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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 없는 죄인(사도행전 25:22~27)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이제 바울을 재판하기 위해서 재판정이 열립니다. 그리고 여기에 베스도가 바울에 대해서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은 베스도가 바울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분명히 알고 그 입장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법정을 간단하게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몇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저마다 성격이 다릅니다. 하나는 유대사람들입니다.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유대사람들, 이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차 있고 바울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끓는 듯한, 불붙는 증오심으로 뭉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죄목을 만들어서라도 베스도 총독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죽이려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여러 번 살펴보았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꼭 없애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한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울이 살아 있는 한에는 자기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가야바와 예수님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를 살려야 가야바도 삽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는 예수가 살아 있으면 자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거든요. 예수가 없어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런데 예수를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각, 참 잘못된 것입니다. 진실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살리고 예수를 영화롭게 해야 자기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멸망의 자식들은 꼭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가 없어야 내가 살고 예수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양자택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그런고로 나 살기 위해서 저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남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이런 생각은 유물사관의 이론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저가 의인이냐 죄인이냐 알 바가 아니다, 그런 것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문제는 내가 살기 위해 저를 죽여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베스도 입니다. 이 사람은 로마총독입니다. 큰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마지막 결정은 베스도 총독이 해야 합니다. 또 모든 책임은 베스도 총독이 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치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죄목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이제 가이사 황제에게 이 죄수를 보내야 되겠는데, 보내려면 문서로그 죄목을 기록해서 보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신에게 보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쓸만한 죄목이 없어요. 그래서 베스도는 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타나 있습니다마는 베스도의 마음은 착잡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아그립바 왕입니다. 유대나라 왕입니다. 젊은 사람입니다. 어디까지나 허깨비라고 하지만 로마정부가 인정하는 유대나라 왕입니다. 이 사람은 호기심에 바울을 만나려고 합니다. 사실은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베스도 각하'에게 인사하러 왔던 것입니다. 왔던 길에 그는 바울이라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전한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알고 싶어합니다.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에 대하여 들은 소리는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는 호기심에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버니게입니다. 이 버니게라고 하는 여인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본래는 아그립바 왕과 남매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왕후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왕후의 행세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위세를 떨치고 싶은 것입니다. 남들은 어떠냐, 남들이 무슨 욕을 하느냐, 자기 위치가 어떠냐……상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기가 왕후처럼, 왕후로서 이 자리에 나서서 한번 과시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는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구경꾼들입니다.
베스도 총독도 새로 부임해온 사람입니다. 더구나 아그립바 왕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총독도 구경하고, 왕도 구경하고, 시비거리와 문제가 많은 요사스러운 여자, 즉 왕비 아닌 왕비도 구경하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들이 지금 방청석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습니다. 생각하면 바울은 지금 어처구니없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회 있는대로 다시 복음을 전하고 합니다. '베스도 각하'에게도 전하고, 아그립바 왕에게도 전하고, 버니게에게도 전하고…… 누구에게든지 좋아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 우리는 이렇게 여섯 부류의 사람을 오늘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 이런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23절)"-위의(威儀) 곧 격식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보좌와 같은 자리에, 혹은 자기로서 왕위에 합당한 격식을 갖추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대로는 이렇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지금 4색 예복에 왕으로서 머리에 쓰는 금관을 썼습니다. 바로 위의를 갖춘 것입니다. 또 여기에 질세라 베스도 총독은 통치자로서의 로마사람들의 상징인 주홍색 예복을 입고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위세를 자랑합니다. 여기에 왕후격으로 나타난 버니게는 여러분, 짐작할만하지 않습니까? 아마 조세핀처럼 차렸을 것입니다. 화려하게 왕후의 차림을 하고, 긴 옷을 입고 이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위풍을 뽐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자, 생각하면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앞에서 온유, 겸손하게 바울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모습을 역사가들은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초라했다. 죄수의 옷을 입었고 손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는 작은 키요, 대머리요, 눈썹은 짙었고, 코는 구부러졌으며, 다리는 휘어 있었다. 아주 지극히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은혜에 충만한, 신령한 영적 권세가 있었다'-다시 뒤에서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이나 다 영적으로 바울의 신령한 권세 앞에 눌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비록 외모는 초라하고, 저쪽은 왕이요 이쪽은 죄수의 자리에 앉아 있을망정 영적으로 높은 권세를 행사하는, 신령한 은혜에 충만한 모습으로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 법정에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없는 자를 죄인 만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법정이란 죄인을 죄인으로, 의인을 의인으로 가려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 법정은 때때로 이처럼'빌라도 법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요.
