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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버린 지식인(마태복음 21장 23절~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33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하셨습니다. 전하는 일만이 아니라 복음 그대로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어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고 왕래하는 중에 길에서 만난 병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상(喪)당한 집을 방문해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어 절망을 생명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평생을 문둥병 환자로 살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깨끗케 하셨고 배고픈 자에게는 먹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위로하며 돌봐주셨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지지자가 많았습니다. 추종자도 많았습니다. 저들은 조만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역사가 이루어지리라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해자와 오해자, 원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옆에서 함께 못 박히던 강도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는 저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아마도 강도이기에 정보에 더 밝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행하시는 이적을 직접 목격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강도가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얼마나 귀한 이야기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천명(闡明)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 이하를 보십시다. 세례 요한이 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당신이 메시야냐 아니냐, 도대체 누구냐 --- 정체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보고 들은 대로, 그만큼만 전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선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이러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토록 선하고 귀한 분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세상입니다. 결국은 공적으로 역사하신 3년밖에 일하지 못하셨습니다. 겨우 3년 일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하고 귀한 사람은 고이 남겨두지를 않습니다. 우리같이 허물이 많은 사람에게야 당연히 핍박이 따르겠습니다마는 거룩하고 깨끗하신 예수님께 핍박과 박해라니, 이 무슨 당찮은 일입니까? 십자가 죽음이라니, 도대체 웬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모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올라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십자가로 향하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 사건을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예수께서는 원수들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를 죽여달라, 나를 죽여달라 하고 말한 것이다.'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과연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까?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핍박이 따르자 몰래 로마성을 빠져나옵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은 로마 성에 국한되어 있어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너 예수의 사람이냐?'하고 누가 물을 일도 아닙니다. 그 자리만 피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정말로 베드로는 몰래 로마 성을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향하여 들어가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버린 로마에 돌아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 하노라." "오 주여,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들어갑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 이적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서 있던 자리에 베드로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저도 로마에 가서 그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위대한 생을 사는 사람들은 명예, 지위, 지식, 재산 할 것 없이 마지막 죽음까지도 스스로 선택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다가, 혹은 못된 짓 하다가 붙잡혀서 죽는 비겁한 죽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가 있고 의로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뒤따릅니다. 이 행렬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됩니다.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더더욱 문제가 된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어지럽혀진 성전 안을 깨끗케 하는 권세를 행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제사장은 예물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검사합니다. 만일에라도 부정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다시 바꾸어와야 합니다. 내다 팔고 다른 것을 사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안으로 점점 가까이 들어와서 성전 뜨락이 그대로 사장바닥이 되어 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 비둘기 파는 사람,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로 인하여 성전이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실인즉 교회를 관리하다보면 이 때문에 문제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앞이나 입구에서 장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카세트를 팔겠다느니, 책을 팔겠다느니 합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사하기를 원합니다. 내용은 좋은 것들인지 모르나 안 된다고 딱 잘라버립니다. 몹시들 섭섭해합니다. 나중에는 성경책이라도 좀 팔겠다고 하지만 안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도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성전이 시장바닥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지러워진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었던 터라 낯선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내몰아도 저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성전은 깨끗해졌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통쾌히 여겼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마 21:13)"하셨습니다. 저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려나보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난처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곤란해졌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점점 더럽혀지고 세속화하여가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기들의 이권 때문에 대충 타협하고 눈감아주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제는 할말이 없습니다. 위신과 체면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가 살면 저들이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이 귀한 역사를 계속하면 저들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흥하면 저들은 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당연히 저들이 성전을 깨끗이 했어야 하는데 그러구러 못하고 있다가 큰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무슨 말이든 꼭 하기는 해야겠는데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 23절의 말씀을 봅시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고작 예수님의 정체를 묻습니다.
