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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마태복음 8장 18절~22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쳐 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 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이 말씀은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잠언입니다. 먼저 이 말씀 전후의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태복음 5, 6, 7의 3장에 걸쳐 저 유명한 산상수훈을 펴시었습니다. 그리고 8장에는 베푸신 이적이 다섯 가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로 4절에는 문둥병자 고치신 이적이, 5절로 13절에는 백부장의 종을 원격적으로 고쳐주신 특별한 이적이, 14, 15절에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적이 있고, 23절로 27절에는 갈릴리바다를 잔잔케 하신 이적이, 28절로 34절에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 장(章) 안에 큰 이적이 다섯 가지나 기록되어 있는 데다 그 사이 18절로 22절에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오늘의 잠언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일깨우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적에 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반응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이적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문둥병자가 멀쩡한 사람으로 '둔갑'한다든지,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홀연 귀신이 나가버린다든지, 죽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되살아난다든지, 거친 풍랑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잔잔해진다든지 하는 사건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첫째,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기적'을 뜻하는 헬레어 '테라스'가 놀랍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요새 같으면 온갖 매스컴이 다 들고일어나 취재하느라 법석을 떨 것입니다. 일반적인 이성의 판단으로는 납득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상천외(奇想天外)요 불가사의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보면 먼저 깜짝 놀라는 것은 사람된 자의 당연하고도 진실한 반응입니다. 오래 전에「타임」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한 부인이 고민거리를 안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인데도 이 부인은 걱정근심이 유달리 많아서 온갖 것을 지지콜콜이 다 털어놓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하도 길어지니까 목사님이 듣다못해 한마디 질문을 합니다. "부인께서는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랬더니 부인은 오히려 목사님께 반문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에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No, I don't." 그러고는 멋진 말을 덧붙입니다. "I am surprised by God every moment." -"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순간 순간 놀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압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순간 순간 놀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모습을 뵈었습니까? 일단은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역사를 보고 깜짝 놀라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놀라지 않습니다. 정신병자, 실성한 사람은 놀랄 줄 모릅니다.
둘째, 그 놀라움 속에서 길이 살려고 하는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상의 눈부신 장면을 목도했을 때, 그 충격 속에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아예 여기서 눌러 사십시다."하고 그 감격, 그 충격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은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적을 베푸시는 놀라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반응입니다. 위대한 분의 제자가 되어 종신 토록 따라다니면서 구경 좀 했으면 좋겠다, 늘 상 그러한 감격 속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하고 당장에 따르겠다는 성미 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르기는 따르는데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고 볼일을 보고 따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장에 따르겠다고 한 서기관은 그 하는 일이 본래 율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꽤나 지성적인 사람인데 그만 이적을 본 순간에 자신의 소속을 바꾸려듭니다. 전문적인 유대주의자가 유대주의자로서의 본분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며칠이나마 깊이 생각해보았다거나 기도해보았다거나 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이적을 본 그 순간에 '화끈해져서' 덮어놓고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 꼴을 보고 예수님께서 독백하시듯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냐, 나를 따르면 배가 고프다, 나를 따르면 노숙을 해야 한다, 나를 따르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너에게 평안을 줄 것으로 아느냐, 나는 이적 가지고 밥 벌어먹는 사람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누릴 사람이 아니다, 너는 잘못 생각했다, 나는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인자(人子)이니라, 이 사실을 알고 따르면 모르거니와 모르고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말리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서기관은 부잣집 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는 날 따라 다녀보아야 며칠 못 가 그만두고 돌아갈 것이니 일찌감치 그만두어라'하시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자 중에 또 하나"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사람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합니다. 예수님을 호칭함에 서기관은 '선생님'이라고 했으며, "제자 중의 하나"는 '주'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일반적인 랍비를 의미하는 반면 '주'라는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자 중에 하나인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먼저 부친의 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조건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조건 좇겠다는 서기관에게는 따르지 말라 하시고,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먼저 따르라고 하십니다.
