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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와 하루살이(마태복음 23 :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헤롯왕이 지은 성전이긴 하지만 이 성전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곳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 또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름지기 1년에 세번씩은 성전에 올라가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그 일을 즐거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이 더러워졌을 때에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두고 몇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열 두살 되던 해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갔다가 혼자 떨어져 선생들과 더불어 성전에 머물고 있을 때 이를 찾아온 부모를 향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3:49)라고 대답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그런 집,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곳을 출입하는 자의 경험을"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에는 "기도하는 집"(마 21:1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만나는 집,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집! 이 모두가 다 귀한 호칭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장 38절에서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시며 여기에 와서는 "너희 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이 성전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됩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지 불과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말씀하신 바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마 24:2) 깨끗이 무너져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건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아는 대로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이 성전을 옛날 그 모습대로 복원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집"이라시며 귀하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던 그 집을 "너희의 집"이라고 하셨으며, 게다가 그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는 무서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신 성전 안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1장 12절에서 성전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 22, 23장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24장이 시작됨과 동시에 성전에서 나오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23장 맨 마지막 말씀을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신 그것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그 의미가 끝이 나고 맙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저 앞, 바로 3일 후에 다가올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한 3일만의 부활과 그 이후의 승천을 내다보시며 인류의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까지의 전역사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 승천, 그리고 저 앞의 재림까지를 내다보시며 종말적인 교훈의말씀을 하신 이것이 21장으로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러고 보면 21장 중간에서부터 22, 23장은 성전 안에서 말씀하셨고, 24,25장은 성전 밖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하신 말씀 중마지막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23장은 매우 특징적인 면을 보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재림주로서의 마지막 심판과 그 선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찐저"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하시는 이 심판은 사실에 있어서 종말적이고도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마지막 순간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전 인류의 역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말적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만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재판을 받아 집행유예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현재에도 심판을 받아버린 사람들이 있다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하시는 말씀은 역사를 심판하시는 심판주로서의 무서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참으로 두려운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8복(마 5:3-10)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화 있을찐저" 즉 바꾸어 말하면 "화가 있나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말을 두고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은 복에대한 허락이요 축복이며 약속인 반면에 "화 있을찐저"라는 말씀은 그와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복이 아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그 때문에 번역에서는 공동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는가 하면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불행이 닥칠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 내용상의 의미는 "화가 있을지어라"라는 것이며 축복을 정지하고 화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해 보면 매우 중요하고도 두려운 선언입니다.
이제 23장을 보노라면 "화 있을찐저"하는 말씀이 일곱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는 말씀 역시 "화 있을찐저"와 같은 뜻이고 보면 23장 전 장에 걸쳐"화 있을찐저"라는 말씀을 여덟번 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마태복음 5장에서는 여덟 가지의 복을 선언하신 반면에 23장에서는 여덟 가지의 화를 선언하시고 그리고 심판 하셨습니다. 이제 이두 가지의 양상을 대조하여 생각해 보면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이 "화 있을찐저"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우아이 후민'으로 화가 있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진노를 말하는 것만이 아닌 매우 슬픈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가 있을 것이다"하는 그 말속에는 굉장한 아픔이 있습니다. 심판을 받는 자로서는 아직은 모르고 있습니다마는 심판을 선언하고, 심판을 해야만 하는 자에게 크나큰 아픔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 있을찐저"라고 하는 말의 뜻이며 단순한 심판이나 단순한 저주가 아닌 매우 큰 아픔과 슬픔을 동시에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것은 곧 깊은 사랑의 마음이요 의로운 분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의 유명한 말인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 없다."고하는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면서 마치 사형 선고를 하듯이 "화 있을찐저"라는 저주를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셔야 하는가 할 때에 그것은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 죄가 4중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첫째는 죄를 짓는 죄요, 둘째는 죄를 반복하는 죄로서 이것이 분명 나쁜 죄인 줄을 알면서도 다시 반복하여 짓는 죄입니다. 이것이 곧 이중의 죄가 되며 보다 무거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무거운 죄는 죄를 변명하는 죄입니다. 분명히 죄를 짓고도 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지은 죄를 변명하기 위한 나머지 멀쩡한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으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며 여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여자는 또한 뱀이 나를 꾀이므로 내가 먹었다며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죄는 그야말로 족보가 있는 뿌리 깊은 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좀더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께서 너 그것 왜 따 먹었느냐고 하실 때에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따먹었습니다. 정말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저의 처가 먹은 것도 제가 잘못해서입니다"라고 하였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따먹지 말아라"하시고는 새로운 기회를 주셨을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그 앞에서 변명을 하겠다며 나오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만 죄가 아니라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그 위에 더 큰 죄는 변명하는 죄로 그 결과 자기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킴으로 삼중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 사중의 죄가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곧 위선의 죄입니다. 이제는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죄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의에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는 법 자체를 뜯어고치며 형식으로 내용을 덮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의로 지은 죄를 상쇄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가령 지금 내가 지은 죄를 다음에 공로를 세워 보충하겠다고 하면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요 처사입니까? 예를 들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그랬다면 내가 자살을 한다고 하여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도둑질을 한 것이라면 훗날10배, 20배를 갚아줌으로 그것이 사해지는 것이겠습니까? 도둑맞은 사람은 그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얼마나 마음 상해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때문에 가정에 큰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어떤 일로 과거에 지은 죄를 덮거나 상쇄할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위선적인 것, 하나님의 의에 도전하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화 있을찐저"라고 하실 때의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 할 때 이는 창녀를 향한 것도 아니요, 강도를 책망하는 것도 아니며, 소돔 고모라를 정죄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정죄하는 것은 전적으로 위선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잘 다듬어진 외식! 속은 썩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잘 꾸며져 있는 그러한 죄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닌 종교적인 죄요 나아가서는 바리새 주의를 말합니다.
