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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있는 자에게 더 주는 원리(마태복음 25장 23절~30절)

by 【고동엽】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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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에게 더 주는 원리(마태복음 252330)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 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 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 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오늘의 본문 29절 말씀은 상식적으로 볼 때에 참으로 역설적이라 할 잠언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라면 말이 될 것 같은데 이 말씀을 보면 오히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당연한 일인가 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것도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어찌 하시는 말씀일까요?

현대에 있어서 아주 큰 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 '분배'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공평하게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하면 바른 분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평준화를 이룰 수 있을까-어떻게 보면 평등분배를 지선(至善)의 덕으로 여기는 것이 현대의 윤리인 양 인식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졌다, 좀 내놓아라, 못 가진 자도 똑같이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리하여 세계의 한쪽에서 제도적으로, 힘을 가지고 소위 평등분배를 한다고 소동을 피운 것이 사회주의요 공산주의입니다. 토지개혁이라는 것을 해서 땅을 빼앗아 나누고, 남의 소유를 강제로 국유화하고 -이런 식으로 평등을 이루어보겠다면서 요란스레 출발했던 사회주의가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당초 그럴싸하게 내세웠던 이론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계의 다른 한쪽에서도 어떻게든 평등을 이루어보겠다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틀을 짜왔습니다. 이를테면 '세금'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누진세니 증여세니 하는 것을 떠 안김으로 많이 가진 자는 더는 못 가지게 한다던가 하고, 적게 가진 자에게는 세금을 감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혜택'이라는 것을 준다던가 하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평등분배'라고 하는 문제는 거의 지선(至善)의 윤리쯤으로 통하게끔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볼 때에 부익부빈익빈은 분명히 지탄받아 마땅한 악입니다. 가진 자는 점점 더 많이 가지고, 못 가진 자는 평생을 가져도 더 가질 수가 없다면 이는 잘못된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의 봉건제도가 그러했습니다. 정작 농사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빌려다 먹습니다.

자꾸 빌려다 먹고 꿔다 먹고 하다가 가을에 수확을 하면 다 갖다 갚고는 다시 빈손이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고 보면 마지막에는 땅도 날아갑니다. 그래서 소작인(小作人)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가진 자에게 땅을 넘기고 이젠 남의 땅에 농사를 짓습니다. 제 땅에서 농사지을 때에도 늘 모자랐는데 이제는 더욱 더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한 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점점 더 부하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기를 쓰고 일을 해도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이렇게만 살펴본다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돈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더 쉽게 벌 수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한사코 벌려 해도 벌리지 않습니다. 꾼 돈 갚느라고, 이자 무느라고 정신없습니다. 평생을 노력해도 가난 벗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볼 때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은 분명 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잠언은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물질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물량적 문제가 아니라 질적 문제요, 양적 철학이 아니라 질적 철학에 근거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적(靈的)인 문제를 말씀하심입니다. 인격적인 문제를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며,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이들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진리를 잘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재주를 가진 사람을 보면 그 한 가지 재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재주도 겸비하고 있어요. 재주가 있는가 하면 인물도 잘나고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좋습니다. 다 가지고 있구나 싶을 만큼 그렇게 남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을 보면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못 가졌어요.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못 가집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는 현상입니다.

있는 자가 더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없는 자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의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심인가? 영적으로도 중요한 말씀이요,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 연관되어 있는, 심오하고도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유명한 '달란트 비유' 끝에 결론적으로 오늘의 잠언을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타국에 나가면서 종들에게 돈을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러고는 타국에 나갔다가 몇 년 후에 돌아와보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돈을 열 달란트로 일구어왔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네 달란트로 일구어왔으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돈을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를 가지고 와서 내놓으므로 주인은 그를 보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힐책합니다. 사람의 여느 상식 가지고는 이 대목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주인이 좀 지나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본전 잘라먹고 많은 사람도 많은 세상에, 본전은 고스란히 가져왔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악하다'고까지 꾸짖는 것일까? 게으르다고 나무란 것은 납득이 가지만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같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먼저, 이 비유말씀은 소유의 문제를 말씀함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 능력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음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건 열 달란트건 모두가 주인의 것이요, 모든 것을 주인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맡은 바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내 것은 없다는 것,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오직 청지기의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말씀에서 중심은 누구냐 입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마음에 들었느냐입니다. '얼마를' 남겼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겼건 두 달란트를 남겼건 간에 남겼느냐 안 남겼느냐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많이 남겼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얼마를 남겼건 남긴 사람이면 똑같이 칭찬합니다. 남겼으면 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한 달란트만 남겼어도 되는 것이요, 반 달란트 받았다면 반 달란트만 남겼으면 되는 것입니다. 의미는 남겼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충성 내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의 기회입니다.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주어진 기회에 대하여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준 것은 기회입니다. 충성되게 하지 않으면 이 기회를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그 안에서 충성을 다해나갈 때에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못 사용하면 주어졌던 기회를 거두어 가십니다. 부디 잊지 말 것입니다.

