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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의 소원(잠언 4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3.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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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의 소원(잠언 4110)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孝子洞)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로 손자를 이불 밑에 깔아 죽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 실수로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해서 몰래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 남편에게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이 불효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시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이 일을 임금님이 알고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네 조상들의 효성이 그러했습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의 한 명절입니다. 며칠전 어느 찻집에를 갔더니 문간에 중추절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그 밑에 영어로 번역까지 달아놓았는데, 생스기빙 데이(Thanksgiving day)라고 했습니다. '감사절'이라고 번역한 셈입니다. 그 번역 썩 잘했다 싶었습니다.

여름내 일하고 곡식이 누렇게 익어갈 때에는 모처럼 잠깐 한가해집니다. 참 흐뭇한 시간입니다, 그동안 수고한 것, 땀흘린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마음에 일년 중 가장 뿌듯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만을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하늘을 대신한 부모에게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 중추절입니다. 참 좋은 풍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는 첫째, 목적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위한 효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을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함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행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그것은 선행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구제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큰 교육 사업을 한다고 떠들어봐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적이 발라야 합니다.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선한 가치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복받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면 그 효도는 완전히 타락된 효도입니다.

둘째로, 효는 그 방법이 문제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가만히 보면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소홀히하다가도 돌아가시고나면 야단스럽게 굴면서 세상에 없는 효자연(孝子然) 합니다. 아주 고약한 심리가 아닙니까? 산 부모 모셔보았댔자 별로 이득이 없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뭘 위한다며 제삿상 괴어 놓고 야단을 떱니다. 내가 복받겠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방법이 그릇된 것입니다. 목적에 대하여 방법에 우리는 다시한번 비판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사무엘 존슨은 어렸을 때에 몹시 가난했다고 합니다. 이제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귀족처럼 높이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습니다. 허술한 옷을 입은 채 하루종일 서서 비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웬일인가 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다가가 물어보았더니 사무엘 존슨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바로 이 근방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많은 불효를 범했습니다.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드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 옛날 숱한 실수를 범했던 이 자리에 와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이 지나간 일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굉장하게 성묘한다고 되는 것입니까? 묘비를 세운다고 되는 것입니까? 제삿상을 떡벌어지게 차려놓았다고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목적이 그릇되고 방법이 미신적인 효도를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옛 어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효도했는지, 효를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정색을 하고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참 효란 부모의 뜻을 높이고 그 부모의 자녀됨을 긍지로 삼고, 부모의 소원을 알고, 그 뜻을 기리고 우러르고 따르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낳아준 데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많이 벌어주면, 유산 많이 물려주면 좋은 부모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주었다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내 생의 고마움을 알고 생 자체를 감사로 받아들이는 자가 효자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행여 부모 앞에서 죽고 싶다고 푸념한다든지 한숨을 쉰다든지 한다면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불효입니다.

부모가 생을 주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어느 장님 가수가 부르는 유행가 가사입니다마는 "우리 어머님 비오는 날 밤에 어찌하여 나를 낳으셨나이까?" 이런 태도가 불효입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이 세상에 산다는 사실 자체를 고맙게 영광스럽게 여기고, 특별히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에 그가 효자입니다.

부모를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낳아주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효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생을 저주하는 자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생을 불안하게 여기는 자도 효자가 아닙니다. 그 부모님의 자녀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용서 못받을 죄인입니다.

또한 키워주었다는 데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고등동물이다' 하지만 제일 지저분하고 제일 하급동물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농촌에서 자랄 때에 보니 소가 들에 나갔다가 새끼를 낳아서 달고 들어오는 일이 있습니다. 새끼를 낳으면 비틀비틀하다가 그만 일어서고 말아요. 산부인과 안가고 산파가 없어도 누가 가르쳤는지 척척 다 처리해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제 발로 걸으려면 얼마나 지나야 합니까? 30세가 되도록 키워놓아야 사람 구실 제대로 할까말까합니다. 정말 비싸고 사치하고 어려운 존재입니다. 대체 무엇을 자랑할 것입니까? 다시말하면 사람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신세를 많이 진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신세를 많이 집니다. 신세 안지고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습니까?

누구나 네 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고마운 일이 다 그때에 있었습니다. 그 많은 신세를 져서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이제 어찌 부모를 소홀히할 것입니까? 부모는 최초의 교사입니다. 내가 만난 최초의 선생님이 부모입니다.

