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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01장-03장

by 【고동엽】 2023. 1. 22.

사울/바울“교회 핍박자”로부터 “복음전파자”로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인가“바울”인가그는 언제어디서 출생하였으며어디서 교육을 받았는가헬라문화권의 교육도시 “다소”인가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인가왜 바울은 고향 땅 다소를 떠나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한 바리새인 랍비 교육을 받았는가(행 22:2-3; 26:3-10; 빌 3:5-8)? 왜 바울은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그렇게 핍박하였는가(행 9:1-9; 갈 1:13-14; 고전 15:5)?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극렬하게 핍박하였을 때바울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그가 초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려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무엇이 그에게 일어났는가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극렬한 기독교 박해자가 아닌 열렬한 기독교 복음 전파자로 살도록 하였는가(행 9:19-30; 갈 1:13-21)?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일종의 “회심”(Conversion) 사건인가아니면 “소명”(Calling) 사건인가?

     다메섹 사건 이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비판하였으며결국 유대교를 떠났는가(빌 3:4-9)? 아니면 여전히 유대교의 교인으로 남아 있었는가왜 바울은 안디옥에베소데살로니가빌립보고린도 등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 다니면서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교회를 세웠으며(행 13-21), 그리고 이들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가왜 그는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모았으며왜 헌금을 가지고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하였는가(롬 15:22-28; 행 21)? 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길 그토록 원했으며왜 모든 핍박을 감수해 가면서 아시아와 유럽과 나아가서 당시 땅 끝으로 불리어진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가(롬 15:28)? 그는 과연 우리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도요복음 전도자요목회자요선교사요교육가요신학자요문필가로 불리어질 수 있는가?1) 그는 과연 참된 예수님의 제자인가아니면 그는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예수님의 가르침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예수님과는 다른 교훈을 가르쳤는가?2) 그래서 예수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를 창설하였는가?3)

 

     1. 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양과 신임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아무리 잘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그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한우리는 그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그렇다면우리가 바울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무엇인가예수님은 직접 쓴 단 한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하여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적어도 약 30년 이후에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간주되는 마태마가누가요한 등 네 복음서에 밖에 없다그러나 예수님과는 다르게 바울 사도는 주후 40년에서 60년까지 그의 목회와 선교활동 중에 세워진 교회들에게 보낸 여러 편지들을 남기고 있다그리고 누가복음서의 저자가 쓴 사도행전도 있다.4)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교회의 확장을 말하고 있지만실제로 사도행전 내용의 반 이상이 바울의 선교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행 13-28).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에 대하여는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바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오늘날 학자들마다 바울에 대하여 의견이 통일되어 있지 않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바울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르게 보일 만큼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바울에 관한 역사적 자료의 규정과 그 신임성과 해석에 있어서 제각기 의견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즉 자료 사용에 있어서 의견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5) 사실상 바울에 대하여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역사적 자료로서는 바울 자신이 주후 40년대에서 60년대 사이에 기록하였다고 간주되는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에베소서빌립보서골로새서데살로니가전후서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 등 13서신과,6) 누가가 쓴 사도행전 이외에는 없다.7)

     우리는 사실상 신약성경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바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그 어떤 주후 1세기의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그의 가정과 가계를 밝혀줄 수 있는 족보나 호적등본이 있는 것이 아니고그의 교육배경을 보여줄 수 있는 초등학교나 가말리엘 문하에서의 생활 기록표나 혹은 성적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더욱이 그의 선교일지나 그의 일기는 물론 그가 개척하고 목회한 교회의 당회록도 없으며심지어 그의 무덤에 세워졌을 비석조차도 남아있지 않다주후 2세기와 3세기에 걸쳐 쓰여진 바울행전8) 라오데게아 서신세네카와 바울의 교환 서신바울의 제자 디도의 서신바울의 순교바울과 베드로의 행전 등이 현존하고 있기는 하지만그 내용이 대부분 정경의 어떤 부분이나 교회 전설 등을 헬라-로마의 소설 양식에 맞추어 쓴 이야기들이기 때문에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9)

