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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자기 민족을 찾는 모세(사도행전 7:17~36)

by 【고동엽】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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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민족을 찾는 모세(사도행전 7:173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사실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스데반은 지금 대단히 중요한 설교를 펴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그 정황과 성격부터가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순교 직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할 것을 이미 각오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임종 직전입니다. 종말론적 위기에 마치 유언과 같은 심각한 의미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이 설교를 해서 자기 앞에 있는 아주 악한 마음의 사람들을 설득함으로 죽음을 면해볼까 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해서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런 핍박을 받아야 하느냐, 무엇 때문에 나를 괴롭히느냐, 따위의 있을 법한 항변 같은 것이 낌새조차 없습니다. 깨끗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오로지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모습입니다.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속속들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부터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 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을 들어 설명하는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 와 같이 요셉 역시 그리스도의 예표요 모형이 됩니다. 그리스도와 그 백성들의 관계가 마치 요셉과 그 형제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유사점을 발견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요셉을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이어서 이제, 스데반은 모세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누가 모세를 이야기할 때면 이스라엘사람들은 으레 숨을 죽이고 옷깃을 가다듬습니다. 모세를 높이 우러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저들은 별수 없이 조용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와 그리스도 - 역시 아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스데반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7:37)." 모세가 그리스도의 예표됨을 말씀함입니다. 모세에 얽힌 이야기를 통하여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보자 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똑바로 듣는다면 본문의 촛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저들이 다 아는 이야기지요. 모세에 관한 한 저들은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 속에서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모세와 그 백성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올바른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여러 가지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애굽 땅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희미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이 전승적으로 마음에 살아 있을 뿐입니다. 저들은 거의 이스라엘답지 못하게 삽니다. 아예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회당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같은 노예생활로 수 대()를 살아온 것입니다. 해서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 없다고 하는 것 - 이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노예로 4백 년 넘게 살았으니 구원에 대한 신앙 자체가 사그라졌습니다. 노예는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자자손손이 노예입니다. 저들은 이제 구원의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합니다. 사는 대로 살다가 죽는 대로 죽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제 전혀 가망이 없는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택하신 방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 곧 사람 하나를 먼저 세우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택정하여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모세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모세는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모세는 집에서 석 달을 자랍니다. 모세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계셔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참으로 오묘한 경륜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세가 원수 애굽의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우연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모세라고 하는 생명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것이 구원의 시작인 것과 유사합니다. 온 세상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격이 세상에 있음으로 해서 구원의 역사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천지개벽을 하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땅에 겨자씨가 떨어지는 것처럼, 종자 하나가 땅에 심어지듯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에 소리소문 없이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창조적으로 역사 하시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그 모든 거역과 죄악과 불 신앙을 나무라시지 않고 믿음을 주셔가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므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없는 믿음을 가지게 하셔서, 믿음을 키워주셔서 그 역사를 이루어가 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전혀 모르게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입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40, 광야에서 40, 이렇게 80년 동안 모세를 잘 준비시키셨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보아도 손색없을 만큼, 박사학위를 얻어도 몇 개나 얻었을 만큼 당시의 문물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진 최고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많은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경험입니다. 뒤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먼저 경험을 하게 한 뒤에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렇듯 오묘하게 역사 하십니다. 이렇듯 한 사람을 들어 쓰셔서 역사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을 특별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할 때에는 누구든지 요묘한 가운데서 그 지난날을 모두 준비시키십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 태생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그 것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 태생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번 중국에 갔을 때에 보니 교포들 가운데는 대학을 마치고 한국말은 한국말대로, 중국말은 중국말대로 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두 가지를 다 하니까요. 저도 영어 하는 것만큼 중국말을 했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도통 말이 안 통합니다. 어쨌든 두 가지 말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도 사실 엄격히 따져 말하면 타고나야 합니다.

