자식 사랑하는 것을 보면 미련할 정도로 맹목적인 것을 많이 봅니다. 사랑은 하는데 지혜가 없어요. 이스라엘사람들의 자녀교육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사랑에 두 가지의 차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care'요 하나는 'build up'입니다. 'care'DTXT^<곧 잘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build up'곧 쌓아올리고 확립개조갱신하고 증진시키고 단련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심리상태라든가 소질이라든가 하는 것을 잘 보고 미래를 생각해가면서, 심지어는 자녀의 입맛도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요, 습관도 어머니가 만드는 것이요, 신앙도 어머니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깊이 연구해서 잘 돌봅니다마는 일단 열두 살이 되면 딱 끊어버립니다. 품안에서 품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요새 보면 자녀가 중학교부터는 집을 떠나서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하고 주말에만 집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교육방법이라고 말하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끼고 도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보니까, 자녀를 유학 보낸다고 하면서 과감하게 얼른 뚝 떼어보내고 미련 없이 딱 끊어버리고 하면 좋으련만 못내 안쓰럽고 못 미더워 가지고 "내가 따라가야 돼"하고 주책없이 따라가려 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다 큰자식 군에 보내면서 손목을 부여잡고 오만걱정을 다 해줍니다. 심지어는 돈을 써서 자식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부모 네도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과감히 내보내야 합니다. 가서 훈련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 공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애처로워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유학 보내는 것, 여행 보내는 것, 훌쩍 보내버리면 됩니다. 가서 고생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도 만나고 저런 것도 견문하고 겪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요 용기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다. 당시 그 제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어디 신학공부라도 한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부름 받은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내보내십니다. 겪어라, 가서 겪어봐라-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보내는 마음, 끊는 마음, 세우는 마음, 용기가 필요한 마음입니다. 함께 있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멀리 떠나보내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나약한 모성적 사랑만 가지고는 자녀를 제대로 키우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어머니들 곧 'Jewish Mother'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열두 살만 되면 과감히 품 밖으로 떼어 내버릴 줄 아는 용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돌보기도 하지만 끊어버리는 데도 무섭게 과감하거든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과감하게 우리를 거친 세상에 내보내시고 계십니다. 양과 같이 나약한 우리를 이리와 같이 사나운 세상에 떠밀어 넣고 계십니다. 물론 모성적 여성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리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사납게 물로 찢고 죽이는 세상, 도대체 선이나 자비는 찾아볼 수도 없는 험악한 세상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가리켜 이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양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양이라 하심은 나약한 존재라 하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양과 같이 아주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 양이 이리와 만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부쩍 많이 합니다.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나 된다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더욱 더 악해지기만 합니까? 도대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끼리 데모라도 하든지, 대항을 하든지, 시위를 하든지 해서 악과 싸우는 데가 있어야지 그렇게 벙어리처럼 가만히 않아서 밤낮 기도만 하고 금식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지겠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가만히 있으면서 괜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 무엇을 해야 되지 않느냐, 대항해야 되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다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항하고 데모하는 것, 이것은 분명 비 성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양이요 세상은 이리다."라고.

양이란 어떤 동물입니까? 양은 천성적으로 순진합니다. 악의가 없습니다. 도대체가 사나운 데라곤 없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학교에서 양을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12마리 정도의 양을 당번을 정하여 학생들로 하여 돌보게 했습니다. 저도 당번이 되어 양들을 데리고 나가 풀도 먹이고 했습니다. 양이 얼마나 순한지 아이들이 등에 올라타고 놀아도 가만히 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착할 수가 없습니다. 귀찮다고 해서 물거나 발로 찰 줄 모릅니다. 맴맴 울면서 이리저리 도망이나 다닐 뿐입니다. 이렇듯 양은 순진하고 약합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합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과도 통합니다. 정말이지 양에게는 약은 구석이라고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이 바로 이중성(二重性)입니다. 간사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런 이중성은 없어야 합니다. 표리가 부동한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안될 일입니다. 양을 보십시오. 양에게는 그런 이중성이 없습니다. 양은 단순해서 어찌 보면 바보스럽기 까지 합니다. 사실 모든 짐승들은 그래도 자기 집은 찾아오지 않습니까? 개나 고양이는 물론 소도 제 집을 찾아올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은 제 집을 못 찾아온다고 하니 얼마나 바보스럽습니까?