내가 건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건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입니다. 일을 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게을러빠졌습니다.

건강을 잘못 사용합니다. 그렇더라도 얼마동안은 봐주십니다. 그러나 길래 그렇게 살면 마침내는 다 잃고 맙니다. '너는 건강이 필요 없나보다'하시고 거두어 가십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심신이 좀 피곤해 있는데 누가 무슨 일을 부탁해옵니다.

할까말까 망설입니다. 시간은 있지만 좀 쉬고 싶어서 그 일을 거절할까 싶어집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 "그렇게 쉬고 싶다면 아주 푹 쉬게 해주마"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꼭 그러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하는 수 없이 그 일을 응낙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아주'쉬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건강이 주어졌고, 시간이 주어졌고, 지혜가 주어졌는데, 이를 바로 쓰지 못한다면 거두어 가십니다. 주인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들 쓸데없이 두었다 뭐하겠습니까? 주어진 기회 앞에 우리는 모름지기 신앙으로, 충성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 한 달란트 그대로 묻어두었다가 '무익한 종'이라고, '쓸데없다, 치워버려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쓸데없는 자를 두어서 무엇하겠느냐'라고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깊이 새겨봅시다. '있는 자'에게 '착하다'고 말씀합니다. 착하다 함은 도덕적인 면에 대한 평가입니다. 여러분, 이 도덕성이 생산과 통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의 경제를 봅시다. 처음에는 자본만 있으면 된다고 하여 외국에서 자본을 끌어 왔습니다. 우리 경제를 일으켜보겠다고 많은 남의 자본을 꾸어들였지만 되지를 않습니다. 다음에는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 해서 기술 계발에 치중했습니다. 공장을 세운다 연구를 한다 하고 어느 만큼 이룩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맞닥뜨린 벽이 있습니다. 자본이 부족합니까? 기술이 부족합니까? 그래서 문제에 봉착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성입니다.

일전에 어느 자동차회사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요새 자동차들, 고장이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을 들어 한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수리공장에 가면 고장난 자동차가 즐비한데도 제대로 하나 수리를 못해내니 걱정입니다"했더니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반드시 기계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 고치는 사람의 마음씨입니다.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자동차 한 대가 2만여 개의 부속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하나 하나를 정성껏 만들고 만지고 해야 되는데 그런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라고 개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래 자동차를 중고로 샀었습니다. 중고 '피아트'를 사 가지고 7년을 탔습니다마는 처음에는 툭하면 고장이 났었습니다. 퓨즈가 자꾸 끊어지는 것입니다. 수리공장에 갔더니 전기기구를 몽땅 교체해야 되니 돈이 많이 들 거라고 하기에 그만 두라 하고 퓨즈"만 갈아 끼웠습니다. 그러나 퓨즈를 갈아 끼우는족족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차가 왜 이럴까? 저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은 '백 기어'를 넣을 때마다 퓨즈가 끊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옳지, 요거로구나'하고 자세히 더듬어보았더니 이것 보십시오. 수리공장에서 손본다면서 나사못을 하나 박았었는데 그리고 지나가는 전선을 비켜 놓지도 않은 채 무지막지하게 냅다 박아놓아서 나사못이 그 전선을 꿰뚫고 바닥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놓으니 '백 기어'를 넣을 때마다 합선이 되어 퓨즈가 끊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제대로 해놓았더니 그제야 퓨즈가 안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7년이나 탈없이 타고 다녔습니다.

