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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의원아 너를 고치라(누가복음 4장 16절~23절)

by 【고동엽】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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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아 너를 고치라(누가복음 41623)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 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지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 해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박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않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 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의사(醫師)를 옛날에는 의원(醫員)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23)"하신 오늘의 잠언말씀은 곧 '의사여, 너 자신부터 먼저 고치라'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이기 전에 속담(俗談)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 가운데에 고래로 있어왔던 속담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처음으로 말씀하신 잠언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이 잠언과 같이 저들에게 이미 있어온 속담이나 격언 같은 것을 인용하셔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담은 언제나 속담대로 존재하지마는 그 속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해석, 설명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사람들 사이에 상식적으로 운위되어온 속담을 드셔서 거기에 그리스도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기독론적으로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눈에 보이는 새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씨뿌리는 일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하는 것처럼 오늘은 속담을 들어서 그것을 비유로 교훈 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일반적인 뜻을 생각하면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말을 몇 갈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사란 자신의 병을 먼저 고치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서 병들지 않는다는 법이 없고 의사라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법도 없습니다. 의사도 병들고, 의사도 죽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의사가 병들어 있는 것이라면 누구라 그 앞에 가서 치료받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의사가 감기에 걸려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고 콧물을 훌치럭훌치럭하면서 앞에 앉은 환자보고 "어디가 아프시십니까? 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으로 내과의사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허리디스크가 있어 고생을 하는 터이라 진찰실 뒷방에 침대를 두고 늘 누워 있다가 환자가 오면 나가서 진찰을 해주곤 해요. 환자를 봐주고 돌려보내면 다시 뒷방으로 들어가 눕습니다. 한번은 제가 우스갯소리를 해보았습니다. "환자들에게 이 침대를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그랬더니 그분, "다 도망가고 말지요" 합디다.

모름지기 의사는 건강하고 보아야 합니다. 남을 고치려들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건강을 염려하기 전에 내 건강이 먼저입니다. 내가 건강하고야 남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내 신앙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남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야 남의 불행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혼을 한 사람이면서 남의 부부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보면 건강치 못한 사람이 건강요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는 병 오는 병을 혼자서 다 앓고 있어요.

내가 진리 안에 서 있어야 남보고 진리를 운위할 수 있습니다. 내 인격이 바로되어 있고야 남을 교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건강하고야 남에게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이 잘되어 있고야 남의 신앙생활을 바로잡아줄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늘 문젯거리에 파묻혀 있고 나 자신이 늘 걱정근심에 사로잡혀 노상 얼굴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고 다닌다면 제아무리 금쪽같은 소리를 한다 한들 그 누가 귀 한번 기울이겠습니까? 결코 전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늘 웃고만 다녀도 반()은 구제하는 것이 됩니다.

 

적어도 남에게 걱정은 끼치지 않는 것이니까요. 모름지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먼저 나 자신부터 영적 육적으로 사회생활에서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고야 비로소 남에게 구원의 도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의사로서의 '처방'이 먼저 자신에게부터 효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비방(秘方)이 있습니다. 묘약이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에게만 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먼저 먹어야 합니다. 자신에게부터 효험이 있어야 합니다. 의학자가 귀한 약을, 이를테면 주사약을 한 가지 발명해놓았습니다. 그는 이 약을 먼저 동물한테 써봅니다. 효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학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동물에 효험이 있었다고 해서 그 약을 막바로 다른 사람에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가 훌륭한 의사라면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부터 그 약을 써봅니다. 그 약을 써서 내가 죽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먼저 써봅니다. 그래야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의원아 너를 고치라"함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진리일진대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이 있다고 하면 나 먼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내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좁은 문을 피하면서 남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심입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 전하는 것이 진리라고 할진대 나 먼저 나 자신을 치료하는 자리에 있고 효력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긍정적으로는 효력을 스스로 입증하라는 것이요, 부정적으로는 '제 앞가림'이나 먼저 하라는 것이 됩니다.