이 '위선자'라고 하는 헬라 원어 '후포 크리테스'는 매우 재미있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본래 '대답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무대에선 배우가 대사를 외우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즉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동안 대사를 외우게 되는데 이 때에 아무래도 실수가 있고 막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럴 경우를 위해 뒤에서 대본을 들고 있던 누군가가 몰래 대사를 들려줌으로 받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을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무대 뒤에서 '사랑합니다'하고 말해주면 마치 자기가 하고픈 말을 하는 것처럼 '사랑합니다'하고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기의 마음도 아닐뿐더러 대사까지 다 잊어버렸던 것을 되받아서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선자라는 말의 원문대로의 뜻은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줄 때 그 말을 듣고 앞에서 자기 말처럼 근사하게 해나가는 것을 말하는 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외에도 텔레비전의 탤런트나 연극, 영화 배우들의 대사나 연기가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슬프지 않으면서도 울고 기쁘지 않으면서도 울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후포 크리테스라는 말이 의역이 될 때에는 '배우'로 번역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하실 때의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에는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긴 옷에 점잖은 걸음을 걸으면서 잘 꾸며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외식이며 문제는 이렇게 되면 회개를 안할 뿐만 아니라 회개를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꾸미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죄를 은폐하고 외식하기 시작하면 회개할 자유를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양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이미 심판을 받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회개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께서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끝장이다! 아! 참으로 불쌍하다는 뜻의 말씀으로 우아이 후민! 그 화가 있을찌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외식의 특징이 무엇인가 할 때 23장 5절 말씀에 기록된 것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의식하는, 소위 말해 '타인주도적 세계관'을 말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고 자기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처신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할 때이면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라(46:16)고 하셨으며 기도를 할 때에도 길거리에서 할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 하라(마 6:5)시며 외식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방어를 말씀하셨습니다. 매사를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보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구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선행이어야 하겠는데 하나님은 저 만큼 밀려나 계시고 대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생각하는 거기에 외식이 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젊은 시절에 목회를 하다보면 새벽기도회 인도가 가끔 늦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심방을 한 몸이라 너무 피곤하여 시계를 둘씩이나 울리게 해 놓았어도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깨는 시간에 있어서 눈을 떠보면 5시 30분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제 아무리 부지런히 옷을 챙겨 입고 나가더라도 10분은 늦게 생겼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만약 내가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면 부목사님 아니면 여전도사님께서 인도하실 것이고, 그 다음은 일찍부터"목사님께서 어디 편찮으십니까?"하고 전화들이 올 것이며 이에 대한 대답이 궁해질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나갔을 경우에는 이제 한 10분이 늦었으니 찬송 부르고, 기도를 한 후에 나서게 되었으니 조금은 창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말씀을 드리기 시작하면 잠깐은 미안하지만 그 다음에는 괜찮아집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될 것 같습니까! 저는 거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게으른 목사라고 하여 그만두라면 그만둘지언정 나가야 편하지,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했다가는 이것을 회개하는데 며칠이 걸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동안에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체질화되면 신앙적, 정신적 불구가 되어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이 칭찬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차지하고자 자기 스스로를 높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어 자기의 옷으로 해 버리는 참으로 무서운 처사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의를 자랑합니다. 하나님께 자복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하지 않고 자기의의, 자기 선행의 도덕적인 의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규범에 의하여 자기의 의를 측정하려 듭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보고는 행하라고 합니다. 저들은 지식을 자랑하고, 명상을 자랑하며, 외적인 의식을 자랑하면서도 진정한 선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23장 14절 말씀에 기록되기를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말만 하고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는 다른 사람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부득불 심판하실 수밖에 없겠기에 "화 있을찐저"라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의비유 말씀은 표현 그대로 보면 과장이 심판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레위기 11장에 보면 까다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결코 아무 것이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소는 먹으나 돼지는 못 먹으며 양은 먹을 수 있으나 말은 못 먹으며, 물고기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하면 먹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낙타는 부정한 것으로 먹을 수가 없으며 하루살이 역시 먹을 것도 없지만 부정한 것이어서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부정한 것이요 둘 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 보면 하루살이는 날아다니는 것으로 언뜻 보아 눈에 보이는 동물 중에 가장 작은 것이며, 약대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제일 쉽게 볼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둘을 놓고 비교하시면서 약대는 통으로 삼키면서 하루살이는 채로 바쳐 걸러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로 말하자면 하루살이 같은 죄는 안 지으려고 까다롭게 따지고 들면서 약대와 같이 큰 것은 그대로 집어삼키고 만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며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실수를 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그 뜻을 자세히 보면 결국은 둘 다 먹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살이도 먹지 말고 약대도 먹지 말라는 것인데 문제는 약대는 삼킨다고 하는데 있으며 더욱이 약대는 삼키면서도 하루살이 먹는 것은 비판하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에도 생각하면 큰 죄 작은 죄, 즉 중죄, 경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에도 큰 의, 작은 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중세기에 있어서는 이 중죄, 경죄를 신학적인 견지에서 구분하기를 알고 짓는 죄는 중죄요 모르고 짓는 죄는 경죄이며, 예수 믿기 전에 짓는 죄는 경죄이요 예수 믿고 세례 받은 후에 짓는 죄는 중죄이며, 능동적으로 짓는 죄는 중죄요 피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짓는 죄에 끌려가서 짓는 죄는 경죄이라고 논술합니다.