     따라서 바울이 어떤 사람이냐그가 무엇을 하였느냐그의 사상과 신학은 어떠한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느냐이들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하고해석하고 종합하느냐에 달려 있다.10)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특별히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바울에 대한 견해가 현격하게 다른 주된 이유는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예를 들면복음적이며 보수주의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사실에 충실한 역사적 자료로 받아들이고신약 성경의 13 서신도 바울에 의해 쓰여졌다고 믿고거기에 근거하여 바울을 말하려고 하는 반면에대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대단히 낮게 평가하고 있으며바울의 13서신 중 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데살로니가전서빌레몬서 등 7곱 서신만을 진정한 바울의 서신으로그리고 이들만을 바울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1차적인 그리고 역사적 문헌으로 받아들인다.11) 이처럼 자료문제부터 서로 차이가 있으니 바울에 대한 견해가 많은 점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오늘 날 바울을 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자하거나연구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역사적 자료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어느 입장에 서서 시작할 것인지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바울 이해는근본적으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따라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13서신이 진정한 바울의 서신들이며누가가 쓴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 아래 시작하여야 한다.12) 이와 같은 우리의 입장에 동조하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증명의 부담이 바울의 13 서신들을 신뢰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으로누가의 사도행전을 역사적 신임성을 가지고 있는 문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13 서신을 모두 바울의 진정한 서신이 아니라는 것과 누가의 사도행전이 역사적 신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나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바울이 쓴 13 서신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임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바울 연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13) 때때로 우리는 바울의 서신들 간의 차이점이나 혹은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 간의 차이점이나 혹은 사도행전 안의 차이점도 만날 수 있다예를 들면우리는 율법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이 갈라디아서보다도 로마서에서보다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인상을 받을 수 있으며갈라디아서 2장 1-10절의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은 바울의 서신 안에서는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소개되어 있는 반면에누가가 사도행전 15장에 따르면 바울의 예루살렘 공의회 방문은 바울의 3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되어 있다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11장의 바울의 부조헌금 전달 방문으로 나타나 있으며사도행전에는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 대한 서술이 3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9, 22, 26), 이들이 모두 모든 면에서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다.14)

 

     바울의 서신들 사이에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 사이에사도행전 안에서 때때로 만날 수 있는 차이점들은다시 한번 우리에게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이 비록 역사적 신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엄밀한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순전히 객관적인 역사를 위해서 기록된 서신이 아니라오히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직접 개척하였거나 자신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교회에게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록된 목회적이며상황적 서신들이다.15) 이점에서 누가가 쓴 사도행전도 예외가 아니다사도행전이 설사 초대교회의 역사서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가 쓴 사도행전은 오늘 우리 시대의 역사 과학적인 방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누가 자신의 신학적목회적변증적선교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16)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울의 서신들과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울의 생애와 그의 신학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때때로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에 대한 통시적(Diachronic), 공시적(Synchronic) 양면의 접근을17) 필요로 한다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연구방법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신뢰의 정도가 우리의 연구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18)  

 

     2. 바울의 가정과 교육 배경

 

     바울이 언제 출생하였으며그의 부모님의 이름과 직업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하여 설명하는 역사적 자료는 사실상 전무하다다만 우리는 사도행전 21장 39절과 22장 3절에 근거하여,19) 바울은 팔레스틴 유대 본토가 아닌 길리기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교육 도시인 다소에서 다소성의 시민으로그리고 사도행전 22:25절과 28절에 근거하여,20) 바울은 또한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21) 그리고 우리는 빌립보서 3:5고린도후서 11:22로마서 11:1사도행전 23:6절 등에 근거하여22)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으로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며바리새파에 속해있는 유대인 이민자 가정(디아스포라)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일반적으로 그렇게 주장되어 온 것처럼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고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바울이 유대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을 가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23)      

 

     우리는 유대인인 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다소성은 물론 당시 유대인으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로마 시민권을 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그러나 바울이 선교하면서 천막기술자로 일하였던 점에 비추어(행 18:3; 고전 4:12; 고후 11:27), 바울의 집안이 다소에서 천막을 생산하는 중소 기업가였으며바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다소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에 천막을 공급하는 등 로마제국에 공헌하여 시민권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4) 어쨌든 바울이 출생할 때부터 다소와 로마의 시민권자였다는 것과그 집안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이민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 공부를 하게 하였다는 점을 보아바울의 집안이 적어도 중상층 이상의 부유하고 뼈대 있는 유대인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5) 그리고 바울의 출생 연대를 확실하게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그가 주후 30년대 초반에 이미 스데반을 위시하여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설만큼 당시 유대 바리새파 지도자중의 한사람으로 부각된 점을 감안해 볼 때당시 바울의 나이가 적어도 25살 이상이었을 것이며그렇다면 바울은 주전 4-6경에 출생하였다고 보아지는 예수님보다 8-9년 뒤인 주후 4-5년경에 출생하였을 것이다.26)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 22:3절에 있는 바울의 말“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한 교훈을 받았고”에 근거하여바울의 유아시절에 바울의 가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서 실제적으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27) 그러나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러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예를 들어사도행전 26:4절은28) 바울이 예루살렘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는 점과바울이 사용하는 헬라어가 모국어처럼 완벽하고 수사학 등 헬라적 문체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과,29) 그가 다메섹 사건 후 자기 고향 땅인 길리기아에 가서 7,8년간 선교사역을 하였다는 것과(갈 1:21-24절 참조), 그가 제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교하였다는 사실들특별히 그의 서신에 나타난 구약 인용이 대부분 희랍어 성경인 70인역(LXX)에서 왔다는 것바울 자신이 자기를 “다소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 점과본격적인 율법 공부가 만 12살부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위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고역사적 신빙성도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30) 오히려 바울이 만 12살까지 다소에 있으면서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헬라의 초등 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보아진다.31)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울이 다소에 있는 동안에는 유대적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32) 바울 자신이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신이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임을 주장하고 있고,33) 실제로 그가 예루살렘 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말한 점과(행 22:2),34)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까지도 당대 유대교 보존에 가장 앞장을 선 바리새파라고 한 점 등(행 23:6)바울의 부모님은 바울이 다소에 있을 때부터 가정이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율법 등을 철저하게 가르쳐 이교도 헬라 문화의 아들이 아닌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새인의 아들로 성장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5) 물론 바울이 본격적인 율법과 바리새인 교육을 받게 된 것은 12살 이후 예루살렘에 유학 가서 가말리엘 문하에 있을 때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갈라디아서 1:14절에 있는 바울의 말“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생 중에서 성적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으며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하고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종교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36)

