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복음 10장 46~52절)

by 【고동엽】 2023. 1. 22.
목차로 돌아가기

 

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복음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말씀대로 소경 바디매오는 그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언급될 만큼 널리 알려진 중요한 사건입니다. 복음서마다 기록된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다른 사건은 아닙니다. 장소와 시간은 비슷하지만 마태복음에는 소경이 두 사람이라고 씌어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는 왜 소경이 두 사람으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 문제는 아주 긍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본래 소경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을 받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는 바디매오뿐이었으므로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이름도 기록하지 않고 수에 넣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을 뜬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일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이적은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고, 신기하고 굉장한 사건으로 거듭 이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이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이고 강권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다시 말하거니와 이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믿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믿음의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그릇은 깨끗해야 하고 커야 합니다. 믿음의 그릇이 너무 작으면 은혜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는 위대한 믿음의 그릇을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 나아가면 내 눈이 떠지리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본문을 함께 보십시다.

첫째, 바디매오는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은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고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가 따로 있고, 은혜 받을 수 있는 때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뒤에야 ', 좀더 열심히 교회에 나갔더라면 좋았을걸. 이제라도 한번만 더 교회에 나가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말입니다. 때때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할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또 우리에게 은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때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외국에 나가게 되면 우리 소망교회 교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종종 듣는 이야깁니다. 객지에서는 특히 너무 은혜가 사모되니까 고국에 편지를 자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우들이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 주는데, 그 테이프를 꼬박꼬박 듣는답니다. 듣고 또 듣고,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보니 카세트 테이프가 다 닳았다고 합니다. 주일날 예배 마친 뒤 나갈 때에도 거의 매주일 그런 말을 듣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매일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음성으로만 듣다가 오늘 뵙게 되니 참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망교회 다닐 때 좀 열심히 다닐걸.' 이런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는 것입니다. 이사간 뒤에, 외국에 나가 일하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목마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디매오는 마지막 기회를 포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이 길로 가시면 다시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마지막 길에서, 바로 그 때에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일생에 딱 한 번이자 마지막인 기회(last chance)를 잡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장님을 눈뜨게 하시고, 문둥병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늘날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고, 많은 정보가 끊임없이 교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막혀진 언어권에 사는 사람이 7,000 방언이나 됩니다. 특히 북한 땅이라든가 공산 세계에는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생동안 한번도 예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서글픈 일입니까? 듣고 믿지 않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하지만 듣지 못해서 못 믿었다고 하면 정말로 애석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귀가 보배였습니다. 보지는 못하지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고, 들으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반신불수를 고치셨다고 할 때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야, 문둥병은 고칠 수 있지만 내 눈은 뜨게 할 수 없을 거야." 그랬다면 바디매오는 평생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 받는 사람, 복 받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지만 나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누구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누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라고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은혜 받고 기뻐하는데 왜 나는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바로 불 신앙 때문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의 소문만 듣고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눈뜨게 하셨다면 내 눈도 뜨게 하시리라.' 예수님께만 가면 내 눈도 뜰 수 있다는 신앙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그 마지막 기회를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께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나 어떤 모임에 갔을 때, 저는 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습니까? 내 모든 문제가 성경 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바로 마스터 키(master key) 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올마이티, 올마이티 파워(almighty power)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믿고 출발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대한 몇몇 소문만 들었지만.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있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없는 것만 달라고 합니다. 좋지 않은 믿음입니다. 현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눈은 없지만 귀와 입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배입니다. 눈이 없는 대신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모두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리고는 가진 것까지 그 능력을 다 부인하고 맙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도 많지만 가진 것이 더 많습니다.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은 없지만 귀도 있고, 입도 있고, 손발도 있습니다. 그는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극대화하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파사데나에 갔을 때, 왼손 하나로 피아노 독주하는 분을 봤습니다. 오른손은 의수라 쓰지 못하고 왼손만으로 한 시간 반 동안 독주를 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손 하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손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장 피에르뢰게라는 분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연습할 때에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참 연주를 잘하는데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나 악보가 없습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악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앞도 못 보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치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못하잖아요?" 이것밖에 못하니까 잘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못하는 것을 하게 해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면 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설거지를 잘하십니까? 음식을 잘 만드십니까? 심방 잘하십니까? 무엇이든지 한번 잘해보십시오. 성공이란 크든 작든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서 제일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까이에 만두집이 하나 있는데 제가 만두를 좋아해서 가끔 갑니다. 그 집 할머니가 만두 만드는 것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만두는 내가 제일이라는 대단한 긍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눈도 없고, 돈도 명예도 없고, 친구도 지식도 없습니다. 그래도 들을 수 있고, 입도 발도 있습니다. 있는 것에 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 거기에 현실적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지른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제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보통으로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체면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목청껏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실은 이 말부터가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의 별명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것은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고백을 하며 소리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소리지를 작정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48절에 보니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바디매오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꼭 방해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달리 착실하게 예수 좀 믿어보려고 하면 꼭 훼방꾼이 있지 않습니까? 수요일 저녁, 일손을 멈추고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그렇게까지 나가야 예수 믿는 거냐"라는 소리를 흔히 듣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상하게 믿는다고도 합니다. 새벽기도 나가겠다고 하면 무슨 광신자 보듯 합니다. 이렇게 꼭 핍박이 따릅니다. 헌금을 해도 핍박이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돈도 없으면서 건방지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며 말도 많습니다. 그래서 헌금하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핍박과 방해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장님이 눈뜨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절실한 일입니까? 이 귀한 일에도 협조는 못할지언정 꾸짖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갖가지 형태로 방해하는데, 이때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그는 방해가 있을수록 더욱 기를 쓰고 소리지릅니다. '두고보자, 누가 이기나'하는 태도로 더욱더 힘을 냈던 멋진 사람입니다. 공은 때릴수록 더 높이 튀는 것입니다. 방해가 있거든 더 힘을 내십시오. 그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금 핍박이 있어야 열심입니다. 핍박이 전혀 없으면 축 늘어져서 힘이 없습니다. 조금 핍박이 있어야 그걸 이기면서 열심을 내지요. 작으나 크나 우리가 나가는 길에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이 있을수록 더 크게 소리질렀던 바디매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하시니"-마침내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극성스러운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로 부르시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직접 보지는 못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참 고맙고 협조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소경 바디매오를 예수님께 인도해야 하겠다는 동정 어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의 바디매오의 행동을 보십시오.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주 돌발적이고 격렬한 행동이었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님이 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뛰어갔을까요? 하지만 무조건 뛰어갑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렇게 뛰어가는 마음이 없습니다. 망설이고 이리저리 미루다가 모두 놓치고 맙니다. 교회에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시간에 나오는 사람들은 늘 제 시간에 나오지만, 늦는 사람은 늘 늦습니다. 늦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고, 늦어도 꼭 5분씩 늦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오로지 뛰어가는 마음이 없어서 입니다. 뭔가 마음에 석연치 않은 게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뛰어나왔습니다. 이제 눈을 못 뜨면 겉옷은 영영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일한 살림을 팽개쳐버렸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거지생활은 이제 끝이다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할 때 '이제는 됐다'하고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은 뜨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부르시자 마자 마음으로는 벌써 다 떴습니다. 그래서 거지 옷을 내버린 것입니다. 옛날에는 옷이 참 귀했습니다. 더구나 거지의 겉옷이란 누우면 이불이고, 일어나면 옷이 되니 항상 둘러메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하나밖에 없는 밑천을 내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거지 옷이란 거지라는 신분이 갖는 특수한 옷입니다. 그 옷을 입어야 얻어먹을 수 있는 일종의 유니폼이지요. 예전에 제가 알던 어느 거지 양반도 얻으러 다닐 때에는 일부러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다음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주 일류 신사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이렇게 좋을 옷을 두고 왜 그렇게 하고 다녔소?" 했더니 "아이구, 목사님.