모름지기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기술로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으로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성으로, 양심 가지고 버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여기서 빗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가면 흔히들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수출하는데, 늘 처음에 보냈던 샘플과 뒤에 간 물건이 같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불합격되어 되돌아옵니다. 이런 물건을 맡아서 싸구려로 팔아 넘기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 꼴이 되는 것입니까? 도덕성 때문입니다. 도덕성이 없이 만들어진 상품은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본, 기술, 노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착하고 신실해야 생산성이 제고됩니다. 결국은 생산도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 생산력인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가 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로 해결해보고자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로 자극을 주어서, 주체사상이니 뭐니 해 가지고 구호를 외친다, 모택동 어록을 아침마다 암송한다 하고 별의별 안간힘을 다 써보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진실과 충성을 생산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임금(賃金)으로 자극해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잘 만들면 더 주마, 열심히 하면 돈 더 준다, 생산성을 어떻게 올리면 보너스를 어떻게 준다는 따위로 미끼를 던져보지만 이 역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계 문제, 경제 문제가 죄다 도덕성에 달려 있습니다. 최선의 길이 무엇이냐, 동기부여를 어디서부터 얻어내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문제에 봉착합니다.

착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해보아도 착해야만 되겠는데, 그렇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도덕성 뒤에 종교가 있습니다. 바른 종교가 아니고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습니다. 바른 종교가 아니고는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종을 보고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했습니다. '충성'으로 쓰인 헬라어 '피스티스'를 성경에서 보면 믿음, 진실, 충성의 세 가지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인 문제는 믿음입니다. 건강한 인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실 때에 복을 주십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건강한 인격은 믿습니다. 나를 믿고 사람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런 인격이 건강한 인격입니다. 병든 인격은 남을 의심하고 아무 것도 안 믿습니다.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 곧 정신병자입니다. 땅 위에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믿어야 합니다. 필경은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길을 갑니다. 신호등이 바뀝니다. 청신호가 켜지면 가는 것이라 믿고 건너갑니다. 적신호에도 막 지나간다, 청신호에도 옆에서 마구 쳐들어온다고 의심을 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 신호등을 따라줄 것이라고 믿음으로 청신호가 켜지면 안심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는 결국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살아남을 길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믿고 싶지 않아도 도리가 없습니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정도만큼 건강한 것입니다.

제가 6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에는 중학생들까지도 수표를 썼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미국에 가보면 주유소 같은 곳에 수표 안 받는다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크레디트 카드도 믿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현금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지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진실입니다. 진실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기초가 되고 모든 인격의 기초가 되며 모든 생산의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주실 것이요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은, 이 진실만은 내가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모든 은사의 그릇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충성은 내가 내놓아야 할, 내가 가진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말씀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 : 13)." 충성은 있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것도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함이요, 유대교에 충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 악착같이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다녔는데, 딴에는 그것이 충성이요 진실이었습니다. 그토록 철저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녀석을 싹 돌려놓으면 쓸만하겠구나'하셔서인지 결국은 그 사울을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무엄한 상상이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물에 물탄 듯 희미하고 미적지근한 사람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충성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핍박해도 '진짜'로 핍박하는 자는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안보면서 핍박하는 사람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든지 충성되게 임해야 합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바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성만큼은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는 주님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믿음일 뿐 아니라 행동적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묻지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니 있는 것입니다. 이를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섯 달란트 주셨으면 그 다섯 달란트를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을 뿐만이 아니라 내게 맡겨주시는 사명에 대하여 믿어야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겨주셨으니 다섯 달란트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는 것이요, 두 달란트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기에 두 달란트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적다고도 말 것이요 많다고도 말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맡아 가지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옛날, 독일인들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야단일 때에 이스라엘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던 한 유대인이 자기는 거기 끌려오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민족운동 같은 것도 한 일이 없고 평소에 이렇다할 아무런 구실도 한 것이 없는데 왜 끌려오나 싶어서 억울했던지 "나는 독일에 반대한 적도 없는데,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왜 죽이려 하느냐"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나란히 걷던 청년이 면박을 줍니다. "당신은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죽어 마땅하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분명히 죄입니다. 한 달란트를 무위(無爲)로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악입니다. 모름지기 생산적이어야 하고 충성되어야 하고, 모험적으로라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주인들 믿었습니다. 주인이 내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맡겨주신 것이 많건 적건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렇지 못했는데다 핑계까지 댑니다.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하기까지 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하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어놓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의 핑계에 대한 주인의 대응에 주의할 것입니다(2630). 하나님께서 한 달란트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도 이 사람은 받은 바 그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입니다. 이 사람은 일을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충성'을 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고 적고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데에, 곧 질적인 것에 요점이 있는데 이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이 사람은 주인과 자기와의 관계를 율법적 관계로 이해하였습니다. 주인인 은혜로 달란트도 주고 기회도 주고 복도 주는데, 이 사람은 이를 율법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두려워하여"라고 말합니다. 내가 섣불리 일을 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주인이 책망할 것 아니냐, 장사하다가 행여라도 손해를 보면 어떡하나 -이렇게 율법적으로 이해하여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고, 그래서 '안전제일주의'로 땅에다 파묻어 두었던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것도 은혜요 기회를 얻은 것도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혹 실수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해주실 것이다,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늘 가상해봅니다. 만일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다가 한 달란트를 홀랑 날려버리고 주님 앞에 나아와 "주인이여, 다른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주시고 두 달란트 주시면서 저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신 것을 보면 주인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시시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과연 잘 보셨습니다. 제가 원래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없는 능력으로 한 달란트 가지고 노력을 해보았습니다마는 아니나다를까 그만 홀랑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말했다면 어찌되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주인은 틀림없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새로 한 달란트를 더 주시면서 꼭 이렇게 말씀하실 것만 같습니다. "Try again!"-"다시 해보아라." 이렇게 기회를 주실 것만 같습니다.