     바울이 젊었을 때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가졌었는가바울이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하면서 독신으로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고전 7:7-8절 참조), 이것이 바울이 예수님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가우리 중에 그 누구도 바울의 결혼 여부에 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그러나 바울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기를 힘쓰는 바리새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면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 율법(창 2:18) 역시 필수적 의무사항으로 삼고 지켰을 것이 분명하다.37) 그리고 고린도전서 7에베소서 5장 등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바울이 부부생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점 등을 미루어 보건대바울이 평생 독신으로 있었다기 보다도 한때 결혼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38) 바울 자신이 자기의 자녀들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점을 보아 그가 한 때 결혼은 하였으나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였거나아니면 그가 빌립보서 3: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39)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직업유산은 포기하였음은 물론 여전히 바리새파 집안으로 남아 있으려고 하는 자신의 부모를 포함하여 가정까지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40)  

 

     3.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을 핍박한 이유

 

     왜 바울이 초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을 그토록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는가사도행전 7:58(참조 22:20)에서 누가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하고그 대신 유대교의 중심인 율법과 성전을 비판하였던 스데반이 순교할 당시 바울을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켜주는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41) 9장에 가서는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누가에 따르면바울은 집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행 8:3), 회당에서 그들을 때렸으며(행 22:19),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행 22:4; 26:10).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다는 사실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도 증언되고 있다(고전 15:9; 갈 1:13-14).42)      

 

     바울은 무슨 이유 때문에무슨 동기에서초대 기독교 신자들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헬라계 유대인 신자들을 박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가?43)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에 관련하여그 자신의 동년배 중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유전말하자면 유대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ζηλωτἠς)을 가지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갈 1:13; 빌 3:5-6). 즉 자신의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과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행했던 핍박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44) 우리는 여기 바울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열심”이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여기서 “열심”은 바울 자신이 한때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열심당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일찍이 구약 민수기 25장 1-18절에서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이방 여인과 부정한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남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과맛디아 형제들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적 신앙을 져버리고 헬라제국에 동조하는 배교자 동족들을 쳐서 죽인 그런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참조 시 106:31; 제 마카비서 2:21,26,54; 제 마카비서 6:13; 제 마카비서 18:12).

     말하자면 사도행전 22:3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45) 바울이 가졌던 유대종교에 대한 열심곧 바리새인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에 대한 신앙율법 준수가 유대인의 정체성의 보존은 물론 의에 이를 수 있는 수단이라는 율법주의적 신앙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며이방인은 죄인이라는 선민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으며따라서 이 유대 종교(특히 성전율법)와 신앙을 도전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게 되었고이것은 결국 만일 필요하다면 그들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유대종교와 신앙을 고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46) 바울은 특별히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빌립보서 3:5-9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47)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심이 크면 클수록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쌓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48)

 

     이 같은 바울의 종교적 열심이 유대 종교 안에 일어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박멸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갈라디아서 1: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여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잔해 하였다”(ἐπὀρθουν)는 말이다이 말은 갈라디아서 1:22절과 사도행전 9:21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사실상 이 말은 강하고 거센 폭력을 동반하는 잔악한 행동을 가리킨다특별히 이 말이 “핍박하다”(ἐδίωκον)라는 말과 함께 헬라어 원문상으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바울의 교회 핍박이 일시적이 아니고 교회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49) 그래서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이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고 보도한다(행 8:1).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이유가 무엇인가무엇 때문에 초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을 섰는가왜 그는 조상들의 전승에 대한 강한 열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 핍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누구 못지않게 초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으며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50) 왜냐하면 그가 알지 않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 1:23절에서 바울 자신이 “전에 잔해 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점을 보아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비록 당시 그는 그 신앙을 거짓된 것으로 여겼다 할지라도-을 몰랐다고 보기는 힘들다.51) 적어도 그는 초대 기독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케류그마), 곧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이며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그가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것과그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과이제 성전이나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 등을 들었을 것이다52) 그러나 바리새인인 그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이와 같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두 거짓이며그리고 이것은 그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 종교에 심히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유대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였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일찍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예고하였을 때 당시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분노하여 이를 예수님을 처형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처럼(막 14:58; 마 26:51; 요 2:19),53) 주로 신앙적 동기 때문에 외지에 살다가 본토에 돌아온 헬라계 유대인들특별히 유대 종교 보존에 힘쓰는 바리새파 출신인 바울에게 있어서 성전과 율법을 비판하고 나사렛 예수를 쫓는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4)

