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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6장 14~18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각와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비로소 갈라디아서의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습니다마는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결론을 두 가지 방법으로 맺고 있습니다. 하나는 종합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파한 모든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종합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다시 한번 말씀함으로써 기억하게 합니다.
강조한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결론 부분이 지금까지 써온 편지 내용을 마무리하는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십자가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로 복음을 삼는 소위 케리그마(kerygma)적 신앙의 주도자였음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는 것마저 들어서 알 뿐이지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훈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인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이 한마디 말고는 직접 인용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아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알고 그 다음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생애의 모든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그의 신학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서 말씀합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넓게 보면 십자가와 우리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저 앞에 있는 십자가와 내가 생명적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속에 내 모습이 보이고 내가 앞으로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환히 보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능력, 그 희한한 능력을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숱한 죄에 시달리다가도 십자가만 쳐다보면 그 십자가로부터 내게로 오는 빛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속에 엄청난 기쁨과 감격이 찾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 신비로운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십자가와 나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성령이요 그것을 바로 설명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여러 증거를 들어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신비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30여년 간을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구나 임종을 앞에 두고 고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먹고살 걱정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남은 가솔들에 대한 아쉬움도 아니요 명예에 대한 걱정도 아닙니다. 임종의 고뇌는 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 인가입니다. 심판대와 나, 내가 일생동안 산 모습이 주님과 face to face로 만나게 됩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그 순간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마는 다 부질없습니다. 평생을 설교하면서 살아온 저도 그 순간에는 뾰족한 재주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 오직 이 한마디뿐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이 나오고 그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게 될 때 얼굴이 비로소 환하게 밝아져옴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한번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손에 들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꽉 쥐고 놓지를 않습니다. 어떻게나 꽉 쥐고 세상을 떠났는지 죽은 다음에도 손에서 빼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아니고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없습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십자가가 해결해줍니다. 오늘의 모든 문제도 알고 보면 십자가로써 해결이 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 아닌 다른 길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은 그의 본 신앙의 본 주제인 십자가 중심의 신학,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재확인하면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나는 십자가 말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나와의 개인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하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말하지 않기로, 지식조차 십자가 중심의 것이 아니면 다 잊어버리기로 의식적으로 결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랑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의 자랑의 의미는 마음의 거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거를 말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다면, 보람과 긍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랑입니다. 그 근거를 말합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적이요 이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수 있는 높은 가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교만하지 않은 자랑에 의하여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자랑이 없으면 죽습니다.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말할 수 있거나 없거나 사람은 나름대로의 자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랑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자살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동안 자랑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적인 자랑을 빌립보서 3장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5~6절)." 유대사람인 것을 자랑합니다. 선민된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교육적으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최고의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종파적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사역으로는 유대교회의 극렬한 행동파입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교리를 대변하는 젊은 행동파로서 유대교에 반대되는 사람은 로마의 법을 어기고라도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극렬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또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거기까지 쫓아갔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모두 자랑에 속합니다. 적어도 자기가 가진 확신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자랑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알게 된 후에 그 모든 자랑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덧없는 것이요 헛된 것이요 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다 내버리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토록 십자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곧 의(義)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한편 의의 반대는 죄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면 사함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가난하고 부하고를 따질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병들어서 가난해서 뜻대로 안되어서 운운합니다마는 입에 발린 소리일 뿐입니다. 그실 깊은 곳에는 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네가 의인이기에 가난하다, 네가 병든 것은 잠깐 쉬라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병들고 보니 꼭 죄 때문인 것 같고 사업에 실패한 것이 내 게으름 때문인 것만 같습니다. 내 불행이 모두 과거 어느 때에 저지른 죄의 결과인 것만 같습니다. 문제는 의요 또한 죄입니다. 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길은 십자가 말고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십자가를 근거로 해야 다른 자랑도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빼놓으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십자가에는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통해 읽고 헤아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확실히 의의 승리를 말합니다. 진리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모든 역사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기에 십자가는 소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참 위대한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능력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볼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패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통일교 교주인 문선명씨도 십자가를 한심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장가도 못가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정치운동 하다가 실패해서 죽은 예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이요 죄인의 상징이요 죽은 사람의 상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진정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 만드는 능력이요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을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능력-이 능력을 설명하고자 할 때에는 때로 드라마틱한 생을 살아온 사람에게서 증거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깡패 출신의 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악수 한번 하면 손이 부러져 나갈 정도로 힘이 세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인데 부흥사가 되어 전도를 합니다.