요컨대 충성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한계를 스스로 부정했습니다. '나는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못한다고 믿음으로 결국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 사명을 주실 때에 모세는 발을 뺍니다. "내가 물 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말도 잘하지 못하는걸요." 이러한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무어라 하십니까?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내가 가라고 하면 갈 것이지 무슨 딴소리냐, 협력자가 필요하면 협력자를 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는 오직 충성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순종이요 충성인 것입니다. 결과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닙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끝에 가서 어떻게 될 거이냐 하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가서 공부를 하는데, 벌써 여러 해 동안이나 한국에서 돈을 갖다 쓰면서 애를 쓰는데도 공부가 어렵고 힘들다면서 저를 보고 "목사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공부해보아야 끝내 시원치 않을 것 같습니다"하고 단념할 듯이 말하기에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닐세. 끝이 시원코 시원치 않고가 문제가 아닐세. 시작은 했으니 끝을 내야지. 공부를 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이냐 -그것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지 지금에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자넨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시작한 것이니 끝을 내게." 모름지기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여 충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준다고 하셨습니다. 충성이 있는 자에게 더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해서 그 기회에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일을 더 맡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준다는 말씀은 곧 맡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돈을 거저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로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는 열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라, 열 달란트로 충성을 다했으니 이 스무 달란트로 일해라…… 이렇게 맡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므로 큰 일을 맡기시겠다 하심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치 못하면 그 작은 일마저 빼앗아버리십니다.

사람의 몸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쓰는 부분은 쓰는 만큼 강해집니다. 안 쓰는 부분은 날로 약해집니다. 걷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쓰지 않고 있으면 조금만 삐끗해도 부러집니다. 어느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의사가 자기를 진찰해보더니 "하루 세 시간을 걸어야 건강을 유지하시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 때는 이를 건성으로 듣고 그 뒤로도 줄곧 차만 타고 다녔더니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보니 덜컥 관절염에 걸려버려 꼼짝을 못하겠다면서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만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읽고 쓰고 생각하고 듣고 말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해야 제대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멍청해질 것은 당연합니다. 눈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귀도 그렇습니다. 쓰지 않으면 둔해지고 어두워집니다.

자꾸 일을 해야 힘이 납니다. 일한 만큼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의 은사를 버리는 것이요, 악함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악하면 하나님께서 은사를 도로 거두어 가십니다. 게으르고 악한 자에게는 은사가 무용인데도 그대로 두어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충성이 있고 진실이 있고 열심이 있고 행동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신 것 위에다 자꾸 더 보태어주십니다. 더 가져라 하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충성 있는 자에게는 더 줄 것이요, 충성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십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는 원리(마태복음 252330)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 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 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 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오늘의 본문 29절 말씀은 상식적으로 볼 때에 참으로 역설적이라 할 잠언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라면 말이 될 것 같은데 이 말씀을 보면 오히려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 당연한 일인가 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것도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어찌 하시는 말씀일까요?