 

     이뿐만 아니다이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유대교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시킨 나사렛 예수를 유대 민족적으로 기다리는 메시야로하나님의 아들로주님으로 고백하고 전파하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볼 때바울은 더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가 잘 알고 있는 신명기 21:22절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말씀에 근거할 때 십자가 처형을 받은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에 불과한데,55)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그 예수를 오히려 메시야로하나님의 아들로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56) 후일 그가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회심하였을 때 그 자신이 갈라디아 3:13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그전에 그가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는 백성들을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선생이요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한 청년에 불과했다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로 확신하고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을 설 수 있었던 것이다.57)

 

     4. 다메섹 사건바울의 회심(Conversion)과 소명(Calling)

 

     초대 기독교 공동체를 말살하려 하였던 바울이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확장시키는 데 가장 앞장을 선 사도가 되었는가사도행전 9장에 따르면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여 부숴버렸으며그것도 모자라 예루살렘에서 약 230km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에까지 피신한 기독교인들까지 붙잡아 오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내려갔다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전 생애(全生涯)전 사고(全思考)모든 사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게 되는 혁명적인 계기를 갖게 되었다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거짓된 메시야이자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이제 오히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다(고전 15:8; Cf. 행 9:3-5; 26:16-18).58) 단순히 심리적 환상 가운데 나타난 것이 아니라일찍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처럼 가시적으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이다.59)

 

     특별히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서 다메섹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보이셨다’(ὤφθη)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단어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이다이처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바울은 자신을 부활하신 예수를 친히 본 제자들과 동일한 경험의 소유자로 나타내고 있다(고전 15:5-12). 우리는고린도전서 9:1절에서도 바울이 주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그가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고 하는 이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사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16절에서도 자신이 한때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스스로를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생각하면서 핍박했던 그 예수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다”라고 증언하고 있다자신이 핍박했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되어왔던 “그 메시야”로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종말론적인 구원자”로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주님”으로 그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에 나타내실 결정적인 구원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에게 보여졌다는 것이다.60)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메시야임을 깨닫는 순간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핍박했던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메시지가 옳았으며반면에 그 자신이 신뢰해왔던 모든 유대교 바리새파 신앙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61)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이방 사람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며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단순히 로마제국의 속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나라를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율법의 저주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대속자구원자고난의 메시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62) 그리하여 바울이 지금까지 그와 자기 동족에게 배척과 걸림돌이 되어왔다고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 오히려 이제는 그 자신과 모든 유대민족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근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곧 율법에 의한 의/구원을 추구하는 자신의 바리새파 신학이 산산이 부서지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구원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신학이 그 자신의 전 존재를 이끌어 가는 중심에 대신 자리 잡게 된 것이다(빌 3:7-9; 고후 4:6).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참된 메시야이며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율법이 저주의 상징으로 규정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이자기 당대 유대교에서 주장되어 온 것처럼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며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세우신 유일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전 15:3-5).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을 만났을 때바울은 비로소 죄의 권세 앞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과인간의 절망적 상황과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은총과 의와 구원의 길을 보게 된 것이다.63) 하나님께서 준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의 길을 보게 되는 순간율법은 처음부터 구원/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지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나누었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그러한 기능이 사실상 끝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롬 10:4).64) 그래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5. 다메섹 사건 후 선교 여행 전까지

 

     바울에게 언제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어렵다그러나 사도행전 저자가 바울의 다메섹 사건을 초대 교회 역사 초기에 두고 있으며바울 자신도 그의 서신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동시에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고전 15:3-8), 바울의 다메섹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시점과 시간 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이 바울의 다메섹 사건 3년 후를 가리키는 갈라디아 1:18절과그로부터 다시 14년 후를 말하는 갈라디아서 2:1절의 예루살렘 공의회에 근거하여바울의 다메섹 연대를 AD 32년 전후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65)

     만일 여러 학자들의 주장처럼바울의 회심과 소명이 주후 32년경 이루어 졌다고 한다면,66) 그리고사도행전 13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바울의 제 1차 선교 여행이 주후 46년경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면약 14년 동안 바울은 어디서무엇을하였는가이 문제에 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7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그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심방 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새,....그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십사년 후에 내가 [안디옥으로 부터]67)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갔노니.