공자(孔子)에게 제자인 자공(子貢)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배운 것이 있는데 그 배운 것을 곧 실천해야 합니까,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는 "그야 곧바로 실천해야지"라고 대답합니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공자보고 자공과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배운 바와 깨달은 바가 있는데 곧바로 실천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실천할까요?" "많이 생각해본 뒤에 실천하는 것이 좋다"라고 공자는 대답합니다. 옆에서 죽 지켜보던 한 사람이 공자보고 "선생님, 누구에게는 즉시 실천하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좀더 생각해보고 실천하라 하시니 어찌된 연유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먼저 물어본 사람은 이미 생각을 많이 해보고 묻는 것이므로 이제는 실천만 하면 되지만 뒤에 물어본 사람은 별반 생각도 안 해보고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좀더 많이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당신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은 마다하시고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다는 제자에게는 무조건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 누구에게는 따르라 하시고 누구에게는 따르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많은 시련을 겪은 연후에 결심하고 따르겠다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은 아무생각 없이 이적만 보고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쫓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의 뜻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오늘의 잠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제자도'입니다. 복음서에서의 제자는 전문적인 제자를 말씀하는 것이요,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을 고백한, 요샛말로 하자면 세례교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특수한 의미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칠십 문도(七十門徒)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12제자를 말하는 것이요, 적어도 70명에는 들어가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12제자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전반적인 사람을 제자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에 이 말은 12제자나 70명과 같이 숫자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모든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라고 하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와 특수한 의미의 두 갈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을 때에 여기에는 일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다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늘나라 가는 성도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위 제 2의 결단을 하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헌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자기 직업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특수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많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제자 중에 또 하나'인 이 제자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제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full time ministry---전적으로 전도에만 힘쓰는 사람이지 그 밖의 직업이 없습니다. 직업이 있다 하더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 total committed person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됨(the discipleship)'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도 해야겠습니다마는 우선 굳은 각오가 필요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용기가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같이 죽고 나아가 대신 죽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본문말씀은 이 같은 결단을 촉구합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전적으로 주님의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사(葬事)한다는 문제입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자식된 자로서 부친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의무입니다.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우선하는 중요한 의무입니다. 유대사람들의 효도사상으로 미루어보더라도 이는 가장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자식이 되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의 시신을 장례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도리의 근본이 되는 강한 의무이자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본문의 '장사한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당장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친이 돌아가셨습니다. 당장 장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래서 장례식부터 치르고 따르겠다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에 가장 편안한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아직은 부친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효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식을 치르고 나야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장례를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내용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을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서 장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교훈 하시고 자 하는 것입니다.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요 복음 전하는 일은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장례식은 이미 끝난 일을 두고 뒤치다꺼리하는 것입니다. 유해를 모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생을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례와 복음,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합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22절)."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목회학적으로 장례식을 치른다 하더라도 전도하는 일로 하라는 주(註)를 달아주셨으면 좋겠다 싶은데 이 말씀만으로 끝내십니다.
우리는 사자(死者)를 위하여 장례식을 치릅니다. 그러나 그실 우리가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는 일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없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당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듯 장례식이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간혹 장례식을 가리켜서 영결식이라고도 합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영결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결별한다「永訣」,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어디까지나 장례식일 뿐입니다. 영결식이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시신을 매장하는 예식입니다. 그것밖에는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이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묻으면 그만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주위에 있는 산 사람들입니다. 지금 애도하러 여기 모인 조문객들, 그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례식이란 죽은 사람을 천당 보내려고 기도하고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죽은 자는 죽은 자요 중요한 것은 산 자다, 산 자의 생명을 인도하는 일이 먼저다 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례식을 치름으로 많은 전도가 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죽어 가는 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며 금식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들이 죽고 나니 벌떡 일어나 의복을 정히 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신복들이 의아해하자 다윗은 말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22,23절)." 일단 아들이 숨을 거두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중에 죽은 자만을 위하여 슬퍼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제부터는 진정 산 자를 위하여 시간을 쓸 것입니다.
옛날에 묘살이 20년에 단산(斷産)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므로 그냥 편안히 살 수 없다고 해서 3년 묘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3년이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다음에는 삼촌이 죽었는데 그 삼촌한테 아들이 없어서 대신 묘살이 했습니다. 그 3년이 지나자 다시 삼촌의 어머니가 죽었고 이어 장모가 죽어서 또다시 3년 묘살이를 했습니다. 장모 역시 아들이 없어서 그가 묘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서 묘살이 만으로 20년이 지나 단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극단적인 이야기 같지만 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라 담긴 이야기입니다.
