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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전쟁에 나가는 왕(누가복음 14 : 31 - 3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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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나가는 왕(누가복음 14 : 31 - 33)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 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특권을누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값을 지불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앞장의 망대 비유와 그 주제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앞장에서밝혔듯이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음에도 그들 모두가 좋은 동기에서 따른다고 보지도 않았거니와 제자로 보지도 않았으며 그리고 끝까지따를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2:23-24 말씀에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지금은 좋다며 이렇게 따르다가 조금만 있으면 또 모른다고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지 않는 자도" 그리고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이 정도가 되어야 예수의 제자됨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결과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리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그 자체가 갖는 값어치는 어떤 것인가를 먼저 평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제자가 됨으로서 얻어지는 능력과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와 함께 능력의 사람, 기적의 사람이 되고 예수와 함께 낙원에 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생각함으로 이것이 너무 크고 놀라와 현재에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또한 얼마나 값비싼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영광된 것인가를 잘 모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를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 한시간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온 세계를 놓고 볼 때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한 자리에 모여 이렇게 가득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내가 일원이 되었다는 그 제자 됨에 대한 존재 가치의 엄청남을 항상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고귀한 가치는 그를 위해서는 지불하는 모든 댓가에 대해 조금도 아쉬움이 없는 충족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먼저 제자 됨의 뜻을 안 후에 그 길로 가는 방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무지한 용기는 용기가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한 귀중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따라가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분명하게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값을 지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망대를 짓는 일과 전쟁을 하는 두 상황의 문제를 두고 비교를 해 볼 때 망대를 짓는 비유는 망대를 쌓는다는 입장에서 건설적인것인데 비해 전쟁은 파괴적인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가 먼 훗날에는 건설적인 것이 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전쟁 자체는 분명 파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두 사건을 놓고 건설하는 일에도 값을 지불해야 되며 전쟁이라고 하는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쟁에 대한 이 비유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 됩니다. 만약 망대를 쌓다가 도중에서 그만 두었다면 "저 사람 정신없이 시작했다가 그만 두었군"하는 비난을 받으며 투자한 만큼의 물질적인 손해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실패하면 죽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생사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 나가는 본 비유는 망대를 쌓는 비유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종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망대를 쌓는 비유에 있어서는 지불해야 될 대가가 돈이지만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불해야 될 대가가 생명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나게 비싼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그 주제가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는 하나의 군인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죽느냐?사느냐의 양자 택일의 문제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살아 남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여 공히군복무를 하며 실전에 참여합니다. 한번은 텔레비젼 화면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여군에게 한국기자가 "훈련이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묻고는 힘들다는 그에게 "그런데 왜 이것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더니 간단하게 대답하는 말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군복을 입고 완전무장을 한 채 뛰며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왜 이 전쟁을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이 대답 역시 간단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한마디입니다. 그는 거창하게 추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며, 따라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의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적을 점령하기 위해서 싸운다기 보다는 우선 자기 방어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기에는 보다 높은 의미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전쟁에 나가서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반드시 살기만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가 군인으로 일선에 있을 때에 보면 첩보대가 한번 나갈 때에 보통 12명 정도의 인원으로 밤에 몰래 나가게 되는데 이 삼일 후에 돌아올 때에는 평균 8명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은 죽든지 실종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누구에게 그런 일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어느 전쟁, 그 누구에게도 승산만 있는 전쟁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다"고 하는 그런 전쟁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저 마지막에 가서 이기는 자가 이긴 것뿐 사실은 양쪽 다 피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미국과 소련,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결을 하고 있음에도 함부로 싸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쪽이든 저 쪽이든 꽝하고 터지는 날에는 다 죽을 판이니 누군가 살아남을 지는 모르나 피해가 너무 클 것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승산만 있는 전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죽는다는 가능성이 반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그와 같은 전쟁에 나가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죽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전쟁철학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가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육일 전쟁시에 있었던 이스라엘 청년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화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아랍권의 청년들은 유학하고 있는 외국으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마는 이스라엘 청년들은 단 한번도 그 누구에게고 돌아오라는 연락을 들은 바가 없었음에도 자기 민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나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한 청년을 붙들고 "무엇 하러 돌아가느냐? 