이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둘째로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묻습니다. 당신의 뿌리는 누구냐 --- 권세의 근원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준비되지 아니한 저들의 마음에 무슨 대답이 소용있습니까? 다만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5절)." 세례 요한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한 진실하고 충성된 선지자다, 모두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의논합니다. 하늘로서 왔다고 진실하게 대답하면 "그렇다면 어찌하여 믿지 않았느냐, 왜 세례 요한을 따르지 않았느냐" 할 것이요, 사람에게로서 왔다고 말했다가는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이 분노하여 저들에게 돌을 던질 것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아주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 ---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7절)." 저들은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참지식을 향한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알고 있었으나 믿지 않았고 인정하고 있었으나 따르지 않았기에 결국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릴없이 은총 밖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금언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을 헤치는 말은 일체 하지 말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많이 하여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헐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남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로, 받아들이지 않는 충고는 하지 말 것입니다. 요즘은 레저다 스포츠다 하여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제가 관련서적을 읽어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디다. '다른 사람이 운동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 본인이 요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충고를 하지 말라.'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집에서 혼자 하기 전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옆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은 틀렸으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참견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기분 좋을 사람 없습니다. 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운동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충고는 조심할 것입니다. 요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충고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모든 일에 불평하지 말 것입니다. 불평이란 많은 사람을 해칩니다. 자신도 해롭습니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평객이 되어버립니다. 불평거리는 자꾸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불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설명을 하지 말 것입니다. 설명이 길어지면 변명이 됩니다. 선물을 줄 때에도 설명을 많이 하면 안주는 것만도 못합니다. 잔소리가 많으면 질색입니다. 묵묵히 행할 것입니다.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도 없습니다. 그대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설명, 조심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한 진주를 개한테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저들, 완악한 마음으로 지식을 저버린 그 지식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뉴턴은 그의 저서 가운데 사람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어 운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생을 기피하려는 요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나의 기분, 나의 욕심만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쉽게 편하게 안전하게 살려는, 눈앞의 이득에만 마음을 쓰는 기회주의자를 일컫습니다. 두 번째로, 달려가는 말에 올라타서 목에 매달려 있는 사람입니다. 떨어질까 봐 목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의지란 없습니다. 말이 달려가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끌려갑니다. 이처럼 종속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창조주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완전히 위탁하고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충성 되이 사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이 세 번째 사람을 통하여 창조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지식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지식입니다.
이는 내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있는 그대로의 지식이요, 진리입니다. 두 번째는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그 지식을 내가 수락하고 수용하고 신뢰하고 긍정하면서 비로소 나의 지식이 됩니다. 나와 관계된 지식입니다. 내가 기꺼이 따르면서 나의 지식으로 바꾸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 지식입니다.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분을 믿기에 그 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음식의 영양가를 내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것이기에 좋은 것인 줄로 알고 먹습니다. 충고도 한가지입니다.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지마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말씀이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자동차 공장을 한번 방문해보았습니다. 쇠를 녹여 부어 엔진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굴러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잠깐동안에 다 지켜보았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대의 자동차는 약 2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네 개의 바퀴가 재빠르게 굴러가지 않습니까? 그 바퀴를 지탱시키고 있는 축을 보십시오. 꼭 손가락 만한 굵기입니다. 여기에 바퀴를 걸어서 너트(nut) 하나로 죄어놓았을 뿐입니다. 이 너트가 빠져 달아나거나 축이 부러지면 차는 곤두박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믿고 타고 다닙니다. 시속 백 킬로로도 달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에는 없습니다만 외국의 자동차 중에는 똑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쪽에 '커스텀 메이드(custom-made)'라고 씌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글자 하나로 그 차의 가격은 훨씬 비싸집니다. 책임을 지고 조립했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에 비하여 안전성을 믿을 수 있어서입니다. 더 고급자동차에는 아예 조립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씌어 있습니다. 가격이 더 비쌉니다. 그만큼 책임을 지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조립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믿고 탑니다. 마음놓고 엄청난 속력으로 달립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그러합니다. 일일이 확인하고 살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 제품이다 하면 신임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제품이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무릇 신뢰에서부터 신앙적 지식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박한 지식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합니다. 심오한 지식은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듭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른다 하고 지식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저들의 생명, 체면, 지위, 인격을 내세우느라, 또 저들 자신을 살리고자 하느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도 심판 받아 죽게 됩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어느 유명한 배우가 자신을 위하여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배우는 음성도 좋고 말솜씨도 유창했습니다. 특별히 대사를 멋지게 읊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침 그에게 대사를 하나 읊어보라고 박수로 청합니다. 그는 뭘 읊을까 생각한 끝에 시편 23편을 암송하기로 했습니다. 부드러운 음성이 마이크를 통하여 흘러나옵니다.