넥타이 매고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 합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입을 생각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향해 뛰어갈 뿐입니다.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격렬하게 달려가는 행동적인 믿음,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려가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달라고 하는 거지가 예수님께는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다른 소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보통 소원인 '돈 한푼 주세요.' '옷 한 벌주세요'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높은 소원을 구합니다. 여러분, 우상 앞에서 구하는 소원과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하는 소원이 같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구하는 소원과 하나님께 구하는 소원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무당 앞에서나 부처님 앞에서, 세상에서, 교회에서 똑같이 달라고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돈입니다. 항상 돈입니다. 안될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 나와서 구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실 어찌 보면 앞 못보는 채 얻어먹고 사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그런 대로 동정 받으며 무책임하게 살다보면 이젠 눈뜨겠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빌어먹는 체질이 될 수 있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체질화하고 타성에 젖게 됩니다. 이제 자기 생활을 비약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항상 현재 상태 그 안에서 행동하고, 행동 안에 생각까지 몰입시켜버리고 맙니다. 새로운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자신의 생활에서 그저 뺑뺑 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소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생활도 아니고 썩어질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높은 차원의 소원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뜨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눈뜸과 함께 그는 책임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얻어먹고 살았지만 눈뜬 다음부터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그 순간에 그는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자기일 보러, 애인 만나러, 사업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바디매오의 훌륭한 믿음입니다. 이같은 믿음이 있으면 오늘도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복음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소경 바디매오가 눈을 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 말씀대로 소경 바디매오는 그의 믿음으로 눈을 뜨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언급될 만큼 널리 알려진 중요한 사건입니다. 복음서마다 기록된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다른 사건은 아닙니다. 장소와 시간은 비슷하지만 마태복음에는 소경이 두 사람이라고 씌어 있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길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에는 왜 소경이 두 사람으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 문제는 아주 긍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본래 소경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을 받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는 바디매오뿐이었으므로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이름도 기록하지 않고 수에 넣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을 뜬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일행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이적은 제자들의 기억에 남았고, 신기하고 굉장한 사건으로 거듭 이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이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이고 강권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에게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다시 말하거니와 이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믿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믿음의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그릇은 깨끗해야 하고 커야 합니다. 믿음의 그릇이 너무 작으면 은혜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는 위대한 믿음의 그릇을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 나아가면 내 눈이 떠지리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본문을 함께 보십시다.

