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실망과 소망의 기로(누가복음 24장 13절~27절)

by 【고동엽】 2023. 9. 9.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실망과 소망의 기로(누가복음 241327)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 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또 우리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절망과 소망, 실망과 용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실 주변 환경이나 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혹은 성경적 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이러하니 나는 틀렸다, 이 일이 잘되니 나는 힘이 난다--그럴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오직 믿음과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여건에서도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여건과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유무가 문제요, 어떤 질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그처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형들이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운명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로 인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야곱은 이 일로 인하여 13년 동안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그것도 맹수에게 갈가리 찢겨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말입니다. 13년 동안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오해한 채로 요셉을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끌려가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마는, 뒤늦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진 드라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역시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난센스가 있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은 것으로 인하여 훗날 동생 앞에 섰을 때, 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저들은 벌벌 떱니다. 이제 동생이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절대로 무사할 리가 없다, 우리가 그렇듯 억울하게 저를 팔아먹었는데 저가 지금 권좌에 앉았으니 우리는 이제 죽었다, 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님들이 나를 팔았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이 현실을 놓고 보세요. 3자의 이야기가 전부 믿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도 비참한 것입니다. 사실 아닌 것에 뿌리를 둔 헛된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비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있는 것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마음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한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늘 생각합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것도 불행이지만,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믿을 사람을 못 믿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는 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요.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될 시간이요, '할렐루야' 만세를 부르며 기뻐해야 될 그런 현실에,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유독히 이것은 슬퍼해야 되고, 절망해야 되고, 낙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같은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얘기 같지만, 오늘의 본문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한 편의 난센스 드라마입니다. 그 얼마나 한심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어요. 한갓 우스갯거리입니다. 정말이지 냉정하게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실망할 것도 없고, 슬퍼할 이유가 없는 일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근심하며 슬퍼하며, 그렇게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나 있습니다. 몇 사람이 가서 보고, 천사를 만났다 어떻다 합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반쯤은 믿었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더라'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슬퍼합니다. 믿지 않으니까요. 더욱 우스운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죽었다고 생각한 그 예수께서 지금 자기들과 같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우리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야말로 난센스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사는 모습이 다 그렇습니다.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걱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슬퍼했다 기뻐했다 하고, 자기 기분대로 절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난센스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습니다. 붙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내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인생 항로에 이 같은 난센스가 없는 것입니다. '왜 실망하고, 왜 슬퍼하고, 왜 근심하는 빛을 띠고 갔느냐, 그리고 왜 피곤한 귀향 길에 서야 했더냐'--엠마오로 가는 이 두 사람의 운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슬퍼할 이유가 없는데 왜 슬퍼했습니까? 왜 이렇듯 웃기는 사람들이 됐느냐 그 말입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를 몰라 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믿는 만큼 압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나쁜 생각으로 보고, 의심하는 생각으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생각하지 못하면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의심하는 마음으로 보면 만사가 의심스럽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여지는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환경이나 자신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를 몰라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와 함께 걷고 있는 이분이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들의 운명도 좀 위태로워져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마저 안 죽이겠느냐? 이거, 아무래도 무사하기 어렵겠다'--그래서 엠마오 가는 길로 새벽에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예수를 몰라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방향이 빗나간 소망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하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기대가 잘못되었어요. 잘못된 기대에 집착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 강하게 집착하는 그 소망이 근본적으로 방향이 빗나가면 정말 정신없어지고 맙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돈만 벌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대로 치닫는 사람들을 보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혹 그에게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 나갑시다"하는 얘기라도 한번 했다가는 아마 "아니, 매일 돈벌어도 모자란데 멀쩡하게 하루를 쉬어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어요. 그러고야 어떻게 사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그럴 때에 "난 일주일에 한 번씩 놀고도 이렇게 사는데 당신이나 나나 다를 게 뭐요?"라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 생각하면 참 난센스입니다. 아무튼 자기가 가진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야가 되시고, 이 나라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기대가 문제입니다. 그런 정치적 욕망, 그런 세속적 기대가 이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그런 바로미터로, 그런 잣대로 볼 때에는 실망이지요.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고난의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 누구도 여기에는 예외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길이었느냐는 것이지요. 그들의 믿음의 구조 안에서는 이것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영광의 메시야를 생각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외치며 비참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저들에게 실망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외치시던 그런 굉장한 능력의 주께서 어째서 말 한마디 없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믿겠노라'고 외치는 그 조소를 고스란히 받으면서 그렇게 죽어가시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영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실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용기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왔지, 하고 일구월심 기다립니다. 이제 어느날엔가 메시야께서 옥문을 확 열어주시면서 '세례 요한아, 그 동안 참 수고했구나'하고 석방시켜줄 줄로 믿고 그렇게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렇게 안됩니다. 특별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옆에서 자꾸 보채는 것입니다. , 메시야가 왔다는데 왜 이렇습니까? 아니, 아마도 당신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가서 이 사실을 일러드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여쭙니다. 그실 세례 요한이 가서 그렇게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5)"--얼마나 한심스러운 질문입니까? 얼마나 형편없는 질문입니까? 왜 그랬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고난의 메시야, 십자가의 메시야가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능한 것과 그 초라한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몰라보게 됩니다.