이길 자신이 있느냐? 지금 3억대 5백만의 한심한 전쟁인데 어차피 질 전쟁이 아닌가? 거기에 죽으러 가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의 대답이 "내가 살아 남으면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 아이가 커서 나에게 묻기를 '우리 나라가 큰 위기 속에 육일 전쟁을 치룰 그 때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때에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소? 나는 요행히 미국에 있으면서 편안하게 지냈다고 말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에 전쟁의 철학이 있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에, 그렇게 비굴하고 더럽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때에 싸우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적을 헤아려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없거든 미리 화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쉽게 타협을 하라는 것이거나 그저 죽음을 면하라는 그런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전쟁에 나갈 때에는 그 만한 각오를 하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만약 싸우러 나간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그리고 죽는다면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을만한 가치가있는가를 물어 상당한 결심을 하고 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백전 백패요, 나는 알고 적을 모르면, 즉 어느 한 편을 모르면 일승 일패며, 적도 알고 나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나도 알고 적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편을 다 알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워야할 이유가 있거든 싸울 것이되, 이길 수 있거든 싸우고, 이기지 못하고 죽더라도 죽음의 확실한 의미가 있거든 나가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쟁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상당한 모험성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쟁에는 무엇보다도 정보가 먼저라고 합니다. 작전을 위해서는 정보와 지혜와 전략을 다 쏟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을 해볼 것입니다. 그러나 진작 싸움터에 나가보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 입니다마는 머리 좋기로 유명한 제갈 공명이 화전(火戰)을 하기 위해 배에 나무를 가득 싣고는 나무에 불을 질러 강 저편에 있는 적군을 향해 띄우게됩니다. 그렇게 하여 적군의 진지에 불을 붙이게 되면 손 하나 대지 않고 전쟁에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가는 도중에 비가 옴으로 그 전쟁은 완전히 패하고 맙니다. 그러자 지략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제갈 공명이 어찌하여 전략을 잘 못 세워 이렇게 되었느냐며 비난을 받게되는데 이때에 제갈 공명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사람의 일을 다하고 나서는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다 동원하여 헤아리고 살펴보며, 또 다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참모회의를 거듭하며, 심지어는 첩보를 하고 실험도 해봅니다마는 그래도 나머지는 상당한 모험이 있고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진대 헤아리지도 않고 싸움에 뛰어든다면 그것처럼 바보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속에서 매우 전략적인 표현으로 여기 있는 일만으로 저쪽 이만을 대적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를 헤아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 양진영의 숫자를 보면 비등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쪽은 만명인데 저쪽은 이만명입니다. 숫자로는 저쪽이 갑절이나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적은 수로서 어떻게 저 많은 적을 이길 것입니까? 하지만 전쟁은 숫자로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기에 지혜를 모아 몇 가지 생각을 해야할 것입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무기가 좋으면 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이 북한과의 대결에서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숫자적으로는 북한의 장병이 우리 보다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가진 무기들이 우수하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저들의 무기는 그 동안 땅 속에 묻어놓았기 때문에 녹이 슬어서 못쓴다는 생각까지도 하며 우리의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수는 적더라도 성능이 좋은 새로운 무기를 가졌다면 승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로도 아니라면 또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기술이 좋아야 합니다. 얼마전 공군 조종사로 귀순한 이웅평씨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는 기름이 모자라서 이론으로만 비행훈련을 할 뿐 진짜 비행기는 몇 번 못 타본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한에 와서 보니 북한에서와는 달리 밤낮으로 날으는 연습을 하여 아주 익숙하게 비행을 하는 기술적인 비행사들이 많은데 자기는 일등 비행사이지만 북한의 비행사는 그렇게 비행을 잘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 무기를 조종하는 사람, 곧 기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전략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를 기점으로 적을 공격하고 기습할 것인가 하는 등의 전략상의 우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기가 있어야 합니다. 군인에게 있어서는 군인의 정신이 빠져나가면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도망가고 싶은 군인이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다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러므로 군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결심과 헌신이 있는 정의의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이쪽은 일만이고 저쪽은 이만이라 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미리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양적인 우세보다는 질적인 우세를 가져야한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세력, 불의의 세력은 이만에 선한 세력은 일만이지만 질적인 우세가 있을 때에 능히 이 일만이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32)고 하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그저 열두 사람의제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중에 하나는 가롯 유다이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별 신통한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이렇게 따라다니고는 있지만 저희들 스스로도 참으로 답답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말씀까지를 하시니 불안하고 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비록 수는 적지만 여기에 의가 있고 진리가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양적인 우세가 아닌 질적인 우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은결코 물량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이요 신앙적인 것이며,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내적이요 질적인 것입니다. 