첫째, 바디매오는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은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고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가 따로 있고, 은혜 받을 수 있는 때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뒤에야 ', 좀더 열심히 교회에 나갔더라면 좋았을걸. 이제라도 한번만 더 교회에 나가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말입니다. 때때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할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또 우리에게 은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때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외국에 나가게 되면 우리 소망교회 교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종종 듣는 이야깁니다. 객지에서는 특히 너무 은혜가 사모되니까 고국에 편지를 자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우들이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 주는데, 그 테이프를 꼬박꼬박 듣는답니다. 듣고 또 듣고, 여러 번 반복해서 듣다보니 카세트 테이프가 다 닳았다고 합니다. 주일날 예배 마친 뒤 나갈 때에도 거의 매주일 그런 말을 듣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왔습니다.' '제가 매일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음성으로만 듣다가 오늘 뵙게 되니 참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망교회 다닐 때 좀 열심히 다닐걸.' 이런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는 것입니다. 이사간 뒤에, 외국에 나가 일하면서 얼마나 답답하고 목마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디매오는 마지막 기회를 포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이 길로 가시면 다시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마지막 길에서, 바로 그 때에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일생에 딱 한 번이자 마지막인 기회(last chance)를 잡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복음을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장님을 눈뜨게 하시고, 문둥병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늘날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고, 많은 정보가 끊임없이 교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막혀진 언어권에 사는 사람이 7,000 방언이나 됩니다. 특히 북한 땅이라든가 공산 세계에는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생동안 한번도 예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서글픈 일입니까? 듣고 믿지 않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하지만 듣지 못해서 못 믿었다고 하면 정말로 애석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귀가 보배였습니다. 보지는 못하지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고, 들으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반신불수를 고치셨다고 할 때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이야, 문둥병은 고칠 수 있지만 내 눈은 뜨게 할 수 없을 거야." 그랬다면 바디매오는 평생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 받는 사람, 복 받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지만 나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누구도 은혜 받지 못합니다. 누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라고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은혜 받고 기뻐하는데 왜 나는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바로 불 신앙 때문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의 소문만 듣고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눈뜨게 하셨다면 내 눈도 뜨게 하시리라.' 예수님께만 가면 내 눈도 뜰 수 있다는 신앙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그 마지막 기회를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께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나 어떤 모임에 갔을 때, 저는 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습니까? 내 모든 문제가 성경 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도 그 속에서 나의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바로 마스터 키(master key) 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올마이티, 올마이티 파워(almighty power)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믿고 출발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대한 몇몇 소문만 들었지만.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있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없는 것만 달라고 합니다. 좋지 않은 믿음입니다. 현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눈은 없지만 귀와 입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배입니다. 눈이 없는 대신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모두 없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리고는 가진 것까지 그 능력을 다 부인하고 맙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도 많지만 가진 것이 더 많습니다. 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은 없지만 귀도 있고, 입도 있고, 손발도 있습니다. 그는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극대화하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파사데나에 갔을 때, 왼손 하나로 피아노 독주하는 분을 봤습니다. 오른손은 의수라 쓰지 못하고 왼손만으로 한 시간 반 동안 독주를 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손 하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손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장 피에르뢰게라는 분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연습할 때에 제가 옆에 있었습니다. 참 연주를 잘하는데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나 악보가 없습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악보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앞도 못 보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치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나는 이것밖에 못하잖아요?" 이것밖에 못하니까 잘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못하는 것을 하게 해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면 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설거지를 잘하십니까? 음식을 잘 만드십니까? 심방 잘하십니까? 무엇이든지 한번 잘해보십시오. 성공이란 크든 작든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서 제일 잘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까이에 만두집이 하나 있는데 제가 만두를 좋아해서 가끔 갑니다. 그 집 할머니가 만두 만드는 것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만두는 내가 제일이라는 대단한 긍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눈도 없고, 돈도 명예도 없고, 친구도 지식도 없습니다. 그래도 들을 수 있고, 입도 발도 있습니다. 있는 것에 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 거기에 현실적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로,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지른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제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보통으로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체면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목청껏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실은 이 말부터가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의 별명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것은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고백을 하며 소리지릅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소리지를 작정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48절에 보니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바디매오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꼭 방해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달리 착실하게 예수 좀 믿어보려고 하면 꼭 훼방꾼이 있지 않습니까? 수요일 저녁, 일손을 멈추고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그렇게까지 나가야 예수 믿는 거냐"라는 소리를 흔히 듣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상하게 믿는다고도 합니다. 새벽기도 나가겠다고 하면 무슨 광신자 보듯 합니다. 이렇게 꼭 핍박이 따릅니다. 헌금을 해도 핍박이 있습니다. 헌금을 하면, 돈도 없으면서 건방지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며 말도 많습니다. 그래서 헌금하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핍박과 방해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장님이 눈뜨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절실한 일입니까? 이 귀한 일에도 협조는 못할지언정 꾸짖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갖가지 형태로 방해하는데, 이때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그는 방해가 있을수록 더욱 기를 쓰고 소리지릅니다. '두고보자, 누가 이기나'하는 태도로 더욱더 힘을 냈던 멋진 사람입니다. 공은 때릴수록 더 높이 튀는 것입니다. 방해가 있거든 더 힘을 내십시오. 그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금 핍박이 있어야 열심입니다. 핍박이 전혀 없으면 축 늘어져서 힘이 없습니다. 조금 핍박이 있어야 그걸 이기면서 열심을 내지요. 작으나 크나 우리가 나가는 길에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이 있을수록 더 크게 소리질렀던 바디매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믿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하시니"-마침내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극성스러운 소리를 들으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로 부르시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직접 보지는 못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참 고맙고 협조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소경 바디매오를 예수님께 인도해야 하겠다는 동정 어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의 바디매오의 행동을 보십시오.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아주 돌발적이고 격렬한 행동이었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막 뛰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님이 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뛰어갔을까요? 하지만 무조건 뛰어갑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렇게 뛰어가는 마음이 없습니다. 망설이고 이리저리 미루다가 모두 놓치고 맙니다. 교회에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시간에 나오는 사람들은 늘 제 시간에 나오지만, 늦는 사람은 늘 늦습니다. 늦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고, 늦어도 꼭 5분씩 늦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을 향해 오로지 뛰어가는 마음이 없어서 입니다. 뭔가 마음에 석연치 않은 게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뛰어나왔습니다. 이제 눈을 못 뜨면 겉옷은 영영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일한 살림을 팽개쳐버렸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거지생활은 이제 끝이다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다고 할 때 '이제는 됐다'하고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은 뜨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부르시자 마자 마음으로는 벌써 다 떴습니다. 그래서 거지 옷을 내버린 것입니다. 옛날에는 옷이 참 귀했습니다. 더구나 거지의 겉옷이란 누우면 이불이고, 일어나면 옷이 되니 항상 둘러메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하나밖에 없는 밑천을 내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거지 옷이란 거지라는 신분이 갖는 특수한 옷입니다. 그 옷을 입어야 얻어먹을 수 있는 일종의 유니폼이지요. 예전에 제가 알던 어느 거지 양반도 얻으러 다닐 때에는 일부러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다음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주 일류 신사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이렇게 좋을 옷을 두고 왜 그렇게 하고 다녔소?" 했더니 "아이구, 목사님.