현대에 있어서 아주 큰 문제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 '분배'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공평하게 평등을 누릴 수 있어야 되는데 과연 어떻게 하면 바른 분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평준화를 이룰 수 있을까-어떻게 보면 평등분배를 지선(至善)의 덕으로 여기는 것이 현대의 윤리인 양 인식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졌다, 좀 내놓아라, 못 가진 자도 똑같이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리하여 세계의 한쪽에서 제도적으로, 힘을 가지고 소위 평등분배를 한다고 소동을 피운 것이 사회주의요 공산주의입니다. 토지개혁이라는 것을 해서 땅을 빼앗아 나누고, 남의 소유를 강제로 국유화하고 -이런 식으로 평등을 이루어보겠다면서 요란스레 출발했던 사회주의가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당초 그럴싸하게 내세웠던 이론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계의 다른 한쪽에서도 어떻게든 평등을 이루어보겠다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틀을 짜왔습니다. 이를테면 '세금'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누진세니 증여세니 하는 것을 떠 안김으로 많이 가진 자는 더는 못 가지게 한다던가 하고, 적게 가진 자에게는 세금을 감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혜택'이라는 것을 준다던가 하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평등분배'라고 하는 문제는 거의 지선(至善)의 윤리쯤으로 통하게끔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볼 때에 부익부빈익빈은 분명히 지탄받아 마땅한 악입니다. 가진 자는 점점 더 많이 가지고, 못 가진 자는 평생을 가져도 더 가질 수가 없다면 이는 잘못된 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의 봉건제도가 그러했습니다. 정작 농사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빌려다 먹습니다.

자꾸 빌려다 먹고 꿔다 먹고 하다가 가을에 수확을 하면 다 갖다 갚고는 다시 빈손이 됩니다. 이런 악순환이 거듭되고 보면 마지막에는 땅도 날아갑니다. 그래서 소작인(小作人)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가진 자에게 땅을 넘기고 이젠 남의 땅에 농사를 짓습니다. 제 땅에서 농사지을 때에도 늘 모자랐는데 이제는 더욱 더 모자라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한 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점점 더 부하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기를 쓰고 일을 해도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이렇게만 살펴본다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돈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더 쉽게 벌 수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한사코 벌려 해도 벌리지 않습니다. 꾼 돈 갚느라고, 이자 무느라고 정신없습니다. 평생을 노력해도 가난 벗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볼 때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은 분명 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잠언은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물질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물량적 문제가 아니라 질적 문제요, 양적 철학이 아니라 질적 철학에 근거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적(靈的)인 문제를 말씀하심입니다. 인격적인 문제를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며,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이들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진리를 잘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재주를 가진 사람을 보면 그 한 가지 재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재주도 겸비하고 있어요. 재주가 있는가 하면 인물도 잘나고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좋습니다. 다 가지고 있구나 싶을 만큼 그렇게 남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을 보면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못 가졌어요.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못 가집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는 현상입니다.

있는 자가 더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없는 자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의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심인가? 영적으로도 중요한 말씀이요,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 연관되어 있는, 심오하고도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유명한 '달란트 비유' 끝에 결론적으로 오늘의 잠언을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타국에 나가면서 종들에게 돈을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러고는 타국에 나갔다가 몇 년 후에 돌아와보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돈을 열 달란트로 일구어왔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네 달란트로 일구어왔으므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그 돈을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를 가지고 와서 내놓으므로 주인은 그를 보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힐책합니다. 사람의 여느 상식 가지고는 이 대목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주인이 좀 지나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본전 잘라먹고 많은 사람도 많은 세상에, 본전은 고스란히 가져왔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악하다'고까지 꾸짖는 것일까? 게으르다고 나무란 것은 납득이 가지만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같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먼저, 이 비유말씀은 소유의 문제를 말씀함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 능력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음입니다. 주인의 것을 맡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건 열 달란트건 모두가 주인의 것이요, 모든 것을 주인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맡은 바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내 것은 없다는 것,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오직 청지기의 입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 말씀에서 중심은 누구냐 입니다. 이 말씀은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입니다.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의 마음에 들었느냐입니다. '얼마를' 남겼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겼건 두 달란트를 남겼건 간에 남겼느냐 안 남겼느냐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이 칭찬한 것은 많이 남겼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얼마를 남겼건 남긴 사람이면 똑같이 칭찬합니다. 남겼으면 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한 달란트만 남겼어도 되는 것이요, 반 달란트 받았다면 반 달란트만 남겼으면 되는 것입니다. 의미는 남겼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를 남겼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충성했느냐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충성 내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의 기회입니다.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주어진 기회에 대하여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준 것은 기회입니다. 충성되게 하지 않으면 이 기회를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 -이 기회를 잘 포착하여 그 안에서 충성을 다해나갈 때에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못 사용하면 주어졌던 기회를 거두어 가십니다. 부디 잊지 말 것입니다.