그러나 죄라면 두 가지 다 짓지 말아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할 것은 모르고 짓는 죄는 몰라서 짓는다 하더라도 알고 짓는 죄는 짓지 말아야 할 것이며 중죄, 경죄를 놓고 말하자면 중죄를 먼저, 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약대는 삼킨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 있다고 할 때 형식적인 죄와 내용적인 죄의 문제를 놓고 보면 어디까지나 내용적인 죄가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승적인 규례에 의한 죄와 본래적인 율법을 범하는 죄가 있다면 이는 분명 본래적인 율법을 범하는 죄가 더 큰 죄이며 전승에 의한 것은 보다 가벼운 죄로서 마치 하루살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승적인 그 하루살이 같은 율법은 엄격하게 지키라고 야단들을 하면서도 본래적인 것,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등의 약대와 같은 것은 통째로 삼켜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마는 한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택시 안에 두고 내린 현금 30만원을 주워 파출소에 갔다 두었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그 운전수 착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더니 옆에 있던 분이 "목사님 그게 3천만원이었다면 아마 다를 것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 옳습니다. 30만원짜리는 갔다주었는데 3천만원짜리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겉과 속을 말하자면 언제나 속이 더욱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겉 같은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생일을 기억해 주며 선물을 마련하고 합니다마는 사실 그것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부인들께서 남편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흔히들 남편이 결혼한 날을 알아 지 않는다느니 혹은 생일도 기억해 주지 못한다며 불만스러워 합니다마는 굳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사실을 두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것이나 꼽고 앉아서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르더라도, 또한 나에게는 다소불친절 하더라도 보다 크고 중요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저 유명한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는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 전처의 자식을 셋이나 맡고 있는 처지에서 남편마져 감옥에 보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모님이 면회를 가셨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가령 "여보 정신 있소? 남들은 다 신사참배하고 마는데 유독 당신만이 별나게 그래서는 나 과부 만들어 벌어 놓은 것도 없는 처지에 남의 자식 셋을 키우라는 말이요?"하고 대어 들었더라면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여기에서 살아 나오면 내 남편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느냔 말입니다. 나에게 친절하지도 못하고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지만 이것은 작은 일이요 순교하는 길은 큰 것이더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겠는데 어쩌자고 나에게는 친절해야 하고 약대는 통으로 삼켜버리는가 말입니까? 물론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할 것 없이 다해야 되겠지만 어차피 큰 것 작은 것을 생각해야 될 경우에는 큰 것을 선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큰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이며 나를 위하는 일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을 생각한다면 남의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잠시 물건을 사러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춘 후에 입어 보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고도 하는데 그러면 그 옷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본래 제대로 생긴 사람은 아무 것이나 걸쳐도 멋이 있는 법인데 자기 옷걸이가 시원찮은 줄은 모르고 남에게 까다롭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놓고 나가면 그 뒤에서 무엇이라 할 것 같습니까? "저런 사람이 교인이고 집사이니 나는 교회에 안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바로 하루살이는 걸러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킨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 그까짓 몇 만원, 몇 십만원이 문제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조금 손해보면 될 것이지 어디 그럴 수 있는 일이냔 말입니다. 흔히들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바로 한다면서 진작 큰 일은 망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를 바치되 중요한 소와 양은 바치지 아니하고 박하와 회양과 근채같은 것만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한 것은 바치지 아니하고 시래기같은 것만 바치고는 나는 다 바쳤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래 가지고야 무엇을 바쳤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형식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의식에서 뭐니뭐니 하여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의와 사랑과 그리고 진리와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린다면 조그마한 의를 행하면서 교만하기보다는 차라리 죄를 지어서 겸손한 것이 나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쪽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아는 대로 모세는 실수를 하였으나 온유했으며 미리암은 실수가 없었지만 교만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겸손과 순종과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것, 이 하루살이 같은 것을 걸러 먹겠다고 하다가 약대를 통으로 삼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할 중요한 말씀은 최소한의 양보를 하더라도 결코 외식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의 죄인됨을 인정하면서 살 것입니다. 죄아니라고 변명하거나 원망하지도 말고 물론 의로 위장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외식하는 죄는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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