분명 마귀의 수가 더 많고 죄악의 세계가 더 크고 강하게 보이지만 문제는 질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하고 때로는 그 세력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느낄 때가 있지만 이길 수 있는 길은 결코 수의 우세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강력한 힘에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일만으로 저 이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만에게는 능히 이만을 이길 수 있는 질적인 우세함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적인 열세는 있으나 질적인 강함이 있고, 돈은 없으나 믿음이 있으며, 환경은 나쁘지만 강한 정신력이 있고 그리고 진실한 충성심이 있을 때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면 그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싸우는 대상과 공격의 방향이 정확하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방향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권투 시합하는 것을 시청하노라면 막상 시합을 하는 선수들을 보는 것 보다 옆에서 해설을 하는 해설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욱 흥미로울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친다는 것이 헛쳐지는 바람에 홱하고 돌아가면 해설자가 말하기를 저렇게 힘껏 쳤을 때에는 상대방이 맞아 주어야지 맞지 않고 돌아 가버리게 되면 오히려 때린 것보다는 훨씬 더 힘이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때릴 때에는 상대방이 맞아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헛치기만 하면 공연히 내 힘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분명히 보고 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직접 하는 말에 의하면 15라운드 경기 중 종반전인 10라운드를 넘어서게 되면 어떤 경우에는 지친 나머지 상대방도 제대로 못 보는 상태에서 그저 연습하던 운동신경만 가지고 팔을 내밀면서 어떻게 하면 케이 오(K.O.)패를 면할 수 있나하는 생각으로 종치는 소리만 기다려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분명히 보고 치십시다. 그리고 그가 누구냐! 어느 정도의 힘과 기술이 있느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특별히 한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잔인한 자인가 하는 잔인성의 파악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사람들은 불과 5백만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3억을 상대로 하여 싸웠으나 이겼으며 지금도 다수의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잘 견디고 강하게 싸워 이깁니다. 그렇다면 이 강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은 그 이유를 "우리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얼마나 비참해지는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도 자주 보듯이 독일의 나치 하에서 당한 잔혹함! 6백만이라는 대학살! 현재의 이스라엘 인구가 5백만에 불과한데 남녀노소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대항하지도 않는 6백만의 생명을 가스실에 넣어 불태워 버린 그 끔찍한 이야기가 바로 엊그제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전쟁에 진다는 것!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이렇게 되는 것이니 그럴 바에는 전쟁에 나가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강할 수밖에 없으며 패전 같은 것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패전은 생각하지 않는 여기에 강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겨도 되고 저도 되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는 한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면 먹히는 것이요, 그 길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한번 양보를 해 보십시오. 그대로 계속 물고 치며 들어오다가 마지막에는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결국은 그대로 지옥으로 쳐 넣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패전이 얼마나 참혹한 것이며 적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알았다면 어떠한 지경에서도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며 그 때문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서 결코 한치의 양보나 후퇴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1:18)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6 : 13)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을 굳게 하며 저를 대적하라"(벧전 5 : 8-9)고 합니다. 이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는 것이며 당연히 그러해야될 줄로 압니다.

어느 날 전쟁터에 있던 알렉산더 대왕이 목이 말라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군 진지 가까이에는 물이 없고 적의 진지 가까이에 가야만 물이 있습니다. 아무튼 대왕이 목마르다는 말을 들은 한 신하가 "조금만 기다리십시오"하고서는 저녁 어두움을 틈타 적군 진지에 있는 우물에서 생명을 걸고 고생을 하면서 물 한 그릇을 떠다가 대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이여 이 물을 드시고 힘을 내시어 우리 장병들을 잘 지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이 물은 물이 아니라 한 신하의 피다! 내가 어떻게 이 피를 마시겠느냐? 나만 아니라 우리 장병 모두가 다 같이 목이 마른데 나는 이것을 마실 수 없노라!"고하면서 목말라하는 전 장병을 향해 ", 이제 진군이다!"하고 외치며 사기 충천하여 나가 싸운 결과 승리하여 마음대로 물을 마실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된 충성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패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도 패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한 사람의 열성과 충성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2:10 말씀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전쟁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비상한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음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 올 때에 비로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17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전쟁에서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이 전쟁에 나가 싸우노라면 또한 그 승리의 영광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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