내가 건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건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입니다. 일을 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게을러빠졌습니다.

건강을 잘못 사용합니다. 그렇더라도 얼마동안은 봐주십니다. 그러나 길래 그렇게 살면 마침내는 다 잃고 맙니다. '너는 건강이 필요 없나보다'하시고 거두어 가십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심신이 좀 피곤해 있는데 누가 무슨 일을 부탁해옵니다.

할까말까 망설입니다. 시간은 있지만 좀 쉬고 싶어서 그 일을 거절할까 싶어집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 "그렇게 쉬고 싶다면 아주 푹 쉬게 해주마"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꼭 그러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하는 수 없이 그 일을 응낙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아주'쉬라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건강이 주어졌고, 시간이 주어졌고, 지혜가 주어졌는데, 이를 바로 쓰지 못한다면 거두어 가십니다. 주인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들 쓸데없이 두었다 뭐하겠습니까? 주어진 기회 앞에 우리는 모름지기 신앙으로, 충성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 한 달란트 그대로 묻어두었다가 '무익한 종'이라고, '쓸데없다, 치워버려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쓸데없는 자를 두어서 무엇하겠느냐'라고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깊이 새겨봅시다. '있는 자'에게 '착하다'고 말씀합니다. 착하다 함은 도덕적인 면에 대한 평가입니다. 여러분, 이 도덕성이 생산과 통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의 경제를 봅시다. 처음에는 자본만 있으면 된다고 하여 외국에서 자본을 끌어 왔습니다. 우리 경제를 일으켜보겠다고 많은 남의 자본을 꾸어들였지만 되지를 않습니다. 다음에는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 해서 기술 계발에 치중했습니다. 공장을 세운다 연구를 한다 하고 어느 만큼 이룩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맞닥뜨린 벽이 있습니다. 자본이 부족합니까? 기술이 부족합니까? 그래서 문제에 봉착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성입니다.

일전에 어느 자동차회사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요새 자동차들, 고장이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을 들어 한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 수리공장에 가면 고장난 자동차가 즐비한데도 제대로 하나 수리를 못해내니 걱정입니다"했더니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반드시 기계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만드는 사람, 고치는 사람의 마음씨입니다.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자동차 한 대가 2만여 개의 부속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하나 하나를 정성껏 만들고 만지고 해야 되는데 그런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라고 개탄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래 자동차를 중고로 샀었습니다. 중고 '피아트'를 사 가지고 7년을 탔습니다마는 처음에는 툭하면 고장이 났었습니다. 퓨즈가 자꾸 끊어지는 것입니다. 수리공장에 갔더니 전기기구를 몽땅 교체해야 되니 돈이 많이 들 거라고 하기에 그만 두라 하고 퓨즈"만 갈아 끼웠습니다. 그러나 퓨즈를 갈아 끼우는족족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차가 왜 이럴까? 저는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은 '백 기어'를 넣을 때마다 퓨즈가 끊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옳지, 요거로구나'하고 자세히 더듬어보았더니 이것 보십시오. 수리공장에서 손본다면서 나사못을 하나 박았었는데 그리고 지나가는 전선을 비켜 놓지도 않은 채 무지막지하게 냅다 박아놓아서 나사못이 그 전선을 꿰뚫고 바닥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놓으니 '백 기어'를 넣을 때마다 합선이 되어 퓨즈가 끊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제대로 해놓았더니 그제야 퓨즈가 안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7년이나 탈없이 타고 다녔습니다.

