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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요 11:11-16)

by 【고동엽】 202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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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11:11-16)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의 가정에 원치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셔서 오빠를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와서 고쳐 주세요라는 요청을 받고서도 바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을병이 아니라고 잠깐 지체하시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기만 했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오시지 않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의 집을 향해 가시는 장면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이 말씀은 보통 자는 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뜻하는 것임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것이면 구태여 깨우러 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불통일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처럼 학교에 매일 등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먹고 자는 공부(full time study)3년을 배웠으니 오늘날 학생들의 학교 공부시간과 비교하면 10년 이상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많이 배우고 보고 들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즉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현대를 가리켜서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언어의 단절이 심각해 아버지와 아들이,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가슴을 칩니다. 그뿐 아니라 학문의 단절도 심각합니다. 전문화 시대이어서 공학하는 이는 의학을 모르고, 법학 하는 이는 문학을 전혀 모릅니다.

내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현대인들은 전문 분야가 깊으면 깊어질 수록 단절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 교수가 의학의 전문화로 인해서 오는 문제를 이야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내과라 해도 이 분야에서만도 다시 여러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으므로 비록 박사일지라도 자기 전공이 아니면 정확한 진찰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자들 스스로가 자기 병을 잘 판단해서 그 병에 알맞는 전문의를 찾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좀더 많이 가르쳐야 하겠다는 과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문이 얼마나 세분화되었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이, 깊게 학문을 연구하므로, 자기 세계 외에는 전혀 문외한이 되어 소위 단절의 벽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으며, 심지어 도덕의 단절까지 오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선()인 것이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단절입니다.

이 본문에서도 지금 언어의 단절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왜 이와 같은 단절이 생겼습니까? 그 이유로 첫째, 관심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렇게 서로 관심이 다르므로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자기 경험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이 사실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인하며 믿지 않으려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면에서는 나의 경험 밖의 세계는 알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상대방이 경험했다 하면 믿어야 합니다. 언제 내가 다 가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가령, 달나라에 갔다온 사람이 "달이 이러하다"고 말하면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가 곡 가봐야 믿겠습니까? 어리석게도 우리들은 나의 경험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갇혀서 대화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셋째, 상대방의 언어를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의 생각이 무엇이며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 즉 잘 듣는 마음이 있고서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하는 말보다 너의 말이 더 중하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있어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정신을 차려서 듣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이런 용어는 언제 어떻게 사용하신다고 하는 기본적인 것은 제자로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예수님과 통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 다루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들과 예수님은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화가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믿음과 겸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신령한 지혜와 진리에 대해 알게 되고 바른 대화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내 친구가 잠들었다. 깨우러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이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1 : 12)라고 말한 이유는 아주 중한 병일지라도 충분히 자고 나면 낫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을 하고 나면 웬만한 깊은 병도 차도가 있고, 몸살 정도는 거뜬히 낫게 된다는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 할머니들께서는 손자들이 소화가 안 되어 괴로워하다가 어찌해서 잠이 들면 "이젠 됐다, 잠들었으니 나을 것이다"라고 안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보통 건강하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입니다. 첫째, 잘 먹는다는 것은 많이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균형 있게 절제 있게 잘 먹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많이 먹고, 맛이 없으면 거의 먹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의 비결을 시간을 맞추어 일정한 양을 규칙적으로 먹는 일입니다. 입맛에 의해 먹는 양을 조절하지 말고 정신력으로 일정한 양을 먹어야 한단 말입니다. 둘째는 잘 자야 합니다. 밤은 하나님께서 휴식을 위해 주신 것이므로 깊이 자야 합니다. 일단 잠이 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대개 허약한 사람은 밤새도록 자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몽롱한 가운데 밤을 지내게 됩니다. 깊이 잠을 잔다는 것은 건강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자가 군에 있을 때 잠 때문에 큰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우리 부대가 갑자기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저만 남겨놓고 모두들 20리를 후퇴했습니다. 그런데, 후퇴하라는 정보가 잘못되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와보니, 제가 그 때까지 자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전우들이 흔들어 깨워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받은 정보가 사실이었다면 넌 죽든지 포로가 되었을 걸세" 하며 야단을 했습니다.