여러분, 김장환 목사님 아시지요? 이름을 대어서 죄송합니다마는 김장환 목사님이야말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사모님이 미국분입니다. 그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은 물론 한국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닮아서 한국말도 잘하고, 어머니 닮아서 영어도 잘합니다. 두 가지 말을 아주 똑같이 잘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이것은 아주 타고난 것입니다. 중학교 다니면서 배울 것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배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들 모인 자리에서 "자네는 선교사로 나갔으면 참 좋겠구먼" 했습니다. 그실 얼마나 좋습니까? 거침없이 구사하니 까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연한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은 히브리말을 다 하고 헬라말을 다 하고, 히브리 종교에 정통하고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이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키워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일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이야기는 옛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 고백을 한 가지 할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제가 평양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 동안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가 다 똑같습니다. 갈 때에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북경에서부터 긴장이 된다고 합니다. 평양에 가서도 벌벌 떨기만 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떠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아이고, 살았구나!'하고 안도감이 생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사실 무서운 곳이니까요.

못 돌아올까 봐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안비 행장에 딱 내리니 참으로 편안합디다. 못 돌아가도 좋다 할만큼 편안했습니다. 왜요? 내 고향이니까요.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늘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고, 어떻게든 전도의 문을 열어야 하겠다고 간절히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남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나름대로 어떤 환경에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하나님께서 모세를 무려 80년 동안 비밀리에 잘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30년 동안 조용하게 준 비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다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신 뒤에, 광야에서의 40일 기도까지를 거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하고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오묘하게 역사 하십니다. 이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모세가 복음을 전하고 역사 하는데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불신하고 그 에게 반역했습니다. 계속해서 모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거기에 합당한 보응을 다 받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백성이 반대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그르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그대로 의연히 이루어나가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어이 가나안땅으로 옮겨놓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때가 되어 서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모든 환경, 모든 어려운 일, 모든 불 신앙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경륜을 약속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든 약속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만백성을 구원하게 되리 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모세는 나름대로 한 번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노력을 해보았습니다. 시쳇말로 용을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그 지시하시는 시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 때나 소리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 허락하셔야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읽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기다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조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감상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셔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지 않는 일을 어찌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모세의 잘못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애굽사람 하나를 때려죽였습니다. 물론 그 동기는 그럴싸했습니다. 민족적이 요. 애국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스스로 지도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자리에서 일하려고 할 때에 그의 지식과 의지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 째로 그것은 모세가 받은 소명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광야로 내몰아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 필요한 인내력과 지구력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다 수련시키셨습니다.

모세는 80년 동안 많은 경험을 쌓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제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보면 모슬렘의 예배당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넓은 예배당에 맨발로 들어갑니다.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풍속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에는 귀한 자리나 어른 앞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나가서 꿇어 엎디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이런 풍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벗는다'하는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셨을 때에 모세는 분명히 신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마음의 신발을 벗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 벗어버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도자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실수를 범하고 혈기를 부리고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물이 없다고 원 망했을 때에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땅땅 치면서 "이 패역한……"하고 고함치는 것을 보세요. 아무래도 모세는 아직 신발을 한쪽밖에 안 벗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 서 큰 사명을 맡기십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하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벗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 을, 내가 너를 통하여 역사 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릅니다'하는 등으로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살인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애굽으로 갑니까? 어떻게 바로의 궁전으로 돌아갑니까? 아무리 40년이 지났다지만 나는 전과자입니다. 그러니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하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만 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과거에 살인을 했든 안 했든, 쫓겨왔든 도망 왔든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 가라 하실 뿐이십니다. 