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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심하라(사도행전 27:13~26)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리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을 포함하여 276명이 탄 이 배는 미항을 떠나서 뵈닉스 항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거리는 한 40마일 된다고 합니다.
저들은 아주 위험한 이 행로를 무사히 통과하리라는 요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전하지만 불편한 미항을 떠나서 모험을 해서라도 뵈닉스에 가 향락을 누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상식과 지식의 세계를 떠나서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위험한 여행이 지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배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첫째, 배를 관리하는 사람, 즉 선장과 선원들입니다. 이들은 기술의 사람들입니다. 기능의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기술과 경험을 믿고 모험을 하겠다고 드는 것입니다. 둘째, 죄수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탄 군인들과 이들을 대표하고 있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 이 사람은 이 배에서 최고의 권세를 가졌을 것입니다. 군인이니까, 로마군인이기 때문에 백부장이 최종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배에는 지금 사람만 탄 게 아니고 많은 물자를 실었습니다. 이 물자가 지금 로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물건의 주인들이 여기에 탔습니다. 그런고로 셋째는 선주와 물주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돈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물건들을 가지고 지금 장사하러 가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고 권리도 없는 죄수들입니다. 자, 이렇게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한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이 가운데 제일 초라하고 무능하고 형편없는 존재가 죄수들입니다. 이들은 살아도 그만, 가다가 죽거나 누가 죽여도 그만인 사람들입니다. 아주 천대받고 있는 사람들이예요. 이제 뒤에 나옵니다마는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이들을 아예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도망가게 놓아두기보다는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이렇게 생명까지도 아주 경시 당하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태우고 이 배는 지금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지난 시간의 내용과 다시 한번 연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항을 떠나서 뵈닉스로 가려고 할 때, 결국은 최종결정을 백부장이 내립니다. 그는 선장과 선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말을 더 믿습니다. 이 다수라고 하는 수(數)를 믿어요. 많은 사람이 옳다 하니까 옳은 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 혼자서 '아니다' 해봐야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장과 선주의 다수의 말을 믿고, 백부장이 '떠나자' 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죄수 바울의 말은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까짓' 한 사람의 말, 더구나 죄수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들 생각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바로 여기서 실수합니다. 바울이 형식적으로는 죄수지만 그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이것은 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민주주의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말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인 이 한 사람의 말은 여타 많은 사람들의 쓸데없는 말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말은 완전히 무시되고 사람의 소리, 돈 많은 사람의 소리, 그리고 기술을 가진 사람의 말이 여기서 통하고 맙니다.
이래서 일단 배는 떠납니다. 한번 떠나면 떠난 것입니다. 어쨌든 미항은 떠났습니다. 한참동안은 순조롭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에 보니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13절)" 합니다. 자기네의 뜻이 이루어진 줄 알고 좋아했다 합니다. 그도 그럴거예요. '이제 됐다. 모쪼록 40마일만 무사히 가자. 뵈닉스에는 유흥가도 많고 환락가도 많으니 그곳에서 한겨울 동안 좀 기분 좋게 지내고, 그리고 로마로 가자'----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득의한 줄 알고, 성공한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14절)"--얼마 못되어 광풍이 밀려옵니다. '유라굴로'라는 이 광풍은 동북풍으로서 계절풍입니다. 그래서 유라굴로(이 말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와 북동쪽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의 합성어)입니다. 그 때쯤 되면 으레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지 말자고 했던 것인데 예외없이 이 계절풍이 닥쳐옵니다. 지금도 우리가 무서워하는 태풍 같은 것이 이 때에 밀려왔다는 말이예요. 그리고 여기에 또하나 설명하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17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르디스란 큰 모래톱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바다 밑은 꼭 고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 밑에도 모래가 있지 않아요? 그 모래바닥이 높은 데가 있고 낮은 데가 있습니다. 이게 바다 물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태풍이 일게 되면 모래 산이 생겼다 없어졌다 합니다. 그래 어제까지는 바닥이 깊었는데 오늘은 산이 생겨 가지고 높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 한번 잘못 만나서 딱 부딪히면 그 배는 끝나는 거예요. 이것을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태풍으로 인해서 생긴 바다 밑의 모래 산, 여기에 걸릴까봐 두려워했다는 얘기입니다.
자, 저들이 여기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단계를 오늘의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해볼 수가 있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보면 첫째는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15절)"----바람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맞추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바람이 워낙 세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배는 범선입니다. 범선은 방향을 정해 가지고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바람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람이 워낙 세니까 맞출 수가 없어요. 돛을 내릴 수밖에요. 이대로 그냥 가다가는 배가 부서지게 됐으니까 돛을 낮추고 그저 바람에 밀려가는 대로 갈 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려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거예요. 어디로 간다고 할 수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하릴없이 떠 밀려가는 수밖에요. 참으로 위험한 시간입니다. 둘째는 "그냥 쫓겨가더니(17절)" 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도통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비바람이 치고 눈앞이 뽀얗게 되니까 여기가 동인지 서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대로 그냥 쫓겨간다---이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가서 부딪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대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 다음은 "연장을 내리고(17절)"------심히 애쓰고 노력하다가 마지막에는 연장을 버려요. 연장을 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세요. 여기에 노도 있고, 돛대도 있고, 키도 있고…… 배에 필요한 온갖 연장이 있습니다. 좌우간 키를 움직여야 방향을 조절하고 돛을 달아야 바람에 맞추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버리다니---아예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키도 필요 없고, 돛대도 필요 없고, 삿대도 필요 없어요.