"당신부터 먼저 치료하시오. 치료가 되면 그것을 보고 내가 따르겠소"-이런 정도라면 그나마도 긍정적으로 보는 셈입니다. 그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이 말씀에는 더 강한 것입니다. "의원아 너를 치료하라" 하는 것은 곧 "시끄럽다. 너나 치료받아라. 나는 상관없다"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시던 고향 나사렛에 돌아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게 됩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였는지를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며 형제가 누구누구인지를 익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곳에 오셔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십니다. '권세 있는 자의 말씀'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은 일단 경탄을 합니다. 깜짝들 놀랍니다. 기이히들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저들의 생각은 '선지자의 고향마을'로 돌아섭니다. '이렇듯 놀라운 말을 하는 이 사람이 실은……'하고 '본전'을 챙기기 시작합니다.'이 사람이 별사람이 아니라 바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 주제에 어디서 이런 것을 얻어들었으며, 어디서 이런 지혜를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경멸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경탄하고 한편으로는 경멸합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해박한 지식으로 저들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들을 비판 심판하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그대가 메시야인 것을 먼저 입증해보라. 우리가 아는 것은 그대의 아버지요 그대의 어머니요 그대의 동생들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면 그 증거를 대보아라' --이런 마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세밀하게 지적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認證)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가버나움과 나사렛이 그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로 인근(隣近)입니다. 그런데도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을 여기서도 행하라. 내 눈으로 보아야 되겠다' 합니다.

보아야 되겠다-언뜻 생각하면 이런 마음이 믿음을 얻기 위한 마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애시당초 불신앙적인 자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이러한 시간, 이러한 긴장관계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이 여기에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의사로부터 배가 치료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의원아 너 자신이나 고쳐라'라고 말하고 있음이 아니냐" 이같이 저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항상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적은 많았어요. 수많은 이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있는 이적은 보지 않고 새로운 이적을 구한 것입니다. 굳이 내 눈앞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미 살아난 사람을 가서 만나보면 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꼭 들어야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은 말씀을 내가 전해들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꼭 경험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고 하는 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아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좀더 큰 것, 요샛말로 말하면 좀더 화끈한 것, 좀더 번쩍 하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증거를 보여라, 가버나움에서나 할 것 없이 이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 눈앞에서 화끈한 사건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되었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이었습니까,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까? 저들의 심리를 깊이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새도 그런 사람이 참 좋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못 믿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을 내게 좀 분명하게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합니다.