어쨌든 깊이 잔다는 것은 건강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웬만한 병도 자고 나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한 말은 생각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째, 적당한 운동도 건강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조건입니다. 적당한 운동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이 잘되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는 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 친구가 잠들었다"고 하신 말씀을 일반적인 잠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죽은 나사로를 왜 잔다고 표현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철학이 있고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원래 잔다는 말은 쉰다는 뜻으로, 사람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쉽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고달픈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긴 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혹시 죽음에 대해 두려운 생각이 있습니까? 필자는 아직 죽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책을 보았더니, 죽음은 잠자는 것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어리석은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숨을 쉬지 않아도 답답한데 땅 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지 않고 있을까 하는 걱정들을 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벌써 의식이 떠났고 영이 떠난 상태로서 고기덩어리인 육체만 남아 있는 것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긴 잠에 들어가서 쉬는거다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안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편히 쉬는 것이 죽음이라고 볼 때에, "죽는다"는 것을 "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잠을 자야 하듯이 죽음도 생의 과정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놓고 볼 때 죽음이 있어야 함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 중에서, 가끔 하나님께서 왜 빨리 불러 가시지 않는지 불편해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병들고 쇠하면 오래 산다는 것이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생리과정으로도 큰 잠, 즉 긴 휴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곧 다시 살리시려는 것을 생각하고 계셨으므로 구태여 죽었다고 표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이와 같은 큰 역사를 이루어서 부활의 진리, 생명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적인 설교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미리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진리를 설교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획인 것입니다. 물론 장례식까지 다 치루도록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니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망할 것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곧 일어날 것이니 나흘 정도 숨쉬지 않은 것은 잠든 것으로써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9:24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은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었으니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제 곧 일어날 것이니 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도 그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 : 60)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 : 6에서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라고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했으며,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 : 13에도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모두 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볼 때에 잠깐 잠드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누가 벌벌 떨며 들어갑니까? 죽음에 대한 자세도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편히 쉬러 가는 마음으로 눈감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죽을 시간을 대략 짐작하고, 침착하게 목욕하고 몸을 단정히 한 후에 자기 신변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 자는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분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모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고 또 곧 깨어날 것이니, 그 기간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에 다시 깨어날 것이니 죽음을 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죽음이란 부활 바로 직전에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써 금생과 내세 사이에 있는 터널로 이 과정을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은 사는 것이 아름답고 초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함께 지나온 제자들이잔다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지만 꾸짖지 않으시고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 : 14) 잔다는 것이 죽었음을 뜻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 이어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 : 15)고 깊은 뜻을 내포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어 가는 나사로에게 달려 가셨으면 그를 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잠깐 지연하시므로 섭섭함은 있었지만 보다 큰 섭리를 위해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장례식 비용도 나갔고 여러 가지로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잠깐 겪는 괴로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초월적이 믿음입니다. 사실, 해피 엔딩이 보장만 된다면 고생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성경의 예를 보면, 요셉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팔려가고 여러 가지 과정 끝에 총리대신이 됩니다. 만약 처음부터 총리대신이 된다는 확실한 보장만 있다면 애굽에서 고생좀 한다고 누가 불평하겠습니까? 고생을 하면 할수록 스릴이 있고 많은 경험은 생을 풍부하게 하므로 마지막 끝이 보장된다면 많은 고생은 영광으로 변합니다. 언제나 영광은 고생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생 없이 이룬 결과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다가 땅을 샀는데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면 복부인은 될지언정 자랑거리는 못됩니다. 그러나, 땀흘려 수고하고 고생한 것은 자손만대에까지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공부를 해도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써가면서 편안하게 공부한 사람보다는 고학한 사람이 더 많은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만 좋을 수 있다면 젊었을 때 하는 고생은 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세계관, 즉 결정적으로 미래가 보장될 것을 믿는다면 오늘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의 끝이, 즉 인간의 소망의 끝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지체하셨다는 문제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내 소원을 하나님께서 즉시 이루어 주셨으면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하루 이틀 연기하기도 하시고, 일 년 또는 십 년을 연기하십니다. 지연되는 그 기간에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늦어지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연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게 준비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참는게 아니라 기쁨으로 기다리는 놀라운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기뻐한 것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병고치는 분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즉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사건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 의심 많은 도마가 말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1 : 16) 예수께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하시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주님께서 가시는 이 길이 위험하니 죽더라도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충성은 갸륵하지만 무식하여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오늘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억지로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하므로 충성은 있지만 즐거움은 없습니다. 알고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으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억지로 끌려가듯 십자가를 지면 값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나사로가 죽은 것을 기뻐하고, 즉 너희들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하신 놀라운 믿음을 오늘 우리들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믿음을 우리들도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11:11-16)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의 가정에 원치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오셔서 오빠를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와서 고쳐 주세요라는 요청을 받고서도 바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죽을병이 아니라고 잠깐 지체하시는 동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기만 했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오시지 않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의 집을 향해 가시는 장면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이 말씀은 보통 자는 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뜻하는 것임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것이면 구태여 깨우러 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불통일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처럼 학교에 매일 등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먹고 자는 공부(full time study)3년을 배웠으니 오늘날 학생들의 학교 공부시간과 비교하면 10년 이상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많이 배우고 보고 들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즉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현대를 가리켜서 단절의 시대라고 합니다. 언어의 단절이 심각해 아버지와 아들이,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가슴을 칩니다. 그뿐 아니라 학문의 단절도 심각합니다. 전문화 시대이어서 공학하는 이는 의학을 모르고, 법학 하는 이는 문학을 전혀 모릅니다.