연장을 다 버렸어요. 능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능력의 한계에 온 것입니다. 속수무책이에요. 넷째는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18절)"----자,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버릴 수밖에요. 이제는 생명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짐을 다 바다에 버립니다. 얼마나 아까웠겠습니까? 저들은 이런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19절)"-----배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구까지 다 버렸어요. 그 다음에는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절)"합니다. 이젠 소망이 없어요. 이젠 죽었구나합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또 하나, 여기에 보니 이미 저들은사나흘을 굶었어요. 먹지 못했어요. 먼저는 워낙 배가 요동하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요.
며칠 전에 제가 진해 해군본부를 방문했었습니다. 해군교육단교회에서 새로 예배당을 짓는데 그 기공 예배에 간 것이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좋은 군함에서 점심을 먹으며 함장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한번 작전을 나가면3개월도 되고 6개월도 된다고 해요. 그러니 몇 개월만에 한번 육지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한번 바다에 나가게 되면 때때로 거센 풍랑도 만나고 하는데,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렇게 몇 달 나갔다가 들어오면 모두가 비쩍 마른다고 해요. 뚱뚱한 사람도 한번 나갔다가 들어오면 홀쭉한 몰골이 되어 있다고 해요. 늘 배를 타는 사람들인데도 한번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그냥 휘둘릴 때에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대요. 소화가 안돼서 고생을 한다고 해요. 그리고 잠을 잘 수가 없대요. 하도 흔들리니까요. 그래서 잠자는 요령이 생겼는데, 침대에 자기 몸을 비끄럽맨답니다. 몸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니까 허리띠로 비끄러매야 잘 수 있다고 해요. 이러니 그 고생이 오죽하겠어요? 이렇게 몇 달을 지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며 "배타는 일이 어려운 일입니다"하고 말합디다.
저는 배가 참 좋아 보이기에 "이것 타면 참 재미있겠네요"했더니 "그것도 잠깐이지 재미가 다 뭡니까? 참으로 힘듭니다"하고 대답해요.
자, 이제 모든 여망이 끊어지는 지경이 되니 저들은 먹을 수가 없어요. 배 멀미하니 먹을 수 없고, 우선 마음이 죽었으니 먹을 수 없어요.
당장에 꽝하고 부딪힐 것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모두가 다 굶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모두가 다 절망합니다. 여망이 없어요.
바로 그런 순간에 사도 바울이 일어섭니다. 죄수 사도 바울,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다 싶던 사람이 저들 가운데 딱 일어서서 권세 있게 말씀합니다. 군인, 선장, 선주, 이 시간에는 아무 존재도 아닙니다. 큰소리치던 백부장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당당하게 '갑시다'하고 떠들던 선장과 선주도 이제 할말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제 권세 있게 서서 저들 앞에 말씀합니다. 담대하게 외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기에 교회의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잘되고, 성공하고, 시쳇말로 번영과, 평등과, 자유…… 그것이 있고난 다음에는 방종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는 타락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환난을 당할 때, 이 때에는 신앙인이 권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북한에서 이런 체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광산에 끌려갔는데 몇 달 동안 고생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2천 명이나 있던 그 큰 광산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어요. 탈출을 했으니 동네에 들어갈 수 있나요? 그래, 깊은 산에 들어가 숨어 있으면서 남의 고구마도 캐어 먹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 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같이 도망쳐서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꽤 많아요. 어찌어찌하다보니 22명이 됐어요. 한 부대가 됐지요. 하지만 이 가운데누구도 스스로 대장 되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도 생명에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 아침에 눈을 뜨면 '자, 오늘은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합니다.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안되니까요. 또 누가 어디로 가자고도 안 해요. 각각 마음대로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입니다.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유를 찾아서 혼자서 가겠다는 사람도 없었어요.
누구 하나가 이리 가겠다고 하면 우 따라가고 했지요. 그런데 일이 참 난처해졌습니다. 모두가 나만 따라다니겠다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좀 보호하실 거야'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는 내가 가만히 있다가 혼자서 어디로 가려고 하면 모두들 우 따라와요. 사람이 22명이다 보니 이게 보통 힘든 게 아니예요. 뭐 이름도 모릅니다만 좌우간 함께 다닌다는 것이 여간 거추장스러운 게 아닙디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숨으려 해도 참 어려웠어요. 보아하니 아무도 이리 가야 살지 저리 가야 살지 모릅니다. 그야말로'Nobody knows.'------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는 자꾸 '누가 그래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인가?'하고 생각하는가봐요.
자,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절망할 때, 그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권세가 쥐어집니다. 바울이 우뚝 섭니다.