그래야 내가 믿을 것이 아니냐 합니다. 이렇게 가시적인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에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 -인자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겠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하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지금 내 마음에 들도록 내 눈앞에서 사건을 보이라 하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욕구입니다. 끝없는 욕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믿도록 해본 일이 있습니까? 안 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만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믿음은 은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마음을 주셔야 믿음이 생깁니다. 안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사람들이 보이는 불 신앙적 자세를 보십시오. 가만히 누워서 '믿게 좀 해다오, 기적을 보여서 믿게 해다오' - 이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봅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거두어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윽박질렀습니다. 알고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기적입니다. 이미 보여준 기적과 증거를 부정하는 자는 새로운 어떤 증거로도 그 인격을 믿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라, 내게 보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2절에 보면,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사람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끝없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만족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꼭 보아야만 믿겠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한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뜻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는 과정에는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유의 사건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마귀가 와서 시험을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합니다. 어떻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으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마귀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다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심이었습니다. 또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 그러면 천사가 와서 붙들어줄 것이 아니냐"하고 시험을 겁니다. "뛰어내려서 죽지 않고 우뚝 선다면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뛰어내려라"하는 유혹을 내포하고 있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고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찌생각하면 뛰어내려야 믿음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주여"하고 용약 뛰어내리면 와하고 사람들이 놀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뭐가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화끈한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께서는 사양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하고도 드라마틱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아냥거립니까? 마태복음 2739절로 42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무엇 하려 매달려 있느냐? 능력 많은 자가 어찌하여 속절없이 매달려 있느냐? 내려 와 보라 -되는 말이지요. 왜 속절없이 매달려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때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저들이 다 믿었을 것 같습니까? 그랬다면 역사가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까? 바로 여기에 큰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또다시 말합니다."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참아내기가 심히 어려운 비아냥입니다. 여러분, 참는 자를 무능하게 보는 것은 참는 자에게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몰라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참는데도 참다보면 무식한 것이 되고, 무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말도 하지 않고 행동도 삼가 하고 있는데, 몰라서, 어리석어서 참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니 괴로운 것입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구원할 수 없어서 못한 것입니까? 안한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은 무능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아니할 때 이는 사랑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는 양, 아는데도 모르는 양, 갈 수 있는데도 못 가는 양, 능력이 많으신 데도 아무 능력도 없으신 양, 그렇게 죽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고, 참된 친구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습니다. 권리를 포기합니다. 권리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비난까지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기 어려운 저러한 비아냥과 비난을 들은 척 만척하십니다. 끝까지 참아내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고 저들은 외칩니다. 로마군인들이 못박아놓았습니다. 그런 십자가에서 이보란 듯이 훌렁 뛰어내리셨다면 참으로 굉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믿겠노라 합니다. 정말 믿었을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별로 신앙도 없이 순전히 병 고침 받겠다는 한 가지 이유로 교회에 나옵니다. 병 고침 받으면 예수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침 받는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 사람치고 예수 믿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적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의 신앙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돈벌면 믿겠다고 하는데 돈벌면 도망가지 교회 나오지 않아요. 무릇 조건부적인 것, 기적을 조건으로 해서 신앙을 말하는 사람에게 저는 속지 않습니다. 나도 속지 않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속으시겠어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기적을 보이라, 당장 내려와 보라, 그러면 믿겠노라 하고 아우성은 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하는 소리는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비난이 있습니다. 줄기차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행여 우리 마음속에 이건 마음, 비난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듣고, 그 능력도 보았습니다. 경탄하고 감탄했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기적,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기적, 또 그 비유의 말씀들, 제사장들 앞에서 하신 말씀들, 서기관들 앞에서 하신 말씀들과 이루어진 일들을 소문 들어서 다 압니다.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작년에 평양을 갔다왔습니다. 어떤 분들이 "어떻습디까?"하고 물어오면 이렇고 저렇습디다 하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목사님, 신문에도 그런 얘기가 나고, 갔다온 사람들에게서 그런 얘기 듣기도 했지만 안 믿었습니다. 아무러면 그럴까 하고 반신반의해왔는데 이제 목사님이 그러시니 믿으렵니다"하는 대답을 듣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듯 힘이 듭니다

내 마음, 내 소원, 내 뜻 안에서 또 다른 기적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그 마음, 지난날의 기적으로는 못마땅하고, 오늘 기적이 있어야 하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으로는 성에 차지 않고 내가 꼭 경험해야 하겠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 고집,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모처럼 은혜를 받았다가도 쏟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잘못 받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믿음은 멀어지거나 잘못된 신앙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듣는 것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렇습니다. 내가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도 충분합니다.

달나라에 갔다온 어윈 대령을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만나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습디다. 다 듣고 나서 저는 말했습니다. "참으로 값비싼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거기 한번 갔다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당신으로부터 몇 마디 이야기만 듣고도 나 자신이 달나라에 거뜬히 갔다온 셈이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꼭 내가 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 않았어도 그 사람이 갔다와서 이야기했고, 내가 직접 만나서 들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남이 매맞는 것 보았으면 아픈 것을 알 것이지 꼭 내가 맞아야 아픈 것을 압니까?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는 것 보았으면 나도 죽을 줄 알아야지, 내가 꼭 죽어봐야 죽는 줄 압니까?

여러분, 들음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꼭 피부에 땋도록 체험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어 문제입니다. 들음으로 충분해야 하거니와 또한 우리는 봄으로써 충분해야 합니다.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도 같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보지요. 사건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병 낫는 것 보았고, 귀신 쫓아내는 것 보았습니다. 보았으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모자라합디다. 반드시 내가 경험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병들 수밖에 없고 내가 문둥이 되었다가 깨끗해져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건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굳이 내가 경험해야 하겠다고 하는 이 생각, 참 무서운 것입니다.

