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육체의 길(5장 16~21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리스도인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다시말하여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그 정체(正體)에 관한 해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 그 생활의 중심에 예수를 왕으로 메시야로 제사장으로 나의 주님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고 이성이 있고 마음 가운데에 영이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느 것이 주도권을 잡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많습니다마는 마지막 판단은 어느 쪽이냐, 무엇을 기준하여 결정하느냐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오로지 육체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만이 능사입니다. 모든 일이 육체에 이끌리어 되어집니다. 육체를 위해 하는 일뿐입니다.
둘째는 이성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추리할 수 있는 능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 즉 이성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하려고 듭니다. 이치에 맞도록 생각하면서 삽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신사적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격자라고는 해도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의 욕망이 있으나 성령의 역사에 다 굴복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성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옳고, 이것이 그릇되고 저것이 그릇되고-생각할 마음도 비판할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욕망 내 판단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해 주시는 대로 그대로 따릅니다. 내가 다 이해하고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믿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이 감동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굴복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가만히 보면 혼인할 때에도 문제가 참 많습니다. 조건을 많이 따집니다. 성격을 봐야 합니다. 가문도, 건강도, 용모도 봅니다. 학벌과 직장, 또 경제형편까지 봐야 합니다. 그 많은 조항에서 모두 만점 맞기는 어렵습니다. 부득불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해야 합니다. 어떤 한 조건이 변변치 않아도 다른 쪽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배운 바가 많지는 않아도 건강해서 좋다거나, 경제형편이 좀 시원치 않아도 신앙 좋으니 그만이라거나, 또 직장이 당장은 믿을만하지 않지만 성품이 좋으니 됐다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부족한 부분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야 믿거나 말거나 돈이 제일이지' '그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평생 고생할래?'-이렇게 나오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집사라는 분이 그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딸이 고생하는 것을 못 보겠다고 합니다. 무조건 돈을 우선으로 칩니다.
그런 것을 보니 괜히 짓궂은 생각이 듭디다. '어디 한번 돈 때문에 혼좀 나 봐라'하고 말입니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위주로 하고 사십니까?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이것이면 된다 하는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제 가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 딸아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던 모양입니다. '어떠한 남자와 다니더라'하는 소문이 제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어떻게 하려나 싶어 가만히 두었더니, 어느날 제게 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제딴에도 배우자감으로서는 어려운 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많아 꽤나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딱 한 가지만 물었습니다.
"예수 믿냐?" "믿어요" "그러면 됐다." 참 좋아합디다. 저야 예수 믿는 것, 그거 하나면 족합니다.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까?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중대한 결정, 최종 결정을 내릴 때에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서 성령 주도적이요, 성령에 이끌리어 결정하고 성령에 이끌리어 따라가면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가 없다고 전제합니다. 진공상태나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중립이란 없습니다.
마귀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성령에 이끌립니다. 언제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對敵)한다'고 말씀합니다.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대적(power encounter)함으로 양자택일해야지 둘 다는 불가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좋고 영적으로도 좋고-그렇게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둘 중의 하나여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끌리어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자유란 없습니다. 무엇엔가 끌려갑니다. 신앙은 하나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풀려난다고 하는 의미의 자유만은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참 자유할 수 없습니다. 참자유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때에 비로소 얻어집니다. 즉 이 힘의 대결, 역학 관계에서 한쪽에 매임으로써 다른 쪽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매임으로써 육체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나'의 육체적인 욕망, 이성적인 판단, 교만, 자기 의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이기고 교만과 명예욕을 이기고 물질의 욕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됩니다. 혹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애쓰고 유혹을 피하여 깨끗하게 살려고 하다가 교만죄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니 더러운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적인 죄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고로 진정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성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22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비로소 모든 죄와 모든 유혹으로부터,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를 일깨워줍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19절)"라고 하여 일상적이며 수치를 모르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하나하나 제시함으로 나의 나됨을 진단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기울고 있으며 무엇에 기뻐하고 있는가?
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이 말씀을 깊이 읽으면서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사자도 사자이기는 같습니다. 내가 지금 행동으로는 죄를 못 짓고 있다 하더라도 죄인은 죄인입니다. 죄 된 욕망은 죄된 욕망입니다. 악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칩시다. 육체가 약해졌기 때문에 죄를 못 짓습니다. 마치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뿐이지 그 마음속에는 타락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하여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 나서 회개할 때에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 : 5)." 이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봅시다. 사실은 벌써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나쁜 마음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고 용기가 없어 쇠사슬에 매여 있는 사자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이 되고 자유가 생기니까 그만 쇠사슬이 탁 끊기면서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사건은 지금에사 나타났지만, 죄는 벌써부터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지어왔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죄인이었다-이것이 바로 다윗의 회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도 이런 회개의 말이 나옵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는 물론 죄요, 말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도 죄입니다'-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있었던 죄를 고백합니다. 또 마지막에는 '죄 아닌 것이 어디 있더이까?'라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의 극치입니다. 행동, 생각, 의까지도 생각하면 할수록 다 더러운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적극적으로 성령에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단단히 붙들리어 더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 뛰어야 합니다. 가만히 한가하게 있으면 못된 짓만 하게 됩니다. 시간이 남아돌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 집사님이 교회일을 열심히 하느라고 집에서 새벽에 나와 밤늦게야 돌아가곤 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되자 그 남편되는 분이 "주일날과 삼일저녁에만 나가면 되었지 뭐 그리 열심히 나다니느냐, 집에 좀 붙어 있어라"하고 책망을 합니다.