또 명백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요. 정치적 이유로, 사리사욕으로, 혹은 뇌물에 의해서 법정이 의의 위치를 잃어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슬프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정권이야 바뀔 수도 있고 세대도 바뀔 수 있지만 때때로 그 때문에 우리네 온 민족이, 정신이 한 번씩 흔들리고 질서가 곤두박질칩니다. 이것을 참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종신형이다, 15년형이다, 20년형이다, 10년형이다 해 가지고 수천 명을 죄인으로 가두어놓았다가 정권이 바뀔 때에 무죄석방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질서가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은 되레 영웅이 됩니다. "봐라, 내가 이렇지 않느냐"-이래서 이 사회가 흔들리는 거예요. 자, 우리 객관적으로 봅시다. 보세요. 어느 때에는 죽을 죄인처럼 가둬 놓았다가 어느 때에는 무죄라고 석방을 하고, 훈장을 달아줍니다.
이런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죄인이라고 재판을 해도 감옥에 있으면서 '정권만 뒤집혀라. 내가 영웅 된다'-이러잖아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든 말든, 어떻게 곤두박질을 하든, 역사가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의는 의입니다. 진리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사법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사법권이 어느 정치가의 손에 마음대로 좌우되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국민의 의식도 젊은이들 마음에 있는 법의식도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놓으니 오늘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재판을 해서 단죄를 한다 해도 죄인은 도리어 '내가 왜 죄인이냐'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쳐드는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베스도 각하'가 지금 재판을 여는데 이 재판정의특징인즉,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곧 바울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스도의 고민이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사도 바울을 보내긴 보내야겠는데 죄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서를 보낼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죄인입니다. 죽을 죄인이나 로마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서 처형하지 못하고 그리로 보냅니다'-꼭 이렇게 보고해야 되겠는데 죄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사람들이 바울을 이렇게 정죄 했다는 거예요. 살려두지 못할 사람, 다시 말해서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소리소리 외쳤고 또 그렇게 고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베스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살피건대 죽을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거예요. 자, 한쪽에서는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보통 죄도 아니요 당장 사형에 처해야 하다고 소리지르고 있는데 베스도 자신이 바울을 만나보고 살펴본 바로는 아무 죄도 없어요. 죽일 죄는 고사하고 아무 죄가 없는 거예요. 죽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래서 그는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죄인 아닌 자를 죄인으로 판결한다면 그것은 판결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 법정이 곧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바로 알아야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했을 때에 이루어질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성령이 밝히 말씀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심판에 대해서 16장 11절에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성령 받은 사람은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음을 알게될 것이라는 거에요. 대단히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지금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합시다. 죄없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너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순간에 내가 재판 받는다고 생각을 안 해요. 바로 나를 재판하는 그쪽이 지금 재판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될 근본을 생각해보십시다. 빌라도 법정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피고입니다. 가야바가 원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예수님께 죄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빌라도가 죄인이 되는 순간이요, 가야바가 죽을죄를 짓는 순간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그 순간 재판장은 예수님이고 피고는 빌라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우리가 빌라도 법정, 빌라도 법정, 하지 않습니까? 바로 빌라도가 심판을 받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죄 없는 자를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바로 그 사람이 죄인 됩니다. 그 사람이 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그런 시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정죄 당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스도가 아주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실 고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복잡하게 생각하기 대문에 생깁니다. 자기 앞에 돌아오는 이익을 챙기려니까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 아니면 '아니오'하라, 여기서 지나치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하려니 문제가 되고, 글쎄요 하려니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YES, NO를 분명히 하면 마음은 깨끗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면 아닙니다. 조금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러나 어쩌고……' 하니까 복잡해지는 거예요. 그런 줄 알면서도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 때문에 양심을 구부리려 하니까 일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사실도 기억해야 되고 거짓말한 것도 기억해야 되고 둘 다 기억하려니까 복잡하잖아요?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본대로 들은 대로 봤다 안 봤다, 있었다 없었다---그대로만 말하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거짓말한 사람은 이게 어려워요. 사실은 사실대로 기억해야 되고, 거짓말한 것도 기억해야 되고, 또 누구에게 무슨 말 한 것까지 다 기억해야 해요. 점점 복잡해져 가지고 마지막엔 어디까지나 사실인지 알 수 없어집니다. 저도 몰라요. 이래서 머리가 혼란해요. 정신병자 안될 수 없어요.