들음으로, 봄으로, 그리고 또한 증거로써 충분해야 합니다. 지금 사건 현장에 없다 하더라도, 지나간 일이라고 하더라도, 증거만 있으면 충분해요. 나는 새를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새 발자국이 있으니 새가 있었음을 압니다. 그 증거로 충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만나 뵈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만 보고도 충분해야 합니다. 성경은 복음을 증거 하라고 말씀합니다. 증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험한 사람들의 말이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에 내 생활 속에서 내 인식 속에서 사건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못 보았다 해도 십자가를 본 사람들이 말해준 바를 들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십자가 밑에 내가 지금 안아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다시 한번 그것이 사건화 하는 것입니다.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 해주는 바를 내가 믿음으로써, 수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성경적 증거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내 눈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성경에 일어났다고 되어 있으니 충분합니다. 문둥이가 깨끗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못 보았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야만 바른 신앙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권위적인, 자기중심적인 그 같은 고집은 다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성의 욕구는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성에 대해서는 가장 귀한 이치를 많이 깨우쳐주었다고 하는 이마누엘 칸트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이성의 욕구를 제한하라고 말입니다.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깨닫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제한해야 합니다. 다 알고, 다 보고, 다 먹고 - 그렇게는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믿음의 소리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선생님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런 선생님에 대하여 "자기나 가르치지"하고 있다면 나는 끝내 아무 것도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말은 의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귀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불 신앙적인 반발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하하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에 가난하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난하셨으니 예수 믿어봤댔자 부자 되긴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서른세 살에 떠나셨으니 예수 믿었다가는 오래 살기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으니 예수를 믿어 가지고는 영광 누리기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자 자신을 비하하셨습니다.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써 참 생명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 우리는 이 같은 비방을 극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불 신앙적 외침이 자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시는 말씀을 언제나 감사히 받아들이고, 진리를 진리대로, 복음을 복음대로 받으면 됩니다. 너나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듣고 보는 증거, 성경적 증거로 충분하고, 그래서 만족하는 신앙을 가질 때 그 심령은 확실히 그 증거 속에서 새롭게 새롭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누가복음 41623)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 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지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 해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박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않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 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의사(醫師)를 옛날에는 의원(醫員)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23)"하신 오늘의 잠언말씀은 곧 '의사여, 너 자신부터 먼저 고치라'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잠언이기 전에 속담(俗談)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 가운데에 고래로 있어왔던 속담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처음으로 말씀하신 잠언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오늘의 이 잠언과 같이 저들에게 이미 있어온 속담이나 격언 같은 것을 인용하셔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담은 언제나 속담대로 존재하지마는 그 속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해석, 설명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사람들 사이에 상식적으로 운위되어온 속담을 드셔서 거기에 그리스도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기독론적으로 교훈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눈에 보이는 새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씨뿌리는 일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시기도 하는 것처럼 오늘은 속담을 들어서 그것을 비유로 교훈 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일반적인 뜻을 생각하면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말을 몇 갈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사란 자신의 병을 먼저 고치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서 병들지 않는다는 법이 없고 의사라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법도 없습니다. 의사도 병들고, 의사도 죽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의사가 병들어 있는 것이라면 누구라 그 앞에 가서 치료받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의사가 감기에 걸려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고 콧물을 훌치럭훌치럭하면서 앞에 앉은 환자보고 "어디가 아프시십니까? 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으로 내과의사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허리디스크가 있어 고생을 하는 터이라 진찰실 뒷방에 침대를 두고 늘 누워 있다가 환자가 오면 나가서 진찰을 해주곤 해요. 환자를 봐주고 돌려보내면 다시 뒷방으로 들어가 눕습니다. 한번은 제가 우스갯소리를 해보았습니다. "환자들에게 이 침대를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그랬더니 그분, "다 도망가고 말지요" 합디다.

모름지기 의사는 건강하고 보아야 합니다. 남을 고치려들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건강을 염려하기 전에 내 건강이 먼저입니다. 내가 건강하고야 남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내 신앙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남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야 남의 불행을 염려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혼을 한 사람이면서 남의 부부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보면 건강치 못한 사람이 건강요법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가는 병 오는 병을 혼자서 다 앓고 있어요.

