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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제자를 위한 기도(요 17:9-1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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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위한 기도(17:9-1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7장은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기도로써 마무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앞에서 공부한 대로 이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오늘 본문은 두번째 부분인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 제자들은 잠시 흩어지겠지만 곧 돌아와서 일하게 될 것이므로, 지금 그들을 위해 중요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소원이면서 목표이기도 하고 또한 생활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이것 역시 우리의 소원이며 생활 목표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도 예수님의 소원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향하신 소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시므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곧 우리의 소원으로, 예수께서 기도하신 대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단순한 소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일생 동안 힘써야 할 생활 목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오늘 제자들을 위한 이 기도에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기도입니다. 몰론 본문에서는 '감사합니다'라는 구절이 직접 나타나 있지 않지만, 잘 읽어보면 예수님의 감사의 뜻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감사 중에서도 먼저, 내게 주신 자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 제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이므로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배신할 것이므로,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 먼저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오늘의 현실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혹 내가 병들었습니까?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음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은 병들었지만 이 시간까지는 건강했으니 지난 날의 건강에 대해서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혹 교통 사고가 났습니까? 지금까지 무사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사고가 났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교통 사고는 매일 수시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있으려면 벌써 수십 번 있을 수 있는 사고였지만, 지금까지 무사했던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입니다. 어떤 여건이든 현실 이대로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야만 바른 기도가 됩니다. 가령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대할 때, 다른 부모보다 경제력도 없고, 명예도 없고, 사랑도 부족하다고 원망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록 어려워서 대학은 못갔지만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감사하고, 한 집에 살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자식으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의 자세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제자들의 형편없는 점만 생각하시고, 하필이면 이런 자들을 제게 주셨으며, 많은 사람 가운데 왜 어부들이냐고 하나님께 불평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다 주의 것이요, 주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이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나를 따르게 되고, 나와 함께 하게 되었고,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 나의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직업도 가족도 다 버렸고 3년 동안 어려운 중에 나를 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생각으로 지금 기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좋은 방향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시므로, 변변치 않은 제자들을 놓고 먼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하는 엄청난 감사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7:10)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아서 감사하다는 기도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수님은 제자들 때문에 망신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안식일날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별 생각없이 밀 이삭을 훑어먹어 바리새인들로부터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날 왜 이러느냐?"고 비난을 받습니다. 답답한 예수님은 다윗의 일행이 굶주렸을 때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었던 일을 그들에게 들려줍니다. 사실 다윗이 굶주려 죽게 되어서 진설병을 먹은 것과 제자들이 경솔하여 밀이삭을 먹은 것과는 상황이 아주 다릅니다. 언제나 제자를 잘못 두면 선생은 곤경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제자들로 인해서 예수께서 망신하고 모독이 돌아간 예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 중에 치명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과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던 사건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지금까지 경험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임을 예견하고 계셨지만 지금 예수께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었다고 감사하시니 얼마나 귀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내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었으며, 혹은 친구로 말미암아, 자녀로 말미암아, 이웃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었다고 기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내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이웃이 나를 못살게 굽니다. 무슨 팔자가 이렇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로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고 기쁨을 얻어 행복하다고 감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감사하신 것은, 당신은 이제 세상을 떠납니다만 저들은 세상에 남아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17 : 11 상반절) 풀이하면,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떠나지만, 제자들은 이제부터 세상에서 예수를 위해 고생하며 순교까지 하는 많은 수고가 있겠으므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둘째번 기도의 내용은, 간구하시는 기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7:11 하반절) 먼저,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이 펼쳐질 것이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잘 지켜 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지켜 주시되,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달라는 귀중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시와 지키었나이다."(17:12) 여기서 지켜 달라는 내용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게 해주시거나 오래 살게 해주시라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켜 주시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름이란 소유를 말합니다. 책을 한 권 사더라도 우리는 먼저 자기 이름부터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름을 쓰지 않으면 다 보고 다른 사람이 가져도 좋은데, 우리는 우선 자기 소유로 만들어 놓고 봅니다. 이렇게 이름은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세요" 하는 말은 아버지의 소유로, 아버지의 것으로 살게 해달라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살아도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름이란 그 이름의 주인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으면 천하게 되고 훌륭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으면 훌륭한 것입니다. 권위로 불려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골동품을 말할 때에 누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이다 하면 그 이름 때문에 값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이름으로가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살며, 그 이름으로 빛내며, 그 이름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켜 주세요"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빛내는 사람들이 되게끔 기도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 하는 간구로서,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다음 간구는 "하나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되어야 함은 너무 잘 아는 일입니다만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나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도 직장도 나라도 세계도 하나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언제나 하나되는 곳에 힘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마음도 둘로 분열이 되면 고민이 있게 되고 복잡하지만 하나이면 평안합니다. 하나됨은 곧 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며 한 운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킴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2장에도 보면,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복종이 있어야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란, 단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 즉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늘 가정과 교회가 하나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되기 위해서 필요한 희생과 수고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째로 가룟 유다에 대한 경고가 두 번 잠깐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본문 9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제한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이론대로 말하면 마치 제한 속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 즉 누구나 구원받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라고 제한 속죄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는, 12절에서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멸망의 자식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으로 기도할 때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성경으로 응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째로 기도의 내용은,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케 하옵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7:13)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는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있게 해 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기쁨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울면서 기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만 하면 우는 버릇이 있는데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신령하고 고상한 그 기쁨을 우리가 갖고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기쁨이 저희 안에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리스도의 기쁨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의로운 기쁨이요, 진리와 함께 있는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6장 마지막에 보면 특별히 아버지와 함께 있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내가 함께 하고 동행하는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래 기쁨이란 나 혼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살아가시면서 사랑으로 인한 기쁨, 희생으로 인한 기쁨, 믿음으로 인한 기쁨, 그리고 섬김으로 인한 기쁨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고 나서 배고픔도 잊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신령한 기쁨을 우리들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소유나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다섯째로 기도의 내용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7:15)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고 도피적인 생각을 합니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악에 빠지지 말라고 예수께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현실 도피가 아니고 현실 속에서 악을 이기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소극적이거나 도피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가난도 면케 하시고 병도 멀리 하시고 어려운 환경에서 훌쩍 떠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금 이대로를 원하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단지 이 시험을 이기고 사랑으로 승리하게 해주세요"라는 적극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필자는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아들에게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항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기도문 중의 한 부분으로 정말 적극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이를 편안하게 하고 어려운 일없이 잘되게 해주세요"라고 사람 구실 할 수 없도록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환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도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으면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6-17) 거룩이란 구별을 말하는 것으로 성별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편으로 구별되기를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우리의 생활의 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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