     갈라디아서 1:17-2:10절에서 바울은 친히 자신의 초기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그는 다메섹 사건이 있은 후 즉시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가서 3년을 살았다그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으며,68) 자기 고향 땅인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도 방문하였고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14년 목회를 한 후, 14년째 되는 해에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서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들을 만났다고 한다사도행전 9-12장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여 주고 있다즉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직후 잠시 소경이 되어 다메섹에 내려갔으며그곳에서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으며(행 9:8-22),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났다그런 다음 바울은 자신의 고향 땅 다소로 갔다(9:23-30).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로 파송을 받은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자신과 함께 안디옥 교회의 동사목회자로 초청하였으며(11:25-26),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본격적인 해외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였음을 말하고 있다만일 이것이 바울이 다메섹 사건 후 본격적인 선교여행을 하기까지 그의 생애의 주요 일정이라고 한다면우리는 바울이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거주하는 3년 동안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기까지 자신의 고향 땅인 다소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하였으며그 다음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 목회 하면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관한 질문을 갖게 된다사실상 이 14년의 기간은 바울의 제 3차에 걸친 선교여행과 로마의 체류 기간에 맞먹는 긴 기간이며바울의 신학 형성에 대단히 중요한 기간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사역은 거의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69)

 

     다메섹 사건이후 바울은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3년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 직후 아라비아로 간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70) 물론 아라비아에 가서 바울이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바울이 그 일을 목적으로 아라비아로 갔다고 보기는 힘들다갈라디아서 본문은 다메섹 사건 후 바울이 광야로 갔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바울이 다메섹에서 받은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첫째바울 자신이 고린도후서 11:32절에서,71) 그가 아라비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나비티아 왕국 아레다 왕(BC 9-AD 40)의 박해를 언급하고 있는데,72) 만일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조용히 기도나 하고 묵상을 하였더라면 구태여 아레다 왕의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바울이 그곳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둘째사도행전 9:22절은 다메섹 사건 직후부터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임을 열심히 전파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다메섹에서 그렇게 했다면 인접한 지역인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73)

     바울이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하는 것은그 후 자신의 고향땅인 다소에 가서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갈라디아 1:21절 이하에 있는 바울의 증언“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고 하는 것과사도행전 11:25-26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바나바가 바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 목회자로 초청하기 위해 다소로 찾았다는 사실은바울이 이미 다소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게 한다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유대 지역에 그와 같은 소문도 나지 않았을 것이고바나바가 다소까지 바울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격적인 선교여행을 떠날 때까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목회한 기간이 얼마인지목회 하면서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다다만 사도행전 11:25-30절에 근거해서,74) 우리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무리들을 가르쳐 주위의 사람들이 이들을 유대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만큼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아마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인 신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들을 위해 이미 이방인 선교사역을 활발히 하고 있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동사 목회자로 초청한 것 같다어쨌든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옴으로써 안디옥 교회가 내적으로외적으로 크게 부흥하였다고 하는 것은주후 43년경 예루살렘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웠을 때 안디옥 교회가 부조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였다는 것과(행 11:28-30; 12:25),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맨 처음 해외 선교사로 파송한 일과(행 13:1-3), 모세의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가르치는 유대주의 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 찾아 왔을 때이를 거부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에 파송한 일(행 15:15:1-29; 갈 2:1-10)등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 그레샴 메이쳔은 그의 책, [바울 종교의 기원], 29에서 “기독교는 신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그리고 최초의 위대한 신학자는 바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역시 최근에 James D.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2에서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첫 번째이며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M. Hengel,The Originals of the Christian Mission", in Between Jesus and Paul: Studies in the Earliest History of Christianity (London: SCM, 1983), 49-50에서 ‘바울은 기독교를 세계로 확장시킨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예를 들면다음의 학자들은 바울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왜곡하였으며예수님이 의도하지 않았던 기독교를 창설하였다고 보고 있다: H. Maccoby, The Mythmaker: Paul and the Invention of Christianity (London: Weidenfeld and Nicholson, 1986); J. Klausner, From Jesus to Paul (London, 1946).

     3) 이 문제에 관한 토의를 위해서는 David Wenham, Paul.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5)를 보라.

    4) John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rev. edition (Macon: Mercer University Press, 1987), 3-16.

    5) Knox, "The Use of Our Sources," in Chapters in a Life of Paul, 17-28.

    6) 바울이 남긴 13서신들의 중요성에 관하여 F. F. Bruce, 박문재역, [바울]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2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바울의 서신들은 바울의 삶과 사역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인 자료가 된다사실 그것들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관한 일차적인 자료이다왜냐하면 이 서신들은 가장 초기의 기독교 문헌들이며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 18년 내지 30년 사이에 쓰여 졌다.

