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아브라함의 의(3장 1~9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는 내용, 다르게 말하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가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생활에서 거의 그러합니다마는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처음 가졌던 감격이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에 가졌던 마음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의 마음을 평생토록 지녔으면 좋으련만……'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변함없이 지속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듯이 폴로우 업(follow up)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첫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 처음 마음을 그대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따르는, 함께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결심하고 한번 좋은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처음의 그 감격과 기쁨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화되어야 합니다.
감정에 속하는 것들이 다음 단계에서 지식화되어야 하고, 지식화된 것은 다시 의지화되어야 합니다. 실천되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동으로 옮겨나가고 생활에 옮겨나갈 때에야 처음 감격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마음에 큰 감화를 받았을 때, 이 감화를 머리속에서 합리화하지 못하고 지식화하지 못하고 체계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후에는 그때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닐까, 일시적인 감정이었던 게 아닐까 - 그만 도로묵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중대한 체험과 경험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수로 돌리고 마는가 하면 환상으로, 꿈으로 치부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처음의 감격을 그것이 흐지부지되기 전에 빨리 정리해서 합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됩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이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어가지고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랑의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행동이 다시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사랑이 지속되게 됩니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야말로 뜬구름처럼 일어났다 뜬구름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종교적인 체험도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란 말로써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체험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다-이런 문제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입니까? 이와 같이 종교적인 체험은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럼으로해서 반드시 체계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이 종교적인 체험을 얻었을 때에는 이것이 성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맥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 안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체험은 무위로 돌아가고 맙니다. 체계화되어야 하고 성경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서적이다, 성경의 맥락과 일치한다는 증거를 분명히 받았다고 하여 그 깨달음만 가지고 안주해버린다면 미구에 그 확신이 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석됩니다. 이윽고는 다시금 의심이 싹틉니다.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았고 성서적인 입증을 얻었으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성경 안에서 그 사랑을 입증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가서 그 사랑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작은 일에라도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보면 처음에 깨달았던 사랑이 불일듯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끼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는 그만 손을 씻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윽고는 말만 많아지고 걱정거리만 늘어납니다. 나아가 끝내는 의심이 많은 병리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맙니다. 남을 비판하게 되고 스스로는 교만해집니다.
비판만 남고 일찍이 마음속에 싹텄던 사랑은 온데간데없어집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 2장이 말씀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와 같은 의미에서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중생을 하였습니다.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냥 그대로라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습니다.
가난해도 좋고 부해도 좋습니다.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크나큰 기쁨과 감격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에 뒤따르는 성경적인 이해가 없습니다. 신학화가 부족합니다.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 상태로 사회에 나가 살아야만 합니다.
부득불 가정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서 자꾸만 새로운 문제에 부닥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결에 처음 가졌던 믿음이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이것이 믿음을 생활화하려고 할 때에 발생되는 문제입니다. 현실의 생활 속에서 직면하는 갈등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차를 타고 다니다보니 휴일이어서 인지 이삿짐을 실은 자동차가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이른바 '손 없는 날'이라서 이사를 많이들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손 없는 날'을 골라서 이사한다는 속신(俗信) 같은 것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만나는 하나의 문제거리라 하겠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어느 날에 이사해야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날수를 따라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방해하는 귀신(손)이 있어 음력 초하룻날과 이튿날은 동쪽에 있고 사흗날과 나흗날은 남쪽에 있고, 닷샛날과 엿샛날은 서쪽에 있고, 이렛날과 여드렛날은 북쪽에 있고, 아흐렛날과 열흘, 열아흐렛날, 스무날, 스무아흐렛날과 그믐날은 하늘로 돌아가버리니, 알아서 이사할 날을 잡으라"-이런 소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딴 궁리를 하다가 이상한 데 가서 물어 가지고 날을 잡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풀이하고 믿음으로 해석하여 해답을 얻어나가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감격만 있었지 실제로 사건 하나하나를 믿음으로 풀이하고 해석할 만큼 넉넉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구제하려고, 봉사하려고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상대방이 매번 좋게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나는 좋은 뜻으로 했는데 상대방이 나쁜 뜻으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때로 비난도 받습니다. "처음 믿는 주제에 건방지게 남을 구제하네" "부자면 얼마나 부자라고 남을 돕나!"-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옵니다. 꼭 시험에 들 만한 이야기들만 골라서 들려오니 이겨내기가 벅찹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고 애쓰다보니 믿음은 어느틈에 저만치 물러나 있습니다. 선행을 위해 애쓰는 그 노력만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결과가 초래됩니다. 