모름지기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기술로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으로 돈버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성으로, 양심 가지고 버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여기서 빗나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가면 흔히들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수출하는데, 늘 처음에 보냈던 샘플과 뒤에 간 물건이 같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불합격되어 되돌아옵니다. 이런 물건을 맡아서 싸구려로 팔아 넘기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 꼴이 되는 것입니까? 도덕성 때문입니다. 도덕성이 없이 만들어진 상품은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본, 기술, 노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착하고 신실해야 생산성이 제고됩니다. 결국은 생산도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 생산력인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가 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로 해결해보고자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로 자극을 주어서, 주체사상이니 뭐니 해 가지고 구호를 외친다, 모택동 어록을 아침마다 암송한다 하고 별의별 안간힘을 다 써보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진실과 충성을 생산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임금(賃金)으로 자극해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잘 만들면 더 주마, 열심히 하면 돈 더 준다, 생산성을 어떻게 올리면 보너스를 어떻게 준다는 따위로 미끼를 던져보지만 이 역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계 문제, 경제 문제가 죄다 도덕성에 달려 있습니다. 최선의 길이 무엇이냐, 동기부여를 어디서부터 얻어내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에 부닥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문제에 봉착합니다.

착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해보아도 착해야만 되겠는데, 그렇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도덕성 뒤에 종교가 있습니다. 바른 종교가 아니고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습니다. 바른 종교가 아니고는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종을 보고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했습니다. '충성'으로 쓰인 헬라어 '피스티스'를 성경에서 보면 믿음, 진실, 충성의 세 가지 뜻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인 문제는 믿음입니다. 건강한 인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실 때에 복을 주십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건강한 인격은 믿습니다. 나를 믿고 사람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런 인격이 건강한 인격입니다. 병든 인격은 남을 의심하고 아무 것도 안 믿습니다.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 곧 정신병자입니다. 땅 위에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믿어야 합니다. 필경은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길을 갑니다. 신호등이 바뀝니다. 청신호가 켜지면 가는 것이라 믿고 건너갑니다. 적신호에도 막 지나간다, 청신호에도 옆에서 마구 쳐들어온다고 의심을 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 신호등을 따라줄 것이라고 믿음으로 청신호가 켜지면 안심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는 결국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살아남을 길이 없어집니다. 아무리 믿고 싶지 않아도 도리가 없습니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정도만큼 건강한 것입니다.

제가 6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에는 중학생들까지도 수표를 썼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미국에 가보면 주유소 같은 곳에 수표 안 받는다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크레디트 카드도 믿을 수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현금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지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진실입니다. 진실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기초가 되고 모든 인격의 기초가 되며 모든 생산의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2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주실 것이요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은, 이 진실만은 내가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모든 은사의 그릇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충성은 내가 내놓아야 할, 내가 가진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말씀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 : 13)." 충성은 있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것도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함이요, 유대교에 충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 악착같이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다녔는데, 딴에는 그것이 충성이요 진실이었습니다. 그토록 철저한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녀석을 싹 돌려놓으면 쓸만하겠구나'하셔서인지 결국은 그 사울을 바울로 만드셨습니다. 무엄한 상상이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물에 물탄 듯 희미하고 미적지근한 사람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충성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핍박해도 '진짜'로 핍박하는 자는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안보면서 핍박하는 사람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든지 충성되게 임해야 합니다.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바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성만큼은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는 주님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믿음일 뿐 아니라 행동적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묻지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니 있는 것입니다. 이를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섯 달란트 주셨으면 그 다섯 달란트를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을 뿐만이 아니라 내게 맡겨주시는 사명에 대하여 믿어야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겨주셨으니 다섯 달란트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는 것이요, 두 달란트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기에 두 달란트 맡겨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적다고도 말 것이요 많다고도 말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맡아 가지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옛날, 독일인들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야단일 때에 이스라엘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던 한 유대인이 자기는 거기 끌려오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민족운동 같은 것도 한 일이 없고 평소에 이렇다할 아무런 구실도 한 것이 없는데 왜 끌려오나 싶어서 억울했던지 "나는 독일에 반대한 적도 없는데,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왜 죽이려 하느냐"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나란히 걷던 청년이 면박을 줍니다. "당신은 나라를 위하여 한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죽어 마땅하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분명히 죄입니다. 한 달란트를 무위(無爲)로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악입니다. 모름지기 생산적이어야 하고 충성되어야 하고, 모험적으로라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주인들 믿었습니다. 주인이 내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맡겨주신 것이 많건 적건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렇지 못했는데다 핑계까지 댑니다.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하기까지 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하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어놓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의 핑계에 대한 주인의 대응에 주의할 것입니다(2630). 하나님께서 한 달란트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도 이 사람은 받은 바 그 능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입니다. 이 사람은 일을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충성'을 양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고 적고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데에, 곧 질적인 것에 요점이 있는데 이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또하나, 이 사람은 주인과 자기와의 관계를 율법적 관계로 이해하였습니다. 주인인 은혜로 달란트도 주고 기회도 주고 복도 주는데, 이 사람은 이를 율법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두려워하여"라고 말합니다. 내가 섣불리 일을 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주인이 책망할 것 아니냐, 장사하다가 행여라도 손해를 보면 어떡하나 -이렇게 율법적으로 이해하여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고, 그래서 '안전제일주의'로 땅에다 파묻어 두었던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것도 은혜요 기회를 얻은 것도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혹 실수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해주실 것이다,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늘 가상해봅니다. 만일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다가 한 달란트를 홀랑 날려버리고 주님 앞에 나아와 "주인이여, 다른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주시고 두 달란트 주시면서 저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신 것을 보면 주인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시시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과연 잘 보셨습니다. 제가 원래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없는 능력으로 한 달란트 가지고 노력을 해보았습니다마는 아니나다를까 그만 홀랑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빈손으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말했다면 어찌되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주인은 틀림없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새로 한 달란트를 더 주시면서 꼭 이렇게 말씀하실 것만 같습니다. "Try again!"-"다시 해보아라." 이렇게 기회를 주실 것만 같습니다.