또 나아가서는 오늘의 본문에 암시된 대로,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에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세하게 당신에 관한 것을 설명하십니다.

당신에 관한 것--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했어요.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매일같이 외고, 많은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지만 메시야를 몰랐습니다. 메시야가 고난받아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입니까? 그쪽은 마음에 안 드니까 아예 그쪽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쪽으로 생각이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부활 중심--이렇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 빗나갔습니다. 성경을 몰랐어요.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게 된 것이요, 또 낙심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 성경에 보니까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데, 정작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세요. 누가 무슨 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디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지금 빚을 많이 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믿는 채권자들이,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면서 빚을 탕감해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사랑하라 하면 당신이 '내가 남을 어떻게 사랑할까?'를 생각해야지 '남이 나를 사랑하나 안 하나'는 왜 헤아려요? 당신은 남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나,' 용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용서하지 않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 보나마나 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말씀이 들리든지 '내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말고 '아이고, 장로라는 사람이 왜 사랑을 안 하나, 목사라는 사람이 왜 사랑이 없나'하고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성경을 아무리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원망만 많아지지요. 마지막에는 교회에 사랑이 없다, 이런 소리나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똑바로 읽어야 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예수 몰라보게 된 것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좀 못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소문이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천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무덤에 갔다 와서는 시체가 없다더라 합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직접 달려가 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팔짱끼고 가만히 앉아 들은 대로 '그랬답디다'하고 엠마오로 가는, 이 소극적 자세가 영 못마땅합니다.

한번은 대학생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어떻고 예정이 어떻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었느냐?"하고 물었더니, "좀 읽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얼마나 읽었느냐?" "마태복음 조금 읽었습니다." "그래? 한 가지 묻겠다. 적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느냐?"

",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 다 읽었어야지. 난 그래도 자네가 성경을 한 열 번은 읽었으려니 했지. 성경을 열 번쯤 읽고나서 자네가 무슨 얘기를 하자고 한다면 내가 상대하겠지만, 겨우 마태복음 몇 장 본 사람하고 내가 왜 얘기를 하겠는가?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 우주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믿음을 알 것 같은가? 자네가 틀렸어. 겨우 그만큼 읽고 나서 하나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이 사람아, 그런 자세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것 같은가?"