사람은 가르치지 아니하면 두 발로 서지도 못한답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의식, 우리의 생활, 우리의 습관,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높이 공경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선험자(先驗者)입니다. 먼저 경험했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적어도 20년은 선배입니다. 인생의 선배라고 하는 입장에서도 부모는 공경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부의 사랑은 육체적인 성향이 많아 그리로 끌리기 쉽고 마지막에 질투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형제의 사랑이라는 것은 경쟁심이 있어서 시기와 거짓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친구의 사랑이란 배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만은 순전하고 영원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 향한 마음만은 절대로 선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지닌 최고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징적 용어를 동원하십니다. 즉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랑, 가장 귀한 사랑을 들어서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탕자 비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탕자의 그 아버지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동양적으로 보고 한국적으로 보면 '보통 아버지'입니다. 무릇 아버지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고선(至高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부모의 사랑이 표현이나 방법의 착오로 본의 아니게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중심에 있는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아버지일 수 있으나 자식에 대한 소원만은 선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후회가 많은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마음만은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황희(黃喜)라고, 조선 초기의 정승을 아실 것입니다. 덕망 높기로 귀감이 되었던 황희 정승이지만 자식에게는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들 하나가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훈계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이 아들이 어느 날 만취해서 이슥하여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문밖에 서 있습니다. 의관속대(衣冠束帶)한 채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 앞에 나아가 "어서 오십시오"하고 정중히 영접합니다. 아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저올시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비의 교훈을 듣지 않는 자는 자식이 아니요. 자식이 아닌 자가 내 집에 오니 분명 손님일 터, 당연히 정장을 하고 맞아야 되지 않겠소?"

여러분, 교훈을 받지 않는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육체만 생명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동물의 새끼지 자식은 아닙니다. 정신이 이어져야 자식입니다. 아비의 훈계가 이어질 때에야 그 자식은 그 아비의 그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깊이 읽어보면 얼마나 깊고 소중한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는 본디 베들레헴에 사는 한 목자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용맹하여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지켜냈습니다. 물멧돌 하나로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용사였습니다.

전쟁도 많이 치렀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유대나라를 건설했고, 다윗 성을 세웠고,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이요 왕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평생을 다 지내고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군사도 아니요 용기도 아니요, 황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것들은 하나도 귀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인생을 다 살았을 때에 비로소 얻은 진리를 그는 자녀에게 물려줍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요.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솔로몬 왕이 써놓은 잠언입니다.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46)." 아무래도 지혜란 좀 나이가 들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한 마흔은 넘어야 지혜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인생은 40부터라고 하는 것은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물 일곱 살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런 대로 목사일을 열심히 해냈습니다 마는 이제 나이가 좀 들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 한 마흔은 되어야 목사이지 싶어요. 이제야 무엇인가를 좀 알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란 역시 많은 경험, 많은 실패, 많은 환난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생을 다 산 이제야 지혜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식한테 말해줍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스스로 경험 끝에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말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21세에 지혜를 논합니다. 왕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하면 주겠다고 하시자 지혜를 주십사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간구가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귀 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다니 기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에다 부귀 영화까지 덤으로 더하여 주십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게 된 동기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다윗의 훈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혜로 40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지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세적인 것이 아닙니다. 미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오는 큰 선물입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돈이 없어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 못삽니다. 병들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 불행합니다.

신령한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지혜가 제일임을 아는 사람, 지혜만 있으면 그만 이라고 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교훈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어떤 아버지가 술로 망했습니다. 자식에게 유언을 합니다.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그것 하나만 지켜도 그 가문은 좋은 가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전자전(父傳子傳)이지, 나도 마셔보아야지 ----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죽을 때에 아들에게 한마디할 것입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그러나 유언은 유언대로 가문은 가문대로 망하고 맙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지혜로운 말을 했거든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소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혜 중심의 가치관을 세워라, 얻어라, 지혜를 잊지 마라, 지혜를 사랑하라, 지혜를 높이라, 지혜를 높이면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315절 이하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야말로 복의 근원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언제나 자식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남부끄러움도 있고 뉘우치는 바도 많지만 자식에게 향한 마음만은 언제나 선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여야 효도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숨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큰일은 못해도 불효자는 되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인간은 되지 맙시다. 아비의 소원은 오직 하나, 지혜로운 자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영원한 지혜, 영생에 있는 지혜 ---- 거기에 축복이 있고 거기에 기업의 약속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소원(잠언 4110)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孝子洞)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실수로 손자를 이불 밑에 깔아 죽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 실수로 손자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해서 몰래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 남편에게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이 불효자식아,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시게 만들다니!" 하면서 그 아이의 뺨을 호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이 일을 임금님이 알고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네 조상들의 효성이 그러했습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의 한 명절입니다. 며칠전 어느 찻집에를 갔더니 문간에 중추절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그 밑에 영어로 번역까지 달아놓았는데, 생스기빙 데이(Thanksgiving day)라고 했습니다. '감사절'이라고 번역한 셈입니다. 그 번역 썩 잘했다 싶었습니다.