내가 진리 안에 서 있어야 남보고 진리를 운위할 수 있습니다. 내 인격이 바로되어 있고야 남을 교훈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건강하고야 남에게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이 잘되어 있고야 남의 신앙생활을 바로잡아줄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늘 문젯거리에 파묻혀 있고 나 자신이 늘 걱정근심에 사로잡혀 노상 얼굴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고 다닌다면 제아무리 금쪽같은 소리를 한다 한들 그 누가 귀 한번 기울이겠습니까? 결코 전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늘 웃고만 다녀도 반()은 구제하는 것이 됩니다.

 

적어도 남에게 걱정은 끼치지 않는 것이니까요. 모름지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먼저 나 자신부터 영적 육적으로 사회생활에서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고야 비로소 남에게 구원의 도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의사로서의 '처방'이 먼저 자신에게부터 효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비방(秘方)이 있습니다. 묘약이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에게만 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먼저 먹어야 합니다. 자신에게부터 효험이 있어야 합니다. 의학자가 귀한 약을, 이를테면 주사약을 한 가지 발명해놓았습니다. 그는 이 약을 먼저 동물한테 써봅니다. 효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학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동물에 효험이 있었다고 해서 그 약을 막바로 다른 사람에게 쓰지는 않습니다. 그가 훌륭한 의사라면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부터 그 약을 써봅니다. 그 약을 써서 내가 죽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먼저 써봅니다. 그래야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의원아 너를 고치라"함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진리일진대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이 있다고 하면 나 먼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내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좁은 문을 피하면서 남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심입니다. 우리의 말하는 것, 전하는 것이 진리라고 할진대 나 먼저 나 자신을 치료하는 자리에 있고 효력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긍정적으로는 효력을 스스로 입증하라는 것이요, 부정적으로는 '제 앞가림'이나 먼저 하라는 것이 됩니다.

"당신부터 먼저 치료하시오. 치료가 되면 그것을 보고 내가 따르겠소"-이런 정도라면 그나마도 긍정적으로 보는 셈입니다. 그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이 말씀에는 더 강한 것입니다. "의원아 너를 치료하라" 하는 것은 곧 "시끄럽다. 너나 치료받아라. 나는 상관없다"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시던 고향 나사렛에 돌아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게 됩니다. 그곳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였는지를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며 형제가 누구누구인지를 익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곳에 오셔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십니다. '권세 있는 자의 말씀'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들은 일단 경탄을 합니다. 깜짝들 놀랍니다. 기이히들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저들의 생각은 '선지자의 고향마을'로 돌아섭니다. '이렇듯 놀라운 말을 하는 이 사람이 실은……'하고 '본전'을 챙기기 시작합니다.'이 사람이 별사람이 아니라 바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 주제에 어디서 이런 것을 얻어들었으며, 어디서 이런 지혜를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경멸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경탄하고 한편으로는 경멸합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해박한 지식으로 저들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들을 비판 심판하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그대가 메시야인 것을 먼저 입증해보라. 우리가 아는 것은 그대의 아버지요 그대의 어머니요 그대의 동생들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면 그 증거를 대보아라' --이런 마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세밀하게 지적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認證)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가버나움과 나사렛이 그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로 인근(隣近)입니다. 그런데도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을 여기서도 행하라. 내 눈으로 보아야 되겠다' 합니다.

보아야 되겠다-언뜻 생각하면 이런 마음이 믿음을 얻기 위한 마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애시당초 불신앙적인 자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이러한 시간, 이러한 긴장관계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이 여기에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 의사로부터 배가 치료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의원아 너 자신이나 고쳐라'라고 말하고 있음이 아니냐" 이같이 저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항상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적은 많았어요. 수많은 이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있는 이적은 보지 않고 새로운 이적을 구한 것입니다. 굳이 내 눈앞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이미 살아난 사람을 가서 만나보면 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 꼭 들어야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은 말씀을 내가 전해들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꼭 경험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고 하는 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아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좀더 큰 것, 요샛말로 말하면 좀더 화끈한 것, 좀더 번쩍 하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증거를 보여라, 가버나움에서나 할 것 없이 이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 눈앞에서 화끈한 사건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되었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것이었습니까,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까? 저들의 심리를 깊이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새도 그런 사람이 참 좋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 못 믿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을 내게 좀 분명하게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합니다.

