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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책임(요 15:22-27)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죄가 죄 되는 것은 죄 자체의 객관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인정하든 아니하든,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면 그것은 죄입니다. 죄의 객관적 성격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간혹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죄를 평가합니다. 인간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든지, 육신이 약하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불가피함을 주장하든지 또는 세상이 어떠하고 상황이 어떠했다고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죄를 상황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죄대로 하나님 앞에 엄연히 객관적 의미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죄로 규정받는 일, 즉 죄로 인정되는 일에는 상황적인 것이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합시다. 사람을 죽인 것은 분명한 죄로서 벗어날 수 없는 가책이 있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정당방위라는 것이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이 참고가 되면 살인죄라도 감하여지며 자책이 어느 정도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정당방위가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양심과 마음속으로 갖는 죄책은 절대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객관적으로 성립되지만 죄에 대한 인정, 혹은 죄에 대한 평가는 다음 두 가지에 의해서 하게 됩니다.
하나는 지식이요, 또 하나는 능력입니다. 지식과 능력, 둘 다 하나의 가능성을 말하고 자유를 말합니다. 능력이 없는 것도 자유가 없는 것이며, 지식이 모자라는 것도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자유하든지 능력이 없게 되면 상당한 감형, 혹은 죄에 대한 성격을 어느 정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문제가 죄의 성립을 평가해 주고 죄의 기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죄의 성립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술취한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술취한 사람이 행한 실수도 실수로서 문제는 문제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취했다는 것은 곧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며,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어느 정도 죄를 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가 감해지지만 반대로 술이 취해서 운전을 한, 술 마신 죄가 또 있습니다. 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안다는 문제가 항상 따라가고 있습니다. 많이 알면 죄가 커지고, 몰랐다면 죄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몰랐던 것은 몰랐다는 죄가 있게 됩니다. 모른다는 죄는 아는 바를 부정했기 때문에 모르게 된 것이므로, 몰랐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있는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죄가 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약해서도 못하고 몰라서 못하는, 즉 능력과 지혜가 부족해서 못하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나약함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자유의 영역이 되고 그 영역 안에서 죄됨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같이 선생이 되지 말라." 남을 가르친다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잘못 가르치는 것은 아주 무거운 죄입니다. 특히,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영향력이란 아이들의 평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혀 놓으면 평생 그 상처를 씻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된다는 것, 즉 남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됩니다. 그래도 인간은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세 가지 죄가 있다고 인도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첫째가 배우지 않는 죄요,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 죄며, 세째는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교만하여 아는 척하며 배우지 않는 문제가 현대인에게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알기는 웬만큼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적게 알고 아는 대로 실천하였는데, 오늘날은 많이 알되 아는 만큼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아 자기 지식에 대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는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내가 알고 있는 소중한 진리를 형제에게, 이웃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 큰 문제입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누구를 가르치겠느냐고 모두 물러선다면 결국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가운데, 두 가지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는 가르쳤고, 또 하나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을 사람에 대한 계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가, 즉 그 존재가 어떠하고 능력이 어떠한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에 대한 계시자요, 동시에 참 사람에 대한 계시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참 사람이 무엇이며 사람이 어떠하여야 하고 사람의 능력이 어디까지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알고자 할 때에, 나 자신에 의해서나 어느 영웅, 또는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통계 숫자에 의해서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90%가 그렇다고 하면 맞는 말이라고 통계에 의존합니다. 가령, 90%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00명 중 한 사람이 주장을 해도 옳은 일은 옳은 일입니다. 통계 숫자에 의해 즉 다수에 의해 진리를 평가한다는 것처럼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을 아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어디까지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받았느냐 하는 모든 것을 예수를 통하여야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야만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전도하시고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배워서 알았습니다. 이제 알았으므로 우리는 그만큼 죄가 더 많습니다. 알면서 실천하지 아니하고, 알면서 회개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에는 알았다는 사실 때문에 죄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생각할 때 살인이 죄요, 간음이 죄요, 도둑질이 죄요, 거짓 증거가 죄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가르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남의 물건을 보고 탐을 내어도 죄요, 음란한 마음을 먹기만 해도 죄요, 미워하는 마음을 먹으면 살인한 것과 같다고 엄청난 이론을 가르치셨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 죄가 없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반드시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살인죄를 짓지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귀중한 진리를 배웠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리고의 광야길에 불한당을 만나 한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보고 지나갔습니다. 이상 두 사람은 살인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의 논법으로는 살인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내버려 둔 것은 죽도록 방치한 것이므로 살인입니다. 반드시 내가 해를 입혀 죽인 것만 살인이 아니라,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돕지 않은 것은 살인이란 말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손을 털고 교만하게, "나는 살인한 일이 없다"고 자랑하겠지만 살인을 했다는 예수님의 정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을 들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훈을 듣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아니 더 큰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 같은 사건일 경우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죄에 대한 심판이 다름을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중량은 같으나 평가는 다릅니다. 아는 사람의 죄가 더 크고, 믿는 사람의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은 우리의 입장만 더욱 곤란하게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들은 핑계할 수 없다고 꼼짝 못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성경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죄가 점점 더 무거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알고 지켜 나갈 때는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되고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무엇인가 변명할 수 있고 나는 전혀 듣지 못해 믿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제 핑계치 못합니다. 