진실처럼 단순한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면 아닙니다.
베스도가 고민을 할 게 뭐 있어요? 죄 없으면 없다, 있으면 있다 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시간에 와서 복잡하게 생각할 것 있습니까? 단순하면 용기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은 언제나 용기가 있어요.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용기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이다. 명예다, 출세다, 하는 시원치 않은 것들을 전부 생각하다가, 이렇게 하면 얼마가 손해고, 저렇게 하면 얼마나 이롭고, 이런 것 다 계산하다보니까 컴퓨터로도 계산이 잘 안나올 정도로 복잡합니다. 머리가 복잡해져요. 양심이 복잡해져요. 마지막에는 음흉하게 되고, 위선적인 존재가 되고, 결국에는 자기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이렇게 되면 지혜도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의를 떠났을 때에 용기가 없고, 단순하지 못할 때에 지혜가 없어요.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었지요. 그 마음이 깨끗할 때, 아직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가지고 왕이 되었을 때에 얼마나 지혜로웠습니까?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창기 둘이 나옵니다. 남편들은 없어요. 그런 두 여자가 아기를 가졌는데, 먼저 한 여자가 아이를 낳고, 사흘 후에 다른 여자가 또 아이를 낳았습니다. 한 집에 두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키웁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무심코 돌아눕다가 제 아이를 덮치는 바람에 그만 아이가 죽었어요. 그래서 슬그머니 다른 여자의 산 아이하고 자기의 죽은 아이를 바꿔놓았습니다. 이쪽 어머니가 눈을 떠보니 아이가 죽어 있어요. '나는 분명 잘못한 게 없는데…… 저 여자가 바꿔치기를 했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이렇게 되어 두 여자는 재판을 받게 되는데, 저마다 그 아이를 제 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아이는 내 아이이고 죽은 아이는 저 여자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복잡해졌을 때에 솔로몬이 "자, 칼을 가져오너라, 다 자기 아이라고 하니 반씩 나누면 될 것이 아니냐?"하지요. 그랬더니 아이를 바꿔치게 한 못된 여자는 끝까지 못됐어요. 열왕기상3장 26절에 보면 "그 산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하고 말씀합니다. 이에 솔로몬 왕은 마침내 "저가 그 어미니라"하고 진짜 어머니를 가려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이 판결에 감동을 합니다. 그 지혜에 놀라워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다도 기가 막힌 지혜입니다.