그래야 내가 믿을 것이 아니냐 합니다. 이렇게 가시적인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에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 -인자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겠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하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지금 내 마음에 들도록 내 눈앞에서 사건을 보이라 하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욕구입니다. 끝없는 욕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믿도록 해본 일이 있습니까? 안 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만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믿음은 은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마음을 주셔야 믿음이 생깁니다. 안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사람들이 보이는 불 신앙적 자세를 보십시오. 가만히 누워서 '믿게 좀 해다오, 기적을 보여서 믿게 해다오' - 이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봅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거두어 먹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세를 윽박질렀습니다. 알고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기적입니다. 이미 보여준 기적과 증거를 부정하는 자는 새로운 어떤 증거로도 그 인격을 믿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라, 내게 보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2절에 보면,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사람들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끝없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만족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꼭 보아야만 믿겠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한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뜻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는 과정에는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유의 사건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마귀가 와서 시험을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합니다. 어떻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으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마귀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다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심이었습니다. 또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 그러면 천사가 와서 붙들어줄 것이 아니냐"하고 시험을 겁니다. "뛰어내려서 죽지 않고 우뚝 선다면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 뛰어내려라"하는 유혹을 내포하고 있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고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찌생각하면 뛰어내려야 믿음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주여"하고 용약 뛰어내리면 와하고 사람들이 놀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뭐가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화끈한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께서는 사양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하고도 드라마틱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아냥거립니까? 마태복음 2739절로 42절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무엇 하려 매달려 있느냐? 능력 많은 자가 어찌하여 속절없이 매달려 있느냐? 내려 와 보라 -되는 말이지요. 왜 속절없이 매달려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때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저들이 다 믿었을 것 같습니까? 그랬다면 역사가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까? 바로 여기에 큰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또다시 말합니다."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참아내기가 심히 어려운 비아냥입니다. 여러분, 참는 자를 무능하게 보는 것은 참는 자에게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몰라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참는데도 참다보면 무식한 것이 되고, 무능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말도 하지 않고 행동도 삼가 하고 있는데, 몰라서, 어리석어서 참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니 괴로운 것입니다.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구원할 수 없어서 못한 것입니까? 안한 것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은 무능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아니할 때 이는 사랑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는 양, 아는데도 모르는 양, 갈 수 있는데도 못 가는 양, 능력이 많으신 데도 아무 능력도 없으신 양, 그렇게 죽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렇고, 참된 친구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습니다. 권리를 포기합니다. 권리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비난까지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기 어려운 저러한 비아냥과 비난을 들은 척 만척하십니다. 끝까지 참아내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고 저들은 외칩니다. 로마군인들이 못박아놓았습니다. 그런 십자가에서 이보란 듯이 훌렁 뛰어내리셨다면 참으로 굉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믿겠노라 합니다. 정말 믿었을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별로 신앙도 없이 순전히 병 고침 받겠다는 한 가지 이유로 교회에 나옵니다. 병 고침 받으면 예수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침 받는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 사람치고 예수 믿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적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의 신앙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돈벌면 믿겠다고 하는데 돈벌면 도망가지 교회 나오지 않아요. 무릇 조건부적인 것, 기적을 조건으로 해서 신앙을 말하는 사람에게 저는 속지 않습니다. 나도 속지 않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속으시겠어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기적을 보이라, 당장 내려와 보라, 그러면 믿겠노라 하고 아우성은 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하는 소리는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비난이 있습니다. 줄기차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행여 우리 마음속에 이건 마음, 비난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듣고, 그 능력도 보았습니다. 경탄하고 감탄했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기적,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기적, 또 그 비유의 말씀들, 제사장들 앞에서 하신 말씀들, 서기관들 앞에서 하신 말씀들과 이루어진 일들을 소문 들어서 다 압니다.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작년에 평양을 갔다왔습니다. 어떤 분들이 "어떻습디까?"하고 물어오면 이렇고 저렇습디다 하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목사님, 신문에도 그런 얘기가 나고, 갔다온 사람들에게서 그런 얘기 듣기도 했지만 안 믿었습니다. 아무러면 그럴까 하고 반신반의해왔는데 이제 목사님이 그러시니 믿으렵니다"하는 대답을 듣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듯 힘이 듭니다

