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중의 기적
요한복음 17장 20~26절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
인터넷 교회 코이노니아 난에 이런 재미있는 글이 실렸었습니다.
"우리 천국에서는 성경 열번 읽어가지고는 성경 보았단 말도 못 꺼냅니다. 백번 읽었으면 “그 놈 성경 좀 읽었구나.” 합니다. 한 200번 읽었다 싶으면 “그 놈 성경 공부 시키면 좀 이해하겠구나.” 합니다. 우리 뒷집에 새로 천국 온 사람이 성경을 300번 읽었다고 자랑하다가 천사들과 성경 인물 빙고 게임하다 엄청나게 창피를 당하고는 다시는 성경 많이 읽었다고 자랑 안합니다. 요전엔 성경 600번 읽은 권사님이 예수님 앞에서 성경 외우다 글씨 하나 틀려 무지하게 혼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허허허 웃으시면서 이렇게 성경을 잘 아는 자가 누구냐며 하늘이 떠나가라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성경을 한 1천 번은 읽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초신자였습니다. 그는 겨우 성경 한번 읽고 사고로 죽어 천국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해보거라." 그러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저..... 사랑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를 쓰다듬으며 ”네가 성경을 제대로 아는구나.“ 하시며 칭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성경 1천 번 읽은 사람도 이런 이야기 하는 것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천국에서는 성경을 얼마만큼 많이 읽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핵심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말은 이제는 정말 사랑하라, 하나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알아들었나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사랑하고 하나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안에 기적이 일어나는데,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중의 기적이 무엇일까요?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가장 많이 드렸던 기도가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실 하나만이라도 결코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능력받기를 위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큰 일을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절실하게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제목으로 간절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분별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서운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보든지 신문을 보든지 그 속에는 계속해서 깨어지는 이야기, 대립하고 싸우는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서운 분열과 대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갈갈이 찢겨지는 모습을 봅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가 큰 땅덩어리가 아닌데도 출신 지역적에 따라 사람 마음이 동과 서가 나뉘었으며, 좌와 우가 대립하고,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이 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사의 갈등,여와 야의 격돌,부와 빈의 갈등이 심화되는 분열의 현장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배후와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이간하고 분열시키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하나님과 갈라지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분열의 틈을 만들고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무서운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인류 사회에 사람들을 선동하여 서로 미워하게 하고 원수가 되어 대적하게 하며 전쟁하게 하는 등 갈등과 분열을 획책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분열되고 나라가 분열이 되고 민족과 민족이 전쟁을 일으키는 무서운 일들을 지금까지 계속해 오는 존재가 마귀입니다.
사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무력화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서로 분열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명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교인들이 가정이나 교회에서 서로 찢어져 갈등하고 미워하며 모든 힘을 서로를 공격하게 만드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은 하나 됨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판단하고 사는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만 따지다가 마귀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중요한 속성이 하나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하나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2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 되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고 서로 판단하고 싸우고 분열되는 역사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하나 됨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단 이단 말을 많이 하는데 가장 무서운 이단은 무엇이냐? 사랑이 없는 기독교다. 우리가 이단을 아주 예민히게 관심으로 싸워야 하고 분별해야 하지만, 진짜 이단은 사랑없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하나 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이 진짜 이단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의 열심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기도의 열심, 봉사의 열심은 한국 교회가 자랑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을 내면서도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큰 죄인 것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교인들끼리 쉽게 화를 내고 서로 판단하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열심과 기도와 헌신, 봉사 등에서 자랑할 것이 많습니다. 커피 한 잔을 대접받고도 감사 기도하고서야 마시는 성도들 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큰 일 나는 것으로 압니다.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합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도 아직도 술 담배 끊지 못하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안합니다. 오늘 교회에 술병 가지고 오신 분은 안계시지요? 혹 담배는 실수로 윗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가지고 와서 지금 내내 찝찝하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교회에 담배를 가지고 온 것 때문에.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상할 정도로 술 담배 하는 것을 무서운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담배 안해야 된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교인들 사이에 쉽게 싸우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정말 큰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하였습니다.
“형제로부터 원망들을 일만 있어도” 예배 시간에 참석하였어도 예배 드리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혹시 어떤 사람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데 해결을 하지 않고 왔다면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열하고 싸우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 그것은 무서운 영적인 분별을 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항상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22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자주 의견 대립으로 다투었습니다.