집사님은 "그러면 내가 댄스홀에 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하고 대꾸했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두손들고 교회일이나 계속하라고 하더랍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마음이 꽉차 있어야 합니다. 바빠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겠다,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해야지 마음이 비어 한가하면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생활이 무료하면 안됩니다.
'빈 집이 위험하다'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감화로 꽉차 있어야 합니다. 내 입에서는 항상 찬송이 떠나지 않아야 하며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묵상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떠나면 잡스런 말들이 나오고 허탄한 생각들이 나옵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의 악한 욕망을 율법과 이성으로 누르고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게 주신 자유를 하나님의 말씀에 반납해버려야 합니다. 자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예 바쳐버립시다.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따라갑시다.
마지막 결론은 뻔한데 무엇을 판단하십니까? 이제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했으면 됩니다. 결정을 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며 묵묵히 따라가십시오. 그럴 때에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나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내 인간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풀어놓으면 잘못되고 시험에 빠지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내 의지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온전히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악덕 목록이 기록됩니다. 나쁜 것이 이것이다-15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 몸에 내 생활에 내 마음에 이런 잡초가 나거든, 이런 성향이 있거든, 이런 욕망이 생기거든, 이런 흔적이 보이거든, 내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회개하고 이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그리스도께,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15가지 악덕 목록을 자세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말씀이 16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악덕을 기록하는 이유는 이로써 나의 나됨을 알고 내가 내 처한 현주소를 알아 내 현 상태를 진단해야 하겠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바위와 모래는 차이가 많지 않습니까? 바위는 크고 모래는 바위에 비해 아주 작은 알갱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위나 모래나 모두 물에 가라앉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래도 가라앉고 바위도 가라앉고 조약돌도 가라앉습니다. 이는 작은 죄든 큰 죄든 같은 죄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중죄다 경죄다 하여 자기 스스로 죄를 판단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큰 죄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하고 안심을 합니다마는 그게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듯 어느 죄목이든, 그것이 크든 작든 그 죄는 나의 인간성이며 내 타락된 본성의 발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내부에는 이러한 성향이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15가지의 악덕을 분석하려 할 때에는 주로 5분설이나 3분설을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4분설을, 위어스비(Wiersbe)는 3분설을 택하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자 합니다. 모든 육체에 속한 일들, 옛사람의 본성, 타락된 인간성은 15가지로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모든 죄목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드러진 것을 대표적으로 열거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육체에 관계된 것, 이 세상에 속한 것, 악령에 속한 것, 사단이 이끄는 행동에 이러한 죄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때에, 첫째로 감각적인 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죄입니다. 둘째로 종교적인 죄입니다. 셋째로는 사회적인 죄입니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죄는 이처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인 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본문에서는 이 죄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의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 : 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더럽히는 것 같아도 실은 나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의 순결을 해하는 것입니다. 몸 안에 죄를 짓는 것, 나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감각적인 죄는 다른 말로 내 인간 존재 자체를 비인간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연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비인간화되어 하나의 속된 동물로 바꾸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음행죄, 더러운 죄, 호색죄를 죄목 제1조로 치고 있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죄입니다. 음행에 대한 칼 바르트의 정의는 유명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간음이다'-육체적 행위만으로서의 성행위는 간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이 행위가 정당한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개인 안된 단순한 육체의 향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분명히 간음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반드시 정신적인 사랑, 아름답고 신령한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의 상징으로 혹은 사랑의 증거로 이루어지는 성행위여야만 정당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습니다. 행동은 육체적이나 그 의미는 정신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가장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성찬예식(Sacramental)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례적 의미가 있습니다. 행동은 육체적인 것 같으나, 정신적 사랑의 발로요 정신적 결합의 발로로서 상징화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행이 됩니다.
순결 문제에는 세 가지의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 순결 문제는 소유욕에 기초합니다. 대개 남자들은 자기 아내에게 절대 정조를 요구합니다.
내것이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소유욕입니다. 제가 한번은 로마에 가서 정조대라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남자들이 군대에 나갈 때에나 일로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게 될 때에 아내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부를 두를 수 있게 만든, 자물쇠가 달린 기구입니다.