옛날 양반들은 상중(喪中)에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를 죽였다고 합니다. 가문을 망쳤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안되어 아직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에 아내를 가까이하여 자식을 낳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상놈 취급을 하는 것이 한국의 문화였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다는 것이 잘못 생각하여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닙니까? 오히려 세상 떠난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위해서라도 산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볼 분이 남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눈물만 흘리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것입니다. 매장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느라고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73년에 차 사고를 당하여 지금까지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니까 부인과 자식이 모두 그에게만 매달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 부인을 만났는데 위로할 말이 없더군요. 그 부인이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아직 안 죽었어요." 20년이나 그렇게 뒷바라지해왔으니 얼마나 지겨웠겠습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0년을 누워있는 아버지 곁에만 붙어 있는 자식이어야 효자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소극적인 효도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하는 적극적인 효도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학생을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장학금을 주어 공부시키려고 했답니다. 공부를 시켜서 장차 그곳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똑똑한 학생을 한 명 선발해서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에게서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가겠다는 회답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회답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서 알고 보니, 그 학생은 돌아 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다리느라고 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마흔인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기다리고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좀더 높은 차원에서 효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늘 같이 있는 것만으로 사랑이랄 수 없습니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함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따라다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게 자유를 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어디를 가나 밤낮 졸졸 따라다녀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냥 붙어 있기만 하고 마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신 말씀을 거듭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둘째, 슬픔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장례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해서 너무 길게 웁니다. 옛날 이스라엘사람들은 우는 기간을 따로 정해놓고 울었다 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울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것보다는 기간을 정하여 우는 것도 일리가 있다 싶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사랑의 원자탄」을 보고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특히 손목사님이 8․15광복 후 애양원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시대에 일본에 항거하여 숱한 무진 고생을 하신 분입니다. 당시의 부흥회는 월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일주일에 걸쳐서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 공교롭게도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나 아들 둘이 공산당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들 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목사님은 까딱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정의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저분이야말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신 분이구나 싶었습니다.
작년이 모짜르트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여서인지 모짜르트에 대한 숱한 이야기와 많은 음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져 소개되었으니 아마도 모짜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한 음악평론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모짜르트를 가리켜 '음악의 예수' '음악의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은 알았지만 '음악의 예수'라고까지 높이 우러름을 받는 줄은 몰랐습니다. 모짜르트가 위대하게 된 데에는 그의 생애가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모짜르트가 30여 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음악은 어느 것 하나도 어두운 것이 없습니다. 베토벤의 생애 역시 고통스럽고 어려웠는데 그의 음악은 그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무겁고 어둡습니다. 그러나 모짜르트의 음악은 가장 어려울 때에 지은 것까지도 밝고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모짜르트의 위대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만일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고 누가 아프다고 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만 부르고 그저 인생이 무상하다느니 괴롭다느니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당장에 장례식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이에 우리는 두말없이 "예"하고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응하는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내 기분이 조금 언짢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의 기분을 온통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무거운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슬픔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많다 하더라도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슬픔에 잠겨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힘을 낭비하고, 과거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고 건강까지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잘못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슬픈 과거에 노예가 되지 말라, 새로운 용기, 새로운 환상, 새로운 미래를 바라다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셋째, 죽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하여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정신적인 죽음을 아울러 말씀하십니다. 몸으로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으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한 사람, 소망을 버린 사람이 마음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끊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몸은 살아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심판 받아 육체로 죽은 사람과 영으로 죽은 사람들은 저들끼리 서로 장례 하게 하고 너는 살았으니 산 사람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주께 구합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먼저라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주십니다. 슬픈 과거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말고, 너는 산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는 이 말씀대로 미래지향적인 신앙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한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 30)." 특별한 뜻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에는 모든 인간적인 정을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름에만 응답하고, 주님의 뜻에만 최우선을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감정과 슬픈 이야기와 과거의 일에 매여들어갈 때에는 아무 일도 할 수 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22절)." 우리는 이 귀한 말씀을 참으로 깊이 음미하고 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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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장 35절~45절) (0) | 2024.03.19 |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요한복음 12장 24, 25절) (0) | 202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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