이제 그는 당연히 가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애굽으로 갑니까?"하고 주저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는 귀한 약속을 주십니다. 모세는 이것을 믿고 애굽으로 향합니다. 그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팡이 하나가 덜렁 있을 뿐입니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능력을 요구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으로 변합니다. 그 리고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됩니다. 여러분, 사실 이 표적 가지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모세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애굽으로 떠납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자기 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니 의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자기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고 하 시니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 야 할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기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순종할 뿐입니다. 주님의 충성된 종으로, 주님의 사자로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요 온유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온 인류 중에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듯 모세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 을 뵌 것은 아닙니다. 모세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 님을 뵈었다기에 그들이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믿음 -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모세를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모세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의 실수를 비판하다가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요. 분명 모세 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벌하십니다. 사실 미리암은 과거에 모세를 업어 키웠다는 것으로 방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세를 비난했습니다마는, 그보다는 미리 암이 정면으로 나서서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녀를 내려치셔서 문둥병자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던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만을 믿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동시에 당신이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 카리스마적 권위를 전적으로 믿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를 우상으로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잘나서 들리어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남보다 지혜가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지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곧 모세 중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이라 고 믿고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하 고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마는, 그실은 모세를 배반해서 죽은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명된 이상 모세에 대하여 일절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모세를 배반할 뿐 아니라 모세를 죽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당신이냐, 하나님께서 당신하고만 같이하시느냐, 아무하고나 같이하시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품었다가 하나님께 내침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셨다고 하는 그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신앙은 성서적 신앙이요 교회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적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에 상관하시지 않고 당신만을 믿기 바라십니다. 전쟁이 나든 사막에 버려지든, 물이 있든 없든 전혀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광야생활의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전적으로 당신만을 믿기 원하십니다. 사람 속으로 생각하면 좀 지나치시다 싶습니다. 너무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광야로 내몰면서까지 당신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목마르면 물줄 테니 나만 믿으라, 고기 먹고 싶다면 내가 고기 줄 테니 나만 믿으라, 더우면 구름기둥을, 추우면 불기둥을 내릴 테니 나만 믿으라,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은 내가 보증할 것이니 어떤 환경이든 어떤 일이든 상관하지 말고 나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함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전적으로 당신을 믿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인도자로 믿는 그 믿음이 저들에게 꼭 필요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시험을 당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역자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믿으면 되지. 내가 직접 기도하면 되지. 내가 직접 성경 보면 되지' 하고 고개를 내젓다가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좀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지명하셨고, 하나님께서 택하셨다 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그 카리스마적 권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시어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도처에 준비해두셨다가 온유하게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택하여 쓰시는 자에 대한 바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모세 중심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민족을 찾는 모세(사도행전 7:173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사실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스데반은 지금 대단히 중요한 설교를 펴고 있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그 정황과 성격부터가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순교 직전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할 것을 이미 각오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임종 직전입니다. 종말론적 위기에 마치 유언과 같은 심각한 의미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이 설교를 해서 자기 앞에 있는 아주 악한 마음의 사람들을 설득함으로 죽음을 면해볼까 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해서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런 핍박을 받아야 하느냐, 무엇 때문에 나를 괴롭히느냐, 따위의 있을 법한 항변 같은 것이 낌새조차 없습니다. 깨끗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오로지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모습입니다.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촛점을 맞추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속속들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고부터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시작이 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을 들어 설명하는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 와 같이 요셉 역시 그리스도의 예표요 모형이 됩니다. 그리스도와 그 백성들의 관계가 마치 요셉과 그 형제들과의 관계와 같다고, 유사점을 발견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요셉을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내용입니다.