원하는 만큼 다 이루지 못하여 마음이 답답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구제불능인가보다'-스스로 절망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남을 비판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선한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저사람 저렇게 허술히 믿어도 되는 건가'하고 남의 믿음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상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져들고, 바리새주의에 빠져들고, 외식주의, 형식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율법주의자들의 의도적인 꾐이 있습니다. 교만스러운 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 특히 유대주의에 철저히 뿌리박고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꾸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수만 믿어서는 안된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오랜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럴 것도 같습니다. 이제는 너도나도 할례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율법을 하나하나 따라 지키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예수는 간 곳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하나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 말씀 가운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대로 풀이하면 '누가 네게 마술을 걸더냐'라는 뜻이 됩니다. 귀신놀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하면 '어떤 귀신이 너를 호리더냐'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그렇게 변질되었느냐 하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리디아 사람들아(1절)." 어리석다-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바로 신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믿음 하나로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왜 그렇게도 신학이 없느냐, 애당초 확실한 믿음이 아니었더냐, 이 말을 하면 이 말이 옳고 저 말을 하면 저 말이 옳은 것으로 여겨져 이리저리 흔들려서야 되겠느냐 하고 책망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1절로 5절에서는 경험을 통하여, 6절로 9절에서는 성서적 진리를 통하여 변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 십자가 앞에 한번 서보라, 분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말합니까?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내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십자가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두 가지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죄인이 이제와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내가 큰 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고 구원할 만큼 내가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그토록 값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내가 큰 죄인이며 동시에 귀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중심의 믿음, 십자가 중심의 신학, 십자가를 계시로 받는 마음-십자가를 내게 향한 개인적인 계시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만 똑바로 보고 십자가와 나와의 바른 관계만 맺으면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유혹과 잘못된 생각들이 전부 십자가를 떠난 데서 비롯됩니다. 요즘 들어 이단과 사설들이 많고 괴상한 소리들도 많이 떠돕니다마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는 어느 교주가 스스로 직접 쓴 책이라며 가져와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의 내용에는 분명 두 가지의 특징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첫째로 복음을 인용한 부분이 없을 것이며, 둘째로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을 것이다-과연 추측은 딱 맞아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서에서는 한 구절도 인용한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요한계시록, 다니엘, 에스겔뿐입니다. 또한 십자가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책 전체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으니 이단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십자가의 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생생하게 보이는 역사적 사건인데 왜 쓸데없이 한눈을 팔아야 합니까? 십자가만을 똑바로 쳐다보면 다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나의 나됨, 내 존재 가치의 확인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거울 보듯이 보십시오. 나의 죄된 모습도 보이고, 소중한 존재로서의 나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존재인지, 그 약속까지도 십자가 안에서 보입니다. 모름지기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고 밝히 보이거늘 어디를 보면서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책망이 피부에 닿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이를 증명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근심걱정이 있을 때에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낙심할 때에도 다시 한번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그렇게 할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의지하고 십자가만을 쳐다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체험, 성령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십자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계시성을 내게 설명하여 줍니다. 그것이 곧 성령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 성령은 나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로마서 8 장에 있는 말씀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내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성령은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어느 때에 우리가 받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듣게 하고 믿게 하는 이가 성령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게 하고 믿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아니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성령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들려지고 믿어집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렇습니다. 그 말씀 안에서 내가 나됨의 의미를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아주 단순한 마음이 됩니다. 그 순간에는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이것이면 족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듯 신비한 성령의 역사, 중생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왜 율법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묻고 있습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어서 오는 큰 감격과 기쁨이 오로지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체험이냐, 아니면 율법을 많이 행함으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제적인 물음입니다. 우리가 선을 죽도록 행한다고 하여도 그로 말미암아 마음에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체험하고는 왜 또 딴 생각을 하느냐, 왜 율법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듣고 믿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만족한 너희들이 이제 와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만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감격을 가져다줍니다. 확연한 체험을 하고도 왜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느냐-묻고 있습니다.