내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현대인들은 전문 분야가 깊으면 깊어질 수록 단절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 교수가 의학의 전문화로 인해서 오는 문제를 이야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내과라 해도 이 분야에서만도 다시 여러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으므로 비록 박사일지라도 자기 전공이 아니면 정확한 진찰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자들 스스로가 자기 병을 잘 판단해서 그 병에 알맞는 전문의를 찾아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좀더 많이 가르쳐야 하겠다는 과제가 나왔다고 합니다. 학문이 얼마나 세분화되었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많이, 깊게 학문을 연구하므로, 자기 세계 외에는 전혀 문외한이 되어 소위 단절의 벽은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으며, 심지어 도덕의 단절까지 오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선()인 것이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단절입니다.

이 본문에서도 지금 언어의 단절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왜 이와 같은 단절이 생겼습니까? 그 이유로 첫째, 관심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이렇게 서로 관심이 다르므로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자기 경험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이 사실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인하며 믿지 않으려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면에서는 나의 경험 밖의 세계는 알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상대방이 경험했다 하면 믿어야 합니다. 언제 내가 다 가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가령, 달나라에 갔다온 사람이 "달이 이러하다"고 말하면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가 곡 가봐야 믿겠습니까? 어리석게도 우리들은 나의 경험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갇혀서 대화를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셋째, 상대방의 언어를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의 생각이 무엇이며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 즉 잘 듣는 마음이 있고서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하는 말보다 너의 말이 더 중하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있어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정신을 차려서 듣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이런 용어는 언제 어떻게 사용하신다고 하는 기본적인 것은 제자로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예수님과 통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 다루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습니다. 이들과 예수님은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대화가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믿음과 겸손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신령한 지혜와 진리에 대해 알게 되고 바른 대화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내 친구가 잠들었다. 깨우러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이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1 : 12)라고 말한 이유는 아주 중한 병일지라도 충분히 자고 나면 낫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수면을 하고 나면 웬만한 깊은 병도 차도가 있고, 몸살 정도는 거뜬히 낫게 된다는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 할머니들께서는 손자들이 소화가 안 되어 괴로워하다가 어찌해서 잠이 들면 "이젠 됐다, 잠들었으니 나을 것이다"라고 안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보통 건강하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입니다. 첫째, 잘 먹는다는 것은 많이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균형 있게 절제 있게 잘 먹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많이 먹고, 맛이 없으면 거의 먹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의 비결을 시간을 맞추어 일정한 양을 규칙적으로 먹는 일입니다. 입맛에 의해 먹는 양을 조절하지 말고 정신력으로 일정한 양을 먹어야 한단 말입니다. 둘째는 잘 자야 합니다. 밤은 하나님께서 휴식을 위해 주신 것이므로 깊이 자야 합니다. 일단 잠이 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대개 허약한 사람은 밤새도록 자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몽롱한 가운데 밤을 지내게 됩니다. 깊이 잠을 잔다는 것은 건강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자가 군에 있을 때 잠 때문에 큰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우리 부대가 갑자기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이 저만 남겨놓고 모두들 20리를 후퇴했습니다. 그런데, 후퇴하라는 정보가 잘못되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와보니, 제가 그 때까지 자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전우들이 흔들어 깨워 말하기를, "만약 우리가 받은 정보가 사실이었다면 넌 죽든지 포로가 되었을 걸세" 하며 야단을 했습니다.