이어서 이제, 스데반은 모세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누가 모세를 이야기할 때면 이스라엘사람들은 으레 숨을 죽이고 옷깃을 가다듬습니다. 모세를 높이 우러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저들은 별수 없이 조용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와 그리스도 - 역시 아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스데반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7:37)." 모세가 그리스도의 예표됨을 말씀함입니다. 모세에 얽힌 이야기를 통하여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보자 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똑바로 듣는다면 본문의 촛점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저들이 다 아는 이야기지요. 모세에 관한 한 저들은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 속에서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모세와 그 백성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올바른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여러 가지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애굽 땅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희미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이 전승적으로 마음에 살아 있을 뿐입니다. 저들은 거의 이스라엘답지 못하게 삽니다. 아예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회당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같은 노예생활로 수 대()를 살아온 것입니다. 해서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 없다고 하는 것 - 이 문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노예로 4백 년 넘게 살았으니 구원에 대한 신앙 자체가 사그라졌습니다. 노예는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자자손손이 노예입니다. 저들은 이제 구원의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합니다. 사는 대로 살다가 죽는 대로 죽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제 전혀 가망이 없는 그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택하신 방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 곧 사람 하나를 먼저 세우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택정하여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모세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모세는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모세는 집에서 석 달을 자랍니다. 모세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계셔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참으로 오묘한 경륜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세가 원수 애굽의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우연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모세라고 하는 생명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것이 구원의 시작인 것과 유사합니다. 온 세상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격이 세상에 있음으로 해서 구원의 역사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천지개벽을 하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땅에 겨자씨가 떨어지는 것처럼, 종자 하나가 땅에 심어지듯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에 소리소문 없이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창조적으로 역사 하시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그 모든 거역과 죄악과 불 신앙을 나무라시지 않고 믿음을 주셔가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므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없는 믿음을 가지게 하셔서, 믿음을 키워주셔서 그 역사를 이루어가 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전혀 모르게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입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40, 광야에서 40, 이렇게 80년 동안 모세를 잘 준비시키셨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보아도 손색없을 만큼, 박사학위를 얻어도 몇 개나 얻었을 만큼 당시의 문물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진 최고의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많은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경험입니다. 뒤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먼저 경험을 하게 한 뒤에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렇듯 오묘하게 역사 하십니다. 이렇듯 한 사람을 들어 쓰셔서 역사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을 특별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할 때에는 누구든지 요묘한 가운데서 그 지난날을 모두 준비시키십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 태생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그 것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 태생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번 중국에 갔을 때에 보니 교포들 가운데는 대학을 마치고 한국말은 한국말대로, 중국말은 중국말대로 다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두 가지를 다 하니까요. 저도 영어 하는 것만큼 중국말을 했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도통 말이 안 통합니다. 어쨌든 두 가지 말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도 사실 엄격히 따져 말하면 타고나야 합니다.

여러분, 김장환 목사님 아시지요? 이름을 대어서 죄송합니다마는 김장환 목사님이야말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훌륭한 목사님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사모님이 미국분입니다. 그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은 물론 한국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닮아서 한국말도 잘하고, 어머니 닮아서 영어도 잘합니다. 두 가지 말을 아주 똑같이 잘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이것은 아주 타고난 것입니다. 중학교 다니면서 배울 것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배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들 모인 자리에서 "자네는 선교사로 나갔으면 참 좋겠구먼" 했습니다. 그실 얼마나 좋습니까? 거침없이 구사하니 까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연한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은 히브리말을 다 하고 헬라말을 다 하고, 히브리 종교에 정통하고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이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키워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일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이야기는 옛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 고백을 한 가지 할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제가 평양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 동안 평양에 다녀온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가 다 똑같습니다. 갈 때에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고들 합니다. 북경에서부터 긴장이 된다고 합니다. 평양에 가서도 벌벌 떨기만 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그곳을 떠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아이고, 살았구나!'하고 안도감이 생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사실 무서운 곳이니까요.

못 돌아올까 봐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안비 행장에 딱 내리니 참으로 편안합디다. 못 돌아가도 좋다 할만큼 편안했습니다. 왜요? 내 고향이니까요.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늘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고, 어떻게든 전도의 문을 열어야 하겠다고 간절히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남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나름대로 어떤 환경에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하나님께서 모세를 무려 80년 동안 비밀리에 잘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30년 동안 조용하게 준 비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다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신 뒤에, 광야에서의 40일 기도까지를 거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하고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오묘하게 역사 하십니다. 이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모세가 복음을 전하고 역사 하는데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불신하고 그 에게 반역했습니다. 계속해서 모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거기에 합당한 보응을 다 받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백성이 반대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그르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그대로 의연히 이루어나가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어이 가나안땅으로 옮겨놓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때가 되어 서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모든 환경, 모든 어려운 일, 모든 불 신앙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경륜을 약속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모든 약속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만백성을 구원하게 되리 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모세는 나름대로 한 번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노력을 해보았습니다. 시쳇말로 용을 써보았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그 지시하시는 시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 때나 소리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 허락하셔야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읽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기다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조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감상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셔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지 않는 일을 어찌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모세의 잘못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애굽사람 하나를 때려죽였습니다. 물론 그 동기는 그럴싸했습니다. 민족적이 요. 애국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스스로 지도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은 자리에서 일하려고 할 때에 그의 지식과 의지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주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 째로 그것은 모세가 받은 소명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이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광야로 내몰아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것은 마치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 필요한 인내력과 지구력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다 수련시키셨습니다.