     7) 베드로 후서 3:15-16절과 1세기 말엽에 쓰여진 로마의 클레먼트의 편지와 익나티우스의 에베소 서신 가운데 바울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나타나 있으나 바울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다그리고, M.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Louisville: John Knox, 1997), 2-3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우리에게 주어진 정경적 자료들도 바울이 초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시절부터 그의 로마 여행까지 약 30년간의 바울의 생애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정경적 자료를 통해서 완전한 바울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8)「바울행전」은 바울을 가리켜“키가 작고대머리이며다리가 휘었으며그의 두 눈썹이 중간에서 만나며코가 다소 크고은혜가 충만하며어떤 때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어떤 때는 천사의 얼굴을 한 것 같다”고 진술하고 있다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9) 이들 문헌들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서는 Wilhelm Schneemelcher, New Testament Apocrypha, Volume Two: Writings Relating to the Apostles: Apocalypses and Related Subjects, Rev. ed. (Louisville: John Knox, 1992), 42-270.  

  10)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5-21.

    11) 예를 들면, E. Hanchen, The Acts of the Apos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71), 327; 퀀터 보른캄허혁역, [바울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이화여자대학교, 1991), 10-11.

    12) 만일 우리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임성을 받아 드릴 수 없다고 한다면우리는 바울의 유대적 이름이 과연 사울인지그의 고향땅이 다소인지그의 예루살렘에서의 선생이 가말리엘인지그가 과연 3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하였는지그가 과연 로마에 도착하였는지에 관하여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결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참조, John Knox, "The Use of Our Sourse," Chapters in a Life of Paul, 24-25.

     13) 예를 들면우리는 바울의 서신에서 바울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을 별로 만날 수 없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울의 자서전적인 기록으로는 갈라디아서 1-2빌립보서 3:3-9등을 제외하고는 별로 도움되는 것이 없다이것은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근거로 하여 바울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재구성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물론 이것이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모름지기 바울은,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6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자신이 세운 교회 공동체에게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따라서 편지의 수신자들이 바울의 삶의 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되풀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14)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최갑종“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과의 관계문제,” [바울연구 II]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243-283을 보라.

    15) Jerome Murphy-O'Connor, Paul the Letter-Writer. His World, His Options, His Skill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5).

    16) 우리는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정확한 기록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적어도 주후 60년대 후반인 바울의 사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순교문제나 그의 서신에 관하여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바울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는 누가가 바울의 순교나 그의 서신에 대하여 일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지 않는지아니면 그것은 누가 자신의 사도행전 목적과 관계없기 때문에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참조, Robert F. O'Toole, The Unity of Luke's Theology: An Analysis of Luke-Acts (Wilmington: Glazier, 1984); Hengel, The Historian Luke and the Geography of Palestine in the Acts of the Apostles," in The Book of Acts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4. The Palestine Setting, ed. R.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5); Ben Witherington III,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8), 1-104.

    17) 통시적 접근 방법(Diachronic)은 주로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을 이들이 기록된 역사적사회적신학적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공시적 접근 방법(Synchronic)은 이들이 기록된 문학적수사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가리킨다보다 자세한 문제는 J.C. de Moor, ed. Synchronic or Diachronic? A Debate on Method in Old Testament Exegesis. OTS 34 (Leiden: E.J. Brill, 1995); Daniel H. Ryo, Zephaniahs Oracles Against the Nations: Its Synchrony and Diachrony (Leiden: E.J. Brill, 1995)을 보라.  

     18) 그 밖의 자료 문제에 관한 논의는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15-23을 보라.

    19) 행 21: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20) 행 22:25: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26)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사람이라 하니 27)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21)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바울 자신이 쓴 서신들은 이점에 관하여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22) 빌 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고후 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23)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의 본래 이름이 사울이었으나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핍박 시절의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바울이름을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이것은 성경적역사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것이다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유대 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오늘 날 미국에 이민 간 한국 교포들의 자녀들이 미국 이름과 한국 이름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사도행전 11:25,30; 12:25; 13:2, 9절에 따르면바울은 안디옥 교회에 목회할 때에도 여전히 유대 이름인 사울로 불리어진 것을 볼 수 있다그러나 그가 헬라-로마의 도시에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하면서부터는 유대 이름이 아닌 로마 이름인 바울로 통용되어진 것 같다(행 13:13). 따라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도 단 한번도 유대적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24) Bruce, [바울], 51은 바울의 가계가 폼페이나 안토니우스 등 길리기아 지역을 통치하였던  로마 장군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되었을 것으로 보면서 다음과 같이 첨가 한다“아마도 바울의 아버지할아버지 또는 증조부께서 로마를 위해 눈부신 공헌을 했었을 가능성이 높다이를테면장막을 만드는 제조업은 전투하는 지방 총독에게 아주 유용했을 지도 모른다.