넥타이 매고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 합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다시 입을 생각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향해 뛰어갈 뿐입니다.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격렬하게 달려가는 행동적인 믿음,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려가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달라고 하는 거지가 예수님께는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다른 소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보통 소원인 '돈 한푼 주세요.' '옷 한 벌주세요'가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높은 소원을 구합니다. 여러분, 우상 앞에서 구하는 소원과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하는 소원이 같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구하는 소원과 하나님께 구하는 소원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무당 앞에서나 부처님 앞에서, 세상에서, 교회에서 똑같이 달라고 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돈입니다. 항상 돈입니다. 안될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 나와서 구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실 어찌 보면 앞 못보는 채 얻어먹고 사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그런 대로 동정 받으며 무책임하게 살다보면 이젠 눈뜨겠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에 빌어먹는 체질이 될 수 있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체질화하고 타성에 젖게 됩니다. 이제 자기 생활을 비약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항상 현재 상태 그 안에서 행동하고, 행동 안에 생각까지 몰입시켜버리고 맙니다. 새로운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자신의 생활에서 그저 뺑뺑 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소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생활도 아니고 썩어질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높은 차원의 소원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뜨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눈뜸과 함께 그는 책임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얻어먹고 살았지만 눈뜬 다음부터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십니다. 그 순간에 그는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자기일 보러, 애인 만나러, 사업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바디매오의 훌륭한 믿음입니다. 이같은 믿음이 있으면 오늘도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