모세는 80년 동안 많은 경험을 쌓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제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보면 모슬렘의 예배당에는 의자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넓은 예배당에 맨발로 들어갑니다.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풍속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에는 귀한 자리나 어른 앞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나가서 꿇어 엎디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이런 풍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과거를 벗는다'하는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셨을 때에 모세는 분명히 신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마음의 신발을 벗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 벗어버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지도자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실수를 범하고 혈기를 부리고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물이 없다고 원 망했을 때에 모세가 반석을 두 번 땅땅 치면서 "이 패역한……"하고 고함치는 것을 보세요. 아무래도 모세는 아직 신발을 한쪽밖에 안 벗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 서 큰 사명을 맡기십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하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벗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것 을, 내가 너를 통하여 역사 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릅니다'하는 등으로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살인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애굽으로 갑니까? 어떻게 바로의 궁전으로 돌아갑니까? 아무리 40년이 지났다지만 나는 전과자입니다. 그러니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하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만 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과거에 살인을 했든 안 했든, 쫓겨왔든 도망 왔든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 가라 하실 뿐이십니다. 이제 그는 당연히 가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애굽으로 갑니까?"하고 주저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하시는 귀한 약속을 주십니다. 모세는 이것을 믿고 애굽으로 향합니다. 그 믿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팡이 하나가 덜렁 있을 뿐입니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능력을 요구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으로 변합니다. 그 리고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됩니다. 여러분, 사실 이 표적 가지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모세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애굽으로 떠납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자기 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니 의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자기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신다고 하 시니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 야 할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기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순종할 뿐입니다. 주님의 충성된 종으로, 주님의 사자로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요 온유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온 인류 중에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듯 모세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 을 뵌 것은 아닙니다. 모세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 님을 뵈었다기에 그들이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믿음 -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모세를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모세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의 실수를 비판하다가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요. 분명 모세 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벌하십니다. 사실 미리암은 과거에 모세를 업어 키웠다는 것으로 방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세를 비난했습니다마는, 그보다는 미리 암이 정면으로 나서서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녀를 내려치셔서 문둥병자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던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만을 믿는 신앙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동시에 당신이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 카리스마적 권위를 전적으로 믿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를 우상으로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사람이 잘나서 들리어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남보다 지혜가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지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곧 모세 중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이라 고 믿고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하 고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마는, 그실은 모세를 배반해서 죽은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명된 이상 모세에 대하여 일절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모세를 배반할 뿐 아니라 모세를 죽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당신이냐, 하나님께서 당신하고만 같이하시느냐, 아무하고나 같이하시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품었다가 하나님께 내침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셨다고 하는 그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신앙은 성서적 신앙이요 교회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적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에 상관하시지 않고 당신만을 믿기 바라십니다. 전쟁이 나든 사막에 버려지든, 물이 있든 없든 전혀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광야생활의 그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전적으로 당신만을 믿기 원하십니다. 사람 속으로 생각하면 좀 지나치시다 싶습니다. 너무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광야로 내몰면서까지 당신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목마르면 물줄 테니 나만 믿으라, 고기 먹고 싶다면 내가 고기 줄 테니 나만 믿으라, 더우면 구름기둥을, 추우면 불기둥을 내릴 테니 나만 믿으라,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은 내가 보증할 것이니 어떤 환경이든 어떤 일이든 상관하지 말고 나만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함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전적으로 당신을 믿기 원하셨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인도자로 믿는 그 믿음이 저들에게 꼭 필요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시험을 당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역자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믿으면 되지. 내가 직접 기도하면 되지. 내가 직접 성경 보면 되지' 하고 고개를 내젓다가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좀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지명하셨고, 하나님께서 택하셨다 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그 카리스마적 권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시어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도처에 준비해두셨다가 온유하게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택하여 쓰시는 자에 대한 바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모세 중심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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