이사람이 한 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사람 하나가 교회에 들어와 방해를 합니다. "예수가 누구냐" "천당이 어디에 있느냐"-별 못된 소리들을 다 지껄이며 비난을 합니다. 한대 치고 싶은 것을 끝내 참다가 목사님이 결국 한마디 합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다"-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너같은 놈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참고 있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위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그 엄청난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자유가 있고 무한한 은혜가 있음을 압니다. 또한 십자가에는 나를 거룩하게 하며 나의 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신비가 있고, 또한 십자가가 나의 생각과 나의 입맛과 나의 취미를 바꾸어 나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만들었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그 신비한 능력을 모두 시원하게 경험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졌다면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딴 사람이 되었다면 그도 십자가 때문이요, 내가 능력의 사람이 되어 무엇이건 이룬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십자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14절에서 '못박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앞부분에서 이미 보았듯이 이는 특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5장 24절에서 말씀한 바 있지만 또다시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세상도 못 박히고 나도 못 박혔다고 밝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죽었고 가치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못 박혔으니 이제 움직이지 못합니다. 피를 흘리고 죽음으로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세상과 상관없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이제 나와 멀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일에 대한 취미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것이 좋고 세상일에 마음이 끌립니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먹을 것 못 먹고, 할 일도 못하고, 중요한 날에도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투덜거립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서 손해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어서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는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세상 것이 무가치해진 것이 수동적이요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것은 내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한 욕심이나 세상으로 끌리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예속 상태를 말합니다. 전자는 수동적인 표현이요 후자는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다음의 15절에서는 할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할례받은 사람은 유대사람이요 할례받지 못한 사람은 이방사람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이든 이방사람이든 그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부터 믿었느냐도 상관이 없습니다.
직분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남는 것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입니다. 오래 믿었다, 직분이 있다, 남보다 배운 바가 많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이는 모두 형식일 뿐입니다. 형식에 너무 매이지 맙시다. 문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영적인, 그 내적인 존재에 변화가 왔느냐가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중생(重生)의 문제입니다. 중생없이 30년 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끔 교인들 가운데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봅니다. '저사람 언제 중생하겠나?' '제대로 중생할까?'하여 안타깝게 기다려지곤 합니다. 중생이 없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삼일저녁예배에 나오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나오므로 힘들고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교회에 나가자니 꾀가 나고 안 나가자니 지옥 갈 것 같아서 늘 힘들다"-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맹랑합니다. 할례를 받았든 못 받았든, 세례를 받았든 못 받았든, 직분이 있든 없든 다 잊어버리십시오. 형식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new creature-새로운 피조물,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이며 내적인 존재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17절)"라고 말씀합니다. 흔적이란 곧 사도의 권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헬라어 '엑수시아'인 이 권위(authority)는 대개 몇 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즉 경험의 권위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먼저 경험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권위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혼생활로 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결혼식은 어떻고 신혼여행은 어떻다고 말해야 권위가 서는 것 아닙니까?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만으로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보았자 통하지 않습니다. 경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경험의 우선자입니다. 경험의 선배로 권위가 있습니다.