내 마음, 내 소원, 내 뜻 안에서 또 다른 기적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그 마음, 지난날의 기적으로는 못마땅하고, 오늘 기적이 있어야 하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으로는 성에 차지 않고 내가 꼭 경험해야 하겠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 고집,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모처럼 은혜를 받았다가도 쏟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잘못 받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믿음은 멀어지거나 잘못된 신앙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듣는 것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그렇습니다. 내가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도 충분합니다.

달나라에 갔다온 어윈 대령을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만나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습디다. 다 듣고 나서 저는 말했습니다. "참으로 값비싼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거기 한번 갔다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당신으로부터 몇 마디 이야기만 듣고도 나 자신이 달나라에 거뜬히 갔다온 셈이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꼭 내가 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 않았어도 그 사람이 갔다와서 이야기했고, 내가 직접 만나서 들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남이 매맞는 것 보았으면 아픈 것을 알 것이지 꼭 내가 맞아야 아픈 것을 압니까?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렇게 미련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는 것 보았으면 나도 죽을 줄 알아야지, 내가 꼭 죽어봐야 죽는 줄 압니까?

여러분, 들음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꼭 피부에 땋도록 체험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어 문제입니다. 들음으로 충분해야 하거니와 또한 우리는 봄으로써 충분해야 합니다.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도 같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보지요. 사건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병 낫는 것 보았고, 귀신 쫓아내는 것 보았습니다. 보았으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모자라합디다. 반드시 내가 경험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병들 수밖에 없고 내가 문둥이 되었다가 깨끗해져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건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굳이 내가 경험해야 하겠다고 하는 이 생각, 참 무서운 것입니다.

들음으로, 봄으로, 그리고 또한 증거로써 충분해야 합니다. 지금 사건 현장에 없다 하더라도, 지나간 일이라고 하더라도, 증거만 있으면 충분해요. 나는 새를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새 발자국이 있으니 새가 있었음을 압니다. 그 증거로 충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만나 뵈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만 보고도 충분해야 합니다. 성경은 복음을 증거 하라고 말씀합니다. 증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경험한 사람들의 말이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에 내 생활 속에서 내 인식 속에서 사건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못 보았다 해도 십자가를 본 사람들이 말해준 바를 들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십자가 밑에 내가 지금 안아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다시 한번 그것이 사건화 하는 것입니다.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 해주는 바를 내가 믿음으로써, 수용함으로써 충분합니다. 성경적 증거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내 눈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성경에 일어났다고 되어 있으니 충분합니다. 문둥이가 깨끗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못 보았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야만 바른 신앙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권위적인, 자기중심적인 그 같은 고집은 다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성의 욕구는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성에 대해서는 가장 귀한 이치를 많이 깨우쳐주었다고 하는 이마누엘 칸트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이성의 욕구를 제한하라고 말입니다.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깨닫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제한해야 합니다. 다 알고, 다 보고, 다 먹고 - 그렇게는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믿음의 소리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선생님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런 선생님에 대하여 "자기나 가르치지"하고 있다면 나는 끝내 아무 것도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하는 말은 의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귀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불 신앙적인 반발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하하셨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에 가난하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난하셨으니 예수 믿어봤댔자 부자 되긴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서른세 살에 떠나셨으니 예수 믿었다가는 오래 살기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으니 예수를 믿어 가지고는 영광 누리기 틀렸구나 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자 자신을 비하하셨습니다.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써 참 생명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의원아 너를 고치라" 우리는 이 같은 비방을 극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불 신앙적 외침이 자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시는 말씀을 언제나 감사히 받아들이고, 진리를 진리대로, 복음을 복음대로 받으면 됩니다. 너나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 이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듣고 보는 증거, 성경적 증거로 충분하고, 그래서 만족하는 신앙을 가질 때 그 심령은 확실히 그 증거 속에서 새롭게 새롭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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