어쨌든 깊이 잔다는 것은 건강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웬만한 병도 자고 나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한 말은 생각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째, 적당한 운동도 건강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조건입니다. 적당한 운동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이 잘되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는 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 친구가 잠들었다"고 하신 말씀을 일반적인 잠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죽은 나사로를 왜 잔다고 표현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철학이 있고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원래 잔다는 말은 쉰다는 뜻으로, 사람은 낮에 일하고 밤에 쉽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고달픈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긴 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혹시 죽음에 대해 두려운 생각이 있습니까? 필자는 아직 죽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책을 보았더니, 죽음은 잠자는 것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어리석은 염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숨을 쉬지 않아도 답답한데 땅 속에서 어떻게 숨을 쉬지 않고 있을까 하는 걱정들을 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벌써 의식이 떠났고 영이 떠난 상태로서 고기덩어리인 육체만 남아 있는 것이므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긴 잠에 들어가서 쉬는거다라고 생각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안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편히 쉬는 것이 죽음이라고 볼 때에, "죽는다"는 것을 "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잠을 자야 하듯이 죽음도 생의 과정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놓고 볼 때 죽음이 있어야 함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 중에서, 가끔 하나님께서 왜 빨리 불러 가시지 않는지 불편해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병들고 쇠하면 오래 산다는 것이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생리과정으로도 큰 잠, 즉 긴 휴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곧 다시 살리시려는 것을 생각하고 계셨으므로 구태여 죽었다고 표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이와 같은 큰 역사를 이루어서 부활의 진리, 생명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적인 설교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미리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진리를 설교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획인 것입니다. 물론 장례식까지 다 치루도록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니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망할 것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곧 일어날 것이니 나흘 정도 숨쉬지 않은 것은 잠든 것으로써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9:24에 보면,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은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었으니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제 곧 일어날 것이니 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도 그 장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 : 60)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 : 6에서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라고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했으며,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 : 13에도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모두 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볼 때에 잠깐 잠드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누가 벌벌 떨며 들어갑니까? 죽음에 대한 자세도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편히 쉬러 가는 마음으로 눈감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죽을 시간을 대략 짐작하고, 침착하게 목욕하고 몸을 단정히 한 후에 자기 신변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 자는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분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모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고 또 곧 깨어날 것이니, 그 기간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에 다시 깨어날 것이니 죽음을 자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죽음이란 부활 바로 직전에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써 금생과 내세 사이에 있는 터널로 이 과정을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내세관이 분명한 사람은 사는 것이 아름답고 초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함께 지나온 제자들이잔다는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지만 꾸짖지 않으시고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 : 14) 잔다는 것이 죽었음을 뜻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 이어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 : 15)고 깊은 뜻을 내포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어 가는 나사로에게 달려 가셨으면 그를 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잠깐 지연하시므로 섭섭함은 있었지만 보다 큰 섭리를 위해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장례식 비용도 나갔고 여러 가지로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잠깐 겪는 괴로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초월적이 믿음입니다. 사실, 해피 엔딩이 보장만 된다면 고생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성경의 예를 보면, 요셉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팔려가고 여러 가지 과정 끝에 총리대신이 됩니다. 만약 처음부터 총리대신이 된다는 확실한 보장만 있다면 애굽에서 고생좀 한다고 누가 불평하겠습니까? 고생을 하면 할수록 스릴이 있고 많은 경험은 생을 풍부하게 하므로 마지막 끝이 보장된다면 많은 고생은 영광으로 변합니다. 언제나 영광은 고생과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생 없이 이룬 결과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다가 땅을 샀는데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면 복부인은 될지언정 자랑거리는 못됩니다. 그러나, 땀흘려 수고하고 고생한 것은 자손만대에까지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공부를 해도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써가면서 편안하게 공부한 사람보다는 고학한 사람이 더 많은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만 좋을 수 있다면 젊었을 때 하는 고생은 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세계관, 즉 결정적으로 미래가 보장될 것을 믿는다면 오늘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의 끝이, 즉 인간의 소망의 끝이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지체하셨다는 문제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내 소원을 하나님께서 즉시 이루어 주셨으면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하루 이틀 연기하기도 하시고, 일 년 또는 십 년을 연기하십니다. 지연되는 그 기간에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늦어지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연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 크게 준비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참는게 아니라 기쁨으로 기다리는 놀라운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기뻐한 것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병고치는 분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지만, 이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즉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사건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 의심 많은 도마가 말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11 : 16) 예수께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하시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 주님께서 가시는 이 길이 위험하니 죽더라도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충성은 갸륵하지만 무식하여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오늘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억지로 피곤하게 신앙생활을 하므로 충성은 있지만 즐거움은 없습니다. 알고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으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억지로 끌려가듯 십자가를 지면 값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나사로가 죽은 것을 기뻐하고, 즉 너희들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하신 놀라운 믿음을 오늘 우리들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믿음을 우리들도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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