아주 잘 읊었습니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 자리에 나이많은 목사님 한 분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분께도 시편 23편을 암송해보라고 청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음성도 껄껄하고 다듬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발음도 좋지 않고 중간에 실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암송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모였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이 유명한 배우는 생각합니다. '나는 시편 23편을 알고는 있지만, 목사님은 믿고 계시다. 나는 시편 23편을 읽고 있지만, 목사님은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계시다.'
여러분, 지식이 어떤 것입니까?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믿고 있으며,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너져야 할 것이라면 빨리 무너져야 합니다. 죽어야 할 것이라면 빨리 죽어야 합니다. 부정해버려야 할 것이라면 빨리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지식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긍정할 때에 생명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호산나 --- 지나간 소리가 아닙니다. 한낱 함성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중심에서부터 예수님을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호산나를 부를 수 있을 때에야 주님의 귀하신 생명, 그 신비로움에 동참하여 함께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지식을 버린 지식인(마태복음 21장 23절~27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33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하셨습니다. 전하는 일만이 아니라 복음 그대로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어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고 왕래하는 중에 길에서 만난 병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상(喪)당한 집을 방문해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어 절망을 생명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평생을 문둥병 환자로 살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깨끗케 하셨고 배고픈 자에게는 먹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불쌍하고 약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위로하며 돌봐주셨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지지자가 많았습니다. 추종자도 많았습니다. 저들은 조만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역사가 이루어지리라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해자와 오해자, 원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옆에서 함께 못 박히던 강도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는 저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아마도 강도이기에 정보에 더 밝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행하시는 이적을 직접 목격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강도가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얼마나 귀한 이야기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천명(闡明)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 이하를 보십시다. 세례 요한이 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당신이 메시야냐 아니냐, 도대체 누구냐 --- 정체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 이런저런 설명도 없이 보고 들은 대로, 그만큼만 전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선명하게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이러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토록 선하고 귀한 분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세상입니다. 결국은 공적으로 역사하신 3년밖에 일하지 못하셨습니다. 겨우 3년 일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하고 귀한 사람은 고이 남겨두지를 않습니다. 우리같이 허물이 많은 사람에게야 당연히 핍박이 따르겠습니다마는 거룩하고 깨끗하신 예수님께 핍박과 박해라니, 이 무슨 당찮은 일입니까? 십자가 죽음이라니, 도대체 웬 말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겠다고 모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올라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십자가로 향하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 사건을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예수께서는 원수들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를 죽여달라, 나를 죽여달라 하고 말한 것이다.'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과연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까?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핍박이 따르자 몰래 로마성을 빠져나옵니다. 네로 황제의 핍박은 로마 성에 국한되어 있어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너 예수의 사람이냐?'하고 누가 물을 일도 아닙니다. 그 자리만 피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정말로 베드로는 몰래 로마 성을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향하여 들어가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버린 로마에 돌아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 하노라." "오 주여,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들어갑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 이적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서 있던 자리에 베드로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저도 로마에 가서 그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위대한 생을 사는 사람들은 명예, 지위, 지식, 재산 할 것 없이 마지막 죽음까지도 스스로 선택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다가, 혹은 못된 짓 하다가 붙잡혀서 죽는 비겁한 죽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가 있고 의로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뒤따릅니다. 이 행렬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됩니다.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더더욱 문제가 된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어지럽혀진 성전 안을 깨끗케 하는 권세를 행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제사장은 예물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검사합니다. 만일에라도 부정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다시 바꾸어와야 합니다. 