여러분, 남자들이 여성에게 순결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소유욕의 소치입니다. 요즘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아주 싫어하는 소리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인 남성들이 소유욕을 도덕적인 말로 설명해놓은 것이 바로 정조라는 것입니다. 음행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소유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권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향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간음이 됩니다. 음행에 속합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다만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합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마음, 상대방을 향락의 도구로 삼으려는 마음이 음행입니다. 셋째, 사랑의 개념에서 풀이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순결을 지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의 순결도 저의 순결도 함께 지킵니다. 소중히 여깁니다. 여기에서 순결의 개념이 유출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음행-바른 길이 아니고 동물적인, 다분히 소유욕의 발로이며, 향락의 도구로 상대방을 비인간화 수단화하면 큰 죄가 됩니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이러한 본능들이 있어 문제입니다.
다음의 '더러운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속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음행의 결과로 오는 더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음행이라는 것은 갈수록 점점 변태성욕으로 속되게 변해갑니다. 요즘은 너무 속되어 동물보다도 더 천해졌습니다. 동물 세계가 오히려 깨끗합니다. 제가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제는 '개같은 놈'이라고 욕할 게 아니라 '개님'으로 개를 받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보다 개가 훨씬 깨끗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현재 세계에는 약 2천 5백만의 에이즈 보균자가 있다고 합니다.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발병자가 약 1백 50만 명이며, 일 년 동안 이로 인해 죽는 사람이 2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대로 나아가 2천년대를 넘어서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에이즈로 죽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참으로 더러워졌습니다. 썩어 빠졌습니다. 왜 깨끗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더러운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즐깁니다. 인간성이 갈데까지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또, '호색'이라 하였습니다. 성의 목적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을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이 생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중심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성은 목적이 되어서도 안되고, 모든 것의 첫째가 되어서도 안되며, 중심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호색-모든 감각적인 것들은 저마다 악한 방향으로 기울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를 이기려면 성령으로 사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신령하게 살려고 애써야 하며 신령한 것들을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종교적인 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우상숭배는 말할 것도 없이 죄입니다. 그러나 술수(術數)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파르마케이아'입니다. 영어의 Pharmacy라는 말의 어원이 바로 '파르마케이아'입니다. 옛날에는 마술사들이 약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술수라고 하는 것은 약물을 가지고, 또는 못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우상숭배 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을 그래서 술수라고 합니다. 영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셋째, 사회적인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기심과 타락된 인간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원수를 맺는 것, 한번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면 기어이 원수를 갚겠다고 벼릅니다. 원수를 풀지를 못합니다. 섭섭한 마음을 품는 순간에 이미 성령은 떠났습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여 '내가 억울하다, 복수하고 말겠다'하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나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차 안에서 들은 방송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9년 전에 해직되었던 기자의 고백입니다. "해직 당했을 때는 욕도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복수하려는 마음도 먹었지만,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늘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덕분입니다"-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살아올 수 있었다고 마음으로부터 절실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내 마음이 가득하여 내게 해롭게 한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다, 또 그들을 위하여 기도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수를 맺는 것, 원수 갚으려고 하는 복수심 그 자체가 마귀의 종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떠나고 내 안에 마귀가 들어와 나를 종으로 부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복수해라"하고 마귀가 자꾸 부추깁니다. 줄레줄레 마귀의 뒤를 따라갑니다. 마침내 무서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어서 나오는 '분쟁'도 똑같은 뜻입니다. 분쟁하는 마음은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음이며 '분내는 것'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또 '당짓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 당만 옳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당만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당짓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은 곧 방임(放任)입니다. 자포자기하는 태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잠깐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함께 일하던 분이 있었는데 금요일만 되면 영락없이 결근을 합니다. 목요일에 주급을 받는데 그 돈으로 그날 밤새껏 술을 마시고 다음날에는 못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다 노는 토요일에 혼자 나와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느냐,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위에 구멍이 뚫려 반으로 잘라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이제는 술 마시면 죽는답니다." "그러면 마시지 말아야지요." "웬걸요.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괴로워서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십니다." 죽어라 하고 마십니다. 술도 살자고 마셔야 하지 않습니까? 방탕과 술취함-내일이란 없습니다. 오늘로 끝내자, 너 죽고 나 죽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15가지의 죄목을 열거한 다음 "경계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덕이 여전히 머물러 있고, 거기에 끌려가면 내 마음속에서 성령이 떠납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21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게 정말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성령의 열매가 맺혀 있으면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열거된 15가지의 악덕들이 자꾸 좋아지고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관심이 가면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옛사람은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이러한 것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도 없어지게 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언급하겠습니다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마음을 충만히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됩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의 종말(2장 14~17절) (0) | 2024.03.19 |
---|---|
율법에 속한 자(3장 10~14절) (0) | 2024.03.19 |
육체로 자랑하는 자(6장 11~13절) (0) | 2024.03.19 |
예수의 흔적(6장 14~18절) (0) | 2024.03.19 |
역사 안에 있는 비유(4장 21~31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