잊지 말 것입니다.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반대를 해도 성경을 읽으면서 반대해야지요. 열심을 내고 뜨겁게 해보아야지요. 엠마오로 가는 그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가 지금 도망가는 중입니다'라는 말은 안 했더군요. 시시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오늘 일찍 나오신 분들께 말씀합니다. 교회에 새벽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예배에도 좀 나와볼 것이지, 생전 새벽기도에 나와볼 생각은 안하고 예수 믿습니까? 언제 한번 똑바로 기도해본 일없고,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뜨겁게 설 마음이 없다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이럴 줄 알았더면 좀 달리 살 걸……' 그러겠습니까?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저 그대로 피신하면서, 귀향 길에 서서 믿음이 있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보니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얼버무리니까 주님께서 눈을 밝혀주십니다.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뵙니다. 또 계속해서 32절에 보니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예수님께서 마음을 뜨겁게 해주십니다. 33절에 보니,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과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 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피신하는 이 시시한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망의 이유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기로에서 소망에로, 갈림길에서 생명의 길로 가는 길은 환경이 달라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시고, 성령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할 때에 이제 절망에서 소망에로, 실의에서 생명에로, 사망에서 영생에로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고 부활 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그 순간에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실망과 소망의 기로(누가복음 241327)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 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또 우리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절망과 소망, 실망과 용기……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실 주변 환경이나 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혹은 성경적 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이러하니 나는 틀렸다, 이 일이 잘되니 나는 힘이 난다--그럴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오직 믿음과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여건에서도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여건과 현실 앞에서도 절망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유무가 문제요, 어떤 질의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성경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그처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립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형들이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운명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로 인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권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야곱은 이 일로 인하여 13년 동안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그것도 맹수에게 갈가리 찢겨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말입니다. 13년 동안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오해한 채로 요셉을 생각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셉도 끌려가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마는, 뒤늦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진 드라마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역시 슬퍼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난센스가 있습니다. 형들이 동생을 팔아먹은 것으로 인하여 훗날 동생 앞에 섰을 때, 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저들은 벌벌 떱니다. 이제 동생이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절대로 무사할 리가 없다, 우리가 그렇듯 억울하게 저를 팔아먹었는데 저가 지금 권좌에 앉았으니 우리는 이제 죽었다, 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님들이 나를 팔았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하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이 현실을 놓고 보세요. 3자의 이야기가 전부 믿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것도 비참한 것입니다. 사실 아닌 것에 뿌리를 둔 헛된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비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있는 것을 몰라서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마음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한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늘 생각합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것도 불행이지만,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믿을 사람을 못 믿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는 더 형편없는 사람이다'라고요.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될 시간이요, '할렐루야' 만세를 부르며 기뻐해야 될 그런 현실에,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유독히 이것은 슬퍼해야 되고, 절망해야 되고, 낙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같은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어찌 생각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얘기 같지만, 오늘의 본문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한 편의 난센스 드라마입니다. 그 얼마나 한심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어요. 한갓 우스갯거리입니다. 정말이지 냉정하게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실망할 것도 없고, 슬퍼할 이유가 없는 일에 슬퍼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근심하며 슬퍼하며, 그렇게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나 있습니다. 몇 사람이 가서 보고, 천사를 만났다 어떻다 합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반쯤은 믿었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더라'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슬퍼합니다. 믿지 않으니까요. 더욱 우스운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죽었다고 생각한 그 예수께서 지금 자기들과 같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우리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야말로 난센스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사는 모습이 다 그렇습니다.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걱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슬퍼했다 기뻐했다 하고, 자기 기분대로 절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난센스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습니다. 붙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내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 같습니까? 인생 항로에 이 같은 난센스가 없는 것입니다. '왜 실망하고, 왜 슬퍼하고, 왜 근심하는 빛을 띠고 갔느냐, 그리고 왜 피곤한 귀향 길에 서야 했더냐'--엠마오로 가는 이 두 사람의 운명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슬퍼할 이유가 없는데 왜 슬퍼했습니까? 왜 이렇듯 웃기는 사람들이 됐느냐 그 말입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를 몰라 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만큼 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믿는 만큼 압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나쁜 생각으로 보고, 의심하는 생각으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생각하지 못하면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의심하는 마음으로 보면 만사가 의심스럽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보여지는 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환경이나 자신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이 사람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를 몰라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와 함께 걷고 있는 이분이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들의 운명도 좀 위태로워져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마저 안 죽이겠느냐? 이거, 아무래도 무사하기 어렵겠다'--그래서 엠마오 가는 길로 새벽에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 예수를 몰라보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방향이 빗나간 소망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하고 기대를 걸었습니다. 기대가 잘못되었어요. 잘못된 기대에 집착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 강하게 집착하는 그 소망이 근본적으로 방향이 빗나가면 정말 정신없어지고 맙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돈만 벌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대로 치닫는 사람들을 보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혹 그에게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 나갑시다"하는 얘기라도 한번 했다가는 아마 "아니, 매일 돈벌어도 모자란데 멀쩡하게 하루를 쉬어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어요. 그러고야 어떻게 사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세요. 그럴 때에 "난 일주일에 한 번씩 놀고도 이렇게 사는데 당신이나 나나 다를 게 뭐요?"라고 말하면 될 것입니다. 생각하면 참 난센스입니다. 아무튼 자기가 가진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야가 되시고, 이 나라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기대가 문제입니다. 그런 정치적 욕망, 그런 세속적 기대가 이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그런 바로미터로, 그런 잣대로 볼 때에는 실망이지요.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고난의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 누구도 여기에는 예외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길이었느냐는 것이지요. 그들의 믿음의 구조 안에서는 이것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영광의 메시야를 생각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목마르다고 외치며 비참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저들에게 실망을 주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외치시던 그런 굉장한 능력의 주께서 어째서 말 한마디 없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믿겠노라'고 외치는 그 조소를 고스란히 받으면서 그렇게 죽어가시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영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의 실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용기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왔지, 하고 일구월심 기다립니다. 이제 어느날엔가 메시야께서 옥문을 확 열어주시면서 '세례 요한아, 그 동안 참 수고했구나'하고 석방시켜줄 줄로 믿고 그렇게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렇게 안됩니다. 특별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옆에서 자꾸 보채는 것입니다. , 메시야가 왔다는데 왜 이렇습니까? 아니, 아마도 당신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계시는지도 몰라요, 가서 이 사실을 일러드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여쭙니다. 그실 세례 요한이 가서 그렇게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5)"--얼마나 한심스러운 질문입니까? 얼마나 형편없는 질문입니까? 왜 그랬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고난의 메시야, 십자가의 메시야가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능한 것과 그 초라한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몰라보게 됩니다.