여름내 일하고 곡식이 누렇게 익어갈 때에는 모처럼 잠깐 한가해집니다. 참 흐뭇한 시간입니다, 그동안 수고한 것, 땀흘린 것은 다 잊어버리고 마음에 일년 중 가장 뿌듯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만을 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하늘을 대신한 부모에게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 중추절입니다. 참 좋은 풍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는 첫째, 목적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위한 효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을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함이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행이라도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을 때에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그것은 선행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구제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했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큰 교육 사업을 한다고 떠들어봐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적이 발라야 합니다. 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선한 가치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복받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효도를 한다면 그 효도는 완전히 타락된 효도입니다.

둘째로, 효는 그 방법이 문제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가만히 보면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소홀히하다가도 돌아가시고나면 야단스럽게 굴면서 세상에 없는 효자연(孝子然) 합니다. 아주 고약한 심리가 아닙니까? 산 부모 모셔보았댔자 별로 이득이 없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야 복을 준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뭘 위한다며 제삿상 괴어 놓고 야단을 떱니다. 내가 복받겠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방법이 그릇된 것입니다. 목적에 대하여 방법에 우리는 다시한번 비판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사무엘 존슨은 어렸을 때에 몹시 가난했다고 합니다. 이제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귀족처럼 높이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복잡한 시장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습니다. 허술한 옷을 입은 채 하루종일 서서 비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웬일인가 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다가가 물어보았더니 사무엘 존슨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바로 이 근방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많은 불효를 범했습니다.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드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무덤 앞에 꿇어 엎드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 옛날 숱한 실수를 범했던 이 자리에 와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이 지나간 일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굉장하게 성묘한다고 되는 것입니까? 묘비를 세운다고 되는 것입니까? 제삿상을 떡벌어지게 차려놓았다고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목적이 그릇되고 방법이 미신적인 효도를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옛 어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효도했는지, 효를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정색을 하고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참 효란 부모의 뜻을 높이고 그 부모의 자녀됨을 긍지로 삼고, 부모의 소원을 알고, 그 뜻을 기리고 우러르고 따르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낳아준 데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많이 벌어주면, 유산 많이 물려주면 좋은 부모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낳아주었다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내 생의 고마움을 알고 생 자체를 감사로 받아들이는 자가 효자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행여 부모 앞에서 죽고 싶다고 푸념한다든지 한숨을 쉰다든지 한다면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불효입니다.

부모가 생을 주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어느 장님 가수가 부르는 유행가 가사입니다마는 "우리 어머님 비오는 날 밤에 어찌하여 나를 낳으셨나이까?" 이런 태도가 불효입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내가 이 세상에 산다는 사실 자체를 고맙게 영광스럽게 여기고, 특별히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더없는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에 그가 효자입니다.

부모를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낳아주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효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생을 저주하는 자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생을 불안하게 여기는 자도 효자가 아닙니다. 그 부모님의 자녀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용서 못받을 죄인입니다.

또한 키워주었다는 데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고등동물이다' 하지만 제일 지저분하고 제일 하급동물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농촌에서 자랄 때에 보니 소가 들에 나갔다가 새끼를 낳아서 달고 들어오는 일이 있습니다. 새끼를 낳으면 비틀비틀하다가 그만 일어서고 말아요. 산부인과 안가고 산파가 없어도 누가 가르쳤는지 척척 다 처리해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제 발로 걸으려면 얼마나 지나야 합니까? 30세가 되도록 키워놓아야 사람 구실 제대로 할까말까합니다. 정말 비싸고 사치하고 어려운 존재입니다. 대체 무엇을 자랑할 것입니까? 다시말하면 사람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신세를 많이 진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신세를 많이 집니다. 신세 안지고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습니까?

누구나 네 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고마운 일이 다 그때에 있었습니다. 그 많은 신세를 져서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이제 어찌 부모를 소홀히할 것입니까? 부모는 최초의 교사입니다. 내가 만난 최초의 선생님이 부모입니다.