내다 팔고 다른 것을 사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다보니 자연히 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안으로 점점 가까이 들어와서 성전 뜨락이 그대로 사장바닥이 되어 있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 비둘기 파는 사람,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로 인하여 성전이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실인즉 교회를 관리하다보면 이 때문에 문제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앞이나 입구에서 장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카세트를 팔겠다느니, 책을 팔겠다느니 합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사하기를 원합니다. 내용은 좋은 것들인지 모르나 안 된다고 딱 잘라버립니다. 몹시들 섭섭해합니다. 나중에는 성경책이라도 좀 팔겠다고 하지만 안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도 제사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이렇게 저렇게 타협하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성전이 시장바닥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안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지러워진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었던 터라 낯선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내몰아도 저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성전은 깨끗해졌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통쾌히 여겼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마 21:13)"하셨습니다. 저들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무엇이 이루어지려나보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난처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곤란해졌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점점 더럽혀지고 세속화하여가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자기들의 이권 때문에 대충 타협하고 눈감아주다가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제는 할말이 없습니다. 위신과 체면이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가 살면 저들이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이 귀한 역사를 계속하면 저들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흥하면 저들은 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당연히 저들이 성전을 깨끗이 했어야 하는데 그러구러 못하고 있다가 큰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무슨 말이든 꼭 하기는 해야겠는데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 23절의 말씀을 봅시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고작 예수님의 정체를 묻습니다.
이것이 첫째 질문입니다. 둘째로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묻습니다. 당신의 뿌리는 누구냐 --- 권세의 근원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준비되지 아니한 저들의 마음에 무슨 대답이 소용있습니까? 다만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5절)." 세례 요한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서 목 베임을 당한 진실하고 충성된 선지자다, 모두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의논합니다. 하늘로서 왔다고 진실하게 대답하면 "그렇다면 어찌하여 믿지 않았느냐, 왜 세례 요한을 따르지 않았느냐" 할 것이요, 사람에게로서 왔다고 말했다가는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이 분노하여 저들에게 돌을 던질 것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아주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 ---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7절)." 저들은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참지식을 향한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알고 있었으나 믿지 않았고 인정하고 있었으나 따르지 않았기에 결국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릴없이 은총 밖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금언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다른 사람을 헤치는 말은 일체 하지 말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많이 하여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헐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남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로, 받아들이지 않는 충고는 하지 말 것입니다. 요즘은 레저다 스포츠다 하여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제가 관련서적을 읽어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디다. '다른 사람이 운동하는 것을 보게 될 경우 본인이 요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충고를 하지 말라.'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집에서 혼자 하기 전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옆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은 틀렸으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고 참견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기분 좋을 사람 없습니다. 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운동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충고는 조심할 것입니다. 요청하기 전에는 절대로 남을 충고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모든 일에 불평하지 말 것입니다. 불평이란 많은 사람을 해칩니다. 자신도 해롭습니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평객이 되어버립니다. 불평거리는 자꾸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불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설명을 하지 말 것입니다. 설명이 길어지면 변명이 됩니다. 선물을 줄 때에도 설명을 많이 하면 안주는 것만도 못합니다. 잔소리가 많으면 질색입니다. 묵묵히 행할 것입니다.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짓도 없습니다. 그대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설명, 조심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한 진주를 개한테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저들, 완악한 마음으로 지식을 저버린 그 지식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뉴턴은 그의 저서 가운데 사람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어 운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생을 기피하려는 요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나의 기분, 나의 욕심만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쉽게 편하게 안전하게 살려는, 눈앞의 이득에만 마음을 쓰는 기회주의자를 일컫습니다. 두 번째로, 달려가는 말에 올라타서 목에 매달려 있는 사람입니다. 떨어질까 봐 목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의지란 없습니다. 말이 달려가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끌려갑니다. 이처럼 종속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창조주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완전히 위탁하고 그분이 지시하는 대로 충성 되이 사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역사가 이 세 번째 사람을 통하여 창조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지식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지식입니다.