둘째는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면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성경에 전문가가 아닙니까? 전문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희생의 권위입니다. 나를 위하여 얼마나 희생했는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어머니의 권위가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으면 어머니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단지 낳았다고 해서 권위가 생깁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권위란 얼마나 투자했는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을 흘렸는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희생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몇 마디 말로 훈계를 해보십시오. 교육적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희생을 한 사람이 한마디 해야 비로소 꼼짝을 못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저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여 매를 맞은 적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말씀은 한번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그만큼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10년을 기도하여 너를 낳았다"-이 말 한마디에 저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기도한 줄 아느냐?" 사실입니다. 단산한 뒤 10년 동안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걸어서 30분이나 걸리는 예배당을 새벽과 밤으로 매일 두 번씩 왕래하면서 기도하기를 10년 동안 하루도 거름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성껏 기도하여 10년만인 41세에 마침내 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라, 목사가 되라'하면서 키웠습니다. 저에게 어머니는 절대 권위입니다. 14세 때부터는 늘 어머니께 손목이 잡혀 새벽기도에 나가곤 했습니다. 싫어도 감히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네가 그러면 되느냐?"하고 꾸중이라도 하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런 희생도 없이 잔소리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소리만 있지 효력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희생을 많이 한 사람이니만큼 권위가 있었습니다.
넷째는 인내의 권위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表蹟)과 기사(奇事)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라고 한 말씀과 같이 그는 무던히 참았습니다. 온갖 어려운 것을 인내합니다. 어디까지 참느냐, 얼마나 참느냐에 권위가 있습니다.
잠시도 참지 못하고 발끈발끈 변덕을 부리면서 권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권위의 종합적인 증거로서 자신의 몸에 흔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스티그마타,' '스티그마'-흔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노예에게는 물론 주인이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쇠사슬에 묶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풀어놓기도 하는데 이 노예가 도망을 갔습니다. 한번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얼마든지 주인 마음대로 죽일 수 있습니다. 당장 목을 쳐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이면 주인에게 손해가 아닙니까? 그때에는 노예의 몸에 문신을 합니다. 인두를 불에 달구어서 몸에 주인의 이름을 새겨넣습니다. 이제 그는 영원히 그 집의 노예입니다. 노예라고 하여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본디 팔 수도 있고, 자유를 주어 내보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양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번 도망갔던 종은 영원한 낙인을 가지게 됩니다. 어디에 가도 인두로 새긴 낙인이 드러나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합니다.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어느 곳을 가도 아무개의 종이라는 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흔적입니다.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은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이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완전한 소유물, 영원한 소유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흔적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요 내가 하는 말이 곧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스티그마'라는 말은 영어로 '스티그머타이제이션(stigmatization)'인데 '흔적이 생긴다'는 이 말의 의미가 왜곡되어 생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손바닥에 십자가가 새겨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빨갛게 십자가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못자국이 생깁니다. 소위 성 프란체스코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의 손바닥에는 못자국이 선명하게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부인이 친히 겪은 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산에 들어가서 보름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보름이 지나니 양 손에서 피가 흐르더랍니다.
이 피가 한달여를 흐르다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금보다는 옛날에 더욱 많았습니다. 워필드(B.B. Warfield)의 「기적론」에 따르면 역사상 무려 320회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 몸에 흔적이 있다'라고 한 말을 손바닥에 피가 흘렀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신비롭게 풀이하는 것은 다분히 미신적인 경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위험한 해석일 수도 있으므로 휩쓸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매를 맞고 어딘가 부러지고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라는 정도로 해석함이 자연스러울 듯싶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 손해본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내 몸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생겼습니까? 마페트 목사님은 모금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말을 남보다 특별히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의 얼굴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길거리에서 전도할 때, 술취한 사람이 맥주병을 깨서 던짐으로 그것에 맞아 생긴 것입니다. 상처가 크게 남아 있습니다. 어디 가서 설교하든 이 상처는 모두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모금이 잘 될 수 밖에요. 무엇인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도토리같이 빤질빤질해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하려거든 휘청할 정도로 해보십시오.
'남으면 하지'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하고 주저주저하면 무슨 흔적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순교적인 흔적을 가지기에는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이 못되지만 아무튼 그리스도로 인한 흔적을 하나씩 만들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내 몸에 흔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고로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또 믿음에 굳게 서 달라고 부탁합니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강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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