양에게는 자생능력(自生能力)이 없다고 합니다. 양은 아주 무능합니다. 혼자서는 풀도 물도 찾아먹지 못합니다. 다른 뭇 동물들을 보십시오. 제비는 우리 나라에서 따뜻한 한철을 보내고는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따뜻한 곳을 찾아 강남까지 이동을 합니다. 그 조그마한 새가 우리 나라에서 대만까지 떼를 지어 이동하면서 스스로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슴도 그렇습니다. 떼를 지어서 이동을 합니다.

기후에 따라서 스스로 적응해가며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양은 누군가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목자가 없이는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물론 같은 양이라도 산양은 야생성이 있어서 스스로 삶을 유지할 줄 압니다마는 이 양은 순진해서 반드시 목자가 돌보아야만 합니다.

또한 양은 철저하게 순종적입니다. 그래서 양이 아무리 많아서 수백 마리가 있어도 목자 혼자서 충분히 다룰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양의 코를 꿰었습니까, 목을 매었습니까, 발목을 묶어놓았습니까, 재갈을 물렸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들판에 그냥 풀어놓았을 뿐입니다. 수백 마리의 양 가운데서 단 한 마리만 붙들어 툭툭 치면서 이리 저리 이끌면 덩달아 모든 양들이 따라나섭니다. 도망가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도 있는데 그들은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목자만을 따라갑니다. 이렇듯 양들은 복종체질과 순종체질로 타고났습니다. 조금도 개별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떼를 지어서 목자만을 따라다니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목자가 양들을 좋은 길로만 이끕니까? 골짜기로 가기도 하고, 산을 넘기도 하고, 내를 건너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양들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따라가기만 합니다. 그래서 간혹 목사님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우리 교인들 모두가 양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끔 염소 같은 교인이 있어서……"라고들 합니다. 양은 일절 반항할 줄을 모릅니다. 독자 행동을 할 줄 모릅니다. 양은 복종적이요 집단적입니다. 한 마리의 양이 목자의 인도를 받으면 다른 모든 양들도 다같이 그대로 좇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풀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는 싫고 저기가 좋다는 식의 자기주장도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처럼 목을 매거나 코를 꿰는 법이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채찍으로 때리는 법도 없습니다. 양은 방목(放牧)을 해도 목자 혼자서 다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무방비입니다. 정말 나약합니다. 소는 뿔이 있고, 말은 강한 뒷발과 빨리 달리는 능력이 있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는 강한 이빨과 발톱이 있어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습니다. 둔해서 빨리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양은 자기보다도 덩치가 작은 동물한테도 잡혀 먹히기 일쑤입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우리들을 그 바보 같은 양에 비유하셨을까요? 하다못해 염소에다라도 비유하시든지 하시지 않고 어찌하여 이렇듯 나약하고 무기력하고 바보스럽기까지 한 양에다 비유하셨을까요? 양은 일절 반항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단적 성향이 강하여 단결이 아주 잘됩니다. 양들은 결코 서로 나뉘어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한데 모여 화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양에다 비기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양은 반드시 목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양은 늘 목자의 뒤를 따릅니다. 목자를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목자를 믿고 따라갑니다. 이것이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나는 목자요 너희는 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양과 같아야 한다, 반드시 양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곤두박질하든 썩어빠지든 간에 너희는 양이 되어야 한다. 사자를 만나도 양이요 이리를 만나도 양이다. 양은 항상 양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양같이 살아왔는지, 내가 얼마나 양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양의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양의 모습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 존재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존재는 절대로 둔갑해서도 변모해서도 변질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끝까지 양된 존재를 지켜야만 합니다. 절대로 이 신분 그대로이어야만 합니다. 만일 양이 양을 만났을 때에는 양이요, 이리를 만났을 때에는 이리요, 호랑이를 만났을 때에는 호랑이요, 사자를 만났을 때에는 사자가 된다고 한다면, 이미 양일 수 없습니다. 흔히 여자를 두고 남자들끼리 하는 못된 말 가운데 "여자란 결혼하기 전에는 비둘기요, 결혼 초에는 양이요, 10년이 지나면 여우요, 그 다음에는 호랑이요, 늙으면 사자가 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으면 부인들한테 구박을 받느라고 남자들 밥 한끼 얻어먹기도 힘듭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호랑이가 다된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호랑이 같은 할먼네들이 많습니다. 남편을 우습게 봅니다. 신혼 때에는 양 같던 여자가 왜 이렇듯 무서운 호랑이가 되었을까요? 둔갑을 잘해서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이렇듯 둔갑을 잘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처음도 양이요 마지막도 양이어야 합니다. 죽을 때에도 양으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은 반드시 양의 소리를 하고 죽어야 합니다. 호랑이의 소리를 하고 죽거나 개의 소리를 하고 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예배당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요 기도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이요 찬송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으로 그 존재를 잘 지켜나가다가도 세상에 나가기만 하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쪽이 눈 꼬리를 치켜 뜨면 나도 눈 꼬리를 치켜 뜹니다. 둔갑을 해서 마음이 달라집니다. 한마디의 비난만 들어도 열두 마디 비난을 퍼붓고 대듭니다. 안될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죽을 때에도 양의 모습으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은 약한 이면과 함께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비롭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장 약할 때에 주님의 가장 강한 능력을 힘입게 됨으로 가장 강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합니다. 여러분, 대체로 보면 겉으로 강한 것처럼 행동반경이 거칠 때가 그실 제일 약한 때입니다. 오히려 아주 약한 것 같고 온유하고 겸손한 때가 가장 강한 때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양에 비기고 계십니다. 이 양에는 '제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양은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었습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죄인 되는 것이 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는 것이 양입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에 알던 신부님이 있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신부님인데 그분은 고해성사를 받고 그 비밀을 지키다가 아주 억울하고 더러운 누명을 쓰게 되셨습니다. 물론 고해성사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그 누명은 당장에 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한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문책을 당하고 낙도로 쫓겨나 그곳에서 7년이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고해성사의 당사자가 죽으면서 그 때의 일이 밝혀져 그분의 누명도 벗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직을 해서 요즘은 인천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안 다음부터 그분을 만나 악수할 때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그 억울하고 더러운 누명을 쓰고 7년 동안 섬에 가서 고생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누명을 쓴 채 자신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명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누명을 벗을 때에 우리는 몇 사람의 죄인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바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많은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명심할 것입니다. 양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죽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죄인 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복 받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입니다.