    25) W. M. Ramsey, St. Paul the Traveller and the Roman Citizen (London, 1908), 34; G. Clark, "The Social Status of Paul," ExpT 96 (1985), 110ff; Bruce, [바울], 49.

    26) 누가가 사도행전 7:58절에서 바울을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당시 청년이란 25-40살 미만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이 때에 바울은,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67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이미 30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7) 예를 들면, Van Unnik, "Tarsus or Jerusalem. The City of Paul's Youth," Sparsa Collecta 1, NovTS 29 (1973), 259-320.

    27)행 26: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29) G.A.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4); B.L. Mack, Rhetoric and the New Testament (Minneapolis: Fortress, 1990).

     30) 존 드레인이중수 역, [바울] (서울두란노서원, 1989), 14-17; 최갑종“바울/사울의 역사적 자리,” [바울 연구 2] (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7), 21-22.

    31) 역시로버트 E. 피키릴리배용덕 옮김, [사도 바울] (서울솔로몬, 1993), 16-17.

     32) 한 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화 된 유대교를 가지고 있었으며반면에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히브리적 유대교를 고수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바울은 헬라화 된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최근의 적지 않은 연구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바울 당대 팔레스틴 유대교도 상당하게 헬라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이와 같은 이분법은 타당성을 잃어버렸다다시 말하자면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서도 팔레스틴 유대인 이상으로 보수적이고 엄격한 유대교를 보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은 반면에팔레스틴 유대인 가운데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보다도 더 헬라화 된 유대인도 있었다는 점이다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토론을 위해서는 Martin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2 vols (Philadelphia: Fortress, 1974)을 보라.  

    33)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팔레스틴에서는 4가지 언어가 혼용으로 사용되었다일상 생활어는 주로 아람어였고종교적 언어는 히브리어였고그 밖에 헬라어는 교육적 언어로라틴어는 관공서 언어로 사용되었다그러나 팔레스틴에 이주해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아람어 대신 헬라어를 생활 언어로 사용하였다언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John P. Meier, A Marginal Jew. Rething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1991), 255-315를 참조하라.  

    34) 행 22: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아람어를 뜻함]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35)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에센파와 함께 예수님과 바울 당대의 유대교 안의 3가지 대표적인 종파 중의 하나였다사두개파가 주로 당시 소수의 종교정치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에센파는 주로 쿰란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종말론과 함께 일반 대중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음에 비해바리새파는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일종의 종교-사회적 운동을 표방하고 있어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그들은 스스로 “언약의 형제들”이라고 칭하면서기록된 모세 오경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리어지는 구전 율법을 다같이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근간으로 생각하고그것을 철저히 준수하려고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 대중들에게도 가르치고 확신시켰다따라서 예수님과 바울 당대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 종교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요 유대 민족 중에서 엘리트가 되는 것이었다. John Kampen, The Hasidean and the Origin of Pharisaism (Atlanta: Scholars, 1988); A. I. Baumgarten, "The Pharisaic Paradosis," HTR 80 (1987), 63-77.

    36) 예수님 당대에 유대교 안에는 율법을 가르치는 두 학교가 있었는데 하나는 랍비 Hillel이 세운 진보적인 율법학교이고또 하나는 랍비 Shammai가 세운 보수적인 율법학교이다지난 1970년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학자들은 바울의 선생이었다고 보아지는 가말리엘이 랍비 Hillel의 손자이며따라서 바울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대교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이방인선교에 앞장을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그러나 가말리엘이 Hillel의 손자였음을 입증할 수 있는 그 어떤 역사적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래서 오늘 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말리엘의 가르침이나회심 전 바울의 행동을 볼 때 바울과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Hillel학파보다 오히려 Shammai학파에 속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37) 탈무드 MKid 4:13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38) 피키릴리, [사도 바울], 52-53.

    39)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40)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Grand Rapids: Eerdmans, 1977), 269; 최갑종“바울과 여성결혼,” [바울 연구 1]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92), 108. n26; 로버트 L. 레이먼드원광연 옮김「바울의 생애와 신학」(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67, n17.