많이 들었고 깨닫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으니 이제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입니까? 열심히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6 : 4 이하에 보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 : 4-6)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두 가지 길로 옴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객관적인 계시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매일매일 당하는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이것은 옳은 길이요 저것은 그릇된 길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둘째로는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감동하셔서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이 동시적으로 말씀하시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억지로 피한다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죄는 큽니다. 예수께서 이런 죄는 영원히 사함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성령으로 감동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이것을 부인하기 위해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억지 해석까지 내렸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함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 이것으로 인해서 그만큼 인간적인 가치가 높아지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자유의 영역이 커집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도 커집니다. 아주 큰 책임을 가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했어도 어린 아이가 한 것과 어른이 한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지식에 대한 혹은 깨달음에 대한 나의 체험에 대해 책임을 강하게 느껴야 합니다. 첫째는,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는 배웠기 때문에 책임이 있고, 둘째는 우리에게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 : 24)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주 죄인이 될 바에는 모두가 죄인으로 율법을 못지켜도 괜찮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아무도 못하는 일을 예수께서 완성하셨으므로 이제 핑계할 수 없고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은 형제는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원수는 미워서 사랑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죄가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가능성을 보여주셨고 그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사랑하신 원수와 우리의 원수는 비교가 안 됩니다. 어쨌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이제 핑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 원수만은 정말 안 됩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원수와 비교해 보아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셨으므로, 지키지 못한다든지 이에 도전할 말이나 핑계거리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셨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시험당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실 때마다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40일을 굶주린 후에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을 생각함은 당연하다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40일을 금식기도 하시고도 말씀을 앞세웠는데 겨우 사흘을 굶고서 도둑질은 괜찮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빵이 먼저라는 생각은 말아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만큼 어려울 수 없고, 아무리 억울해도 예수님만큼 억울할 수 없고, 아무리 고난을 당한다 해도 예수님만큼 고난당할 수 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어떤 분이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서 예수님 십자가와 자기 아픔을 비교했답니다. 비교가 되는 일입니까? 흔히 아프면 십자가를 들추는데 그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시험을 이길 수 있을 방법을 보여주셨으므로 이제 변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 못했으면 내 잘못으로, 하나님을 탓할 수 없고 세상을 탓할 수도 없고 율법을 나무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못하는 일을 주께서 행하셨으므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은,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심판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는 것도 은혜요, 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누리는 특권과 자유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25)고 시편 35:19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연고없이 미워한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바르게 사는 사람, 진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중상모략이 있기도 하고 핍박이 있기도 합니다. 연고없이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옛말에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말이 있는데, 요즈음은 가스불을 써서 그런지 아니땐 굴뚝에도 연기가 납니다. 모두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발달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없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혀 근거가 없고 연고도 없이 핍박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고, 깨끗하게 살아도 핍박이 있음을 알면, 핍박을 당해도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움이나 핍박을 받게 되면 우선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그려려니 하고 50%라도 무슨 연고나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은 부족하여서 연고가 있습니다만 연고없이도 핍박이 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핍박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까닭 없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생각하면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고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를 지었으면 그런 대로 정당화될 수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의롭게 살면 의롭게 산 그 사람 때문에 모두가 부끄럽게 됩니다. 아무도 못하면 좋겠는데 할 수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정죄당하는 것입니다. 가령,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데 모든 학생들이 그 문제를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선생님이 잘못 냈거나 배우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학생이라도 풀었다면 다른 학생들은 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한 학생이 풀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정죄당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거짓말을 했는데 한 사람이 진실했다면 진실한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아니해도 거짓된 사람들은 정죄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해 의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죄인들은 극악스럽게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살려고 할 때 그것으로 말미암아 핍박이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외롭고 어려운 길을 누가 위로해 줍니까?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나오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 : 27)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해 주십니다. 세상 사람이 다 정죄하여도 나는 성령의 증거, 양심의 성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사는 사람은 핍박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기쁨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의 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진리의 영이 위로합니다. 또한 사도들이 증거한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설명하면, 역시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진리 안에 있는 자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자가 진실한 자를 알아봅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증거해 주므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때문에 아는 것이 많습니다. 또한 그만큼 책임이 큽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때문에 선을 행하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증거해 주시므로 외롭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는 큰 기쁨과 위로와 감사를 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살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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