그는 죄수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그는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아주 확실하게 얘기합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내용의 첫째는 바로 잘못된 것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이게 중요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안 듣고 미항을 떠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나간 일을 묵살하려고 합니다. '그것 다 지나간 건데 뭘……' 이건 안됩니다. 그러면 똑같은 실수가 반복됩니다. 이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떠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 내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당하게 됐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 시점에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게 첫째입니다.
인정하라 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내 말을 들으라. 이제는 안심하라' 하고 말씀합니다. '풍랑 속에서 현명한 사람은 그 위기에서 안전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세요. 위기를 모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게 아니예요.
문제는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두려움에서부터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심하라, 기운을 차리라, 함입니다. 다음 시간에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그런고로 음식을 먹어라'라고도 말씀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안심하라(22절)"-----이 말씀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안심한다'라는 말은 '유뒤메인'이라는 헬라말로 되어 있는데 신약에 세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27장22,25절과 야고보서 5장 13절에 있습니다. 이것은 '즐거워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좋은 기분을 가지라, 하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안심하라'라는 말은 좋은 마음, 기쁜 마음을 가지라, 내가 복음을 전할 테니 기쁜 마음을 가지라, 마음을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기 때문에 안심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선지자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떠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 들려오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죄에 깊이 들어가서 멀리 가버리면 주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말씀을 못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심하라"--오늘의 본문에 주신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니, 말씀이 들렸으니, 계시가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음이요 또 함께 하심이 아니냐, 그러니 안심하라, 하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기 때문에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미 우리가 본 말씀입니다 마는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체포되던 바로 그날 밤에 하신 말씀입니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까지 무사히 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여기에 계십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무사히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런고로 무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간다면 다른 사람도 무사하겠지요. "안심하라"----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실 때에 야곱이 처해 있는 라반의 가정에 복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주실 때에 보디발의 집에까지 복을 주셨어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일 때에 그 가정 전체가 복을 받는 거예요.
득을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믿는 사람 때문에 전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바울이 이 배에 있는 한 이 배는 무사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가야 하니까 이 배는 무사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말씀에는 더 귀한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다 내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4절)"-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바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잊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 주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생명들을 다 바울에게 주셨다-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이것은 약속입니다.
바울이 꼭 살아야 한다는 것은 바울이 꼭 로마까지 가야 하니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또 여기에 탄 사람들이 다 무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증인이 되니까요.
여기서 되어진 모든 일들은 큰 사건이요, 굉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로마에 가서 전부 증인이 될 사람들이라는 말이예요.
그런고로 무사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다치면 안돼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니까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과, 경륜과, 증인됨과, 능력……이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 모든 생명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이 바울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25절)"-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런고로 안심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어느 탄광에서 갱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광부들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패로 나누어져 이쪽에도 갇혔고 저쪽에도 갇혔어요. 그 사이는 막혔습니다. 그들을 구출하는 데에 며칠이 걸렸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시간에 그들을 다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한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고, 다른 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죽어 있어요. 똑같은 여건인데 왜 그랬을까 하고 살펴보니, 한쪽은 전화선이 없었어요. 그런고로 자기네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몰랐어요. 그대로 스스로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는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파 들어간다, 걱정하지 말라, 조금만 참아라, 하고 전화로 계속 연락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고생했는데도 그래서 안 죽었어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해서, 연결이 돼서, 계속 연락을 합니다. 연락이 있으니까 소망이 있고, 소망이 있으니까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대로 될 줄 믿는다-이 얼마나 확실한 약속입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대로 되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생명만 건질 것이요, 너희들이 애지중지하던 이 물자, 이 배는 다 파손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유대사람 아버지와 아들, 단 둘이서 사막을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입니다. 그런데 그만 길을 잃어버렸는지 마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마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가지고 갔던 물도 다 떨어져서 목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아들은 미처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난 지쳐서 못 가겠습니다. 이젠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가보자." 그렇게 아무리 가봐도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저쪽에 무엇이 있는 것 같아서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무덤이 하나 있어요. 그게 마을의 집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아들은 또 실망을 합니다. "아버지, 무덤밖에 없지 않아요? 마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낙심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무덤이 있으면 마을이 있단다."정말 조금 더 걸어가니까 과연 마을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해요. 이렇게 징조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무엇이 나타나고 있는지 지금은 안보이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저 앞에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두가 실망하고 모두에게 소망이 없어졌어요. 바로 그 시간에 일개 죄수 바울이 우뚝 서서 큰소리로 말씀합니다. "안심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게 하신 말씀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믿으시오." 여기에 뜻이 있어요. 내게 말씀 하신 대로 되어지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소, 당신들은 내 말을 믿으세요, 그러면 살 것이오-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하나가 가정에 있고, 나 하나가 직장에 있을 때에 믿는 사람인 나 하나로 인하여 내가 속해 있는 그곳의 모두가 복을 받고,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때문에 전체가 무사합니다. 본문에서 본바,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생명은 바울 하나 때문에, 바울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때문에 다들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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