    41) 만일 스데반이 바울처럼 디이스포라 출신인 헬라계 유대인이었다면, M. Hengel, The Pre-Christain Paul (London: SCM, 1991), 68-69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예루살렘에 사는 헬라계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스데반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의 대변자로바울은 정통적 유대교 보존의 대변자로 자처하여 서로 라이벌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42)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갈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43) 예수님과 바울 당대에 예루살렘에는 바울의 경우처럼 본래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이었는데종교적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쿰란 문헌과 당시 예루살렘의 비문들의 일부가 헬라말로 기록된 것을 보아 바울 시절에 이미 예루살렘 인구의 10%정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아람말 보다 헬라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으로 불리어졌다바울이 핍박한 초대 기독교 교인들은 주로 헬라계 유대인들이었다사도행전 6:1절 이하는 이미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신자들과 헬라 말을 사용하는 헬라파 신자들이 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그 자신이 헬라파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에바울은 스데반을 위시하여 헬라파 신자들을 우선적으로 핍박하였던 것이다물론 이 말이 바울이 아람 말을 쓰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전혀 핍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4) 어떤 학자들은(예를 들면보른캄당시 바울은 유대교를 확산시키는데 앞장을 선 유대교 선교사였기 때문에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선 스데반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교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는 어떤 기록도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45)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46) Richard N. Longenecker, "A Realized Hope, A New Commitment, and A Developed Proclamation: Paul and Jesus,"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20-23.

    47)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5-9).

    48) 요한복음 16:2절에 보면 유대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 신자를 출교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49) F. F. Bruc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2), 90f; H. D. Betz, Galatians (Philadelphia: Fortress, 1979), 66.  

    50) 바울이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하셨을 당시 그의 나이가 20대 후반 이였다고 한다면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그 어느 서신에서도 긍정적으로부정적으로나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자세한 논의는 메이천, [바울 종교의 기원], 73-86을 보라.  

    51)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서울엠마오, 1994), 87: “바울의 교회 핍박은 그가 회심 전에 적어도 헬라파 유대 기독교의 케류그마의 일부를 알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52) 최갑종,“바울과 예수”,「사도 바울그의 삶편지그리고 신학」(서울기독교연합신문사, 2003), 381-386

    53) 최갑종“예수의 성전청결 사건과 그 의미,  [나사렛 예수]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291-359를 보라.

    54) A. J. Hultgren, "Paul's Pre-Christian Persecutions of the Church: Their Purpose, Locale, and Nature," JBL 95 (1976) 97-111.

    55) 쿰람 문헌 1QTemple 64:7-12는 바울 당대에 이미 십자가 처형을 당한 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6)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서울엠마오, 1994), 80-81.

    57)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79-84.

    58)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9: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26:15-1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59) 바울이 사도로 불리어질 수 있는 근본 이유도 그가 다른 사도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으며그로부터 직접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5:8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하고 있는 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이 동일한 것임을 강조한다.

    60)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메섹 사건이 바울에게 있어서 새로운 기독론의 확립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사실 바울 서신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 예수”“주”“구원자”등이 나타나고 있다.

    61) 물론 바울이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그리스도이시며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참조 갈 4:4-6; 고후 4:6).  

    62) Terence L. Donaldson, "The Origin of Paul's Gentile Mission,"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7), 66-72.  

    63) James D. G. Dunn, "'A Light to the Gentiles' or 'The End of the Law'? The Significance of the Damascus Road Christophany for Paul," in Jesus, Paul and the Law (Louisville: Westminster, 1990), 89-107.

    64) T.L. Donaldson, "The Origin of Paul's Gentile Mission," 71.  

    65) 바울의 회심 연대 문제에 관한 최근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알기 위해서는 Rainer Riesner, Paul's Early Period. Chronology, Mission Strateg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8), 3-28을 보라. Riesner는 이 책, 322에서 바울의 연대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AD 31/32); 예루살렘 베드로 방문(33/34); 수리아와 길리기아 체류(34-42); 안디옥 교회 목회(42-45); 예루살렘 교회 부조방문(44/45); 바나바와 함께 제 1차 선교 여행(45-47); 예루살렘 회의(48); 제 2차 선교여행(49-52); 제 3차 선교여행(52-56); 예루살렘 방문과 가이사야에서의 투옥(57-59); 로마 압송과 체류(59-62).

     66) Hengel,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26-27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바울의 개종 연대의 간격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년 이상을 잡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67) 안디옥이란 말은 본문에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2:11절 이하는 당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8) 갈라디아서 1:18절에 따르면바울은 다메섹 사건 3년 뒤에 비로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사도 베드로를 만나 그와 함께 15일을 유하였다바울이 베드로와 함께 15일을 유하면서 무엇을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때에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경험과 자신의 이방인 복음 전파에 관하여 말하였을 것이며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지상 사역특별히 예수에 관한 여러 사도적 전승들에 관하여 들었을 가능성은 크다.

    69) 최근에 Hengel이 쓴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The Unknown Year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7)은 이 기간 동안의 바울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70) 예를 들면, Burton, Galatians, 55; Ridderbos, Galatians, 65; 박윤선, [바울서신] (서울영음사, 1985), 23.

    71) 고후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72) 당시 아라비아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을 가리지 않고다메섹 인근지역을 가리켰으며이 아라비아가 아레다 4세가 통치하는 나비타왕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73) Bruce, Galatians, 105.

    74)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출처 : https://cafe.daum.net/bkt6707.net/bchR/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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