셋째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4절)"-예수를 믿기 위해서 이미 투자한 바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냥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핍박과 환란 속에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가운데에 당하는 고통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다 이겨놓고는 이제 다시 율법주의자의 꾐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어이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핍박을 무슨 힘으로 이겼습니까? 성령으로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말씀으로 이겼고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야지 중간에서 율법주의자의 꾐에 빠져 넘어간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렇게 생각이 모자라느냐' 합니다.
율법의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은 언제나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교만, 그리고 두려운 마음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아무리 많이 행하여도 만족할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반면 성령으로는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기쁨으로 시작하였다가 슬픔으로 끝내겠느냐,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 소망으로 시작하였다가 절망으로 마치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은 감격이 넘칩니다. 전도학에서 이야기하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서 전도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예수 믿은 지 1년 6개월이 안된 사람이랍니다.
예외는 있습니다마는 통계를 내보면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교회 정치니 교회 조직이니 무슨 직분이니 하는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집사가 되든말든, 장로가 되든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문자 그대로 십자가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감격합니다. 이 감격을 바탕으로 누구든지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권할 수 있으니 전도를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래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것이 많습니다. 이것저것 마음에 안 드는 일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 전도를 해보려고 하지만 상대방에서 "당신을 보니 예수 믿을 생각이 없어져"하고 비웃을 것 같습니다. '내 주제에 누구한테 예수 믿으라고 하나'하는 자책의 마음이 먼저 생깁니다. 이럭저럭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가운데 내 생활과 예수 전도하는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생전 누구한테도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를 못합니다. 심지어 20년을 같이 살아온 자기 남편(아내)에게도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 나올 것 같다" "해보았자 소용없다"-이유가 이렇습니다. 성경을 들어 다시 설득합니다. "듣거나 말거나 너 할말은 하라." 그래도 어렵기는 같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훌륭한 아내로 자처할 수 있으면 남편이 감동이 되어 교회에 따라 나올지도 모르지만, 여러 모로 시원치 않은 점이 많아서 차마 함께 나가자는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언제는 나의 의로 살았습니까? 나의 의를 의지하고 전도를 할 것입니까? 나를 닮으라고 할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직 십자가 신앙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먼저 믿는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믿는 자가 먼저 될 사람이 많으리라'하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분히 오늘의 본문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겠느냐"-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시종일관 믿음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도중에 곁길로 빠져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가 되고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6절로 9절까지의 말씀에서 이 사실을 성서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을 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장면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처럼 귀한 믿음이 다시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분명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영 기미가 안 보입니다. 24년을 기다려봐도 낌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내년에는 아들을 주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은 노쇠하였고 아내 사라는 이미 단산한 지 오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을 보아도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성격, 행동까지 구제불능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의롭다 하시고 그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실 때에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할 때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전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가리켜 '너는 나의 아들이다'하고 환영의 잔치를 베풀자 그대로 잔치에 참여하고 염치없지만 아들의 자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아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복을 주셨다 합니다. 자기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기가 부족하고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먼저 의롭다 함을 얻고 14년 후에 가서야 할례를 받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할례가 먼저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이 이 내용입니다. 의식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할례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고나서 14년 후에야 그 증표로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할례는 상징적인 것이요 의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언제 생겨났습니까? 모세 때에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마음의 율법은 있었지만 십계명처럼 기록된 율법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브라함 계통으로 구원받는 사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7절)"-분명히 밝힙니다. 아브라함의 계통,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계통에 따라 율법이나 할례와는 관계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1절로 9절까지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의롭다 하실 때에 그는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합니다. 내 능력, 내 의는 포기하고 주님이 주신 능력과 말씀을 수용하는 응답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응답적인 신앙, 순종하는 신앙을 가졌을 때에 그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시작과 끝, 어느 순간에라도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끝내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할례를 베푼 사건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 우리가 지키는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그 율법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준행하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중요한 맥락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 : 17)"-이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는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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