사람은 가르치지 아니하면 두 발로 서지도 못한답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의식, 우리의 생활, 우리의 습관,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높이 공경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선험자(先驗者)입니다. 먼저 경험했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적어도 20년은 선배입니다. 인생의 선배라고 하는 입장에서도 부모는 공경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부의 사랑은 육체적인 성향이 많아 그리로 끌리기 쉽고 마지막에 질투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형제의 사랑이라는 것은 경쟁심이 있어서 시기와 거짓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친구의 사랑이란 배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 사랑만은 순전하고 영원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 향한 마음만은 절대로 선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사람이 지닌 최고의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에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상징적 용어를 동원하십니다. 즉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랑, 가장 귀한 사랑을 들어서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탕자 비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셨습니다.

아무리 읽어보아도 탕자의 그 아버지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동양적으로 보고 한국적으로 보면 '보통 아버지'입니다. 무릇 아버지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고선(至高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부모의 사랑이 표현이나 방법의 착오로 본의 아니게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중심에 있는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아버지일 수 있으나 자식에 대한 소원만은 선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후회가 많은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마음만은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황희(黃喜)라고, 조선 초기의 정승을 아실 것입니다. 덕망 높기로 귀감이 되었던 황희 정승이지만 자식에게는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들 하나가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훈계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이 아들이 어느 날 만취해서 이슥하여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문밖에 서 있습니다. 의관속대(衣冠束帶)한 채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 앞에 나아가 "어서 오십시오"하고 정중히 영접합니다. 아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저올시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비의 교훈을 듣지 않는 자는 자식이 아니요. 자식이 아닌 자가 내 집에 오니 분명 손님일 터, 당연히 정장을 하고 맞아야 되지 않겠소?"

여러분, 교훈을 받지 않는 자식은 자식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육체만 생명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동물의 새끼지 자식은 아닙니다. 정신이 이어져야 자식입니다. 아비의 훈계가 이어질 때에야 그 자식은 그 아비의 그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깊이 읽어보면 얼마나 깊고 소중한 교훈을 주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는 본디 베들레헴에 사는 한 목자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용맹하여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지켜냈습니다. 물멧돌 하나로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소년 용사였습니다.

전쟁도 많이 치렀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유대나라를 건설했고, 다윗 성을 세웠고,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이요 왕이 아닙니까? 그런 그가 평생을 다 지내고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군사도 아니요 용기도 아니요, 황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것들은 하나도 귀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인생을 다 살았을 때에 비로소 얻은 진리를 그는 자녀에게 물려줍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요.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솔로몬 왕이 써놓은 잠언입니다.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46)." 아무래도 지혜란 좀 나이가 들어야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한 마흔은 넘어야 지혜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인생은 40부터라고 하는 것은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물 일곱 살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런 대로 목사일을 열심히 해냈습니다 마는 이제 나이가 좀 들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시 한 마흔은 되어야 목사이지 싶어요. 이제야 무엇인가를 좀 알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란 역시 많은 경험, 많은 실패, 많은 환난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생을 다 산 이제야 지혜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식한테 말해줍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스스로 경험 끝에 지혜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말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21세에 지혜를 논합니다. 왕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구하면 주겠다고 하시자 지혜를 주십사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간구가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귀 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다니 기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에다 부귀 영화까지 덤으로 더하여 주십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게 된 동기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다윗의 훈계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훈계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혜로 40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지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세적인 것이 아닙니다. 미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오는 큰 선물입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돈이 없어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 못삽니다. 병들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 불행합니다.

신령한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지혜가 제일임을 아는 사람, 지혜만 있으면 그만 이라고 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교훈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어떤 아버지가 술로 망했습니다. 자식에게 유언을 합니다.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그것 하나만 지켜도 그 가문은 좋은 가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전자전(父傳子傳)이지, 나도 마셔보아야지 ----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죽을 때에 아들에게 한마디할 것입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그러나 유언은 유언대로 가문은 가문대로 망하고 맙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지혜로운 말을 했거든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소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혜 중심의 가치관을 세워라, 얻어라, 지혜를 잊지 마라, 지혜를 사랑하라, 지혜를 높이라, 지혜를 높이면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315절 이하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야말로 복의 근원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언제나 자식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남부끄러움도 있고 뉘우치는 바도 많지만 자식에게 향한 마음만은 언제나 선하고 의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여야 효도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숨쉬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큰일은 못해도 불효자는 되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인간은 되지 맙시다. 아비의 소원은 오직 하나, 지혜로운 자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영원한 지혜, 영생에 있는 지혜 ---- 거기에 축복이 있고 거기에 기업의 약속이 있습니다. 거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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