요컨대 충성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한계를 스스로 부정했습니다. '나는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못한다고 믿음으로 결국은 못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애굽 사명을 주실 때에 모세는 발을 뺍니다. "내가 물 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말도 잘하지 못하는걸요." 이러한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무어라 하십니까?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내가 가라고 하면 갈 것이지 무슨 딴소리냐, 협력자가 필요하면 협력자를 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는 오직 충성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순종이요 충성인 것입니다. 결과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닙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끝에 가서 어떻게 될 거이냐 하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가서 공부를 하는데, 벌써 여러 해 동안이나 한국에서 돈을 갖다 쓰면서 애를 쓰는데도 공부가 어렵고 힘들다면서 저를 보고 "목사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공부해보아야 끝내 시원치 않을 것 같습니다"하고 단념할 듯이 말하기에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닐세. 끝이 시원코 시원치 않고가 문제가 아닐세. 시작은 했으니 끝을 내야지. 공부를 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이냐 -그것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지 지금에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자넨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시작한 것이니 끝을 내게." 모름지기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여 충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준다고 하셨습니다. 충성이 있는 자에게 더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주어진 기회를 잘 포착해서 그 기회에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일을 더 맡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준다는 말씀은 곧 맡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돈을 거저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로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는 열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라, 열 달란트로 충성을 다했으니 이 스무 달란트로 일해라…… 이렇게 맡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므로 큰 일을 맡기시겠다 하심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치 못하면 그 작은 일마저 빼앗아버리십니다.

사람의 몸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쓰는 부분은 쓰는 만큼 강해집니다. 안 쓰는 부분은 날로 약해집니다. 걷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쓰지 않고 있으면 조금만 삐끗해도 부러집니다. 어느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에 의사가 자기를 진찰해보더니 "하루 세 시간을 걸어야 건강을 유지하시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 때는 이를 건성으로 듣고 그 뒤로도 줄곧 차만 타고 다녔더니 1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보니 덜컥 관절염에 걸려버려 꼼짝을 못하겠다면서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만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읽고 쓰고 생각하고 듣고 말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해야 제대로 발달하는 것입니다.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멍청해질 것은 당연합니다. 눈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귀도 그렇습니다. 쓰지 않으면 둔해지고 어두워집니다.

자꾸 일을 해야 힘이 납니다. 일한 만큼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의 은사를 버리는 것이요, 악함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악하면 하나님께서 은사를 도로 거두어 가십니다. 게으르고 악한 자에게는 은사가 무용인데도 그대로 두어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충성이 있고 진실이 있고 열심이 있고 행동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신 것 위에다 자꾸 더 보태어주십니다. 더 가져라 하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십니다. 충성 있는 자에게는 더 줄 것이요, 충성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리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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