이는 내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있는 그대로의 지식이요, 진리입니다. 두 번째는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그 지식을 내가 수락하고 수용하고 신뢰하고 긍정하면서 비로소 나의 지식이 됩니다. 나와 관계된 지식입니다. 내가 기꺼이 따르면서 나의 지식으로 바꾸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 지식입니다.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분을 믿기에 그 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먹는 음식의 영양가를 내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것이기에 좋은 것인 줄로 알고 먹습니다. 충고도 한가지입니다.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지마는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의 말씀이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자동차 공장을 한번 방문해보았습니다. 쇠를 녹여 부어 엔진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굴러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잠깐동안에 다 지켜보았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대의 자동차는 약 2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네 개의 바퀴가 재빠르게 굴러가지 않습니까? 그 바퀴를 지탱시키고 있는 축을 보십시오. 꼭 손가락 만한 굵기입니다. 여기에 바퀴를 걸어서 너트(nut) 하나로 죄어놓았을 뿐입니다. 이 너트가 빠져 달아나거나 축이 부러지면 차는 곤두박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믿고 타고 다닙니다. 시속 백 킬로로도 달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에는 없습니다만 외국의 자동차 중에는 똑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쪽에 '커스텀 메이드(custom-made)'라고 씌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글자 하나로 그 차의 가격은 훨씬 비싸집니다. 책임을 지고 조립했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에 비하여 안전성을 믿을 수 있어서입니다. 더 고급자동차에는 아예 조립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씌어 있습니다. 가격이 더 비쌉니다. 그만큼 책임을 지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조립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믿고 탑니다. 마음놓고 엄청난 속력으로 달립니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그러합니다. 일일이 확인하고 살 수 없습니다. 어느 회사 제품이다 하면 신임하는 것입니다. 회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제품이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무릇 신뢰에서부터 신앙적 지식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박한 지식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합니다. 심오한 지식은 우리의 인격을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듭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른다 하고 지식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저들의 생명, 체면, 지위, 인격을 내세우느라, 또 저들 자신을 살리고자 하느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들도 심판 받아 죽게 됩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어느 유명한 배우가 자신을 위하여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 배우는 음성도 좋고 말솜씨도 유창했습니다. 특별히 대사를 멋지게 읊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마침 그에게 대사를 하나 읊어보라고 박수로 청합니다. 그는 뭘 읊을까 생각한 끝에 시편 23편을 암송하기로 했습니다. 부드러운 음성이 마이크를 통하여 흘러나옵니다.
아주 잘 읊었습니다. 모두들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 자리에 나이많은 목사님 한 분이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분께도 시편 23편을 암송해보라고 청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음성도 껄껄하고 다듬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발음도 좋지 않고 중간에 실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고 암송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모였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이 유명한 배우는 생각합니다. '나는 시편 23편을 알고는 있지만, 목사님은 믿고 계시다. 나는 시편 23편을 읽고 있지만, 목사님은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계시다.'
여러분, 지식이 어떤 것입니까?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믿고 있으며,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너져야 할 것이라면 빨리 무너져야 합니다. 죽어야 할 것이라면 빨리 죽어야 합니다. 부정해버려야 할 것이라면 빨리 부정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지식에 그칠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긍정할 때에 생명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호산나 --- 지나간 소리가 아닙니다. 한낱 함성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중심에서부터 예수님을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호산나를 부를 수 있을 때에야 주님의 귀하신 생명, 그 신비로움에 동참하여 함께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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