자, 그러면 베스도도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요. 베스도가 정말로 제대로 사람답게 살려 한다면 이렇게 판단하면 되는 거예요. "죄 없는 사람을 왜 죄인으로 끌어왔느냐? 그런고로 원고 너는 무고죄인이다"-그렇지 않아요? 죄 없는 사람을 죽을죄 지었다고,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다 무고죄에 걸려야지요. 그리고 전임자인 벨릭스는 직무유기죄에 해당하고요. 왜 죄 없는 자를 재판도 안하고 2년 동안 가두어놓습니까? 그 2년이라는 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요? 자, 벨릭스가 이렇게 판단하고 "땅 땅" 쳤으면 딱 좋았겠는데, 이걸 못한 거예요. 왜요? 유대사람들에게서 환심을 사려고, 자기 지위를 지키려고, 자기 명예와 자기 처지를 지키려고, 정치적 위치를 지키려고 그는 그렇게 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리고 오늘의 본문 26절을 보세요.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이런 웃기는 얘기가 어디에 있어요? 바울을 재판정에 세워놓고, 또 2년 동안이나 가두어놓고,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하여 당신을 불러왔으니 얘기 좀 해보시오. 내가 들으면서 그 재료 좀 얻어봅시다'하는 얘기예요. 얼마나 못된 생각입니까? 얼마나 기막힌 난센스입니까? 그 마음속에 이미 악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웃지 못할 얘기가 있습니다. 로마황제 중에 유대사람을 가장혐오하고 무작정 미워한 아드리아누스하고 하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황제가 궁전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주 겸손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를 받고 난 황제는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고 물었습니다. "저요? 유대사람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옆에 있는 군사한테 "당장에 저놈을 내다 쳐라" 했습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유대사람이 어디라고 건방지게 로마황제에게 인사를 하느냐? 저놈을 아예 죽이라!"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유대사람이 지나가다가 황제를 보고는 인사를 안 했습니다. 어제 된 일을 아니까요. 황제는 "저놈, 왜 인사를 안하고 가느냐?"하며 그를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 왜 인사를 안 하느냐?" "저는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안 했습니다." 황제는 "이놈도 목을 쳐라! 건방지게 인사를 안하고 가는 놈이구나." 유대사람들은 하도 기가 막혀서 "어제는 인사를 한다고 죽이더니 오늘은 인사를 안 한다고 죽이니 황제여, 도대체 어떡하란 말씀입니까?" 합니다. 황제는 "유대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잘 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구실만 있으면 죽이겠다, 그 소리지요. 다시 말하면 죽인다는 생각이 먼저 있어요. 죄목은 이제부터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바로 그와 같은 재판이 바야흐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언제든지 결백해야 하고, 정직해야 되고, 오직 정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편견을 벗어야 할 뿐더러 자기에게 돌아올 이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지위도 생각해서는 안돼요. 이 재판 끝나고 이 자리를 내놓는다 해도 재판은 끝까지 바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위와도 관계가 없어요. 더구나 정욕이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면 그 의는 굽어질 수밖에 없어요. 보세요. 재판은 뇌물로 인하여 굽어진다고 잠언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내게 돌아올 이권을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재판은 빗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봅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 이런 일은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죄 없이 공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걱정하지 말아라. 현장에 서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내가 일러주마." 바울은 지금 바로 그런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법정에 서는 그 때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용기, 주님께서 주시는 영감을 통하여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무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적어도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무죄이어야 합니다. 무죄한 가운데서 핍박을 받는 것, 그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 없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원적으로 당하는 것입니다. 도망가다 할 수 없이 붙들리는 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아이구 내 팔자야, 내 신세야"하면서 누구를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고난 당해도 안됩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고 선교적 의미가 있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이 없어야 되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난만이 고난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죄 없는 고난, 순교적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이 됩니다. 이를 통하여 선교가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예요. 오히려 여기서 더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망할 것도 없고, 주저할 것도 없습니다.
어쨌든 사형에 해당한다는 고소를 당하고 비난을 받으면서 바울은 지금 죄 없는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원망할만합니다.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할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 변명도 말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잘못된 사람들이 앞에서 재판하고 있지만 그 누구를 미워하지도 말 것입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현실적 고난의 모습입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깨끗하고 티없이,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내 할 말 다 하고, 증거 할대로 다 증거하고, 시간 시간, 순간 순간, 사건 사건마다에서 순교적으로 임해야됩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내가 바르게 해야 했었습니다.
바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한 것 때문에 바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든지 많이 듣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표 낼 생각을 하고 일을 해야 됩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정의의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누가 시켰는지, 누구 때문이니 말할 것 없어요, 아무 변명도 하지 말고, 아무 절망도 하지 말고, 아무 낙심도 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그 앞에 정직하게-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모습입니다. 그럴 때에 이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크고 놀라운 역사,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진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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