그들이 왜 싸웠겠습니까? 서로 교회를 잘 섬겨 보자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누구 의견이 더 옳으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어느 것이 더 옳으냐 보다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서로 싸우는 일이 생길 때 주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네가 옳고 상대방이 잘못이다.’며 옳고 그른 것만 따지도록 충동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일단 싸우는 것을 일단 그만 두고 하나 됨을 지킨 다음에 문제를 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마귀가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하는 사람, 분열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쉽게 화내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 세울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고민이 되는 이유는 하나가 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 용서하고 어떻게 다 사랑하고 어떻게 다 하나되어 살 수 있을까? 오늘 그 질문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일은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되라”고 기도하시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했습니다. 하나 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지키라고 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가 되었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값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죄의 종이요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고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장 하나 될 수 없는 관계가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입니다.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허물어졌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화해를 이루는 화해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신 12명의 제자들은 소수였지만 너무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개성 강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충동적이면서 거친 베드로, 숙맥같이 무엇이든 쉽게 믿어버리는 안드레, 의심많은 도마, 세리였던 마태, 테러리스트였던 시몬.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변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고는 함께 교회를 섬기며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역사하는 곳마다 어둠과 분열의 영이 쫓겨가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 됨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담하면서 보면 “사랑이 안됩니다! 용서가 안되요. 하나가 안되요!” 하며 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일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해결자이십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다 사랑할 수 있어?’ 하는 자는 심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사랑할 수도 하나가 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나 교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화해가 잘 안되는 경우를 자세히 보면 그 둘 중에 하나는 분명 ‘나는 너하고는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싸울 수도 있다’ 하니 싸우는 것입니다. ‘갈라질 수 있다!’ 생각하니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어떻게 싸울 수 있으며 갈라질 수 있습니까? 믿으면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인도의 스탠리존스 선교사님은 미국 감리교회 감독으로 선임되셨던 분입니다. 목사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 입니다. 그러나 존스 목사는 24시간 후에 감독직을 사퇴하고 인도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그가 평생 동안 붙잡고 살았던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인데,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구원과 은혜와 축복과 영생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현실은 암담하고, 숱한 문제와 죄 가운데 상황은 점점 꼬여만 갑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아멘!” 하고 나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사람들과 나 자신조차도 이제 끝장 났다고 말할 때에도, 예수님은 이제 시작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No! 라고 소리 높일 때라도, 예수님은 Yes!라고 말씀하십니다.
스텐리존스 선교사님께서 이 말씀을 너무나 놀랍게 경험한 사건이 69세 은퇴하신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것입니다. 새벽 2시부터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된 아침 7시까지 다섯 시간 동안,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고 자신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마음으로 아멘!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아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자신이 믿음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신을 붙잡고 있음에 감격하였습니다.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게 부탁했답니다.
“내가 잠에서 깰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렇게 나에게 명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그렇게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예’만 하면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인도로 가서 89세까지 사역하다가 인도에 묻혔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영혼의 구원만 아닙니다. 육신의 치유도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아멘!” 하고 나가면 됩니다. 마음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 되는 것이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아멘! 하면 됩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있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도 있고 도무지 하나가 안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능히 바꾸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이 놀라운 일이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음으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 모임을 열정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이끈 경건한 여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큰 영적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에게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웬일인지 제 마음은 점점 식어만 가고,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식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목사님이 그 성도에게 ”잃어버린 뜨거움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그 성도에게 “성도님이 어떻게 회심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내 노력을 포기하고 주 예수께서 생명과 평안을 주실 것을 믿고 십자가만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제게 구원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은 구원 문제는 예수님만 의지하였으면서 사랑 문제에 대하여는 왜 똑같이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도님의 마음이 아무리 차갑고 어둡다 할지라도 바르게 만들려고 억지로 애쓰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저는 십자가만 붙잡습니다. 주님은 내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 다 보고 계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능력이고 소망이십니다.‘ 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주님께서 영적 메마름에서 미움에서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을 어린 아이처럼 믿고 의지하고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곧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도 혹시 “용서해야 되는데, 사랑해야 되는데, 내가 하나 되도록 살아야 되는데 나는 도무지 안돼. 도무지 불가능해.’ 하고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라고 하는 것을 율법의 계명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은 절대로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인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놀랍게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도록 변화 시켜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힘으로 극복하려고 결심하고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면 우리는 탄식하며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라는 요청을 율법의 명령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 하나 됨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우리 소유의 땅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면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우리가 똑같은 형편에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 하나 됨이 그렇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것인데, 왜 싸우고 갈라지고 삽니까?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승리를 얻으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십자가만 바라보면 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심'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은 ‘사랑하지 않는 죄’ 에서 나를 건지고 이 죄를 깨끗케 하설 분이 오직 주 예수님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든 복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모든 것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랑은 개인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안됩니다. 용서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하나 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 역사해 주세요. 제게 변화의 기적을 허락해 주세요. 가정 안에서 속회 안에서 저 성도님과 사이에 하나 되는 기적을 제가 누리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으면 여러분 입으로 간증하는 자가 됩니다. 내게 사랑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고, 내게 용서를 주신 분이 주님이시고 우리 가정을 하나 되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그리고 교회 안에 성도와 하나 되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라고 여러분이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생각 나게 하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 됨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1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사회도 나라와 민족도 하나 되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복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해도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어 있을 때 세상이 하나님이 계신 것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성도 여러분, 하나 되게 하신 기적은 주님이 일으키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미 이루셨다는 것도 믿으십시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 되게 해 주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말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비난하고 험담해서는 안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다가 하나 됨이 깨어지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먼저 영적으로 가정과 교회를 지키고 일을 바로 잡으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지키며 기도할 제목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시간에 정말 지쳤습니다.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하지 못해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 되지 못한 것 때문에 제 마음이 지쳤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제가 쓸데없이 노력으로 하려고 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예수님, 이미 이루신 것 하나 됨을 제게 주옵소서. 예수님이 용서요 사랑이시고 내 주님이시니 제 삶 속에 이루소서. 사랑으로 역사하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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