또 나아가서는 오늘의 본문에 암시된 대로,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에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세하게 당신에 관한 것을 설명하십니다.

당신에 관한 것--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했어요.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매일같이 외고, 많은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지만 메시야를 몰랐습니다. 메시야가 고난받아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입니까? 그쪽은 마음에 안 드니까 아예 그쪽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쪽으로 생각이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십자가 중심으로 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부활 중심--이렇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 빗나갔습니다. 성경을 몰랐어요.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모르게 된 것이요, 또 낙심하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 성경에 보니까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데, 정작 예수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세요. 누가 무슨 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디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지금 빚을 많이 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믿는 채권자들이,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면서 빚을 탕감해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사랑하라 하면 당신이 '내가 남을 어떻게 사랑할까?'를 생각해야지 '남이 나를 사랑하나 안 하나'는 왜 헤아려요? 당신은 남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나,' 용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용서하지 않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 보나마나 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말씀이 들리든지 '내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말고 '아이고, 장로라는 사람이 왜 사랑을 안 하나, 목사라는 사람이 왜 사랑이 없나'하고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성경을 아무리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원망만 많아지지요. 마지막에는 교회에 사랑이 없다, 이런 소리나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똑바로 읽어야 됩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예수 몰라보게 된 것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좀 못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소문이 들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천사를 만났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무덤에 갔다 와서는 시체가 없다더라 합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직접 달려가 보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팔짱끼고 가만히 앉아 들은 대로 '그랬답디다'하고 엠마오로 가는, 이 소극적 자세가 영 못마땅합니다.

한번은 대학생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어떻고 예정이 어떻고 하면서 하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었느냐?"하고 물었더니, "좀 읽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얼마나 읽었느냐?" "마태복음 조금 읽었습니다." "그래? 한 가지 묻겠다. 적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느냐?"

",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 다 읽었어야지. 난 그래도 자네가 성경을 한 열 번은 읽었으려니 했지. 성경을 열 번쯤 읽고나서 자네가 무슨 얘기를 하자고 한다면 내가 상대하겠지만, 겨우 마태복음 몇 장 본 사람하고 내가 왜 얘기를 하겠는가?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 우주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믿음을 알 것 같은가? 자네가 틀렸어. 겨우 그만큼 읽고 나서 하나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이 사람아, 그런 자세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것 같은가?"

잊지 말 것입니다.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반대를 해도 성경을 읽으면서 반대해야지요. 열심을 내고 뜨겁게 해보아야지요. 엠마오로 가는 그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가 지금 도망가는 중입니다'라는 말은 안 했더군요. 시시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오늘 일찍 나오신 분들께 말씀합니다. 교회에 새벽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예배에도 좀 나와볼 것이지, 생전 새벽기도에 나와볼 생각은 안하고 예수 믿습니까? 언제 한번 똑바로 기도해본 일없고,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뜨겁게 설 마음이 없다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이럴 줄 알았더면 좀 달리 살 걸……' 그러겠습니까? 좀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저 그대로 피신하면서, 귀향 길에 서서 믿음이 있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좀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보니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얼버무리니까 주님께서 눈을 밝혀주십니다.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들이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뵙니다. 또 계속해서 32절에 보니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예수님께서 마음을 뜨겁게 해주십니다. 33절에 보니, 마음이 뜨거워질 때에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과연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 하게 됩니다. 엠마오로 피신하는 이 시시한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실망의 이유는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기로에서 소망에로, 갈림길에서 생명의 길로 가는 길은 환경이 달라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시고, 성령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할 때에 이제 절망에서 소망에로, 실의에서 생명에로, 사망에서 영생에로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고 부활 신앙을 회복하게 되는 그 순간에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