"너희는 양이어야 한다" --얼마나 명백한 말씀입니까? 더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양이십니다. 양의 제자인 우리 역시 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것입니다. 이사야 537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말이 없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괴로움을 당해도 끝까지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발명(發明)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은 없습니다. 억울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만 아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털을 모두 깎여버려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한마디만 하면 풀어 주겠다고 하는 빌라도의 회유에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실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주를 했습니까?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하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끝끝내 말이 없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만 양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당신 스스로가 양이 되셨습니다.

철저하게 양이 되셨습니다. "나는 양이다, 너희도 양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리 가운데서도 양으로 살고 양으로 죽었다, 너희도 이리 가운데 살지마는 양으로 살고 양으로 죽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통괄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불이익을 당하면 대항하고 싶어하고, 외치고 싶어하고, 성명서라도 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양은 전혀 그런 것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한 대항은 성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사람들은 기독교인을 무도하게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수만 명의 사람을 원형경기장에 밀어 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의 양이 되어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대로마제국은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로마에 갔을 때에 바티칸궁전을 보면서 옛 로마의 문화와 그 바티칸궁전의 문화를 비교해본 적이 있습니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종교인 기독교가 어떻게 대로마제국을 굴복시켰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양은 절대로 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없이 죽어 가는 것 같지만, 그실 그 속에는 아주 무서운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6)." 뱀은 손도 발도 아무 것도 없는 악조건 속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압니다. 뱀한테는 위기에 처했을 때에 민첩하게 깨닫고 움직일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비둘기는 순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뱀의 지혜와 비둘기가 지닌 인격의 순결을 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뒤, 초대교회에 핍박이 심할 때에 하늘나라에서 이를 내려다보시던 예수님과 천사 가브리엘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세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그나마 몇 안 되는 기독교인들도 핍박으로 나약해지고 죽어갑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걱정이 된 가브리엘이 예수님께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귀한 역사가 시원치 않은 몇몇 제자들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그 크고 귀하신 역사가 헛것이 되면 어떡합니까? 천사를 세상에 내려보내서 전도하게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 있는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시더랍니다. "나에게 다른 계획은 없다. 나는 내 제자들을 믿는다. 양같이 약하고 약하지만 나는 베드로와 요한을 믿는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양이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되었다가는 둔갑을 해서 사자가 되고 호랑이가 되기 때문에 그만 그 거룩한 본질과 거룩한 능력이 모두 소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끝까지 양으로만 살아보십시오.

엄청난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와 순교의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교회 되는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독교인들이 양이 되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살아갈 때에 이 위대한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양이 됨에는 예수님의 능력과 승리에 대한 보장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16)"하십니다. 이어서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떤 고난과 핍박을 받더라도 끝까지 양으로 살고 양으로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믿고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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